가족 임금
Family Wage
남성 한 사람의 임금만으로 아내와 자녀를 부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임금 규범. 19세기 영국 남성 노동조합원들의 요구로 퍼져 19세기 말·20세기 초 안정된 노동계급 가족의 표준이 되었고, 1907년 오스트레일리아 하베스터 판결처럼 임금 결정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하이디 하트먼은 이를 여성 노동력을 둘러싼 가부장적 이해와 자본주의적 이해의 갈등을 푼 해결책이자 가부장제와 자본의 동반자 관계를 굳힌 장치로 읽었고, 이후 여성의 경제적 의존을 제도화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상세
가족 임금은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임금을 뜻하며, 노동자 한 사람이 살아가기에 충분한 생활 임금과 구별된다. 영국에서는 19세기 중엽 지불 형태가 가족 단위의 공동 지불에서 개인 지불로 바뀌고, 생계 기준도 가족 전체의 소득에서 아내와 어린 자녀가 돈을 벌지 않아도 남편의 임금만으로 가족을 부양한다는 「성인 남성 생계 부양자 임금」의 이상으로 옮겨 갔다. 그 이전 저소득 가정에서는 개인의 산출에 따라 생계 임금을 받고 가족 모두가 가계를 거들어야 했다.
이 요구를 앞세운 것은 남성 노동조합원들이었다. 하트먼에 따르면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과 아동이 노동시장에 대거 들어오는 데 맞서 그들을 노동조합과 일자리에서 배제하려 했고, 1846년 《10시간 노동 옹호》는 여성 공장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려면 노동 시간을 줄여야 하며 기혼 여성은 집에서 가사를 하는 편이 낫다고 썼다. 남성들은 고임금 일자리를 지키고 자기 임금만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임금을 요구했으며, 이 「가족 임금」 체계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안정된 노동계급 가족의 표준이 되었다. 가톨릭교회도 1891년 레오 13세의 회칙 「레룸 노바룸」에서 임금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가족 임금은 국가의 임금 결정에도 들어갔다. 1907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조정중재법원의 하베스터 판결에서 H. B. 힉긴스 판사는 미숙련 남성 노동자의 「공정하고 합리적인」 임금이 「문명사회의 인간」이 아내와 세 자녀를 「검소한 안락」 속에 부양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반면 여성의 최저임금은 자기 의식주만 감당하고 가족은 부양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정해졌고,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여성 기본임금은 대체로 남성의 약 54%였다.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의 히스타드루트는 1923년 가족 수에 따라 가산하는 가족 임금을 채택해 10년간 정책으로 삼았으나 시행은 제한적이었다.
하트먼은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불행한 결혼」(1979)에서 남성 노동자가 남녀 동일 임금을 위해 싸우는 대신 아내의 가사 서비스를 지키려 가족 임금을 요구했다고 보았다. 가부장제가 없었다면 단결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에 맞섰을 수도 있지만, 가부장적 관계가 노동계급을 갈라 남성을 여성의 희생으로 매수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 임금은 여성 노동력을 둘러싼 가부장적 이해와 자본주의적 이해의 갈등을 푼 해결책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가족 임금은 직종 분리로 여성의 저임금을 강제해 여성의 경제적 의존을 보장하고, 여성이 집에서 남성에게 직접 이로운 가사와 양육을 맡게 해 남성 지배의 물질적 토대를 두 방식으로 다졌다. 하트먼은 이 해결책이 건강한 노동자와 교육받은 아이를 원한 자본가의 이해에도 맞았다고 보고, 가족 임금이 가부장제와 자본의 동반자 관계를 굳혔으며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늘어난 뒤에도 성별 분업의 주춧돌로 남아 있다고 썼다.
가족 임금과 생계 부양자 모델은 여러 방향에서 비판받았다. 하베스터 판결이 전제한 남성 생계 부양자와 여성 가사 돌봄 제공자라는 가정은 여성의 유급 노동을 의도적으로 억제한 정책이며, 노동시장의 표준 노동자를 돌봄 책임이 없는 사람으로 상정한 잘못된 이해라는 비판을 받았다. 생계 부양자 체제는 어린 자녀를 둔 여성을 결혼 안에서 의존적으로 만들고 경력 단절과 낮은 생애 소득, 관계가 깨졌을 때의 빈곤과 가정 폭력 노출로 이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생활 임금 운동 안에서도 생활 임금을 가족 임금으로 정의하면 남성의 생계 부양자 역할을 강조하게 된다는 비판이 나왔다. 영국의 무소속 하원 의원 엘리너 래스본은 1924년 『상속권을 빼앗긴 가족』에서 남성 임금에 대한 어머니와 아이의 의존을 끝내려면 어머니에게 독자적 소득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해 가족수당을 얻어 냈고, 이 주장은 뒤의 가사노동 임금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낸시 프레이저는 1994년 「가족 임금 이후」에서 그 뒤의 사회복지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