富田事变 · 1930.12.12–1931.07

푸톈 사변

Futian Incident

1930년 12월 장시 소비에트의 「AB단(반볼셰비키단)」 숙청에 맞서 홍20군 일부가 푸톈에서 일으킨 반란과, 그 뒤 홍20군 지휘관들에 대한 처형. 마오쩌둥의 총전위가 보낸 숙반위원회가 장시 현지 간부들을 국민당 첩자로 몰아 체포·고문하자 부대가 들고일어나 「마오쩌둥 타도」를 외쳤다. 1931년 왕밍의 중앙이 이를 「반혁명 폭동」으로 규정한 뒤 지도자들과 700명 넘는 간부가 처형되었고, 반AB단 운동은 장시 소비에트 전역으로 번졌다.

상세

AB단은 1926년 국민당이 장시 국민당의 주도권을 공산당과 다투려 만든 조직으로, 1927년 4월 이미 무너졌다. 1930년 가을 장시 서남부의 현지 간부들은 리리싼 노선을 지지하며 「적을 깊이 끌어들이자」는 마오의 방침에 반대했고, 마오는 이들을 AB단과 연결해 숙청에 나섰다. 12월 숙반위원회 주임 리사오주는 푸톈에서 홍20군과 장시성 행동위원회 간부 120여 명을 체포해 17명을 처형했고, 12월 12일 제174연대 1대대가 반란을 일으켜 융양으로 물러나 상하이의 중앙에 호소했다.

중앙의 판단은 엇갈렸다. 1931년 1월 소비에트구 중앙국 대리서기 샹잉은 이를 「무원칙한 파벌 투쟁」으로 보고 리사오주를 제명했지만, 3월 왕밍의 중앙이 보낸 런비스·왕자샹·구쭤린은 「반혁명 폭동」으로 규정했다. 4월 협상에 나온 홍20군 지도자들이 체포·처형되었고, 7월 펑더화이와 린뱌오의 부대가 홍20군을 포위해 부소대장 이상 간부 700여 명을 처형하고 부대 번호를 없앴다. 이후 숙청은 더 가혹해져, 어떤 지역에서는 당 기관원의 80~90%가 AB단으로 몰렸다.

희생자 수는 확정되지 않았다. 1930~1931년의 숙청으로 약 7만 명이 죽었다는 서술이 있으나 받아들이지 않는 연구도 많다. 마오는 1945년과 1956년 숙반에서 잘못을 저질렀다고 인정했고, 1980년 후야오방의 지시로 재조사가 시작되어 1989년 초 전면 복권을 권고하는 보고서가 나왔지만 6·4 이후 공표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은 반AB단 운동의 피해자 대부분이 무고했다고 인정하지만 푸톈 사변 자체는 공식 복권하지 않았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zh.wikipedia.org
  2. 위키백과 (영문)
  3. zh.wikipedia.org
  4.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