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가치사슬
Global value chain
한 제품을 시장에 내놓기까지 거치는 설계, 부품 생산, 조립, 마케팅, 유통 등 모든 활동이 여러 나라에 나뉘어 이어진 것. 공급망이 물자와 제품이 어디서 어디로 옮겨 가는지에 주목한다면, 가치사슬은 각 단계가 얼마의 가치를 더하고 누가 그 몫을 가져가는지에 주목한다. 세계은행은 2020년 글로벌 가치사슬이 세계 무역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보았다.
상세
글로벌 가치사슬이라는 말은 1990년대 중반 처음 쓰였다. 이 개념은 생산 과정만이 아니라 그 앞의 설계와 그 뒤의 마케팅·유통까지 한 제품에 들어가는 활동 전체를 하나의 사슬로 본다. 공급망과 비슷하지만, 공급망이 물자와 제품의 이동과 소유권 이전에 초점을 맞춘다면 가치사슬은 생산과 소비의 여러 단계가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구조 자체를 가리킨다. 기업들은 여러 나라의 다른 기업에 일을 맡겨 제품을 효율적으로 설계하고 만들고 팔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이익은 사슬 안에서 고르게 나뉘지 않았다.
가치사슬 분석의 개척자인 사회학자 게리 제레피는 동아시아 의류 기업 연구를 바탕으로 1994년 논문에서 두 가지 지배 유형을 구분했다. 하나는 소매 체인이나 상표 기업 같은 최종 구매자가 이끄는 구매자 주도 사슬이다. 이들은 옷, 신발, 식품을 직접 만들지 않고 대부분 개발도상국에 있는 납품업체들에 맡기며, 납품업체끼리 경쟁을 붙여 값과 품질을 요구한다. 납품업체들은 요구를 맞추지 못하면 다른 업체로 바뀔까 두려워 따를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원자재와 유통을 쥔 선진 제조업체가 이끄는 생산자 주도 사슬로, 여기서는 선도 기업의 기술력이 사슬의 경쟁력을 정한다. 뒤의 연구는 지배 형태를 위계형, 준위계형(종속형), 관계형, 모듈형, 시장형 다섯 가지로 나누었다.
경제학에서는 허멀스·이시이·이가 2001년 논문에서 이 현상을 처음 형식화했다. 이들은 수입한 중간재의 외국산 부분으로 생산한 산출물이 다시 수출되는 것을 가치사슬로 정의했고, 이기무(Kei-Mu Yi)는 2003년 논문에서 무역 비용이 조금만 줄어도 세계 무역이 크게 늘어나는 현상을 「수직적 특화」라 불렀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2013년 보고서에서 부가가치 무역이 개발도상국 GDP의 약 30%를 차지해 선진국(18%)보다 훨씬 비중이 크고, 가치사슬 참여가 1인당 GDP 성장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세계은행의 『2020년 세계개발보고서』도 1990년 이후 가치사슬이 무역의 급증과 가난한 나라들의 빠른 따라잡기를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초기 연구는 가치사슬에 들어간 개발도상국 기업이 거의 「자연스럽게」 배우며 올라설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업그레이딩」은 더 나은 기술로 효율을 높이는 공정 업그레이딩, 더 좋은 제품을 만드는 제품 업그레이딩, 스스로 설계하고 상표를 키우는 기능 업그레이딩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른 연구자들은 구매자와 납품업체의 관계가 비대칭이어서 가치사슬에 들어간다고 저절로 올라서지는 않는다고 반박했다. 선도 기업은 설계, 마케팅, 상표처럼 가치가 높은 활동을 손에 쥐고 이 핵심 능력을 납품업체에 넘길 생각이 없으며, 개발도상국의 작은 기업들은 제조처럼 가치가 낮은 일에 묶인다. UNCTAD도 나라 안에서 하는 일이 부가가치가 낮으면 성장 기여가 작고, 기술 이전과 업그레이딩을 보장하는 자동 과정은 없으며, 개발도상국이 영영 낮은 부가가치 활동에 머물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선도 기업이 생산을 더 값싼 나라로 쉽게 옮길 수 있다는 점도 위험으로 꼽았다.
이 불균등은 대만 에이서의 창업자 스탠 시가 1992년 무렵 내놓은 「스마일 곡선」으로 흔히 그려진다. 개인용 컴퓨터 산업에서 가치사슬의 양 끝인 구상과 마케팅은 부가가치가 높고 가운데인 제조는 낮아서, 가로축에 생산 단계를, 세로축에 부가가치를 놓으면 웃는 입 모양이 된다는 것이다. 비판적 연구자들은 같은 현상을 노동의 관점에서 본다. 1970년 무렵까지 개발도상 지역이 주로 광물과 농산물을 공급했다면, 그 뒤의 「신국제분업」에서는 노동집약적인 제조와 조립이 비용이 훨씬 낮은 아시아, 멕시코, 중앙아메리카로 옮겨 갔다. 자본은 노동이 싸고 세금과 환경 규제가 덜한 곳으로 옮겨 가 그곳에서 만든 상품을 원래 시장에 되판다. 이것을 「글로벌 노동 차익 거래」라 부른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아르기리 에마뉘엘과 사미르 아민은 중심부와 주변부의 임금 격차가 무역을 통해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가치를 옮긴다는 「부등가 교환」론을 폈고, 제이슨 히켈 등은 특허와 시장 접근을 쥔 북반구 기업의 힘이 남반구의 노동과 자원을 싸게 유지한다고 본다.
가치사슬로 묶인 세계는 그만큼 서로에게 취약하다. 수요 변동을 예측하기 어렵고 먼 거리에 걸친 생산과 운송을 관리하기도 어렵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공급망이 잠시 멈추자 원자재와 완제품의 교환이 끊겼고, 이후 경제적 상호 의존과 취약성에 대한 걱정에서 생산을 자국이나 가까운 나라로 되돌리는 리쇼어링과 니어쇼어링이 늘었다. 보호주의 정책에 대한 관심은 2008년 금융위기 뒤부터 이미 커지고 있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곡물 수입국과 섬유·식품 가공 산업에 연쇄 손실을 주며 이 흐름을 부추겼다. 세계은행은 2008년 이후 무역 성장이 더뎌지고 가치사슬의 확장이 멈췄으며, 큰 나라들 사이의 갈등이 가치사슬을 축소하거나 쪼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만 필요한 자원을 세계 여러 곳에서 구해야 하는 이상 가치사슬이 사라질 가능성은 낮고, 의존의 정도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