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인도교 폭파
Hangang Bridge demolition
1950년 6월 28일 새벽, 대한민국 국군이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서울의 한강 인도교를 조기 폭파한 사건. 피난민과 철수 병력이 건너고 있던 다리를 사전 대피령 없이 폭파하여 500~800명이 사망하고 국군 주력부대의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당일 오전 서울 함락을 앞당겼다. 폭파 책임자 최창식 대령은 사형당했으나 1964년 무죄 판결로 복권되었다.
상세
배경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 지 사흘째, 조선인민군은 전차를 앞세워 서울 외곽까지 진격해 있었다. 27일 저녁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자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은 서울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이미 27일 오전부터 폭약 1,600kg를 설치해 둔 한강 인도교 폭파 준비에 들어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오전 특별열차로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향했으며, 같은 날 '수도를 지키겠다'는 방송을 내보냈으나 이미 정부 수뇌부는 철수한 뒤였다.
폭파와 인명 피해
28일 오전 2시 30분,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지휘 아래 한강 인도교와 3개의 철교가 폭파되었다. 그러나 피난민과 후퇴 중인 병력, 차량이 여전히 다리 위를 건너고 있었고 군 당국은 사전 대피령을 제대로 발령하지 않았다. 현장에 있었던 미국 종군기자 버턴 크레인(《뉴욕타임스》), 프랭크 기브니(《타임》), 키스 비치(《시카고 데일리뉴스》)는 25야드 앞에서 폭발을 목격했다고 보도했다. 사망자는 500~800명으로 추정되며, 서울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관 77명의 사망이 현재까지 확인된 유일한 공식 희생자 명단이다.
군사적 결과
폭파에도 불구하고 한강철교 중 하나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아, 조선인민군은 도섭판을 깔고 T-34 전차를 도하시켜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국군 제5사단을 비롯한 강북의 주력부대는 퇴로를 상실해 와해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조선인민군은 폭파 8시간여 만인 오전 11시 30분 서울을 점령했다. 폭파의 책임을 물어 최창식 대령은 1950년 9월 21일 총살되었고, 1962년 재심을 거쳐 1964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역사적 평가
한강 인도교 폭파는 개전 초기 한국군 지휘부의 혼란과 의사결정 실패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폭파 명령 계통을 둘러싼 책임 소재는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부장, 장경근 국방차관, 이범석 총리 등 여러 인물로 분산되어 있으며, 당시 주한 미군 고문관의 관여 주장도 제기되었다. 조기 폭파로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고, 군이 시민을 보호하지 않고 퇴로를 스스로 차단했다는 점에서 한국 전쟁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군사 결정 중 하나로 평가된다.
출처
- 위키백과 (영문) English Wikipedia: date (28 June 1950, 2:30 a.m.), 1,600 kg TNT, 200–800 casualties, 77 Jongno police confirmed dead, Fifth Division trapped, Col. Choi Chang-sik executed and posthumously acquitted, three American war correspondents at the scene
- 위키백과 (한국어) Korean Wikipedia: background on Miari defense line collapse, Chae Byeong-deok decision, chain of command dispute, Choi retrial and acquittal timeline, incomplete railway bridge destruction enabling KPA tank crossing
- encykorea.aks.ac.kr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uthoritative Korean reference confirming 28 June 2:30 a.m. detonation, three railway bridges + one pedestrian bridge, Chae Byeong-deok and Choi Chang-sik roles, civilian/military casualties, Choi executed September 1950, retried 1962 and acquitted 1964
- darksideofseoul.com Detailed narrative: Rhee's secret evacuation and misleading public broadcast, lack of civilian evacuation order, eyewitness accounts of the blast, hundreds killed while crossing, Fifth Division trapped north of the ri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