Идел-Урал штаты · 1918

이델-우랄 국가

Idel-Ural State

러시아 내전 초기 볼가·우랄 지역의 타타르 민족운동이 타타르·바시키르·추바시를 묶어 세우려 한 자치 국가. 「이델-우랄」은 타타르어로 「볼가-우랄」이라는 뜻이다. 1918년 3월 1일 카잔의 불라크 강 건너 타타르 구역에서 소비에트 러시아 안의 자치 국가로 선포되었으나, 실제로는 카잔과 우파의 일부 구역만 다스리다 3월 28일 붉은 군대에 진압되었다. 소비에트 역사학은 이를 「불라크 너머 공화국」이라 불렀다.

상세

1917년 7월 22일 카잔에서 열린 세 전러시아 무슬림 대회의 합동 회의는 「내부 러시아와 시베리아 무슬림 투르크-타타르의 민족·문화 자치」를 선포했고, 그 조정 기관으로 우파에 민족 의회 「밀레트 메질리스」가 세워졌다. 1918년 1월 메질리스는 국가 수립 절차를 정해, 위원 8명으로 된 「우랄-볼가 국가 위원회」에 헌법 초안과 국경, 경제 문제를 맡겼다. 사드리 막수디가 1월 5일 민족 행정부 「밀리 이다레」의 의장이 되었고 영어 출처는 그를 이델-우랄의 대통령이라 부른다. 국경을 두고는 세 안이 맞섰다. 타타르·추바시·마리인을 모두 넣으면 무슬림이 44%, 카잔·우파 현 전체와 페름·오렌부르크·사마라·심비르스크 현 일부로 하면 51%, 사마라 현 전체와 부케이 오르다를 넣으면 29%였고, 투르크주의 분파는 카스피해로 캅카스·이란·투르키스탄과 이어지는 「큰 이델-우랄」을 원했다. 바시키르를 「타타르 민족」에 넣을지도 다툼거리였고, 영어 출처는 아흐메트제키 발리디의 바시키르 자치 선언과 볼셰비키의 반대가 이 구상을 약하게 했다고 본다. 1918년 1월 8일~3월 3일 카잔의 제2차 전러시아 무슬림 군인 대회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안에 우파 현 전체와 카잔·심비르스크·사마라·오렌부르크·페름·뱌트카 현 일부로 된 국가를 세운다고 결의했지만, 제헌의회와 소비에트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일지를 두고 갈라졌다. 러시아어 출처는 당시 타타르가 소비에트와 전국 정당 조직에 거의 대표를 두지 못했고 타타르 노동자·농민의 자기 조직 수준이 매우 낮았다는 점을 이 구상의 근본 약점으로 든다.

2월 26일 카잔 무슬림 단체들이 국가 선포를 결정하고 이튿날 포스터가 붙자, 카잔 소비에트는 2월 28일 계엄을 선포하고 군인 대회와 군사 협의회(하르비 슈로) 지도부를 체포했다. 저녁에 풀려난 이들은 회의 장소를 불라크 강 건너로 옮겨 3월 1일 국가를 선포했고, 자체 인민위원회의와 무장 대원을 모으는 혁명 참모부를 두었다. 그러나 3월 22일 민족인민위원부가 소비에트식 대안인 타타르-바시키르 소비에트 공화국을 결정했고, 3월 24일 스탈린과 물라누르 바히토프가 서명한 법령으로 하르비 슈로가 해산되었다. 3월 27일 붉은 군대가 타타르 구역을 에워싸고 무기 인도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불라크 너머 군대」는 큰 충돌 없이 항복했다. 3월 28일 인민위원회의와 참모부 구성원들이 체포되었다. 진압에는 카잔 적위대와 바히토프의 요청으로 모스크바에서 온 수병 부대, 바이소프 종파의 무장대가 가담했다. 4월 민족 의회가 해산되고 5월 1일 밀리 이다레가 금지되었으며, 남은 대의원들은 「소메질리스」로 볼셰비키가 없는 지역에서 활동했다. 7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봉기와 함께 민족 행정이 일부 되살아났지만, 1918년 말 하르비 슈로의 남은 병력은 콜차크군의 제16타타르 연대로 들어갔다. 막수디는 핀란드로 망명해 외무장관 카를 엥켈의 환대를 받았고,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이델-우랄 주민의 권리를 호소했다. 망명자들은 반소비에트 선전을 이어 갔고, 이델-우랄은 1959년 미국 법률의 「피억압 민족」 목록에 올랐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만든 「이델-우랄 군단」 안에는 반나치 지하 조직이 활동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위키백과 (러시아어)
  3. 위키백과 (영문)
  4. 위키백과 (러시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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