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르프론트 (인테르무브먼트)
Interfront / Intermovement
1988년 7월 19일 에스토니아에서 결성된 친소련 정치운동으로, 초기 명칭은 인테르프론트(인터내셔날 프론트)였으나 같은 해 가을 인테르무브먼트(인테르드비제니예)로 개칭했다. 주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공장 노동자와 소련군 퇴역 장교들로 구성되어 발트 3국의 독립운동에 반대했으며, 라트비아의 인테르프론트, 리투아니아의 예딘스트보 등 유사 조직이 각 공화국에 병행했다. 보수파 공산당원들과 KGB의 지원을 받으며 소련 연방의 유지를 주장했고, 1991년 소련 붕괴 후 발트 국가들에서 금지되었다.
상세
창립과 계보
인테르프론트는 1988년 7월 19일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결성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노동자 국제운동(에스토니아어: Eesti NSV Töötajate Internatsionaalne Liikumine)이었다. 창립 당시의 이름은 인테르프론트, 즉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노동자 국제전선이었고, 같은 해 가을 인테르무브먼트(인테르드비제니예, 에스토니아어: Interliikumine)로 개칭했다. 구성원 수는 자료에 따라 1만 6000명에서 10만 명까지 크게 엇갈린다.
사회적 기반과 구성
이 운동은 주로 군수 공장과 전연방적 중요성을 지닌 공장들, 즉 다른 소련 지역의 산업에 생산물을 공급하는 통합 생산 사슬에 편입된 에스토니아 중공업 기업들에서 활동했다. 여기에는 엔진 공장 '드비가텔', 칼리닌 및 뵈겔만 전기공장과 톤디 엘렉트로니카, 그리고 북부 에스토니아의 광업(특히 인광석 채굴)이 포함되었다. 에스토니아의 독립이 일자리 상실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동력의 하나였다. 독립 후 실제로 이 산업들은 생산을 재편하고 새로운 시장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했고, 대부분의 경우 생산이 급감하면서 소련 시기 이주 노동자 출신을 다수 포함한 노동자들이 해고되었다.
운동은 소련 공산당 에스토니아 지부의 보수파와 결합되어 있었고, 인민전선이 이끄는 에스토니아 독립운동과 공산당 내 자유파에 반대했다. 거의 예외적으로 비(非)에스토니아계 주민들로 구성되었지만, 민족주의 원칙에 세워진 조직은 아니었고 에스토니아계 지지자도 있었다. 그러나 1989년 3월 5일 첫 대회에 참석한 742명의 대의원 가운데 에스토니아계는 11명에 불과했다. 구스타프 나안과 블라디미르 휘트가 이 운동을 지지했고, 아르놀트 사이, 렘비트 안누스, 발테르 토오츠도 활동가 대열에 있었다.
정치적 입장과 지원
주요 지도자는 예브게니 코간(러시아어: Евгений Коган)이었고, 그는 소련 최고회의 내 강경파 '소유즈' 회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밖의 지도자로는 '드비가텔' 공장장 블라디미르 야로보이(러시아어: Владимир Яровой), 아르놀트 사이, 블라디미르 레베데프, 경제학자 콘스탄틴 키크나제가 있었다.
비판자들에 따르면 이 운동의 목적은 보수적 소련 가치를 지키고 인민전선의 행동을 가로막는 데 있었다. 전 KGB 장군 올레크 칼루긴(러시아어: Олег Калугин)에 따르면, 에스토니아와 소련의 다른 지역에서 이 운동은 민족주의 조직으로 인식된 인민전선에 대항할 견제 세력으로서 KGB의 발의로 세워졌다. 러시아어권 주민을 에스토니아 독립운동에 맞서는 엘리트 세력으로 도식화하는 통념과 달리, 인테르프론트 계열 조직은 대중 운동이었고 그 구성원은 여러 사회 계층에 걸쳐 있었다.
주요 사건과 금지
1989년 소련 인민대의원 대회 선거에서 친인테르무브먼트 후보들은 에스토니아에 배정된 36석 가운데 6석을 얻었고, 인민전선은 27석을 얻었다. 1990년 5월 15일 인테르무브먼트는 톰페아 성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이는 의회 건물을 점거하려는 시도로 확대되었다. 에드가르 사비사르가 "톰페아가 공격받고 있다"는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자 수천 명의 에스토니아인이 모여들어 무장하지 않은 반독립 시위대를 몇 시간 만에 해산시켰다.
1990년 8월 29일부터 1991년 8월 21일까지 인테르무브먼트는 라디오 방송국 '나데주다'(러시아어: Надежда, '희망')를 운영했다. 이 방송국은 통상 절차를 벗어나 소련 중앙 당국으로부터 면허를 받았으며 에스토니아 지방 당국에는 통보되지 않았다. 소련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의 지시에 따라 송신 시설은 탈린 인근 케일라의 소련 군사기지 영내에 설치되었다.
병행 조직과 사후 조치
라트비아에서는 인테르프론트(라트비아 노동인민 국제전선)가 1989년 1월 7일 독립 지향의 라트비아 인민전선에 대항해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라트비아가 소련에 남는 것을 지지했고, 회원은 거의 대부분 라트비아 내 러시아계였다. 1989년 소련 인민대의원 선거에서 인테르프론트와 소련 공산당 라트비아 지부는 42개 선거구 가운데 8곳에서만 승리했다. 1991년 1월 라트비아 사건 당시 모스크바 중앙 정부에 충성하는 OMON 부대와 충돌해 민간인과 법 집행 요원 여러 명이 사망했다. 8월 쿠데타 실패와 라트비아 독립 회복 뒤인 1991년 9월 라트비아 최고평의회는 인테르프론트와 라트비아 공산당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1991년 1월 13일 이후 인테르프론트 활동 경력이 확인된 사람은 라트비아 시민권 자연화에 제한을 받고, 시민권자라 해도 사에이마와 지방의회 선거 후보 등록이 금지된다.
리투아니아의 '예딘스트보'(러시아어: Единство, '단일')는 사주디스에 반대하는 친소련 운동으로, 소련 군대와 KGB의 지원을 받았고 리투아니아의 폴란드계 소수민족 일부에서도 지지를 얻었다. 지도자들이 8월 쿠데타를 지지한 뒤 영향력을 잃었고 1991년부터 활동하지 않고 있다. 몰도바에서는 1989년 7월 인테르프론트로 창설되었다가 1991년 12월 '권리평등을 위한 통일운동'(Unitate-Edinstvo)으로 개칭했으며, 소련 연방 유지를 주장하며 1991년 몰도바 독립선언 서명을 거부했다. 우크라이나 돈바스에서는 1990년 인테르프론트 계열의 돈바스 국제운동이 결성되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1993년 혈통주의에 기초한 시민권·거주 법률이 채택되면서 과거 소련 시민권자이면서 에스토니아 시민권을 가진 적이 없고 시민의 후손도 아닌 사람들(약 50만 명의 러시아계를 포함)이 외국인으로 분류되었다. 같은 해 유리 미신 등 옛 인테르무브먼트 활동가들은 북동부 에스토니아의 러시아계 우세 지역에 대한 지역 자치를 요구했고, 나르바 지역에서 헌법에 맞지 않는 주민투표가 1993년 7월 16일부터 17일까지 치러졌다. 나르바와 실라매에 활동가 위원회에 따르면 유권자의 53.2%가 참여해 98%(나르바 97.2%)가 자치에 찬성했으나, 중앙 정부는 인구 대다수가 참여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분리주의자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한 나르바 시의회에 해산을 요구했다.
역사적 의의
인테르프론트와 인테르무브먼트를 비롯한 인터프론트 계열 조직은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소련 각 공화국의 민족 운동에 맞선 친소련 반대 세력의 핵심이었다. 이들은 소련의 영토적 통합에 헌신하여 러시아 민족주의 조직들과 연합을 맺었고, 소련 붕괴 뒤 발트 국가들에서 금지되었다. 한편 옛 활동가들의 요구 일부는 발트 국가의 시민권·언어 정책이 소련 시기 이주민과 그 후손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겹쳐 있었다.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founding date (19 July 1988), original name Interfront renamed to Intermovement autumn 1988, leadership, membership 16,000–100,000, 1989 election results (6/36 seats), radio Nadezhda, Toompea incident May 1990, parallel organisations in Latvia/Lithuania/Moldova/Donbass, KGB involvement per Oleg Kalugin
- 위키백과 (영문) English-language summary: founding, membership, alignment with pro-Soviet wing of Estonian Communist Party, opposition to Popular Front, leadership (Kogan, Jarovoi, Sai, Lebedev, Kiknadze), Narva autonomy referendum 1993, post-independence ban
- hoover.org Hoover Institution archival description confirming Estonian Intermovement, Latvian Interfront, Lithuanian Yedinstvo as pro-Soviet organisations of mainly Russian minority members in industrial cities, banned after 1991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영문)
- hoover.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