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Japanese intervention in Siberia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일본 제국 육군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구출과 연합국 군수물자 보호를 명분으로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에 군대를 보낸 군사 개입. 미국은 7천 명을 요청했고 일본 정부는 1만 2천 명 파병을 결정했지만, 실제로는 7만 명이 넘는 병력이 들어가 치타 동쪽의 항구와 주요 도시를 모두 점령했다. 다른 연합국이 1920년 물러난 뒤에도 남았다가 1922년 10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철수했고, 북사할린 점령은 1925년까지 이어졌다.
상세
1918년 2월 일본 육군 참모본부와 육군성은 「시베리아 계획위원회」를 만들어, 제정 붕괴를 틈타 시베리아를 떼어 내 완충국을 세우면 러시아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검토했다. 같은 해 1월 일본 해군은 영국 군함보다 먼저 전함 이와미와 아사히를 블라디보스토크에 보냈다. 7월 윌슨 대통령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구출을 위한 2만 5천 명 규모 연합군의 일부로 7천 명을 요청하자,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의회의 격론 끝에 1만 2천 명을 보내되 일본 단독 지휘 아래 두기로 했다. 대규모 상륙은 8월 8일 시작되어 그달 말까지 1만 8천 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 6천 명이 만주를 거쳐 만저우리에 들어갔고, 8월 18일 오타니 기쿠조 장군이 연합군 전체의 지휘를 맡았다. 11월 초에는 7만 명이 넘었다. 일본군은 바이칼호 서쪽으로는 가지 않았고, 연해주의 항구와 치타 동쪽의 주요 도시를 차지한 채 그리고리 세묘노프의 특별만주부대를 후원했다. 1920년까지 미쓰비시·미쓰이 같은 재벌이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치타에 사무소를 열었고, 민간인 정착민도 5만 명 넘게 들어왔다.
1920년 다른 연합국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물러난 뒤에도 일본군은 조선과 만주에 가까운 곳으로 공산주의가 번지는 것을 우려해 남았다. 그러나 1920년 공고타 협정으로 자바이칼에서 철수해야 했고, 이는 그해 10월 세묘노프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니콜라옙스크 사건을 이유로 북사할린을 점령했고, 블라디보스토크의 프리아무르 임시정부를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미국과 영국의 외교 압력, 그리고 인명과 비용 때문에 커진 국내 반대 속에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은 1922년 6월 24일 철수를 발표했고, 마지막 병사가 10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북사할린의 일본군은 1925년 1월 일소 기본조약 체결 뒤 5월에야 물러났다. 일본 쪽 사망자는 영어 문헌에 따라 전투와 질병을 합쳐 약 5천 명, 또는 전사 1,399명과 병사 1,717명이며, 비용은 9억 엔이 넘었다. 의회는 군부가 파병 규모를 속이고 기밀비를 유용했으며 잔학 행위 소문이 돌던 운게른 같은 인물을 지원했다고 공격했고, 출병은 전시의 단결을 무너뜨려 군과 정부, 그리고 군 내부 파벌의 다툼을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