Хотинське повстання · 1919

호틴 봉기

Khotyn Uprising

1919년 1월 7일부터 2월 1일까지 베사라비아 북쪽 끝 호틴군에서 우크라이나 농민을 중심으로 일어난 루마니아 지배 반대 봉기. 드네스트르강 건너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쪽에서 온 무장대가 1월 23일 호틴시를 장악해 「디렉토리아」를 세웠으나, 클레안테 다비도글루 장군의 루마니아군이 2월 1일까지 진압했다. 희생자 수는 출처에 따라 수백 명에서 1만 1천 명 이상까지 크게 엇갈린다.

상세

호틴군은 부코비나와 포딜리아 사이에 있었고, 1900년 무렵이면 우크라이나인이 다수였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가 니콜라에 엔치우에 따르면 1918년 우크라이나인만 사는 마을이 121곳, 루마니아인만 사는 마을이 52곳, 혼합 마을이 16곳이었다. 1918년 10월 22일 호틴 젬스트보는 다수결로 러시아와의 재통합을 청했고, 11월 오스트리아군이 떠난 자리에 다비도글루의 루마니아군이 들어왔다. 봉기에는 우크라이나 농민 외에 우크라이나 인민군을 이탈한 카자크, 몰도바인 무리, 지역 볼셰비키와 백군 계열이 얽혀 있었다. 봉기 지도부인 디렉토리아는 파리 강화회의를 앞두고 호틴군이나 베사라비아 전체의 지위를 바꾸려 했지만,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지지파와 볼셰비키 지지파로 갈려 있었다. 디렉토리아는 호틴 시장을 체포하고 사흘 안에 150만 루블을 내라고 했는데, 부담은 주로 유대인 주민에게 돌아갔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공식적으로 개입을 부인했고, 비밀 지원 여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진압의 피해는 출처마다 다르다. 루마니아 군 기록에는 반란 마을 7곳을 불태우고 봉기군을 최대 5천 명까지 죽였다는 것이 있고, 우크라이나 역사가 포틸차크는 마을 22곳 파괴와 희생자 1만 1천 명, 그 가운데 철도원 165명과 비무장 민간인 500명의 처형을 집계하면서 1만 5천 명 이상이라는 추정은 과장일 것이라고 보았다. 1만 1천 명이라는 숫자는 1925년 국제적색구원회가 처음 퍼뜨린 것이다. 루마니아군 손실은 전사 159명을 포함해 369명이었다. 이온 안토네스쿠를 비롯한 루마니아 장군들도 민간인 무차별 살해가 루마니아를 「야만인의 나라」로 보이게 한다고 비판했다. 농민 약 5만 명과 무장 봉기군 4천~1만 명이 드네스트르강을 건너 달아났고, 참가자 일부는 그리고리 코톱스키의 벤데르 습격에 합류했다. 루마니아와 소련 역사학은 모두 볼셰비키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네덜란드 학자 빔 반 뫼르스 등은 이를 지역적 봉기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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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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