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군
Kwantung Army
러일전쟁으로 얻은 랴오둥반도 조차지(관동주)와 남만주 철도를 지키기 위해 1906년 뤼순에 둔 일본 육군 부대. 1928년 장쭤린 폭살과 1931년 류탸오후 사건처럼 도쿄의 승인 없이 벌인 작전이 잇달아 사후 추인되면서 사실상 독자적인 정치 세력이 되었고, 만주국을 세운 뒤로는 그 나라의 실질적인 통치 기구 노릇을 했다. 소련을 먼저 쳐야 한다는 북진론의 본거지여서 1938년 하산 호와 1939년 할힌골에서 소련군과 부딪쳤고 두 번 다 졌다. 태평양 전쟁이 길어지며 정예 부대와 장비가 남방으로 빠져나간 뒤, 1945년 8월 소련의 만주 작전 앞에서는 두 주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상세
성립
관동군의 기원은 러일전쟁의 결과에 있다. 1895년 청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랴오둥반도의 관동주를 일본에 넘겼으나 삼국간섭으로 곧 반환했고, 1898년 이 지역은 러시아가 조차해 다롄(달니)으로 개발했다. 1904~1905년 전쟁에서 러시아를 이긴 일본은 관동주 조차권과 남만주철도를 다시 차지했고, 1906년 이 지역과 철도 부설지를 지키기 위한 관동수비대가 뤼순에 설치되었다. 보병 1개 사단과 공성중포병 1개 대대, 철도 경비를 맡은 독립수비대 6개 대대로 모두 1만 4천 명 규모였으며, 관동도독부가 관장하고 도독이 사령관을 겸했다. 1919년 관동도독부가 민정과 군정으로 분리되면서 관동군 사령부가 성립했다.
독단과 만주국
관동군은 도쿄의 육군참모본부에 명목상 속했지만 지휘부는 종종 상부의 명령을 정면으로 위반하고도 아무 제재를 받지 않았다. 1928년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가 펑톈군벌 장쭤린의 열차를 황고둔에서 폭파해 죽였고, 1931년에는 류탸오후 사건을 만들어 만주 침공을 개시했다. 이는 도쿄의 정치·군사 지도부의 명시적 명령에 대한 대규모 항명이었다. 기정사실을 마주한 참모본부는 1932년 만주국 수립과 그 뒤의 진압 작전을 추인했고, 항명은 처벌이 아니라 보상으로 끝났다. 관동군 사령관은 만주국의 정치와 경제 개발 전반을 관장하는 통치자에 준하는 지위에 있었고, 명목상의 황제 푸이의 명령을 승인하거나 취소할 권한을 가졌다. 관동군 사령관이 주만 일본 대사를 겸한 것도 이 지배의 밀도를 보여준다.
중국 침략과 소련과의 충돌
만주국을 확보한 뒤 관동군은 북중국에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한 국경 분쟁을 계속 벌였고,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전면전이 시작되자 베이핑-톈진 전투와 차하르 작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들어 소련·일본 국경 분쟁에서 명성에 큰 금이 갔다. 1938년 하산 호 전투에서는 소련군과 교착 상태에 빠졌고,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는 결정적으로 패해 큰 손실을 입었다. 이 패배 뒤 관동군은 독단적인 인사들과 시베리아 방면으로 팽창을 우선하자는 북진론 지지자들이 숙청되었고, 1940년대에는 놀랄 만큼 명령에 순응하는 조직이 되었다.
대소 전쟁 계획
관동군은 소련 극동 침공 계획의 중심에 있었다. 1938~1939년 참모본부 작전부와 관동군은 제8호 작전 계획, 즉 하치호 계획을 공동으로 검토해 1943년을 상정한 대소 전면전을 준비했고, 1941년 6월 독소전 발발 뒤에는 관동군 특종연습으로 알려진 칸토쿠엔 계획이 마련되었다. 7개 군과 해·공군의 상당 부분을 동원하는 일본 역사상 최대의 합동 작전이 될 예정이었고, 7월 7일 천황의 부분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동남아 공세 준비, 중일전쟁의 부담, 독일의 조속한 승리에 대한 회의, 미국의 경제 제재가 겹치면서 이 계획은 참모본부에서 힘을 잃고 폐기되었다. 다만 만주에 주둔한 대규모 병력 자체는 소련으로 하여금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시베리아에 상당한 군사 자원을 묶어 두게 만들었다.
궤멸
관동군의 병력은 1938년 20만, 1941년 70만 규모까지 늘었고 사령부는 만주국 수도 신징으로 옮겼다. 태평양 전쟁이 확대되면서 사정이 뒤집혔다. 전선이 악화되자 정예 부대와 장비가 남방과 중국 전선으로 차출되었고, 관동군은 남은 병력과 낡은 장비로 1945년 8월을 맞았다. 소련군의 만주 작전에서 관동군은 약 8만 4천 명이 전사하고 60만 명가량이 포로가 되었으며, 포로들은 시베리아와 극동의 노동수용소로 보내져 이후 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송환되었다. 관동군의 패망은 한반도 북부의 소련군 진주와 분단으로 이어졌다.
전쟁 범죄와 책임
관동군은 731부대를 비호하며 생물학전과 민간인·연합군 포로에 대한 인체실험을 후원했다. 전후 소련군은 731부대와 그 지부의 화학·생물무기 시설을 발견했고, 이시이 시로가 지휘한 인체실험 프로그램에는 중국인과 미국인, 러시아인 민간인과 포로가 동원되었다. 미국 점령 당국에 체포된 이시이와 731부대원 약 2만 명은 인체실험에 기초한 세균전 자료를 넘기는 대가로 전범 기소 면제를 받았다. 1947년 5월 6일 더글러스 맥아더는 워싱턴에 보낸 서한에서 그 정보를 정보 경로에 보관하고 전범 증거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취지를 일본 측에 알리면 추가 자료를 얻을 수 있다고 썼고, 거래는 1948년에 성사되었다. 한편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에서는 731부대원 12명과 관동군 지도부 인사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도쿄의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이타가키 세이시로, 마쓰이 이와네, 도이하라 겐지, 도조 히데키, 무토 아키라 등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평가와 기억
관동군의 행동을 누구의 책임으로 볼 것인지는 지금도 쟁점이다. 관동군은 일본 제국 육군의 정예 사령부였고, 일본과 소련은 할힌골을 공식적으로 국경 사건으로 취급했으며, 미국의 면책 거래는 가해자 일부가 처벌을 피하는 결과를 낳았다. 지휘 체계를 실제로 움직인 단위와 그 결과를 함께 기록해 두는 것이 이 논쟁의 출발점이다.
관련 용어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Alvin D. Coox, Nomonhan: Japan Against Russia, 1939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0)
- Yoshihisa Tak Matsusaka, The Making of Japanese Manchuria, 1904–1932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1)
- David M. Glantz, Soviet Operational and Tactical Combat in Manchuria, 1945 (Frank Cass, 2003)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