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炼钢铁 · 1958.08–1959

대제강 운동 (1958)

Mass steel campaign (1958)

1958년 8월 베이다이허 회의가 그해 강철 생산을 1957년의 두 배인 1,070만 톤으로 정한 뒤, 9천만 명을 동원해 흙으로 쌓은 「토법 고로」(뒷마당 용광로)에서 철을 녹이게 한 대약진의 운동. 목표 숫자는 채워졌으나 생산된 강철의 상당 부분이 쓸 수 없었고, 농사철의 노동력을 빼앗아 1958년 가을 곡식이 밭에서 썩게 해 대기근의 한 원인이 되었다.

상세

연초 계획의 강철 목표는 624만 8천 톤이었다. 1957년 11월 마오가 모스크바에서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는다」고 한 뒤 야금공업부장 왕허서우와 국가계획위원회 주임 리푸춘이 목표를 잇달아 높였고, 베이다이허 회의는 「강철을 고리로 삼는다」며 1,070만 톤을 결정했다. 9월 안후이의 쩡시성이 토법 고로로 녹인 강철 덩어리를 보여 주자 마오는 전국에 이 방식을 권했다. 1958년 말까지 전국 노동인구의 5분의 2인 9천만 명이 제강에 나섰다. 철광석이 모자라 농민은 밭 대신 산으로 가 광석을 캤고, 연료를 대느라 숲을 베었으며, 집집의 솥과 농기구를 녹여 넣었다.

발표된 1958년 강철 1,108만 톤 가운데 합격품은 800만 톤, 선철 1,369만 톤 가운데 합격품은 953만 톤이었다. 국가통계국은 토법 제강의 손실을 50억 위안으로, 다른 추산은 제강 운동 전체의 손실을 200억 위안으로 보았다. 1959년 강철 목표는 3천만 톤에서 1,800만~2천만 톤으로 낮아졌고 실제 생산은 1,387만 톤이었다. 마오는 1959년 루산 회의 초에 뒷마당 제강을 「큰 재난」이라 부르면서도, 대중의 열의와 창조성을 보여 주었다며 운동을 옹호했다. 펑더화이는 사신에서 제강이 「득도 있고 실도 있었다」며 비례 실조를 지적했다. 운동은 숲의 대량 벌채와 오염으로 건국 뒤 첫 대규모 생태 파괴도 남겼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zh.wikipedia.org
  2. zh.wikipedia.org
  3. 위키백과 (영문)
  4. 위키백과 (영문)
  5.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