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rde nationale mobile · 1848–1850.01.31

기동대 (프랑스, 1848–1850)

Mobile Guard (France, 1848–1850)

상위 항목 프랑스 제2공화국

1848년 2월 혁명 뒤 프랑스 임시정부가 파리의 15~20세 젊은이들로 꾸린 유급 무장 부대. 1,000명씩 24개 대대였고, 6월 봉기 때 군대·국민방위군과 함께 노동자 봉기를 짓눌렀다. 1850년 1월 31일 해산되었다. 마르크스는 이들을 「기동대로 조직된 룸펜프롤레타리아트」라 불렀다. 1868년 니엘 법으로 만든 같은 이름의 예비군과는 다른 조직이다.

상세

2월 혁명으로 군대가 파리에서 물러나자, 수도에 남은 무력은 부르주아로 이루어진 국민방위군뿐이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계급투쟁』에서 임시정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에 맞세우려고 기동대를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대원들은 대부분 큰 도시마다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와 뚜렷이 구별되는 무리를 이루는 룸펜프롤레타리아트 출신이었고, 그 나이의 젊은이들은 가장 영웅적인 행동에도 가장 비열한 약탈에도 쉽게 끌려갔다. 임시정부는 이들에게 하루 1프랑 50상팀을 주어 사들였고, 따로 제복을 입혀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들과 겉모습부터 갈라놓았다. 지휘관은 일부는 상비군 장교였고, 일부는 대원들이 뽑은 부르주아 집안 젊은이였다.

파리 노동자들은 처음에 이 부대를 바리케이드의 맨 앞에 선 투사로, 부르주아 국민방위군과 다른 「프롤레타리아의 근위대」로 여기며 환호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용서받을 만한 착각이라고 했다. 1848년 4월 16일 기동대가 시위를 진압하면서 군대와 국민방위군과 기동대의 차이는 흐려졌고, 국민방위군은 무장한 인민을 대표하는 성격을 잃고 질서 유지를 위한 복종하는 무력이 되었다.

6월 봉기에서 정부 쪽에는 정규군 2만 5,000명, 국민방위군 1만 7,000명과 함께 파리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어린 층에서 뽑은 기동대원 1만 5,000명이 섰다. 기동대는 카베냐크 장군 아래서 봉기자들과 싸웠고, 100명이 죽고 600명이 다쳤다. 엥겔스는 조직된 룸펜프롤레타리아트가 일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싸웠다고 썼고,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부르주아 공화국 편에 「기동대로 조직된 룸펜프롤레타리아트」가 섰다고 적었다. 그는 또 「사회주의 노동자에게 국립 작업장이, 부르주아 공화파에게 기동대가 그랬듯, 보나파르트에게는 12월 10일회가 그만의 당파 무력이었다」고 비교했다.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은 국민방위군을 믿지 않아 1849년 1월 그 대대의 절반을 없앴고, 기동대는 1850년 1월 31일 완전히 해산되었다. 규율이 없고 분란을 가라앉히기보다 일으킨다는 것이 이유였다. 제2제정 말기인 1868년 육군장관 니엘이 만든 「기동 국민방위군」(garde nationale mobile)은 징집되지 않은 젊은이를 훈련하는 예비군으로, 이름은 같지만 다른 조직이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2. fr.wikipedia.org
  3. fr.wikipedia.org
  4. 위키백과 (영문)
  5.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6.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