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의 의지당
Narodnaya Volya (People's Will)
1879년 나로드니키 조직 「토지와 자유」에서 갈라져 나온 러시아 혁명적 사회주의 비밀결사. 짜르 전제정치 타도를 목표로 개인 테러를 정치 투쟁의 수단으로 체계화했으며,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에 성공했다. 비밀 세포 조직과 집행위원회 중심의 중앙집권적 구조를 갖추고 전국 약 50개 도시에 지부를 두었으며, 비록 당원은 500여 명에 불과했으나 수천 명의 추종자를 동원했다.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대대적인 탄압으로 와해되었으나, 정치 테러를 혁명 전략으로 정립한 점에서 후대 혁명 운동과 현대 테러리즘의 원형으로 평가된다.
상세
기원과 분열
나로드니키 운동의 '민중 속으로' 캠페인(1874)이 실패한 후, 혁명적 포퓰리스트들은 1876년 「토지와 자유」(젬랴 이 볼랴)를 결성했다. 그러나 선전·선동을 중시하는 '촌락파'와 정치 테러를 통한 정부 전복을 주장하는 '정치파'의 대립이 깊어져 1879년 8월 조직은 분열했다. 전자가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중심의 「흑토 재분할」(초르니 페레델)로 이어진 반면, 후자는 「인민의 의지당」을 창립했다.
조직과 이념
인민의 의지당은 알렉산드르 미하일로프, 안드레이 젤랴보프, 소피야 페롭스카야, 베라 피그네르, 니콜라이 모로조프 등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가 중앙에서 비밀 세포 조직을 지휘하는 엄격한 중앙집권제를 택했다. 강령은 제헌의회 소집, 보통선거권,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토지의 인민 이양, 공장의 노동자 통제로의 이행, 그리고 러시아 제국 내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 포함했다. 이는 민주주의적 개혁과 사회주의적 전환을 결합한 독특한 포퓰리즘 사회주의였다.
테러리즘의 체계화
인민의 의지당은 테러를 단순한 복수나 선전 수단이 아니라 정치 투쟁의 중심 전략으로 격상시켰다. 집행위원회는 1879년 8월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사형 선고를 공식 결의했고, 이후 기차 폭파, 겨울궁전 폭파 등 7차례의 암살 시도 끝에 1881년 3월 13일 페테르부르크 운하 변에서 니콜라이 리사코프와 이그나티 그리네비츠키의 폭탄 투척으로 황제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은 세계사에서 근대적 정치 테러리즘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몰락과 유산
암살 직후 집행위원회는 신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에게 정치 개혁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으나, 정권은 즉각 탄압으로 응답했다. 1881~1883년 사이 조직원 대부분이 체포·처형·유형되었고, 1887년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레닌의 형)가 이끈 재건 시도도 실패로 끝났다. 인민의 의지당은 농민 대중을 동원하지 못했고 '음모적 블랑키즘'이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으나, 그 희생적 투쟁은 전 유럽 진보 여론을 뒤흔들었고 레닌을 비롯한 후대 혁명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는 젤랴보프 같은 인물들이 보여준 위대한 투쟁 정신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라는 레닌의 말은, 볼셰비키가 인민의 의지당과 거리를 두면서도 그 혁명적 유산을 선택적으로 계승했음을 보여준다.
관련 인물
출처
- 위키백과 (영문) foundational article covering origins, program, organizational structure, assassination campaign, aftermath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language article with detailed party program, Executive Committee composition, and historical narrative
- newworldencyclopedia.org comprehensive entry covering program, founders, terror tactics, and ideological character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Lenin's own gloss on Narodnaya Volya as a 'secret political organisation of Narodnik terrorists' and his acknowledgment of its revolutionary herit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