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방조약
New Union Treaty
신연방조약은 소련의 해체를 막고 연방을 개혁하기 위해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조약 초안으로, 1922년 소련 수립 조약을 대체해 공화국들에게 실질적 주권을 부여하는 완화된 연방(훗날 연방)을 구상했다. 노보-오가료보 정부 별장에서 진행된 초안 작업(노보오가료보 과정)은 1991년 3월 국민투표에서 연방 존속이 76%의 찬성을 얻으면서 탄력을 받았고, RSFSR을 비롯한 공화국들의 서명식이 1991년 8월 20일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바로 전날 발생한 8월 쿠데타로 서명이 무산되었고, 쿠데타 실패 이후 공화국들의 독립 선언과 벨로베즈 협정으로 소련 자체가 해체되면서 조약은 결국 체결되지 못했다.
상세
왜 조약 개정이 필요했는가
신연방조약은 1922년 소련 창설 조약을 대체해 소련을 구제·개혁하기 위해 마련된 1990년 조약 초안이었다. 고르바초프는 1990년 7월 당 대회에서 덜 중앙집권적인 연방제를 제안했고, 11월 23일 초안이 소련 최고회의에 제출되어 1991년 1월 1일부터 초안 작성위원회가 작업에 들어갔다. 이 작업은 모스크바 교외의 정부 별장 노보오가료보에서 고르바초프가 공화국 지도자들과 만나 진행되어 노보오가료보 과정으로 불렸다.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몰도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15개 공화국 가운데 6개 공화국은 초안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3월 국민투표와 9+1 협정
연방과 공화국 사이의 권한 배분을 두고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고르바초프는 대중적 지지에 호소했다. 1991년 3월 17일 초안 작성에 참여한 9개 공화국(러시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은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76%가 연방제 유지를 지지했으며 이는 9개 공화국 모두에서 과반이었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같은 대도시에서 반대가 가장 컸고, 이미 독립 방향으로 나아가던 나머지 6개 공화국에서는 투표가 대체로 보이콧되었다. 국민투표 결과를 발판으로 중앙정부와 9개 공화국 사이의 9+1 협정이 4월 23일 노보오가료보에서 체결되었다. 이 9+1 회의와 그에 따른 신연방조약 협상, 세금과 권한 문제로 정체된 여름의 초안 작업을 거쳐 서명일은 8월 20일로 잡혔다.
조약안의 내용
조약문은 기본 원칙과 26개 조항으로 이루어졌다. 평등한 주권 국가들의 자발적 연합으로서 공동의 연방정부를 두고, 공화국은 연방에 직접 가입하거나 다른 국가의 일부로서 가입할 수 있으며 그 관계는 당사국 간 조약으로 규율하도록 했다. 공화국 지도자들과 연방 대통령으로 구성된 대통령평의회와 연방 헌법재판소가 신설되고, 소련 최고회의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소련 평의회와 공화국 평의회의 양원제로 존속하며, 소련은 두 개의 소련과 공화국 평의회로 개편되고, 군사·외교·금융·에너지 등이 중앙정부 소관으로 남되 공화국은 천연자원과 조약에 따른 연방 탈퇴 권리를 포함한 더 큰 권한을 얻는 구상이었다.
초안의 진화: 연방에서 국가연합으로
1991년 7월 초안이 배포되고 고르바초프가 소련 주권국가연합 조약(ССГ)을 발표했으며, 8월 초안에서는 새 국가의 명칭이 소련 주권공화국연합(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уверенных Республик)으로 제시되어 'СССР' 약자를 유지했다. 이후 협상이 재개되어 9월에는 주권국가연합(Союз Суверенных Государств)으로 개칭되었다. 1991년 9월 초안은 연방에서 국가연합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11월 1일 샤흐나자로프가 이끄는 작업그룹은 주권국가연합을 국가연합으로 규정한 대안 초안을 제출했다. 11월 14일 국가평의회는 '민주적 국가연합'이라는 타협적 표현을 채택했고, 11월 25일 옐친, 슈시케비치, 카리모프가 가서명을 거부했으며, 11월 27일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조약 초안이 공표되었다.
서명식이 중단된 경위
8월까지 우크라이나를 제외한 9개 공화국 중 8개가 일부 조건을 붙여 조약 초안을 승인했다(우크라이나는 조건에 동의하지 않았다). 서명식은 1991년 8월 20일로 예정되었고 러시아가 첫 서명자였다. 7월 29-30일 밤 노보오가료보에서 고르바초프, 옐친, 나자르바예프가 회동해 서명일을 8월 20일로 확정했다. 조약 훼방을 명분으로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서명식은 무산되었고 조약은 끝내 서명되지 못했다. 8월 18일 강경파는 크림의 고르바초프 별장에 그를 감금해 모스크바로 돌아와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막았고, 8월 19-21일 쿠데타는 소련 각지에서 대중적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8월 쿠데타와 조약의 종말
쿠데타가 무너진 뒤에도 협상은 9월부터 12월까지 국가연합으로서의 신연방조약을 되살리려는 시도로 이어졌지만 진전은 제한적이었다. 9월 5일 소련 인민대표대회는 과도기의 소련 국가권력과 관리 기구에 관한 법을 채택해 권력 구조를 크게 바꾸었다. 10월부터 12월까지 노보오가료보 과정은 국가평의회 회의, 새 연방 조약에 대한 러시아의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거부 속에서 이어졌고, 11월 14일과 25일 국가평의회 회의에서 국가연합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11월 25일 옐친, 슈시케비치, 카리모프가 가서명을 거부하면서 조약 초안은 사실상 무력해졌고, 12월 1월 우크라이나 국민투표에서 독립이 승인되었다. 12월 8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가 벨로베즈 협정을 체결하고 독립국가연합 창설을 선언하면서 소련 자체가 해체되었다.
남은 자료와 후대의 평가
노보오가료보 과정은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끝났고, 다음 날 최고회의가 소련의 해체를 공식 선언하고 스스로 해산했다. 신연방조약이 연방을 구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대안이었는지, 이미 때를 놓친 문서였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러시아어 사료는 노보오가료보 과정을 1991년 4월부터 12월까지의 협상과 문서 작업으로 기록하며, 최종 조약이 서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여러 판본의 초안 문헌 자체로 확인된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Core article: draft treaty to replace 1922 treaty, Novo-Ogaryovo process, 17 March 1991 referendum (76% in favor), scheduled signing 20 August 1991, derailed by the August Coup, subsequent replacement by CIS.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article: details on republic-by-republic signing schedule announced by Gorbachev on 3 August 1991, transformation from federation (СССР as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уверенных Республик) to confederation (ССГ as Союз Суверенных Государств) after the coup, and the Belovezha meeting on 8 December 1991.
- soviethistory.msu.edu Full English text of the 15 August 1991 draft published in Sovetskaia Rossiia, showing the treaty's structure: basic principles, Union structure, citizenship, territory, division of powers between Union and republics.
- history.state.gov U.S. State Department historical account confirming the August Coup was triggered by the imminent signing of the New Union Treaty on 20 August and that the coup's failure propelled Yeltsin and the republics toward dissolution.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