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선언
October Manifesto
1905년 10월 17일(구력) 니콜라이 2세가 전국적 총파업에 굴복해 반포한 선언으로, 시민적 자유와 입법 두마를 약속하며 러시아 전제정치가 헌법군주제로 전환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세르게이 비테가 기초한 이 문서는 신체의 불가침, 양심·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두마의 승인 없이는 어떤 법률도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원칙을 천명했으나, 차르는 두마 해산권과 거부권을 유지했다. 선언 직후 파업은 일시 소강되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이 양보에 만족한 반면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을 무장해제하려는 '종잇조각'으로 간주했으며, 약속된 개혁이 제한적으로 이행되면서 1907년 6월 쿠데타까지 혁명은 계속되었다.
상세
반포 경위
1905년 10월 초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파업은 전국으로 번져 러시아 전역의 10월 정치 총파업이 되었다. 10월 12~18일(구력) 여러 산업에서 200만 명 넘게 파업에 참가했고, 특히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제국의 통신·교통·공공서비스를 마비시키면서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전면적 권력 상실을 피하기 위해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는 새 정부 형태에 관한 보고서에서 입헌 군주제와 선출 의회 수용을 제안했다. 니콜라이 2세는 군사독재를 세우려 했으나 그 지명자였던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총살을 언명하며 거부했고, 결국 비테 안을 받아들여 10월 17일(구력, 서력 10월 30일) '국가질서 개선에 관한 최고 칙령'을 서명했다. 선언문 자체는 황실 각료들의 압박 속에 비테의 지도 아래 국무회의 의원 알렉세이 오볼렌스키가 초안을 쓰고 그와 각료위원회 사무국장 니콜라이 부이치가 다듬었다. 니콜라이 2세는 끝까지 개혁에 반대했고, 선언문은 모든 교회에서 낭독되었다.
주요 조항과 입법적 한계
선언은 '실질적 신체 불가침, 양심·언론·집회·결사의 자유에 기초한 시민적 자유의 확고한 기초'를 부여할 것을 천명했다. 두마 구성에 관해 이전에 완전히 선거권을 박탈당했던 계층을 참여시키고, '어떠한 법률도 국가두마의 승인 없이는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규칙을 세우며, 임명된 관리들의 행위의 합법성 감독에 선출된 대표들이 참여할 기회를 보장했다. 다만 니콜라이 2세는 두마 해산권과 법률 거부권을 그대로 유지했다.
선언은 이후의 입법으로 구체화되었다. 인신의 불가침 조항은 반년 뒤인 1906년 4월 23일 국가기본법에서 구체화되어 주거·재산의 불가침과 이동의 자유를 규정했다. 언론에서는 1865년 '검열과 출판에 관한 임시 규칙'을 몇 차례 수정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문제의 공개 토론이 합법화되었고, 집회와 결사에 관해서는 1906년 3월 4일의 임시 규칙 두 건이 미팅과 정치 조직을 허용하는 한편으로 엄격한 제한을 두었다. 선거권은 1905년 8월 6일 부лыгин 선거법에서 재산 자격에 묶여 있었고 여성·노동자·도시 중간층과 상당수 농민이 배제되었는데, 선언 이후인 12월 11일 법령이 이를 크게 넓혀 영세 지주, 가난한 도시민, 농촌 지식인과 산업 노동자까지 참여하게 했다. 1906년 4월 23일 판 국가기본법은 국민이나 국민 대표가 아니라 차르가 제정한 것으로, 국가두마에 일정한 입법 권한을 주었으나 입헌 관행은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반응의 분열
선언은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진영을 갈라놓았다. 자유주의자들은 대표적 정부와 언론의 자유라는 성과로 받아들였고, 입헌민주당(카데트)과 10월 17일 연합(옥토브리스트)이 선언 직후 합법적 정당으로 등장했다. 반면 사회주의자들과 많은 노동자들은 선언을 혁명을 무장해제하려는 '종잇조각'으로 규정하고 투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다. 사회민주주의 지도부는 문서상의 자유를 종이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보수적 여론은 차르의 추가 양보를 우려했고, 비테 자신은 선언이 즉각적 파국은 막았으나 혁명적 폭발의 가능성이 계속 열려 있다고 평가했다.
즉각적 결과와 진압
선언 공표 직후 파업과 폭력의 상당 부분이 멎고 사회적 기대가 고조되었지만, 그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05년 10월 말 전국에서 대규모 유대인 포그롬이 일어나 최소 1,600명이 사망하고 3,500명이 다쳤으며, 포그롬은 유대인뿐 아니라 학생·지식인 같은 '민주주의자'로 분류되는 이들을 겨냥하기도 했다. 선언은 비밀리에 준비되어 지방 당국에 아무런 사전 통보나 사후 지침이 없었고, 새 조건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랐던 관리들이 혼란을 겪으면서 폭력 진압이 늦어졌다. 정부는 곧 반격에 나섰다. 1905년 12월에는 모스크바에서 노동자 무장봉기가 일어나 10여 일간 도시가 전투 지역이 되었고,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이 체포되고 사망했다. 이후 군법회의 판결로 사형이 대량으로 선고되었고, 1906년 봄에는 처형 수가 주당 수백 명에 이르렀다. 정부는 정치 조직을 탄압했고, 1906년 7월 제1두마 해산과 1907년 6월 3일 제2두마 해산·선거법 변경으로 이어졌다. 이 6월 3일 쿠데타가 1905년 혁명의 종결로 간주된다.
역사적 의의
선언은 러시아 제국에서 처음으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법적으로 명문화하고, 이전에는 차르가 독점했던 입법 발의권을 군주와 새 대표 기구인 국가두마 사이에 나누었다는 점에서 전제정치에서 입헌적 출발로의 전환점이었다. 동시에 그 양보는 총파업과 무장봉기로 강제된 것이었고, 차르는 거부권과 해산권을 통해 입법권을 통제할 수 있었으며 약속된 개혁은 제한적으로만 이행되었다. 합법적 정당·노동조합·반대 언론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문이 열렸지만, 그 문은 여러 차례의 해산과 탄압 위에서 유지되었다. 이처럼 선언의 성격을 둘러싼 평가는 처음부터 갈렸고, 노동계급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전투 조건의 출발점이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comprehensive article on the Manifesto's background, provisions, and consequences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historical significance, content analysis, and contemporary reactions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full English text of the Manifesto from the Marxists Internet Archive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Lenin's contemporaneous analysis rejecting the Manifesto as a concession to be exploited, not accepted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