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진반도
Ongjin Peninsula
옹진반도는 38도선 최서단에 위치한 한반도의 돌출부로, 1949년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전면전 대신 제한작전의 첫 목표로 점령을 제안했던 지역이다. 스탈린은 전면 침공을 거듭 거부하면서도 이 반도에 한정된 타격은 검토했으나, 결국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금지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개전된 직후 조선인민군은 이곳을 38도선 전역에 걸친 총공세의 한 축으로 공격해 이틀 만에 점령했다.
상세
지리
옹진반도는 38도선의 최서단에 놓인 한반도의 돌출부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육로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토를 거쳐야만 접근할 수 있었고, 남단의 부포가 대한민국군의 유일한 주요 보급로였다. 부포와 인천의 해상 거리는 90km로, 당시 연락선으로는 편도 9시간이 걸렸다.
1949년의 제한작전 구상
1949년 김일성은 남침을 위한 스탈린의 지지를 얻으려 했지만, 8월 12일 소련 대사 테렌티 슈티코프는 남측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전면 침공은 있을 수 없다고 답하면서 옹진반도를 겨냥한 제한작전만 검토할 수 있다고 했다. 그해 9월 그리고리 툰킨의 보고를 검토한 뒤 스탈린은 침공에 반대했고, 옹진반도에 대한 제한적 타격도 금지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남침 고집을 멈추지 않았고, 1950년 1월 17일에는 소련 외교관들에게 남측을 해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옹진반도를 향후 진격의 교두보로 생각했다.
계획 변경과 개전
1950년 5월까지 소련군사고문단이 완성한 계획에는 한반도 서해안, 옹진반도에서의 접촉전을 촉발하는 방안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6월 21일 김일성은 남측이 계획을 알아냈고 방어를 강화하고 있다며 옹진에서의 제한작전 대신 38도선 전역에 걸친 총공격으로 계획을 수정했고, 스탈린이 이를 승인했다.
1950년 6월 25일 04시 40분 조선인민군은 포격을 앞세워 38도선을 넘었고, 옹진반도에서의 전투가 개전을 알렸다. 제3 38경비여단에 제6보병사단 제1보병연대가 배속된 부대가 대한민국군 제17보병연대를 기습했고, 교전은 6월 26일 조선인민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대한민국군 병력 다수는 반도 밖으로 빠져나갔다.
사료와 쟁점
개전 직후 북측은 남측이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했고, 남측은 제17연대가 해주 방면으로 반격했다고 발표했다. 일부 학자는 이 반격 주장이 실은 도발이었다고 보아 남측이 먼저 발포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다만 해주 주장을 담은 보고서에는 오류와 명백한 허위가 있었다. 남침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38도선, 특히 개성과 옹진 일대의 충돌은 남측이 개시한 경우가 많았다. 한편 남측은 사전에 조선인민군 계획을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다. 개전 약 한 달 전 조선인민군 포병 참모 장창남 소좌가 제3 38경비여단 연락장교와 함께 제17연대에 투항해 작전 명령과 부대 위치, 훈련 상황을 넘겼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책임
옹진반도는 전면전의 여러 공격 축 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어 있었다. 남침 계획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가 세우고 스탈린이 최종 승인했으며,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1950년 6월 25일 결의 83호로 이를 평화에 대한 파괴 행위로 규정했는데, 소련 대표는 대만의 중국 상임이사국 지위 점유에 항의해 1월부터 회의를 보이콧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복 의사를 거듭 표명했다.
전투의 조건
배치 단계에서 조선인민군은 6월 10일부터 23일까지 서부 지역 전면전 배치를 '군사훈련' 명목으로 끝냈다. 옹진 방면 조선인민군 병력은 제3 38경비여단 8천 명과 배속 부대 3천 명을 합쳐 1만 1천 명이었고, 곡사포·자주포·대전차포와 장갑차로 무장했다. 이에 맞선 대한민국군 제17보병연대는 45km의 경계를 맡았는데, 정상적인 사단 담당 구역을 훨씬 넘는 길이였다. 제17보병연대의 병력은 3천6백 명이었고, 담당 구역 안의 주요 산악 진지는 대부분 38도선 이북에 있었다.
점령과 통제
1950년 가을 유엔군의 북진으로 한반도 서부 전선은 다시 옹진반도 일대를 지나갔고, 휴전으로 38도선 일대가 아닌 군사분계선이 남북을 갈랐다. 전쟁 중 옹진반도와 연평도·백령도는 남측이 유지한 서해 도서 지역의 일부가 되었고, 1953년 정전협정은 서해 5도를 유엔군 사령부의 통제 아래 두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Stalin agreed to and also banned the limited strike on the Ongjin peninsula" after Tunkin advised against invasion; Kim continued pressing for full-scale war.
- accesson.kr Shin Bok-ryong,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Kim thought that the Ongjin Peninsula would serve as a springboard for further advance (Bajanov: 18). The USSR regarded this as a well-planned strategy, but a poorly-devised scheme in a political sense."
- 위키백과 (영문) The battle for Ongjin Peninsula on 25–26 June 1950 as part of Operation Pokpung, with KPA 3rd 38-Guard Brigade and attached 1st Infantry Regiment attacking ROK 17th Infantry Regiment.
- digitalarchive.wilsoncenter.org Stalin–Kim Il-sung meeting, 5 March 1949, showing Kim's early push for military action and Stalin's cautious response focused on economic and military aid rather than approval of war.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