Операция «Багратион» · 1944년 6월–8월

바그라티온 작전

Operation Bagration

1944년 6월 22일 개시되어 8월 19일까지 이어진 소련의 벨로루시 전략공세작전의 암호명이다. 소련군은 4개 전선군이 동시에 타격을 가해 독일 중부집단군을 궤멸시켰으며, 28개 사단을 소멸시키고 3주 만에 400~500km를 진격했다. 이 작전은 소련 종심작전과 마스키로프카(기만)가 처음으로 완전히 실현된 사례로, 독일 국방군 역사상 최대의 패배이자 소련 작전술의 결정판으로 평가된다.

상세

개요

바그라티온 작전(러시아어: Операция «Багратион»)은 1944년 6월 22일부터 8월 19일까지 소련 벨라루스에서 벌어진 붉은 군대의 전략공세작전이다. 서유럽에서 오버로드 작전이 시작된 지 2주 뒤에 개시되어, 나치 독일이 개전 이래 처음으로 두 개의 주요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게 만들었다. 소련은 중앙집단군 34개 사단 가운데 28개를 소멸시켰고, 약 45만 명의 독일군 사상자를 낸 이 전역은 독일 군사사에서 최대의 패배로 기록되었다. 작전의 성공은 30만 명의 독일군이 쿠를란트 포위망에 고립되는 길을 열었다.

배경

1944년 6월까지 중앙집단군은 1943~44년 겨울 남부집단군이 쿠르스크, 키예프, 드네프르-카르파티아, 크림 공세에서 연달아 패배하면서 노출되었다. 북쪽에서는 북부집단군도 밀려나, 중앙집단군의 전선이 동쪽으로 돌출되어 이웃 집단군과의 연락을 잃을 위험에 놓였다.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는 다음 소련군 공세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발터 모델 원수)을 향할 것으로 예상했다. 국방군은 중앙집단군의 포병 3분의 1, 구축전차의 절반, 전차의 88퍼센트를 남부로 옮기고, 동부 전선의 작전예비군 18개 기갑·기계화 사단을 모델의 전선에 배치했다. 그 결과 중앙집단군에는 580대의 전차·구축전차·돌격포만 남았고, 제9군 전선은 1km당 143명의 병력으로 방어되었다.

스타프카는 1944년 4월 28일까지 6~8월 작전 일정을 확정했다. 르보프와 야시-키시네프 방면 공세는 적의 강력한 기동 병력 때문에 배제되고, 루마니아·카르파티아 방면,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발트해를 겨냥하는 공세, 발트해 공세, 벨라루스 공세 등 네 가지 안이 검토되었다. 앞의 두 안은 지나치게 야심적이고 측면 공격에 노출된다는 이유로, 세 번째 안은 적이 너무 잘 준비되어 있다는 이유로 기각되었고, 벨라루스 공세만이 안전한 선택으로 남았다. 스타프카의 5월 31일 지령은 종전의 과대한 목표와 달리 각 전선의 당면 과제를 48~64km, 최종 목표를 160km 이내로 제한했다.

양측 병력과 기만

스타프카는 약 167만 명의 전투·지원 병력, 32,718문의 포와 박격포, 5,818대의 전차·돌격포, 7,799대의 항공기를 투입했다. 중앙집단군의 전투 병력은 486,000명(지원 병력 포함 849,000명)이었고, 야포 3,236문, 가동 가능한 전차·돌격포 495대, 항공기 920대(가동 602대)를 보유했다. 중앙집단군은 기동예비군이 심각하게 부족해, 기동력을 상실한 제14보병사단이 유일한 실질적 예비 부대였고 제20기갑사단(전차 56대)이 보브루이스크 남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벨라루스의 비교적 고정된 전선 덕분에 독일군은 여러 겹의 참호와 지뢰 지대를 갖춘 견고한 야전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소련군의 마스키로프카(기만)는 이중 기만이었다. 소련군은 르보프-프셰미실 지역에 4개 전차군을 남겨 두고 독일군이 이를 알도록 방치했다. 남부에 대한 공세는 독일군의 관심을 루마니아와 남부 폴란드에 묶어 두었고, 기동예비군이 없는 중앙집단군을 타격하면 중앙 지역의 위기가 독일군 기갑 병력을 폴란드와 루마니아에서 벨라루스로 북상하게 만들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실제로 소련의 야전 서열은 주공이 비스와강 방면임을 보여준다. 르보프-프셰미실 작전에는 근위전차군단 6개 등 전차·기계화 군단 12개와 기계화 군단 5개가 배속된 반면, 바그라티온 작전의 발트해·벨라루스 전선에는 전차·기계화 군단 8개가 배정되었다. 바그라티온·발트해·우크라이나 작전에 배정된 54개 대전차연대 가운데 38개가 제1우크라이나 전선에 주어졌다. 벨라루스 방어선 뒤에서는 소련 파르티잔이 6월 19일부터 철도와 통신 시설을 공격했다.

1단계: 전술적 돌파

작전은 단계적으로 개시되었다. 파르티잔의 배후 공격이 6월 19~20일에 시작되었고, 6월 21~22일 밤 붉은 군대는 국방군 전선에 정찰성 공격을 가하는 한편 통신선을 폭격했다. 주공세는 6월 22일 새벽 전례 없는 규모의 포격과 함께 시작되어 대부분의 지점에서 즉시 돌파구를 열었다. 비텝스크-오르샤 방면에서 제1발트 전선과 제3벨라루스 전선은 비텝스크 돌출부의 남북에서 방어선을 끊고 도시를 포위했다. 제53군단은 탈출을 시도했으나 6월 29일 비텝스크가 함락되면서 28,000명이 전투서열에서 제거되었다. 오르샤는 6월 26일 해방되었다.

중앙 구역에서는 제2벨라루스 전선이 제4군을 모길레프 부근에 묶어 두는 동안 제3벨라루스 전선이 모스크바-민스크 도로를 겨냥했다. 6월 22일의 포격으로 방어진지와 벙커가 파괴되었고, 제11근위군 등이 첫 방어선을 돌파했다. 제4군 사령관 팁펠스키르히는 6월 25일 철수를 요청했으나 거부되자 독단으로 드네프르강으로 후퇴를 지시했다가 집단군 사령관 부시에게 번복당했다. 부시는 6월 26일 히틀러에게서 베레지나강까지 후퇴를 허가받았으나 응집된 전선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남쪽 보브루이스크에서는 로코솔롭스키가 두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계획을 밀어붙여 관철시켰고, 6월 24일 제1벨라루스 전선의 7,000문의 화포가 제9군을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파리치 방면의 기병-기계화 집단이 슬루츠크를 점령해 제9군의 퇴로를 끊었고, 제65군이 6월 29일 보브루이스크를 함락시키면서 제9군은 섬멸되었다. 부시는 6월 28일 해임되고 모델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2단계: 중앙집단군 격멸

두 번째 단계의 핵심 목표는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 민스크였다. 6월 28일부터 제3벨라루스 전선의 제5근위전차군 등이 베레지나 강 도하 지점을 확보했고, 남쪽에서는 제1벨라루스 전선이 포위의 아래쪽 집게를 닫았다. 제2근위전차군단이 7월 3일 새벽 민스크에 진입했고, 이튿날까지 시내의 독일군 후위 부대가 소탕되었다. 제5근위전차군과 제65군이 민스크 서쪽에서 포위를 완성해 독일 제4군 전부와 제9군 잔여 병력을 가두었다. 민스크 동쪽 포위망에는 약 10만 명의 병력이 있었으나 그중 극히 일부만이 탈출했다. 1944년 6월 22일부터 7월 4일 사이에 중앙집단군은 25개 사단과 30만 명을 잃었고, 이후 몇 주 동안 독일군은 10만 명을 더 잃었다. 폴로츠크도 7월 4일까지 소련군에 의해 정리되었다.

3단계: 북부와 폴란드 방면

독일군 저항이 거의 붕괴하자 스타프카는 민스크를 넘어 진격하라는 새 목표를 내렸다. 1발트 전선은 7월 5일~31일 샤울랴이 공세로 리가만 연안에 도달했고, 8월 독일군의 되찾기 시도는 실패했다. 제3벨라루스 전선은 7월 8일 빌뉴스를 포위했고 시가전 끝에 7월 13일 도시를 함락시켰다. 제2벨라루스 전선은 7월 27일 비아위스토크를, 제1벨라루스 전선은 7월 24일 루블린을, 7월 28일 브레스트를 점령하고 8월 2일까지 비스와강 도하 지점을 확보했다. 이로써 작전은 사실상 마무리되었고, 이후 여름은 도하 지점에 대한 독일군 반격을 막는 방어전에 쓰였다. 카우나스는 7월 31일 소련군 통제 아래 들어갔고, 나레프 강을 따라 독일군이 방어선을 안정시킨 것은 1945년 1월 동프로이센 공세까지 이어졌다.

결과와 비용

붉은 군대는 벨라루스를 되찾고 일부 발트해 연안과 폴란드 영토로 진격했다. 진격하는 소련군이 발견한 도시들은 파괴되었고 마을은 인구가 사라졌으며 주민 대부분은 점령자에 의해 학살되거나 강제 이주되었다. 민스크 동쪽 포위망에서 잡힌 약 57,000명의 독일군 포로는 모스크바 시가를 행진했는데, 이는 이후 '패배자들의 행진'으로 불렸다. 독일 육군은 이 시기에 잃은 물자와 병력을 결코 회복하지 못했으며, 동부 전선 병력의 약 4분의 1을 상실해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손실률(약 17개 사단)을 넘어섰다. 독일 측 자료에 따르면 중앙집단군은 27개 사단이 심하게 타격을 받아 19개가 해체되고 7개가 2개 사단으로 통합되었다. 관련된 독일 사단장·군단장 47명 가운데 31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독일군의 정확한 손실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최근 연구는 사망·실종·부상 약 40만~54만 명으로 추산한다. 소련군의 손실도 컸다. 전사·실종 180,040명, 부상·병사 590,848명과 함께 전차 2,957대, 야포 2,447문, 항공기 822대를 잃었다. 독일 측 근거는 사단 규모 손실을 세분해 제시하지만 전투원 수치의 정확도에는 논쟁이 있으며, 러시아 측 수치는 전선별 집계를 바탕으로 한다. 미군이 공여한 22만 대 이상의 트럭과 스터드베이커 차량이 소련 보병 기계화에 기여했다는 지적도 있다. 이 작전으로 북부집단군과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은 서로 갈라지고 예비 전력을 중앙으로 빼앗겼으며, 이후의 소련군 공세에 직면해 소련 영토에서 훨씬 빠르게 철수해야 했다. 바그라티온 작전의 종료는 노르망디의 팔레즈 포위망에서 서부전선 독일군 정예 부대가 소멸한 시점과 겹쳤다. 230만 명이 참여한 이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최대 규모의 소련 작전 가운데 하나로, 소련 선전에서는 스탈린의 '10대 타격' 가운데 하나로 선전되었다.

폴란드 지하군과의 충돌

바그라티온 작전 중에는 폴란드 지하군의 여러 저항 조직도 싸웠다. 일부 지하군 파르티잔 부대는 소련을 더 큰 위협으로 보고 독일 점령군과 휴전이나 임시 동맹을 맺었는데, 지하군 지도부는 이런 거래를 비난했고 독일군과 협력한 장교들은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 지하군은 '폭풍 작전' 계획에 따라 진격하는 소련군을 지원하고 독일군을 공격했다. 이 계획은 전술적으로 붉은 군대와 협력하면서 폴란드 민간 권력이 지하에서 나와 연합국 통제 지역에서 권력을 잡는 것이었다. 독일군과의 협력 뒤에 소련군이 지하군 부대를 공격하면서 계획은 실패했다. 많은 폴란드 지하군 병사들이 전사했고, 소련이 통제하는 폴란드 인민군에 징집되거나 살해, 투옥, 추방되었다.

명칭

작전의 암호명은 1812년 조국전쟁의 영웅 표트르 바그라티온(1765?~1812)에게서 따왔다. 그는 러시아 제국 보병대장이자 2서부군 총사령관이었다. 그의 출생 연도와 출생지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차이가 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comprehensive article: codename, dates (22 June – 19 August 1944), destruction of 28 divisions of Army Group Centre, role of Soviet deep battle and maskirovka, naming after Pyotr Bagration, Stavka planning process
  2.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article: названа в честь генерала П. И. Багратиона, разгром группы армий «Центр», ход операции, соотношение сил
  3. the-past.com Military History Matters: 23-day offensive, 400–500 km advance, 381,000 German killed and 158,480 captured, the greatest offensive in world history with 3.5 million men, 7,000 tanks, 9,000 aircraft
  4. 위키백과 (영문)
  5. 위키백과 (러시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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