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를레앙파
Orléanists
1830년 7월 혁명으로 즉위한 오를레앙가의 루이 필리프와 그 후손을 받드는 입헌군주정을 지지한 프랑스 정치 세력. 7월 왕정(1830~1848)의 지배 세력으로 은행가와 대산업가, 대상인과 이어져 있었고, 제2공화국에서는 정통왕조파와 함께 질서당의 다수를 이루었다. 마르크스는 이들을 금융귀족과 대산업, 곧 자본의 정치적 대표로 보았다.
상세
1830년 7월 샤를 10세의 권위주의적 칙령에 맞선 「영광의 3일」 혁명이 일어나자, 하원은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를 「프랑스인의 왕」으로 뽑았다. 샤를 10세에 맞선 자유주의 반대파인 독트리네르가 이를 강하게 밀었고, 8월 14일 하원이 승인한 새 헌장이 오를레앙파의 사실상의 강령이 되었다. 의회 중심의 입헌군주정이었다. 오를레앙파는 하원 안에서 티에르의 중도좌파와 기조의 중도우파로 나뉘었고, 루이 필리프는 기조 쪽에 기울며 은행과 산업, 금융의 「새 사람들」과 가까워져 「부르주아 왕」이라 불렸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가 물러나자 오를레앙파는 왕좌를 잃었지만, 18년 통치 동안 법조계와 언론, 대학, 학술원, 특히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단단한 기반을 남겼다. 제2공화국에서 이들은 티에르가 이끄는 질서당의 다수를 이루었다. 가장 열성적인 오를레앙파는 1852년 대통령 선거에 루이 필리프의 셋째 아들 주앵빌 공을 내세우려 했다.
오를레앙파는 1870~1871년 제2제정이 무너진 뒤 다시 살아났다. 1871년 2월 선거에서 왕당파가 이겼는데, 그 가운데 오를레앙파가 214석, 정통왕조파가 182석이었다. 두 당파는 자식 없는 샹보르 백작을 왕으로 받들고 루이 필리프의 손자 파리 백작을 그 후계자로 삼는 「융합」에 합의했다. 융합파는 브로이 공작의 지도 아래 1873년 마크마옹을 대통령으로 세우고 왕정복고를 준비했지만, 샹보르 백작이 삼색기를 거부해 계획은 무너졌다. 1883년 샹보르 백작이 죽었을 때는 이미 왕정에 대한 열기가 식어, 파리 백작은 끝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 뒤 오를레앙파 상당수는 온건 공화파로 넘어갔고, 오늘날에도 악시옹 프랑세즈가 나름의 오를레앙주의를 내세운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오를레앙가 아래서는 고급 금융, 대공업, 대상업, 곧 자본이 변호사·교수·달변가의 무리를 거느리고 다스렸다」고 썼다. 그는 두 왕당파가 왕가에 대한 애착 때문에 갈라선다고 서로 믿게 하려 했지만, 「뒷날의 사실이 증명한 것은 오히려 그들의 갈라진 이해가 두 왕가의 결합을 가로막았다는 것이었다」고 보았다. 또 볼테르주의를 따르던 자유주의 부르주아인 오를레앙파가 공화국에서는 숙적인 예수회에 프랑스 정신의 관리를 맡겼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