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공사
People’s commune
대약진 시기인 1958년 여름 농업생산합작사를 통합해 만든 농촌의 대규모 집단 조직으로, 평균 5천 가구 규모에서 생산·행정·민병·교육을 한 단위로 묶었다. 공동식당과 「공급제」 분배, 사유 텃밭의 폐지, 대규모 수리·철강 노동 동원이 특징이었고 국가 징발의 단위가 되어 대기근을 키웠다. 1962년 이후 생산대를 기본 회계 단위로 낮추어 유지되다 1983년 농가생산책임제로 해체되었다.
상세
인민공사는 허난 등에서 자생적으로 시작된 합작사 통합을 마오가 1958년 8월 「인민공사는 좋다」고 칭찬하고 베이다이허 회의가 결의하면서 몇 달 만에 전국 농촌의 99%로 퍼졌다. 공산주의로의 지름길이라는 선전 아래 공동식당에서 마음껏 먹게 하고, 노동은 군대식으로 편성되었으며, 농민의 가축·농기구·주택까지 공유화되기도 했다.
1958~1959년의 수확 과장 보고는 국가 징발량을 높였고, 공사가 곡물을 통제하는 구조는 농민이 스스로 식량을 지킬 수단을 없앴다. 공동식당의 낭비와 이후 식량 고갈, 수리·철강 동원으로 인한 수확 방치가 겹쳐 1959~1961년 대기근이 일어났다. 1960년 말부터 「12조」와 1962년 「60조」로 사유 텃밭과 생산대 회계가 복원되었다.
축소된 인민공사는 이후 20년 동안 농촌의 기본 단위로 남아 다자이 모델의 무대가 되었다. 1978년 이후 안후이·쓰촨의 농가 청부 실험이 확산되면서 1983년 중앙 문건으로 정사분리(政社分離)가 결정되어 향 정부가 행정을 맡고 공사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