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za Accord / プラザ合意 · 1985.09.22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발표되었다. 달러 하락을 멈추기로 한 1987년 2월 22일의 루브르 합의가 그 뒤를 이었다.)

플라자 합의

Plaza Accord

1985년 9월 22일 미국·일본·서독·프랑스·영국 다섯 나라(G5)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외환시장에 함께 개입해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기로 한 합의. 지나치게 오른 달러와 미국의 무역 적자, 특히 대일 적자를 줄이려는 것이었다. 합의 뒤 엔화 가치가 1년 만에 달러당 240엔 안팎에서 150엔대로 크게 올라, 일본의 엔고 불황과 그 뒤의 금융 완화, 거품경제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세

1980년대 전반 미국에서는 연방준비제도 의장 폴 볼커의 강한 긴축 통화정책과 레이건 정부 1기(1981~1984)의 확장 재정이 겹쳐 장기 금리가 오르고 해외 자본이 몰려들었다. 그 결과 1980~1985년 달러는 엔·마르크·프랑·파운드에 견주어 약 50% 올랐다. 비싼 달러는 금융업에는 이득이었으나 미국 제조업과 농업을 어렵게 했고,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국내총생산의 3.5%에 이르렀다. 곡물 수출업자, 자동차 산업, 캐터필러 같은 중공업, IBM·모토로라 같은 첨단 기업이 외국 경쟁에서 보호해 달라는 운동을 벌였고, 1985년에는 의회가 보호무역 법안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무역 제한을 피하려고 백악관은 협상에 나섰다.

처음 레이건 정부는 강한 달러를 미국 경제에 대한 신임으로 보고 외환 개입을 꺼렸다. 1985년 1월 제임스 베이커가 재무장관이 되면서 방향이 바뀌었다. 그해 7·8월 G5 차관급의 준비 회의를 거쳐, 9월 22일 플라자 호텔에서 다섯 나라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만났다. 참석자는 미국 재무장관 베이커, 영국 재무장관 나이절 로슨, 서독 재무장관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 프랑스 경제재정장관 피에르 베레고부아, 일본 대장대신 다케시타 노보루였다. 내용은 미리 실무자 협의에서 정해져 있어 회의 자체는 20분 남짓한 형식적인 자리였다고 한다.

발표문은 미국의 큰 경상 적자와 일본, 그리고 그보다는 덜한 서독의 큰 경상 흑자가 불안정한 대외 불균형을 낳았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환율이 경제의 기초 여건을 더 잘 반영해야 한다며, 「달러에 대한 주요 비달러 통화의 추가적인 질서 있는 절상이 바람직하다」고, 도움이 될 때는 더 긴밀히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나라마다 약속도 붙였다. 미국은 재정 적자를 줄이겠다고 했고, 일본은 시장 개방, 규제 완화, 「엔 시세에 유의한 탄력적 통화정책」, 금융시장 자유화, 소비자 신용과 주택 담보 대출 시장을 넓혀 민간 소비와 투자를 늘리는 내수 확대를 약속했다.

시장의 반응은 빨랐다. 발표 다음 날인 9월 23일 하루 사이 달러당 엔 시세는 235엔에서 약 20엔 떨어졌고, 한 번 움직인 시장은 가속하여 1년 뒤에는 150엔대에서 거래되었다. 합의 뒤 다케시타가 「달러당 190엔이라도 괜찮다」고 말하자 엔고가 더 빨라졌다. 공동 개입은 목표 방향을 미리 알려 시장 참가자의 투기를 끌어들이므로 그 힘이 컸다. 그러나 일본은행은 바로 금리를 내리지 않고 오히려 단기 금리를 높게 두었다가, 1986년이 되어서야 공정 보합(기준 금리)을 내리기 시작했다.

엔고는 수출에 기대던 일본 경제를 흔들었다. 성장률은 1985년 5.2%에서 1986년 3.3%로 떨어졌고, 「엔고 불황」이 왔다. 정부는 내수 확대로 돌아섰고, 일본은행은 1986~1987년 공정 보합을 잇달아 내려 2.5%까지 낮췄다. 남는 돈은 부동산과 주식으로 흘러 거품경제를 낳았다. 엔고로 일본 기업은 「반값 세일」이라 불린 미국 자산을 사들였고, 임금이 싼 동남아시아로 공장을 옮겨 그 지역의 고도성장을 거들었다.

정작 대일 무역 적자는 크게 줄지 않았다. 달러 하락은 서유럽에 대한 미국의 적자는 줄였으나, 일본 시장의 구조적 수입 제한 탓에 대일 적자는 거의 그대로였다. 그래도 의회는 합의 뒤 보호무역 법안을 미루었다. 1987년 무렵 달러는 다른 통화에 견주어 25% 넘게 떨어졌고, 미국은 국채를 외국에 팔아야 하는 처지에서 자본 유입이 끊길까 걱정하게 되었다. 1987년 2월 22일 여섯 나라는 파리 루브르 궁에서 「현재 수준 근처에서 환율을 안정시킨다」는 루브르 합의를 맺어 달러 하락을 멈추려 했다.

플라자 합의가 일본 거품과 그 뒤의 장기 침체를 불렀는지는 논쟁거리다. 일본에서는 합의를 「잃어버린 10년」에서 「잃어버린 30년」으로 이어진 장기 침체의 출발점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나카소네 총리·다케시타 대장대신·스미타 일본은행 총재의 결단을 미국 요구를 전면 받아들인 대미 타협으로 보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반면 경제학자 제프리 프랭컬은 시기가 맞지 않는다고 본다. 엔이 오른 것은 1985~1986년이고 불황은 1990년대인데, 그 사이 1987~1989년의 거품기에는 환율이 더는 엔을 밀어 올리지 않았다. 마르크도 크게 올랐지만 서독에는 거품도 불황도 오지 않았다. 리하르트 베르너는 합의 같은 외부 압력이나 대장성의 금리 인하 요구만으로는 거품을 낳은 일본은행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 쪽에서는 이 합의를 세계 제조업 경쟁의 한 장면으로 읽는다. 로버트 브레너의 해석을 소개한 월든 벨로에 따르면, 레이건 정부는 노조를 꺾어 임금을 누르고, 고금리로 자본을 끌어들이고, 플라자 합의로 엔을 크게 올려 미국 제조업의 우위를 되찾았다. 벨로는 플라자 합의가 본질적으로 일본과 서독이 미국 산업을 구해 준 구제 작업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일본과 서독의 오랜 불황은 미국 수출품을 사 줄 힘을 깎았고, 클린턴 정부는 1990년대 중반 달러 강세를 허용하는 「역플라자 합의」로 일본 제조업을 도왔다. 벨로에 따르면 이 역플라자 합의는 달러에 통화를 묶은 동아시아·동남아시아 경제의 경쟁력을 떨어뜨려 1997~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배경이 되었다. 1999년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 실린 브레너 서평도 플라자 합의 뒤 일본이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려 일부러 느슨한 통화정책을 펴 거품경제를 낳았다고 정리했다.

플라자 합의는 오늘날에도 교훈으로 거론된다. 2018년 미중 무역전쟁이 시작되자 중국에서 이 합의가 다시 주목받았다.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 등 일본 인사들이 위안화 절상을 요구하는 미국 압력에 응하지 말라고 조언한 것이 반향을 불렀고, 국영 신화통신은 「플라자 합의로 미국에 굴복한 일본의 경제 침체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g7.utoronto.ca
  3. ja.wikipedia.org
  4.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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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g7.utoronto.ca
  7. thenation.com
  8.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