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édition de Quiberon · 1795.6–7

키브롱 상륙 (1795)

Quiberon expedition (1795)

1795년 6월 27일 영국 함대가 브르타뉴 키브롱반도의 카르나크에 프랑스 망명군 3,500명을 상륙시켜 슈앙과 방데의 봉기를 되살리고 왕정을 복고하려 한 원정. 퓌자예와 데르빌리의 지휘권 다툼으로 기습의 이점을 잃었고, 오슈의 반격으로 7월 21일 항복했다. 포로 6,000여 명 가운데 망명 귀족 솜브뢰유를 비롯한 748~750명이 군사위원회의 판결로 오레에서 총살되었다.

상세

1794년 영국으로 건너간 조제프 드 퓌자예는 아르투아 백작과 수상 피트를 설득해 브르타뉴에 4만 명의 군대가 있다고 주장하며 원정을 얻어 냈으나, 영국은 배와 장비만 주고 병력은 주지 않았고 프로방스 백작 쪽 대리인은 데르빌리 백작을 지휘관으로 세우려 했다. 6월 23일 워런과 후드가 지휘하는 함대가 망명군 두 개 사단 3,500명과 4만 명분 무기·군복·식량을 싣고 출항했고, 빌라레조와이외즈의 브레스트 함대는 그루아섬 앞에서 전열함 두 척을 잃고 물러났다. 6월 26일 함대가 키브롱 앞에 닻을 내렸을 때 데르빌리가 임명장을 꺼내 총지휘권을 주장했고, 즉시 공격하려는 퓌자예와 반도를 요새화하려는 데르빌리의 다툼으로 하루를 잃었다. 6월 27일 카르나크에 상륙한 망명군은 카두달이 모은 슈앙 수천 명과 합류했고, 7월 3일 「상퀼로트 요새」로 불린 팡티에브르 요새가 항복했다.

반에 있던 오슈는 2,000명으로 출발해 7월 4일까지 1만 3천 명을 모았고, 7월 6일 카르나크를 되찾아 7일 반도를 거의 봉쇄했다. 7월 10~11일 슈앙 두 종대가 영국 군복을 입고 배로 후방에 상륙하려 했으나 한 종대는 흩어졌고, 탱테니아크와 카두달의 종대는 파리 왕당파 기구의 지시로 생브리외 쪽으로 돌려졌다가 탱테니아크가 7월 18일 매복에 죽었다. 7월 15일 솜브뢰유의 망명군 2,000명이 증원되었으나 16일 공격은 실패했고 데르빌리가 치명상을 입었다. 7월 20일 밤 폭풍 속에 오슈가 팡티에브르 요새를 공격하자 망명군에 편입되었던 공화국군 포로들이 요새를 넘겼고, 퓌자예는 영국 기함으로 철수해 2,500명이 영국 보트로 빠져나갔다. 7월 21일 아침 솜브뢰유가 항복했다. 포로 6,332명 가운데 여자와 아이는 풀려났으나 탈리앵이 기소를 맡아 솜브뢰유와 동료 750명이 오레에서 총살되었고, 그중 430명이 귀족이었다. 솜브뢰유가 처형 전날 퓌자예의 도주를 비난한 편지는 슈앙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모르비앙의 장교 회의는 퓌자예에게 궐석 사형을 선고했다. 뒤이어 8월 영국 함대와 아르투아 백작이 방데 앞바다로 왔으나 일되외섬에 머물다 10월 돌아갔고, 샤레트는 키브롱의 처형에 대한 보복으로 8월 9일 벨빌의 공화국군 포로 100~300명을 처형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fr.wikipedia.org
  3. fr.wikipedia.org
  4.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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