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혁명운동 (칠레)
Revolutionary Left Movement (Chile)
1965년 콘셉시온 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사회당 청년 이탈파, 트로츠키주의자, 마오주의자, 아나키스트가 모여 만든 칠레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 쿠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선거를 통한 「평화적 길」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로 노동자·농민 정부를 세우겠다고 했다. 1967년부터 미겔 엔리케스가 이끌었다. 인민연합에는 들지 않았지만 아옌데 정부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며 토지·공장 점거와 「인민 권력」을 조직했고, 쿠데타 뒤 무장 저항의 중심이 되어 군사정권의 집중 탄압을 받았다.
상세
MIR의 창립 대회는 산티아고의 한 아나키스트 노조 회관에서 100명이 채 안 되는 사람으로 열렸고, 「봉기의 길로 권력을 장악한다」는 정치·군사 테제를 채택했다. 사회당에서 쫓겨난 엔리케스 형제와 바우티스타 반 스하우번 등 콘셉시온의 젊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가장 큰 무리였다. 엔리케스는 이후 2년에 걸쳐 여러 사상 경향이 섞인 조직을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으로 다졌고, 1969년에는 콘셉시온의 라디오 방송국을 점거해 무장봉기를 호소하고 은행 지점을 습격하는 등 직접 행동에 나섰다.
1970년 아옌데가 당선되자 MIR 지도부는 무장 활동을 멈추고 지하에서 나왔다. 정부를 비판하면서도 지지하는 태도를 정하고, 혁명농민운동(MCR), 혁명노동자전선(FTR), 혁명빈민전선(FPR) 같은 대중 전선을 통해 세력을 넓혔다. 남부 카우틴 지방에서는 마푸체 공동체와 함께 옛 경계를 되찾는 「울타리 옮기기」를, 산티아고에서는 「누에바 아바나」 같은 빈민 정착지를 조직했다. 1973년 절정기에 구성원과 동조자는 약 1만 명이었다. MIR은 법 안의 개혁을 앞세운 공산당과 노조와 대학에서 경쟁했고, 사회당 좌파와 함께 인민연합의 급진파 쪽에 섰다.
엔리케스는 1972년부터 쿠데타가 다가온다고 경고했고, 탕케타소 뒤에는 조직의 무장 역량을 대통령 경호에 내놓겠다고 했다. 그러나 9월 11일 당원들은 무기와 지시를 기다리다 흩어졌다. 쿠데타 뒤 MIR 지도부는 대사관 망명을 배신으로 여기며 지하에 남아 저항했으나, 1974년 10월 엔리케스가 DINA에 사살되는 등 지도부 다수가 죽거나 실종되었다. 1980년대 말 노선 분열을 거쳐 1990년 이후 대부분의 활동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