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09.04–1973.10.22

칠레 인민연합 정부와 1973년 쿠데타

1970년 선거로 집권한 아옌데의 인민연합 정부는 헌법의 틀 안에서 사회주의로 가겠다며 무엇을 바꾸었고, 왜 3년 만에 경제 위기와 정치적 고립에 빠졌나? 미국은 이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무엇을 했으며, 기밀 해제 문서가 확인하는 것과 확인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1973년 9월 11일의 쿠데타와 그 직후의 탄압은 어떻게 벌어졌나?

1970년 9월 대선에서 살바도르 아옌데의 인민연합이 36.6%로 1위를 차지했고, 의회의 선출을 거쳐 11월 취임했다. 정부는 구리 국유화와 농지 개혁, 주요 기업 국유화로 「칠레식 사회주의」를 추진했다. 첫해 호황 뒤 재정 적자와 물가 폭등, 물자 부족이 닥쳤고, 미국은 신용 차단과 야당 비밀 지원으로 압박했다. 1972년 10월 파업과 1973년 6월 탕케타소를 거쳐 9월 11일 피노체트 등 군 지휘관들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아옌데는 라 모네다에서 숨졌다. 군사평의회는 경기장 수용소와 「죽음의 캐러밴」으로 좌파를 탄압했다.

칠레1970년 칠레 대선에서 인민연합은 어떻게 이겼나?

1960년대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드물게 선거와 의회 정치가 오래 이어진 나라였다. 1964년 대선에서는 기독민주당의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가 「자유 속의 혁명」을 내걸고 당선되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좌파 후보 살바도르 아옌데의 당선을 막으려고 이 선거에 300만 달러 가까이를 썼다고 훗날 미국 상원 처치 위원회가 밝혔다. 프레이 정부는 외국 기업이 소유한 대형 구리 광산의 지분 51%를 사들이는 「구리의 칠레화」와 농지 개혁을 시작했지만, 개혁이 너무 느리다는 좌파와 너무 멀리 갔다는 우파 양쪽의 불만을 샀다. 1969년 10월 칠레 사회당, 칠레 공산당, 급진당, 기독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온 MAPU 등 좌파 정당이 인민연합을 만들었고, 세 번 대선에서 진 사회당의 아옌데가 네 번째로 후보가 되었다. 1 2 3 4

1970년 9월 4일 대선은 세 후보의 싸움이었다. 아옌데가 36.6%, 국민당이 민 전 대통령 호르헤 알레산드리가 35.3%, 기독민주당의 라도미로 토미치가 28.1%를 얻었다. 아옌데와 알레산드리의 차이는 약 3만 9천 표에 지나지 않았다.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의회가 상위 두 후보 가운데 대통령을 고르는 것이 칠레 헌법의 절차였다. 캐스팅 보트를 쥔 기독민주당은 아옌데에게 언론과 교육의 자유, 군의 직업적 독립 등을 헌법에 못 박는 「헌법 보장 조례」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아옌데가 이를 받아들이자 10월 24일 의회는 153 대 35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고, 아옌데는 11월 3일 취임했다. 선거로 집권한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칠레 안팎에 큰 충격을 주었다. 5 6 7

인민연합의 강령은 「칠레식 사회주의」, 곧 무장 봉기가 아니라 기존 헌법과 법률의 틀 안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내세웠다. 아옌데는 대부르주아지의 힘이 제도가 아니라 경제력과 자본주의 소유 관계에서 나온다고 보고, 그 경제적 기반을 바꾸겠다고 했다. 정부 계획의 세 기둥은 구리 국유화, 농지 개혁의 확대, 그리고 은행·산업·유통의 주요 독점 기업을 묶은 「사회적 소유 영역」의 창설이었다. 의회에서 소수였던 정부는 1932년 짧게 존재한 「칠레 사회주의 공화국」 시절의 법령 520호처럼 잊혀 있던 법 조항을 찾아 기업을 국가 관리 아래 두었다. 이 방식은 신속했지만, 야당과 사법부는 이것을 법의 편법적 이용이라고 공격했고 합법성 논쟁은 이후 3년 내내 이어졌다. 8 9

미국칠레미국 정부는 아옌데의 취임을 어떻게 막으려 했나?

1970년 9월 15일 닉슨 대통령은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 미첼 법무장관과 함께 리처드 헬름스 CIA 국장을 불렀다. 헬름스가 그 자리에서 적은 메모는 기밀 해제되어 미국 국무부 외교 문서집에 실렸다. 메모에는 「열에 하나의 가능성일지 모르지만 칠레를 구하라」, 「1천만 달러를 쓸 수 있고 필요하면 더」, 「대사관은 관여하지 말 것」, 「경제가 비명을 지르게 하라」 같은 구절이 있다. 그 전에도 미국 기업 ITT는 알레산드리 진영에 35만 달러를 건넸고, CIA는 아옌데를 공산 독재와 동일시하는 선전전을 벌였다. 키신저는 훗날 1천만 달러가 실제로 다 쓰이지는 않았다고 증언했다. 메모는 대통령의 의지를 보여 주는 1차 사료이지만, 거기 적힌 모든 계획이 그대로 실행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10 11 1

CIA의 공작은 두 갈래였다. 「1트랙」은 프레이 대통령과 의회를 움직여 알레산드리를 뽑게 한 뒤 재선거를 유도하는 정치·경제 압박이었고, 「2트랙」은 대사관에도 알리지 않고 군부 쿠데타를 부추기는 비밀 공작이었다. 10월 16일 CIA 본부가 산티아고 지부에 보낸 전문은 「쿠데타로 아옌데를 무너뜨리는 것이 확고하고 지속적인 정책」이라고 적었다. 걸림돌은 헌법 준수를 고집한 육군 총사령관 레네 슈나이더였다. CIA는 퇴역 장군 로베르토 비오의 무리와 접촉했으나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10월 17~18일 지원을 거절했고, 카밀로 발렌수엘라 장군 쪽에는 22일 기관단총 세 정과 최루탄을 건넸다. 그날 비오 무리가 슈나이더 납치를 시도하다 총을 쏘아 그는 25일 숨졌다. CIA는 이후 비오 무리에 3만 5천 달러를 주었다. 12 7 13 14

여기서 문서가 확인하는 것과 확인하지 않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처치 위원회와 2000년 미 정보기관 보고서(힌치 보고서)는 CIA가 쿠데타를 부추기려 했고 슈나이더 납치를 핵심으로 본 음모 집단들과 접촉했으며 무기를 건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반면 CIA가 슈나이더의 살해를 의도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보았고, 무기는 발렌수엘라 쪽에 건너갔다가 쓰이지 않고 반환되었다. 슈나이더의 죽음은 오히려 군을 헌법 쪽으로 결속시켜 1970년의 쿠데타 계획을 무산시켰다. 아옌데 취임 뒤 키신저는 11월 5일 닉슨에게 칠레가 성공하면 그 「모델 효과가 은밀하게 퍼질 수 있다」고 썼고, 11월 9일 국가안보결정각서 93호는 칠레 정부에 「냉담한 자세」를 취하고 신용을 조이라고 지시했다. 7 1 15 12 16

칠레인민연합 정부는 어떤 개혁을 했나?

가장 큰 상징은 구리 국유화였다. 구리는 칠레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추키카마타와 엘 살바도르 광산은 미국 기업 아나콘다가, 엘 테니엔테 광산은 케니콧이 갖고 있었다. 1971년 7월 11일 의회는 헌법 개정으로 대형 광산 국유화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기독민주당과 우파 국민당까지 찬성했다는 점이 이 정책이 당시 칠레 사회의 폭넓은 합의였음을 보여 준다. 논란은 보상에 있었다. 아옌데는 외국 기업이 오랫동안 정상 수준을 넘는 「초과 이윤」을 가져갔다며 그만큼을 보상금에서 빼도록 했고, 그 결과 주요 광산 기업은 사실상 보상을 받지 못했다. 미국 기업은 국제 법정과 외국 법원에서 칠레산 구리의 압류를 시도했고, 미국 정부는 이것을 칠레에 대한 신용 차단의 명분으로 삼았다. 3 17 8

농지 개혁은 프레이 정부가 만든 법을 그대로 쓰되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인민연합 정부는 일정 규모가 넘는 대농장(푼도)을 모두 수용하려 했고, 칠레 농지 개혁 전 기간에 걸쳐 농지의 약 59%가 재분배되었다. 남부에서는 마푸체 공동체가 옛 땅을 되찾으려는 운동에 나섰고, 정부가 따라가지 못하는 속도로 농민과 좌파 활동가들이 농장을 점거하는 일도 잦았다. 한편 정부는 은행과 대기업을 국가 관리로 넘겨 「사회적 소유 영역」을 넓혔고, 아이들에게 하루 우유 반 리터를 무상으로 주는 사업, 보건과 교육 확대, 임금 인상을 추진했다. 1971년에는 영국 사이버네틱스 학자 스태퍼드 비어와 함께 국영 기업의 생산 자료를 실시간으로 모아 계획에 쓰려는 「사이버신」 계획도 시작했다. 4 8 18

첫해의 성적은 좋았다. 1971년 국내총생산은 8.3%, 공업 생산은 약 14% 늘었고, 실업률은 3.8%까지 내려갔으며, 물가 상승률은 35% 안팎에서 20%대로 떨어졌다. 임금 인상과 가격 통제로 노동자의 실질 소득이 크게 늘었다. 1971년 4월 지방선거에서 인민연합 정당들은 49.7%를 얻어 대선 때보다 크게 지지를 넓혔다. 같은 해 11월에는 피델 카스트로가 3주 넘게 칠레를 돌며 연설했다. 그러나 이 성장은 대부분 놀고 있던 설비를 돌려 소비를 늘린 결과였고, 투자는 줄고 있었다. 정부 안에서도 경기 과열과 재정 적자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정치적 지지를 넓히려면 분배를 앞세워야 한다는 판단이 우세했다. 8 9 2

칠레미국칠레 경제는 왜 1972년부터 무너졌나?

1972년부터 숫자가 뒤집혔다. 공공 부문 적자는 국내총생산 대비 1970년 1.4%에서 1973년 22.9%로 불어났고, 정부는 부족분을 중앙은행 발권으로 메웠다. 외환보유액은 1970년 말 약 3억 9400만 달러에서 1971년 말 1억 6300만 달러로 줄었다. 물가 상승률은 1972년 225%, 1973년 600%를 넘었다는 수치가 흔히 인용되지만, 이 수치는 연평균인지 특정 시점의 전년 대비 상승률인지 밝히지 않는다. 세계은행 보고서 『Chile: An Economy in Transition』(1980)이 집계한 연평균 상승률은 1971년 22%, 1972년 77.8%, 1973년 1~9월 188.1%다. 공식 가격과 실제 가치가 벌어지자 생필품이 상점에서 사라지고 암시장이 퍼졌으며, 정부는 동네 단위의 「물자공급·가격위원회(JAP)」로 배급과 가격 감시를 맡겼다. 같은 시기 칠레 수출의 중심인 구리의 국제 가격이 떨어졌다. 줄을 서는 일상과 물자 부족은 중간층과 상인, 화물 운송업자를 정부에 등 돌리게 했고, 1971년 12월 1일 빈 냄비를 두드리며 행진한 여성들의 「빈 냄비 행진」은 야당 동원의 상징이 되었다. 8 9 19

위기의 원인은 지금도 두 갈래로 설명된다. 한쪽은 정부 정책 자체를 원인으로 본다. 단기 수요를 부풀린 임금 인상과 가격 통제, 발권으로 메운 적자, 수용과 점거로 무너진 투자와 생산이 물가 폭등과 물자 부족을 불렀다는 것이다. 다른 쪽은 외부 압박을 강조한다. 미국은 국가안보결정각서 93호에 따라 양자 원조를 끊고 세계은행·미주개발은행의 신규 차관을 막았으며, 처치 위원회에 따르면 CIA는 1970~1973년 야당 정당과 언론에 약 800만 달러를 비밀리에 댔다. 그 가운데 우파 신문 《엘 메르쿠리오》에만 70만 달러가 넘게 들어갔다. 프랑스 학자 크리스티앙 들루아는 1972년 칠레로 가기로 되어 있던 2억 7천만 달러 가운데 3200만 달러만 들어왔다고 집계했다. 두 설명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정책의 무리와 미국의 압박이 겹쳐 위기를 키웠다고 보는 연구가 많다. 8 1 12 11

소련의 역할은 더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전 KGB 문서관리원 바실리 미트로힌이 서방으로 가져온 자료에 따르면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아옌데에게 개인 보조금을 주었고 칠레 공산당에도 자금을 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미트로힌의 기록에 근거한 주장이며, 미국 측 문서처럼 원문이 공개되어 검증된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소련이 칠레를 「제2의 쿠바」로 떠받칠 만큼 큰 경제 지원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칠레의 위기는 미소 냉전의 대리전이라기보다, 미국의 적극적 압박과 소련의 소극적 관망 사이에서 국내 정치가 극단으로 치달은 결과였다. 8 20

칠레1972년 10월 파업은 칠레 정치를 어떻게 바꾸었나?

1972년 10월 남부 아이센주의 화물차 운송업자들이 국영 운송 회사 설립 계획에 반대해 파업을 시작했다. 10월 9일 전국화물차연맹이 무기한 파업을 선언했고, 상인과 전문직 단체, 일부 노조와 기독민주당·국민당이 가세하면서 파업은 정부 퇴진 운동으로 커졌다. 12일부터 도로가 막혔고 정부는 18개 주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극우 단체 「조국과 자유」는 도로에 못(미겔리토)을 뿌리는 등 파업을 거들었다. 미국의 개입에 대해서는 문서가 구분해서 말한다. CIA를 감독한 40인 위원회는 파업 참가자에게 직접 돈을 주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야당에 준 자금이 파업 쪽으로 흘러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고, CIA의 지원을 받던 한 민간 단체가 규정을 어기고 파업 참가자에게 2800달러를 넘긴 사실은 확인되었다. 21 1 22 7

파업은 약 24일 만에 끝났다. 아옌데는 11월 2일 육군 총사령관 카를로스 프라츠를 내무장관으로 하는 군인 내각을 꾸려 질서를 되찾았다. 군이 처음으로 정치의 중재자로 내각에 들어온 것이다. 파업 동안 노동자들은 공장을 지키고 물자를 나르기 위해 스스로 조직을 만들었다. 산티아고 공업 지대의 공장들을 지역 단위로 묶은 「공업 벨트(코르돈 인두스트리알)」가 이때 크게 자랐고, 이들은 정부의 통제 밖에서 공장 점거와 노동자 관리로 나아가기도 했다. 이로써 인민연합 안의 노선 갈등이 드러났다. 공산당과 아옌데는 중간층과 기독민주당을 잃지 않으려고 「다지기」를 앞세웠고, 사회당 좌파와 연합 밖의 좌파혁명운동(MIR)은 민중 권력을 키워 「멈추지 않고 전진하자」고 외쳤다. 21 23 24 25 2

1973년 3월 총선은 양쪽 모두에게 실망스러운 결과를 냈다. 야당 연합(민주연합, CODE)은 의회의 3분의 2를 얻어 아옌데를 탄핵하기를 바랐지만 약 55%에 그쳤고, 인민연합은 경제 위기 속에서도 약 44%를 얻었다. 탄핵이라는 합법적 출구가 막히자 야당 안에서 군사적 해결을 바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기독민주당 지도부는 점점 우파 국민당 쪽으로 기울었고, 아옌데와 기독민주당 사이의 대화는 몇 차례 시도되었지만 결실을 보지 못했다. 4월 15일에는 엘 테니엔테 구리 광산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가 76일 동안 이어졌다. 파업으로 정부는 큰 수입을 잃었고, 노동자 정부를 자처한 정권의 지지 기반 안에서도 균열이 드러났다. 26 19 20

칠레탕케타소부터 8월 위기까지 쿠데타는 어떻게 준비되었나?

1973년 6월 29일 아침, 로베르토 수페르 중령이 이끄는 제2기갑연대가 전차와 장갑차를 몰고 산티아고 도심으로 들어가 대통령궁 라 모네다와 국방부를 공격했다. 「탕케타소(전차 쿠데타)」로 불린 이 반란은 몇 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육군 총사령관 카를로스 프라츠가 직접 현장에 나가 전차 앞에서 병사들에게 항복을 명령했고, 다른 부대들도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민간인과 군인 22명이 죽었다. 반란군을 촬영하던 아르헨티나 카메라맨 레오나르도 엔리크센은 쓰러지기 직전까지 자신에게 총을 쏘는 병사들을 찍었고, 그 필름은 동료가 수습해 아르헨티나 텔레비전에 방송되었다. 극우 단체 「조국과 자유」의 지도부는 에콰도르 대사관으로 피신한 뒤 자신들이 반란을 부추겼다고 인정하는 성명을 냈다. 27 22 23

탕케타소는 실패했지만 군 내부의 쿠데타 모의자들에게는 시험대가 되었다. 군이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노동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날 노동총동맹(CUT)과 공업 벨트의 지도자들은 350개가 넘는 공장을 점거했다. 7월 26일 「조국과 자유」는 아옌데의 해군 부관 아르투로 아라야 페테르스를 암살했고, 같은 날 화물차 운송업자들이 두 번째 파업에 들어가 쿠데타 때까지 이어 갔다. 송전탑과 철도를 노린 파괴 공작이 잇따랐다. 해군 안에서는 장교들의 쿠데타 준비를 알아챈 부사관과 수병들이 이를 당국과 사회당 총서기 카를로스 알타미라노에게 알렸으나, 오히려 이들이 해군에 의해 가장 먼저 기소되었다. 국가가 무장력을 잃어 가는 동안 좌파 안에서는 노동자 무장을 주장하는 쪽과 군과의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쪽이 계속 맞섰다. 27 22 28 20

8월에 마지막 균형이 무너졌다. 아옌데는 8월 9일 프라츠를 국방장관으로 삼아 다시 군 지휘관들을 내각에 불러들였지만, 8월 22일 장군들의 부인들이 프라츠의 집 앞에 몰려가 그를 겁쟁이라고 부르는 시위를 벌였다. 동료 장군들의 지지를 잃었다고 판단한 프라츠는 다음 날 사임했고, 후임 육군 총사령관으로 그가 추천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임명되었다. 같은 8월 22일 하원은 81 대 47로 정부가 헌법과 법을 어기고 있다고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은 탄핵에 필요한 3분의 2에 못 미쳤지만, 군에게 「법질서를 회복하라」고 호소하는 문구를 담아 쿠데타 세력에게 정치적 명분을 주었다. 아옌데는 위기를 풀기 위해 국민투표를 제안하려 했고, 9월 11일에 이를 발표할 계획이었다고 전해진다. 23 19 20 28

칠레1973년 9월 11일 라 모네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9월 11일 새벽 해군이 먼저 움직였다. 오전 6시까지 해군은 항구 도시 발파라이소를 장악하고 방송을 끊었다. 해군 총사령관 몬테로 제독은 고립되었고, 지휘권은 쿠데타를 기획한 호세 토리비오 메리노에게 넘어갔다. 소식을 들은 아옌데는 경호대(GAP)와 함께 7시 40분 무렵 라 모네다에 도착했다. 피노체트와 공군 사령관 구스타보 레이는 대통령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군은 대통령에게 즉시 사임하면 가족과 함께 국외로 나갈 비행기를 주겠다고 했지만, 아옌데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정부 쪽에 마지막으로 남은 라디오 마가야네스로 국민에게 작별 연설을 했다. 그는 자신은 사임하지 않을 것이며, 머지않아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세우러 지나갈 큰 길이 다시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20 28 7

피노체트는 세르히오 아레야노 장군에게 기갑·보병 부대를 이끌고 라 모네다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수비대가 저격으로 맞서자 공군의 호커 헌터 전투기가 대통령궁에 로켓을 퍼부었고, 대통령의 사저 토마스 모로도 공격받았다. 불길에 휩싸인 궁에서 수비대는 오후 2시 30분 무렵 항복했다. 아옌데는 집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를 두고 오랫동안 의혹이 이어졌지만, 2011년 칠레 법원의 명령으로 유해를 발굴해 국제 법의학 조사단이 검시한 결과 자살로 결론이 났다. 그날 저녁 피노체트, 메리노, 레이, 그리고 경찰(카라비네로스)의 세사르 멘도사가 군사평의회를 구성했다. 13일 평의회는 의회를 해산하고 인민연합 정당을 불법화했으며, 모든 정치 활동을 「휴회」로 선언하고 언론을 장악했다. 20 29 28

미국은 쿠데타 당일에 무엇을 했나? 처치 위원회는 미국이 쿠데타에 직접 도움을 주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다만 미국은 그 전의 행동과 태도, 칠레 군부와의 접촉으로 군사 정부를 반대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냈다고 덧붙였다. 2000년 힌치 보고서는 CIA가 1973년 쿠데타를 부추기지는 않았지만 군의 모의를 알고 있었고, 일부 모의자와 정보 수집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1970년에 쿠데타를 부추긴 적이 있고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으므로 「묵인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썼다. 9월 16일 키신저와 닉슨의 통화 기록에서 닉슨은 「알다시피 이번에는 우리 손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미국의 3년에 걸친 압박이 쿠데타의 조건을 만든 것은 문서로 확인되지만, 9월 11일 작전을 미국이 지휘했다는 증거는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 1 7 20 16

칠레쿠데타 직후 군사평의회는 어떻게 탄압했나?

쿠데타 직후 군은 인민연합 지지자, 노조 활동가, 학생, 외국인을 대규모로 잡아들였다. 산티아고의 국립 경기장은 거대한 수용소가 되었다. 국제적십자위원회는 9월 22일 무렵 그곳에 7천 명이 넘는 사람이 갇혀 있었다고 집계했고, 수감자들은 탈의실과 관중석 아래에서 심문과 고문을 당했다. 미국인 찰스 호먼과 프랭크 테루기도 이 무렵 끌려가 살해되었다. 그보다 작은 칠레 경기장에는 국립기술대학에서 붙잡힌 교수와 학생들이 갇혔다. 가수이자 연출가인 빅토르 하라는 9월 12일 그곳으로 끌려가 며칠 동안 구타와 고문을 당했고, 시신은 16일 빈민가 근처 길가에서 44발의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9월 23일 병원에서 숨졌으며, 그 사인을 둘러싼 조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30 31 32 33

9월 30일부터 10월 22일까지는 「죽음의 캐러밴」이 이어졌다. 피노체트의 대리인 자격을 받은 세르히오 아레야노 스타르크 장군이 장교들과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남부의 카우케네스에서 북부의 라 세레나, 코피아포, 안토파가스타, 칼라마까지 군 주둔지를 돌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에서 이미 자수했거나 재판을 기다리던 정치범들이 끌려 나가 처형되었다. 레티그 위원회는 10월 한 달 동안 이 다섯 곳에서 72명이 살해되었다고 확인했고(칼라마에서만 26명), 그 가운데 40명이 사회당원이었다. 스페인어 자료는 전체 희생자를 97명으로 센다. 아레야노는 수감자를 「너무 관대하게」 다룬 장교들을 처벌하기도 했다. 미국 국무부의 1973년 11월 16일 내부 메모는 쿠데타 뒤 19일 동안의 즉결 처형을 320명으로 보아, 군사평의회가 공개한 숫자의 세 배가 넘는다고 보고했다. 34 35 31 12

탄압의 전체 규모는 민주화 이후의 공식 조사로 드러났다. 1991년 레티그 위원회(진실과 화해 국가위원회)는 군사 독재 기간에 인권 침해로 숨지거나 실종된 2115명과 정치적 폭력의 희생자 164명, 모두 2279명을 확인했고, 그 가운데 다수가 1973년 마지막 넉 달에 집중되었다. 2004년 발레치 위원회와 그 보완 조사는 정치적 이유로 구금되고 고문당한 피해자를 2만 8천여 명으로 확인했으며, 체포의 약 69%가 1973년 9월 11일부터 12월 31일 사이에 일어났다고 밝혔다. 쿠데타 이후 1990년까지 적어도 20만 명이 칠레를 떠났다. 1974년에는 비밀경찰 DINA가 만들어져 탄압이 체계화되었고, 이후 남미 군사 정권들의 공동 탄압 체제인 「콘도르 작전」으로 이어졌다. 31 36 20 19

칠레미국칠레의 경험은 이후 어떻게 기억되고 평가되었나?

쿠데타 뒤에도 인민연합 정부의 인물들은 국외에서 추적당했다. 아르헨티나로 망명한 프라츠 장군은 1974년 9월 3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부인과 함께 차량 폭탄으로 살해되었다. 좌파혁명운동 지도자 미겔 엔리케스는 망명을 거부하고 지하 투쟁을 하다 1974년 10월 5일 산티아고에서 사살되었다. 아옌데 정부의 외무·국방장관을 지낸 오를란도 레텔리에르는 쿠데타 당일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다가 국제적 압력으로 풀려났지만, 1976년 9월 21일 워싱턴 한복판에서 DINA가 설치한 차량 폭탄에 목숨을 잃었다. 경제에서는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한 경제학자들, 이른바 「시카고 보이스」가 1975년 무렵부터 정책을 맡아 민영화와 시장 개방을 밀어붙였고, 칠레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장 먼저 대규모로 시행된 나라가 되었다. 23 25 37 38

칠레의 경험은 세계 좌파에게 큰 질문을 남겼다.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엔리코 베를링구에르는 칠레 쿠데타를 보며, 좌파가 홀로 다수를 얻는 것만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고 가톨릭 대중 정당인 기독민주당과의 「역사적 타협」이 필요하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반대로 혁명적 좌파는 칠레가 군과 국가 기구를 그대로 둔 채 선거로 사회주의에 갈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고 해석했다. 학계에서도 평가는 갈린다. 피터 콘블루 같은 연구자들은 기밀 해제 문서를 근거로 미국의 책임을 강조하고, 다른 연구자들은 인민연합의 경제 운영과 정치적 고립, 좌파 내부의 분열을 더 무겁게 본다. 문서가 확인하는 것은 미국이 칠레의 민주적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 오랫동안 비밀 공작을 했다는 사실이고, 쿠데타 자체를 실행한 것은 칠레 군부였다는 점이다. 39 16 8 1

피노체트는 1990년까지 칠레를 통치했다. 1998년 10월 그는 신병 치료차 머물던 런던에서 스페인 법원의 영장으로 체포되어, 전직 국가원수도 인권 범죄로 외국에서 재판받을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그는 건강을 이유로 풀려나 칠레로 돌아갔고, 끝내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채 2006년 죽었다. 칠레 안에서는 진실 위원회와 재판이 이어지며 많은 가해자가 처벌받았다. 국립 경기장의 옛 관중석 일부는 수감자를 기리는 공간으로 남았고, 빅토르 하라가 갇혔던 칠레 경기장은 그의 이름을 붙여 「빅토르 하라 경기장」이 되었다. 9월 11일은 칠레에서 지금도 사회를 가르는 날이며, 쿠데타 50주년이던 2023년에도 그날을 어떻게 볼지를 두고 여론은 크게 갈렸다. 40 30 32 20 28

결과

쿠데타로 인민연합 정부가 무너지고 피노체트의 군사 독재가 1990년까지 이어졌다. 의회가 해산되고 좌파 정당이 불법화되었으며, 레티그 위원회는 독재 기간의 사망·실종 피해자를 2천 명 넘게, 발레치 위원회는 정치적 구금과 고문 피해자를 2만 8천여 명으로 확인했다. 적어도 20만 명이 나라를 떠났다. 시카고 보이스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행되었고,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의 좌절은 세계 좌파의 전략 논쟁, 특히 이탈리아 공산당의 역사적 타협 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연표와 지도

라 모네다 궁 추키카마타 칼라마 안토파가스타 코피아포 라 세레나 발파라이소 칠레 경기장 국립 경기장 카우케네스 2 워싱턴 5 워싱턴 7 추키카마타 18 칼라마 4 라 모네다 궁 10 라 모네다 궁 12 라 모네다 궁 15 라 모네다 궁 17 칠레 경기장 1 산티아고 3 산티아고 6 산티아고 8 산티아고 11 산티아고 13 산티아고 14 산티아고 16 국립 경기장 9 코이아이케
  1. 11970.09.04칠레
    아옌데의 대선 승리

    대선에서 인민연합의 살바도르 아옌데가 36.6%를 얻어 호르헤 알레산드리(35.3%)와 라도미로 토미치(28.1%)를 앞섰다. 차이는 약 3만 9천 표였다. 과반 득표자가 없어 의회가 상위 두 후보 가운데 대통령을 뽑아야 했고, 캐스팅 보트는 기독민주당이 쥐었다.

  2. 21970.09.15미국
    닉슨과 헬름스의 회의

    닉슨 대통령이 키신저, 미첼과 함께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를 불러 아옌데의 취임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헬름스의 메모에는 「1천만 달러를 쓸 수 있고 필요하면 더」, 「경제가 비명을 지르게 하라」는 구절이 남았다. 이 메모는 훗날 기밀 해제되어 국무부 외교 문서집에 실렸다.

  3. 31970.10.22칠레미국
    슈나이더 장군 피격

    헌법 준수를 고집한 육군 총사령관 레네 슈나이더가 퇴역 장군 로베르토 비오 무리의 납치 시도 중 총에 맞아 25일 숨졌다. CIA는 며칠 전 비오 쪽 지원을 거절했지만, 같은 날 발렌수엘라 장군 쪽에 기관단총과 최루탄을 건넸다. 그의 죽음은 오히려 1970년의 쿠데타 계획을 무산시켰다.

  4. 41970.11.03칠레
    아옌데 대통령 취임

    기독민주당이 요구한 「헌법 보장 조례」에 아옌데가 서명한 뒤, 10월 24일 의회는 153 대 35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아옌데는 11월 3일 취임해 무장 봉기가 아닌 헌법과 법률의 틀 안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식 사회주의」를 내걸었다. 선거로 집권한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이었다.

  5. 51970.11.09미국
    국가안보결정각서 93호

    키신저가 닉슨에게 칠레의 「모델 효과가 은밀하게 퍼질 수 있다」고 경고한 나흘 뒤, 미국 정부는 국가안보결정각서 93호로 칠레 정부에 「냉담한 자세」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양자 원조와 국제 금융 기관의 신규 차관이 막혔고, 야당과 언론에 대한 비밀 자금 지원도 이어졌다.

  6. 61971.04칠레
    지방선거에서 49.7% 득표

    정부 첫해 국내총생산이 8.3%, 공업 생산이 약 14% 늘고 실업률이 3.8%로 내려가자, 4월 지방선거에서 인민연합 정당들은 49.7%를 얻었다. 대선 때 36.6%에서 크게 오른 것이다. 다만 이 성장은 놀던 설비를 돌려 소비를 늘린 결과였고, 투자는 이미 줄고 있었다.

  7. 71971.07.11칠레
    구리 국유화 헌법 개정

    의회가 헌법 개정으로 대형 구리 광산 국유화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아나콘다의 추키카마타·엘 살바도르와 케니콧의 엘 테니엔테가 대상이었다. 아옌데는 외국 기업의 「초과 이윤」을 보상금에서 빼도록 해 기업들은 사실상 보상을 받지 못했고, 미국은 이를 신용 차단의 명분으로 삼았다.

  8. 81971.11칠레쿠바
    카스트로의 칠레 방문

    피델 카스트로가 23일 동안 칠레를 북쪽에서 남쪽까지 돌며 연설했다. 쿠바 지도자의 이례적인 장기 국빈 방문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쿠바의 외교적 고립을 깨는 계기였지만, 칠레 우파에게는 「칠레식 사회주의」가 결국 쿠바의 길을 따르려 한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9. 91972.10.09칠레
    10월 화물차 파업

    남부 아이센주의 화물차 운송업자 파업을 계기로 전국화물차연맹이 무기한 파업을 선언했다. 상인과 전문직 단체, 야당이 가세해 파업은 정부 퇴진 운동이 되었고, 정부는 18개 주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지키려고 「공업 벨트」를 조직했다. 파업은 약 24일 이어졌다.

  10. 101972.11.02칠레
    군인 내각 구성

    아옌데가 육군 총사령관 카를로스 프라츠를 내무장관으로 삼아 군 지휘관들을 내각에 불러들이자 10월 파업이 끝났다. 군이 처음으로 정치의 중재자로 내각에 들어온 것이다. 이 무렵 인민연합 안에서는 「다지기」를 앞세운 공산당과 「전진」을 외친 사회당 좌파의 노선 갈등이 깊어졌다.

  11. 111973.03.04칠레
    1973년 총선

    야당 연합(CODE)은 의회의 3분의 2를 얻어 아옌데를 탄핵하려 했지만 약 55.7%에 그쳤고, 인민연합은 경제 위기 속에서도 약 44%를 얻었다. 탄핵이라는 합법적 출구가 막히자 야당 안에서 군사적 해결을 바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4월에는 엘 테니엔테 광산 노동자들이 76일 파업에 들어갔다.

  12. 121973.06.29칠레
    탕케타소

    로베르토 수페르 중령의 제2기갑연대가 전차를 몰고 라 모네다와 국방부를 공격했다. 프라츠가 직접 현장에서 반란을 진압했지만 22명이 죽었고, 아르헨티나 카메라맨 레오나르도 엔리크센은 자신을 쏘는 병사들을 찍다가 숨졌다. 「조국과 자유」 지도부는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반란을 부추겼다고 인정했다.

  13. 131973.07.26칠레
    해군 부관 암살과 2차 파업

    극우 단체 「조국과 자유」가 아옌데의 해군 부관 아르투로 아라야 페테르스를 암살했다. 같은 날 화물차 운송업자들이 두 번째 파업에 들어가 쿠데타 때까지 이어 갔고, 송전탑과 철도를 노린 파괴 공작이 잇따랐다. 물자 부족은 더 심해졌고 물가 상승률은 그해 600%를 넘었다.

  14. 141973.08.22–23칠레
    하원 결의와 프라츠 사임

    하원이 81 대 47로 정부가 헌법과 법을 어기고 있다고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켜 쿠데타 세력에게 명분을 주었다. 같은 날 장군 부인들이 프라츠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동료들의 지지를 잃은 프라츠는 이튿날 사임했다. 후임 육군 총사령관에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임명되었다.

  15. 151973.09.11칠레
    쿠데타와 라 모네다 폭격

    새벽 해군이 발파라이소를 장악하며 쿠데타가 시작되었다. 아옌데는 라 모네다에서 국외 탈출 제안을 거부하고 라디오 마가야네스로 마지막 연설을 했다. 공군 전투기가 대통령궁에 로켓을 쏘았고, 오후 2시 30분 무렵 수비대가 항복했다. 아옌데는 집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6. 161973.09.13칠레
    의회 해산과 정당 불법화

    피노체트, 메리노, 레이, 멘도사로 이루어진 군사평의회가 의회를 해산하고 인민연합 정당들을 불법화했으며 모든 정치 활동을 「휴회」로 선언했다. 군은 모든 언론을 장악했다. 같은 무렵 산티아고의 국립 경기장은 대규모 수용소가 되어 9월 22일 무렵 7천 명이 넘는 사람이 갇혔다.

  17. 171973.09.16칠레
    빅토르 하라의 죽음

    쿠데타 이튿날 국립기술대학에서 붙잡혀 칠레 경기장에 갇혔던 가수이자 연출가 빅토르 하라가 며칠 동안 구타와 고문을 당한 끝에 살해되었다. 시신은 44발의 총상을 입은 채 빈민가 근처 길가에서 발견되었다. 칠레 경기장은 훗날 그의 이름을 따 빅토르 하라 경기장이 되었다.

  18. 181973.09.30–10.22칠레
    죽음의 캐러밴

    피노체트의 대리인 세르히오 아레야노 스타르크 장군이 헬리콥터로 카우케네스에서 칼라마까지 군 주둔지를 돌며 정치범들을 끌어내 처형했다. 레티그 위원회는 10월 한 달 동안 다섯 곳에서 72명이 살해되었다고 확인했고, 칼라마에서만 26명이었다. 스페인어 자료는 희생자를 모두 97명으로 센다.

관련 인물 1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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