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ège de Paris (1870-1871) / Belagerung von Paris · 1870년 9월 19일 ~ 1871년 1월 28일

파리 포위전 (1870–1871)

Siege of Paris (1870–1871)

1870년 9월 19일부터 1871년 1월 28일까지 프로이센이 이끄는 북독일연방군이 파리를 에워싼 넉 달의 포위전. 세 차례 돌파 시도가 실패하고 굶주림과 추위, 1월의 포격 끝에 국방정부가 휴전에 서명했다. 포위 중 정치화된 국민방위군이 무기를 간직한 채 남은 것이 파리 코뮌의 배경이 되었다.

상세

스당 뒤 길이 열리자 빌헬름 1세와 몰트케는 제3군과 뫼즈군을 이끌고 거의 저항 없이 파리로 진군했다. 파리 총독 트로쉬는 스당에서 빠져나온 정규군 6만 명, 기동대 9만 명, 수병 1만 3천 명, 국민방위군 35만 명 등 약 51만 3천 명을 모았으나 징집된 국민방위군은 훈련이 없었다. 바이양 원수의 위원회가 1,200만 프랑으로 방어를 보강했고, 불로뉴 숲에는 양 25만 마리와 소 4만 마리가 들어왔으며 정부는 밀가루가 80일 분이면 넉넉하다고 보았다. 9월 15일 몰트케가 포위 명령을 내렸고 18일 베르사유가 점령되어 독일군 사령부가 되었으며 19일 포위가 완성되었다. 공성 지휘는 블루멘탈이 맡았다. 비스마르크는 빠른 항복을 위해 포격을 주장했으나 왕과 블루멘탈·황태자·몰트케는 민간인 피해와 중립국 여론을 들어 거절했고, 새 프랑스 군대를 먼저 섬멸해 파리를 굶겨 항복시키기로 했다. 트로쉬는 몰트케가 강습하기를 바라며 티에르 성벽과 16개 외곽 요새에 기댔지만 몰트케는 강습할 뜻이 없었다. 9월 30일 슈비이, 10월 13일 샤티용, 10월 29일 르부르제의 싸움이 이어졌고, 10월 31일 메스 항복 소식에 군중이 시청을 점거해 트로쉬 내각을 인질로 잡았다. 플루랑스·들레클뤼즈·블랑키 등은 새 정부를 세우려 했으나 합의하지 못했고, 11월 1일 새벽 평화롭게 물러났다. 정부는 보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도 주모자 22명을 투옥했다.

11월 30일 뒤크로의 8만 명이 샹피니·크레테유·빌리에를 공격한 「대출격」은 12월 3일 뷔르템베르크 군단에 막혔고, 12월 21일 르부르제 출격은 영하 14도의 추위 속에 동상 900건과 사상 2,000명을 냈다. 파리에서는 10월 초 말고기, 11월 중순 개·고양이·쥐를 거쳐 식물원의 코끼리 카스토르와 폴뤽스까지 잡아먹었고, 가난한 여성과 아이들이 가장 고통받았으며 1월에는 한 주에 3천에서 4천 명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다. 기구 66편이 우편 250만 통과 강베타 등 승객을 실어 날랐고 전서구가 답신을 가져왔다. 1월 5일 샤티용 고지에서 남쪽 요새를 포격한 뒤 독일군은 23일 밤 동안 약 12,000발을 좌안에 쏘아 약 400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으나 들레클뤼즈는 「1870년의 프랑스인은 전투가 축제였던 갈리아인의 후손」이라 외쳤고 저항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1월 19일 뷔즈발 출격이 4천 명 넘는 손실로 끝나자 트로쉬는 총독직을 내놓았다. 1월 25일 빌헬름 1세는 몰트케에게 비스마르크와 상의하라고 명했고 비스마르크는 대구경 크루프 공성포를 쏘게 했다. 1월 23일부터 베르사유에서 파브르와 비스마르크가 비밀 교섭을 벌였고, 비스마르크는 국민방위군의 봉기를 걱정하는 파브르에게 「봉기를 도발하라, 아직 진압할 군대가 있을 때」라고 조언했다. 1월 28일 정규군 무장해제(1개 사단 제외), 2억 프랑, 요새 인도를 조건으로 휴전이 체결되었다. 영국과 미국의 식량이 곧 들어왔고, 3월 1일 독일군 3만 명이 승전 행진을 한 뒤 이틀 만에 동쪽으로 물러났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위키백과 (영문)
← 용어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