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타주 이론
Montage Theory
1920년대 소비에트 영화감독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레프 쿨레쇼프, 프세볼로트 푸돕킨 등이 정립한 영화 편집 이론으로, 개별 숏 자체보다 숏들의 충돌과 병치를 통해 새로운 관념이 발생한다고 본다. 예이젠시테인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해 '몽타주는 곧 충돌'이라 주장했고, 쿨레쇼프는 동일한 무표정 얼굴 숏도 뒤따르는 숏에 따라 관객의 해석이 달라짐을 실험으로 입증했다. 이 이론은 〈전함 포툠킨〉의 오데사 계단 시퀀스 등에서 구체화되었으며, 편집을 영화의 핵심 표현 수단으로 격상시켜 할리우드 연속편집과 대비되는 독자적 영화 문법을 수립했다.
상세
몽타주 이론의 형성
몽타주 이론은 20세기 초 영화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초기 영화 이론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다. 몽타주를 단순히 이미지와 음향 조각을 이어 붙이는 기술적 조작으로 보지 않고, 화면의 공간·시간·행위를 조직하고 의미를 만들어 내며 관객의 지각을 구조화하는 원리로 파악한다. 따라서 몽타주 이론은 편집 기술론과 구별된다.
몽타주 이론의 형성에는 그리피스를 비롯한 초기 서사 영화의 관행과, 쿨레쇼프·벨라 발라시·예이젠시테인·푸돕킨·베르토프의 작업이 함께 작용했다. 특히 1920년대 소비에트의 이론가들은 몽타주를 영화의 핵심 표현 원리로 보았고, 이미지의 병치를 통해 기존에 없던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소비에트 영화인들 사이에서도 몽타주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견해차는 컸다. 푸돕킨은 이미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의미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고, 예이젠시테인은 숏들의 충돌에서 관념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내부 논쟁에도 불구하고 여러 소비에트 영화인들이 몽타주 이론을 제기했으며, 그중에서도 충돌에서 관념이 발생한다는 예이젠시테인의 견해가 가장 널리 받아들여졌다. 몽타주 이론은 상업적으로도 학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폭넓은 영향을 남겼다.
실험과 이론의 분화
쿨레쇼프가 이끈 집단은 영화의 본질이 무엇인지 규명하려 했다. 러시아 영화와 미국 영화를 비교한 작업에서 이들은 평균 숏 길이가 짧은 미국 영화의 숏 조직이 관객의 지각에 더 잘 맞는다고 판단했고, 여기서 숏의 연쇄가 관객 해석을 좌우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대표적 실험에서 쿨레쇼프는 배우 이반 모주힌의 무표정한 얼굴 숏을 각각 수프 한 그릇, 관 속의 아이, 소파에 앉은 여성과 교차 편집했다. 관객은 모주힌의 표정이 매번 달라졌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같은 숏이 반복된 것이었다.
다만 이 실험의 학술적 지위는 확정적이지 않다. 스티븐 프린스와 웨인 헨슬리는 쿨레쇼프의 결론이 비과학적이며 영화에 관한 신화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실험의 시기·장소·방법 자체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편집된 필름이나 사진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푸돕킨과 쿨레쇼프는 1920년대부터 서로 다른 판본을 이야기했으며, 1960년대 이전에는 이 현상을 푸돕킨 효과라 부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심리학적 후속 연구들은 무표정한 얼굴이 놓이는 맥락이 그 얼굴의 지각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는 점을 확인했다.
한편 1923년 잡지 《레프》에 실린 예이젠시테인의 글 「어트랙션 몽타주」는 연극의 모든 공격적 요소, 즉 관객에게 감각적·심리적 충격을 주도록 계산된 요소를 몽타주로 조직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가 세운 다섯 가지 편집 기법은 리듬적·음조적·배음적·지적 편집 등으로 이어지며, 특히 지적 몽타주는 시각적 내용과 대립하는 개념적 관계를 만들어 추상적 관념을 표현하는 단계로 설명된다.
제도적 조건과 학파의 종언
몽타주 학파의 성장은 제도적 조건과 분리해 이해할 수 없다. 혁명 직후 소비에트 정부는 산업 전체를 장악할 만큼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않았고, 1918~1922년에는 카메라와 필름의 만성적 부족이 창작을 옥죄었다. 1919년 8월 27일 레닌이 서명한 영화 사업 국유화 법령은 영화의 조직과 기술 수단·자재의 공급 및 분배를 교육인민위원회(나르콤프로스) 관할로 넘겼다. 나르콤프로스의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가 영화에 보인 호의는 젊은 몽타주 학파 예술가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나르콤프로스는 1918년 쿨레쇼프와 베르토프를 영화계에 끌어들였고, 베르토프는 1920년부터 나르콤프로스의 영화 시사편을 촬영했다. 그는 카메라 렌즈가 세계를 인식하는 불오류의 도구라는 키노-아이 이론을 세우고, 정연한 허구 영화를 배격하며 노동·운동·생활 기계와 노동자 일상의 기록을 내세웠다. 키노-아이는 화면과 뉴스릴의 집단적 제작을 지향하며 예술가 개인의 숙련을 인민의 요구 위에 두는 부르주아적 관념을 해체하려 했다. 개인이 아니라 군중에 주목하지 않는 영화는 반혁명적으로 간주되었다.
몽타주 학파는 소비에트 영화의 주도적 경향은 아니었지만 유럽 영화에 뚜렷한 영향을 주었다. 소비에트 권력이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을 도입하면서 학파의 시대는 끝났고, 예이젠시테인은 1938년 《알렉산드르 넵스키》, 1944~1946년 《이반 뇌제》와 같이 개인을 서사의 중심에 세우는 후기 작품으로 나아갔다.
반대와 이후의 재평가
이 이론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는 몽타주 이론과 어트랙션 몽타주 원리를 거부하고, 영화의 핵심은 숏의 시간적 연쇄가 아니라 영화 구조 내부의 운동으로서의 리듬이라고 주장했다. 앙드레 바젠의 몽타주 비판과 《카이에 뒤 시네마》의 작가주의는 이러한 반대를 제도화했다.
몽타주 이론은 이후의 영화 이론에도 계속 남았다. 1967년 타르콥스키의 「봉인된 시간」은 시간과 리듬을 중심으로 반대 입장을 정리한 글이었으며, 질 들뢰즈는 《시네마 1: 운동-이미지》에서 몽타주 이론을 다시 다뤘다. 장뤼크 고다르, 아르타바즈 펠레시얀 등은 몽타주를 재해석해 이어 갔고, 영화 분석을 언어, 즉 영화의 문자적 문법 쪽으로 돌려세운 후대 이론들도 몽타주 이론에 크게 의존했다. 오늘날 영어권의 '몽타주'는 시간의 경과를 짧은 숏의 연쇄로 압축하는 기법을 흔히 가리키지만, 소비에트의 가장 보수적인 해석에서도 시간은 이미지의 충돌과 그 상징적 의미에 종속되어 있었다.
관련 인물
출처
- 위키백과 (영문) foundational article on Soviet montage theory, its key figures, and its departure from continuity editing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language overview of montage theory, its development from early cinema through the Soviet school and beyond
- artforum.com Rosalind Krauss in Artforum (2022) analyzing Eisenstein's dialectical approach to montage and his ambition to film Marx's Capital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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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러시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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