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인민
The Soviet People
소련의 여러 민족이 사회주의 아래에서 융합되어 “새로운 역사적 인간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공식 규정이다. 1961년 제22차 당대회 강령에서 정식화되었고 1977년 헌법 전문에 명시되었다. 민족들이 가까워진다는 ‘접근’과 궁극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융합’을 단계로 놓아, 민족의 소멸을 먼 미래의 목표로 남기면서 현재는 다민족성을 인정하는 절충이었다. 실제 정책에서는 러시아어를 민족 간 교류의 언어로 확대하는 근거로 작동했고, 1980년대 후반 공화국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상세
왜 새 범주가 필요했나
스탈린 사후의 소련은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해야 했다. 하나는 민족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열다섯 공화국의 민족적 구성이 여전히 현실이라는 것이다. 맏형과 아우라는 가족 비유(맏형 러시아 인민론)는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 이후 그대로 쓰기 부담스러웠고, 강제이주 민족의 명예회복이 진행되면서 위계를 앞세우는 언어의 설득력도 떨어졌다.
1961년 강령이 내놓은 답이 ‘소비에트 인민’이다. 민족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사회주의 아래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로 묶였다는 것이다. 이 규정은 민족을 부정하지도, 위계를 명시하지도 않으면서 통합을 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접근과 융합
이론적으로는 두 단계가 설정되었다. 먼저 민족들이 경제와 문화에서 서로 가까워지고(스블리제니예), 먼 장래에 하나로 합쳐진다(슬리야니예)는 것이다. 융합을 언제 어떻게 이룰 것인가는 소련 학계의 오래된 논쟁거리였고, 브레즈네프기 공식 노선은 융합을 서두르지 않는 쪽이었다. 1977년 헌법 전문은 “새로운 역사적 인간 공동체인 소비에트 인민”이라는 표현을 넣으면서도 연방제와 공화국의 탈퇴권 조항을 그대로 두었다.
실질적 정책 수단은 언어였다. 러시아어는 ‘민족 간 교류의 언어’로 규정되어 학교와 고등교육, 군대, 행정에서 비중이 커졌다. 공화국 언어의 지위는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었으나, 승진과 진학에서 러시아어가 갖는 실질적 가치가 계속 커졌다.
어디서 무너졌나
1970~1980년대의 통계는 융합이 예상만큼 진행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공화국의 기간 민족 비율은 오히려 높아지는 경우가 많았고, 각 공화국에서 민족어와 민족사 연구는 코레니자치야가 남긴 대학과 학술원 안에서 계속 재생산되고 있었다.
1988년 이후 이 구조가 정치적으로 터져 나온다. 언어법 제정 요구, 공화국 주권 선언, 그리고 연방 탈퇴 요구가 이어졌고, 그 근거로 사용된 것은 소련 헌법 자신이 보장한 탈퇴권과 민족어의 지위였다. ‘새로운 역사적 공동체’라는 규정은 그 과정을 설명하지도 막지도 못했다.
평가에서는 이 범주를 국가 정체성을 만들려던 시도로 읽는 시각과, 러시아화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읽는 시각이 함께 있다. 다만 두 시각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 있다. 소련은 민족을 없애는 길이 아니라 민족을 제도로 만들어 관리하는 길을 택했고, 그 제도가 마지막에 연방 해체의 단위가 되었다는 점이다.
관련 용어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формулировка Программы КПСС 1961 г., преамбула Конституции 1977 г., дискуссия о сближении и слиянии наций.
- 위키백과 (러시아어) текст преамбулы о «новой исторической общности людей — советском народе» при сохранении федерации и права выхода.
- 위키백과 (영문) статус русского языка как «языка межнационального общения» и его роль в образовании и управлении.
- Rogers Brubaker, Nationhood and the National Question in the Soviet Union (Theory and Society, 1994) — тезис об институционализации наций советским государством и её роли в распаде ССС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