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르부나리 봉기
Tatarbunary Uprising
1924년 9월 15~18일 루마니아령 남부 베사라비아의 타타르부나리 일대에서 일어난 친소비에트 무장 봉기. 코민테른이 짠 루마니아 봉기 계획의 일부로, 안드레이 클류시니코프(네닌)가 이끈 혁명위원회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에 속하는 「몰다비아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루마니아 제3군단에 사흘 만에 진압되었다. 이듬해의 「500인 재판」은 국제적 관심을 끌었다.
상세
1924년 3~4월 빈 회담에서 소련의 베사라비아 주민투표 제안이 거부된 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7월 20일 각국 공산당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가 루마니아의 전쟁 위협을 받고 있다」고 알렸다. 8월 8일 발칸 공산주의 연방 서기 바실 콜라로프가 주재한 회의는 루마니아를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 9월 중순 봉기를 일으키는 계획을 세웠고, 1921년 토지개혁에 대한 농민의 불만과 1924년 여름 가뭄으로 남부 베사라비아에 든 기근에 기댔다. 현지에서는 1922년 5월 클류시니코프와 니콜라이 시시만 두 코민테른 요원이 이끄는 소련 직속 당위원회가 카훌·이즈마일·아케르만 3개 군의 마을 25곳과 두 도시에 혁명위원회와 무장대를 꾸리고 무기를 쌓아 두었다. 9월 11일 니콜라예우카 습격 뒤 지도자들이 체포되자 네닌은 일정을 앞당겼다. 9월 15~16일 밤 무장대가 타타르부나리 면사무소를 점령해 공화국을 선포했고, 봉기군은 4천~6천 명으로 대부분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이었다. 루마니아인·불가리아인·독일인 주민은 거의 가담하지 않았다.
루마니아군은 9월 18일 포격 끝에 타타르부나리를 함락했고(러시아어 문서는 19일, 화학 포탄 사용을 주장), 다뉴브 함대도 진압에 나섰다. 클류시니코프는 달아나다 죽었다. 영어 위키백과는 1,600명이 체포되고 3천 명이 죽었다고,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3천 명 넘게 죽었다고 쓴다. 1925년 8월 24일부터 12월 2일까지 103일 동안 열린 「500인 재판」에서는 489명이 기소되어 287명이 재판을 받았고 85명이 유죄를 받았는데, 루마니아인은 피고 가운데 9명뿐이었고 유죄자 가운데는 없었다. 로맹 롤랑, 시어도어 드라이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이 피고를 옹호했고, 앙리 바르뷔스는 재판을 지켜본 뒤 『사형집행인들』을 써 루마니아는 「소수민족의 감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루마니아 당국과 비공산계 사회주의자 일리에 모스코비치, 미국 학자 클라크는 밖에서 꾸민 공산주의 습격으로 보았고, 반 뫼르스는 빈 회담 결렬과 몰다비아 자치 공화국 선포 사이의 시점으로 보아 크렘린의 관여를 확신한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저자들은 경제 위기와 기근, 가혹한 행정을 원인으로 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