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 회담
Tehran Conference
1943년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이란 테헤란의 소련 대사관에서 스탈린·루스벨트·처칠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연합국 정상회담이다. 가장 시급한 합의는 1944년 5월 프랑스 북부에 제2전선을 열기로 한 결정으로, 소련이 동부전선의 부담을 덜기 위해 수년간 요구해온 사안이었다. 전후 독일 분할과 폴란드 국경, 유엔 구상도 처음으로 다루어졌으나, 회담의 중심축은 여전히 군사적 생존에 놓여 있었다. 이후 1945년 얄타 회담이 전후 질서의 분할로 옮겨간 것과 비교하면, 테헤란은 아직 승리를 위해 싸우는 동맹의 자리였다.
상세
개최 경위
미국·영국·소련 세 연합국 수뇌가 한자리에 모인 첫 회담이다.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서방 연합국과 소련은 물자 지원과 협력 방안을 두고 런던과 모스크바를 오가며 실무 협의를 벌였지만,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자원 배분과 전후 독일 처리 문제를 둘러싼 공동 전략은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P5]] 특히 소련은 1941년부터 서부 전선, 곧 제2전선 개설을 요구해 왔으나 구체적인 약속을 얻지 못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를 떠나기를 꺼렸고 루스벨트는 신체적 장애로 장거리 이동이 어려웠다. 루스벨트가 카이로 회담을 제안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비롯해 바그다드·바스라 안도 거절했고, 결국 1943년 11월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합의했다. [[P7]] 스탈린은 바쿠까지 열차로 이동한 뒤 비행기로 테헤란에 도착했고, 루스벨트는 전함 아이오와를 타고 알제리 오랑에 상륙한 뒤 카이로를 거쳐 들어왔다. [[P6]][[P52]] 회담 자체는 비밀 교신에서 코드명 '유레카'로 불렸다. [[P54]]
회의 진행과 제2전선 결정
회담은 1943년 11월 28일 오후 4시에 시작되었고, 12월 1일까지 이어졌다. [[P9]] 회의의 중심 의제는 서유럽 제2전선 개설이었다. 처칠은 지중해와 이탈리아 방면 작전 확대를 선호했고, 소련은 프랑스 북부 상륙을 요구했다. [[P12]] 논쟁이 교착에 빠지자 스탈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로실로프와 몰로토프를 돌아보며 집에 할 일이 많다며 회의를 떠날 태세를 보였고, 회담 결렬을 우려한 처칠이 양보했다. [[P66]]
그 결과 미국과 영국은 1944년 5월까지 프랑스 북부 상륙 작전(오버로드)을 개시하고, 소련은 동시기에 동부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벌여 독일군을 분산시키기로 합의했다. [[P12]][[P27]] 이 결정은 회담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성과로 평가된다. 루스벨트는 11월 30일 점심 자리에서 스탈린을 설득한 끝에 처칠의 동의를 얻어냈다. [[P36]] 회담에서는 이와 함께 남프랑스 상륙 작전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대한 지원, 독일 패망 후 소련의 대일 참전 문제도 다루어졌다. [[P33]][[P61]]
전후 문제: 독일과 폴란드
참가국들은 전후 독일 분할이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했으나 분할 방식과 수에는 이견이 있었다. 루스벨트는 독일을 5개 국가로 나누는 방안을, 처칠은 다뉴브 연방 구상을 제시했고, 스탈린은 독일의 통일 유지를 주장했다. [[P70]][[P40]] 이 문제는 테헤란에서 결론이 나지 않고 런던 위원회로 넘겨졌으며, 유럽자문위원회가 분할 문제를 검토하기로 했다. [[P129]]
폴란드 문제에서는 처칠의 제안에 따라 동부 국경을 1920년 커즌 라인으로 하고, 그로 인한 영토 손실을 독일 영토로 보상하기로 했다. [[P30]][[P72]] 루스벨트는 1944년 미국 대선에서 폴란드계 유권자 문제를 의식해 이 논의에서 빠져 달라고 요청했고, 회담 직전 소련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 승인을 일방적으로 철회했다. [[P30]] 이 합의는 1945년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서 비로소 공식 비준되었다. [[P11]][[P129]] 발트 3국 문제에서는 루스벨트가 주민 투표를 요구했으나, 스탈린은 소련 헌법에 따라 처리하겠다며 국제적 통제를 거부했다. [[P31]][[P75]]
이란·터키 문제와 유엔 구상
이란은 연합국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세 정상은 회담 기간에 이란 정부에 경제 원조를 계속 제공하고 이란의 독립·주권·영토 보전을 존중한다는 내용의 '이란에 관한 3국 선언'을 발표했다. [[P16]][[P17]][[P131]] 터키에 대해서는 연합국 측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크레타섬과 도데카니사 제도를 제안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P18]]
전후 국제기구 구상도 처음으로 본격 논의되었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이른바 '네 명의 경찰'이 주도하는 국제기구 구상을 설명했고, 스탈린은 이를 대체로 긍정하면서도 소국들의 불만을 우려해 지역 기구 필요성을 제기했다. [[P82]][[P86]][[P130]] 테헤란에서는 국제기구 창설에 관한 공식 결정이 내려지지는 않았다. [[P87]]
암살 음모와 보안
소련 측 보고에 따르면 나치 독일은 테헤란에서 3국 수뇌 암살 계획을 세웠고, '장거리 점프'라는 작전명으로 오토 스코르체니에게 임무가 맡겨졌다. [[P89]] 소련 정보기관은 회담 개최 며칠 전 루스벨트의 경호 책임자에게 이 음모를 통보했고, 회담을 앞두고 테헤란에서 대규모 체포가 이루어졌다. [[P44]][[P94]]
이 음모의 실체를 두고는 평가가 갈린다. 소련 측은 독일 요원들이 테헤란에 투입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몰로토프는 회담 후 해리먼에게 구체적인 암살 계획은 알지 못했다고 말해 앞선 주장을 축소했다. [[P46]][[P47]] 미국 측은 스탈린이 루스벨트를 소련 대사관으로 옮기려는 구실로 음모를 조작했을 가능성을 의심하기도 했다. [[P46]] 루스벨트는 처음에 미국 공사관에 묵었으나, 음모 통보 후 소련 대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는 스탈린·처칠과의 접근성을 높이는 결과도 낳았다. [[P45]][[P53]] 소련 대사관에서의 대화는 소련 정보기관에 의해 도청되었다. [[P53]]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full account of the conference, including preparations, the second-front debate, Operation Overlord commitment, German and Polish questions, and the NKVD role in the assassination plot
- 위키백과 (영문) English Wikipedia: comprehensive overview including codename Eureka, military decisions, political decisions, and the alleged German assassination plot
- history.state.gov Office of the Historian, U.S. Department of State: authoritative summary of the conference's military and political outcomes, including the second-front decision, Poland's borders, and UN discussions
- history.navy.mil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U.S. Navy museum summary confirming the conference as the first Big Three meeting and its key outcomes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
- history.state.g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