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개조 요구
Twenty-One Demands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월 18일 일본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이 위안스카이의 베이징 정부에 비밀리에 내민 다섯 묶음의 요구. 산둥의 독일 권익 승계, 남만주·동부 내몽골의 특권, 한예핑 제철 회사 지배 등을 담았고, 중국 정부에 일본인 고문을 두게 하는 제5호는 열강의 반발로 빠졌다. 일본은 5월 7일 최후통첩을 냈고 위안은 5월 25일 조약에 서명했다. 전국적 일화 배척과 민족주의를 불러 5·4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상세
배경: 일본은 1914년 8월 23일 영일동맹을 근거로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칭다오와 자오저우만의 독일 조차지를 점령했다. 신해혁명 뒤 중국의 혼란과 유럽 열강의 전쟁을 기회로 본 오쿠마 내각과 가토 다카아키 외상은 요구 목록을 만들어 원로와 다이쇼 천황의 검토를 거쳤고, 히오키 에키 공사가 1915년 1월 18일 위안스카이에게 이를 은밀히 건넸다.
내용: 제1호(4개조)는 산둥의 독일 권익 승계와 철도·연안에 대한 일본의 세력권 확대, 제2호(7개조)는 남만주 철도 지대의 조차 기한을 99년으로 늘리고 남만주·동부 내몽골에서 거주·치외법권과 관리 임명권을 얻는 것, 제3호(2개조)는 한양·다예·핑샹의 한예핑 제철 회사 지배, 제4호(1개조)는 연안·도서를 다른 나라에 할양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제5호(7개조)는 중국 정부에 일본인 고문을 두어 재정과 경찰을 맡기고 푸젠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권을 주는 내용으로, 중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교섭과 결과: 중국 정부는 내용을 열강에 흘려 시간을 벌었고, 영국과 미국의 반발 속에 일본은 4월 26일 수정안이 거부되자 제5호를 빼고 5월 7일 이틀 기한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위안은 5월 25일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골에 관한 조약」과 「산둥에 관한 조약」에 서명했다. 일본은 얻은 것보다 영국·미국의 신뢰를 더 많이 잃었고, 중국에서는 일본 상품 불매 운동과 반일 민족주의가 일어났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가 산둥 권익을 일본에 넘기자 그 분노는 5·4 운동으로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