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인 바쿠 코미사르
26 Baku Commissars
1918년 9월 20일 밤 트랜스카스피아 철도의 페레발역과 아흐차쿠이마역 사이에서 총살된 바쿠 코뮌의 볼셰비키·좌파 사회혁명당 활동가 26명. 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 스테판 샤우먄과 바쿠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 프로코피 자파리제 등이 포함되었고, 소련은 이들을 혁명의 순교자로 기렸다.
상세
바쿠 코뮌이 무너진 뒤 지도자들은 아스트라한으로 가려다 카스피 함대에 붙잡혀 수감되었다. 1918년 9월 14일 바쿠가 오스만군에 함락될 때 아나스타스 미코얀이 이끈 무리가 이들을 빼냈고, 일행은 투르크멘호를 타고 아스트라한으로 향했지만 배는 크라스노보드스크로 갔다. 최근 연구는 선원들이 아스트라한에서 체포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으로, 소비에트 역사학은 배에 탄 영국 장교 두 명이 항로를 바꾸게 했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이들은 크라스노보드스크에서 체포되었고, 사회혁명당원 표도르 푼티코프가 이끄는 아슈하바드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투르크멘인 병사들에게 처형되었다. 26명에는 인민위원만이 아니라 경호원·서기·기자도 있었고, 그리스인·라트비아인·유대인·러시아인·그루지야인·아르메니아인·아제르바이잔인이 섞여 있었다. 미코얀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지금도 불확실하다.
소련은 처형의 책임을 영국에 돌렸다. 영국 연락 장교 레지널드 티그존스는 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으나 이들을 인질로 넘겨받자는 영국군 소장 윌프리드 맬리슨의 제안을 전하지 않았고, 역사가 리처드 울먼은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처형을 막을 수 있었다고 본다. 1926년 바쿠에서 재판을 받고 총살된 푼티코프는 티그존스가 총살을 명령했다고 주장했지만, 영국은 개입을 부인했다. 이 논란은 영국과 소비에트 정부의 관계를 더 나쁘게 했다. 유해는 1920년 바쿠 중심 광장에 다시 묻혔고, 이들은 영화·회화·우표와 기념비로 기려졌다. 2009년 아제르바이잔 당국은 26인 기념비를 철거하고 1월 26일 유해를 호브산 묘지로 옮겨 묻었는데, 아르메니아에서는 이를 아르메니아인을 수도 중심에서 치우려는 조치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