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당
Union of 17 October
1905년 10월 17일(구력) 니콜라이 2세의 10월 선언 직후 러시아 제국에서 결성된 입헌군주주의 정당. 대지주·기업가·관료층을 기반으로 한 러시아 자유주의의 온건 우파였고, 1906년부터 알렉산드르 구치코프가 이끌었다. 제3대 국가 두마에서 최대 교섭단체를 이루었으나 1913년 분열했고, 1915년 무렵 당으로서 사실상 활동을 멈추었다.
상세
10월당은 젬스트보·도시 대회의 온건 소수파를 바탕으로 생겨났고, 당명은 1905년 10월 선언에서 따왔다. 강령은 선언의 이행, 곧 군주정을 유지하면서 군주 권력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정과 시민적 자유를 요구했고, 「단일 불가분의」 러시아를 내세워 핀란드 외 지역의 자치를 거부했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당 조직은 1905년 10월 말 시작되어 1906년 2월 8~12일 모스크바의 제1차 당대회에서 마무리되었고, 첫 혁명기 당원은 약 7만 5천 명이었다. 중앙 기관지는 「골로스 모스크비」(1906–1915)였다.
입헌민주당과 달리 10월당은 처음부터 입헌군주정을 고수했고, 비테와 스톨리핀 정부와 대체로 협력했다. 1906년 제1·2대 두마 선거에서는 부진했으나, 1907년 6월 3일 선거법이 유산계급에 유리하게 바뀐 뒤 제3대 두마(1907–1912)에서 최대 교섭단체가 되었다. 러시아어 출처는 이때 의석을 154석으로 적고, 제3대 두마 의장 호먀코프·구치코프·로댠코가 모두 10월당원이었다고 적는다. 당은 스톨리핀의 개혁 법안과 토지 개혁을 지지했다. 1906년 8월 구치코프가 야전 군사 법정 도입을 지지하자 일부 창립자가 탈당해 평화쇄신당을 만들었다.
다수 의석을 정부 정책에 대한 영향력으로 바꾸지 못하면서 당은 흔들렸다. 1913년 11월 협의회가 정부를 10월 선언 위반으로 비판하는 결의를 채택한 뒤, 12월 두마 교섭단체는 셋으로 갈라졌다. 분열 규모는 출처마다 다르다. 영어 출처는 좌파 10월당 16명, 젬스트보 10월당 57명, 우파 10월당 13명으로, 러시아어 출처는 구치코프를 따른 좌파 22명, 로댠코가 이끈 젬스트보 10월당 65명, 독립을 선언한 15명으로 적는다. 1915년 7월 기관지 발행이 멈추고 중앙위원회도 더는 소집되지 않으면서 당은 사실상 소멸했고, 좌파 10월당과 젬스트보 10월당 일부는 진보 블록에 가담했다.
구치코프와 로댠코는 1917년 2월 혁명 때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설득하고 임시정부를 세우는 데 관여했다. 10월 혁명 뒤 랴부신스키 같은 일부 당원은 내전에서 백군에 가담했고, 백군 패배 뒤 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