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한가지

PeopleNikolai Yezhov, Joseph Stalin, Georgy Malenkov, Lavrentiy Beria, Genrikh Yagoda, Grigory Zinoviev, Lev Kamenev, Sergei Kirov, Leon Trotsky, Vladimir Lenin, Vyacheslav Molotov, Nikolai Bukharin, Lazar Kaganovich, Nikita Khrushchev, Anastas Mikoyan, Sergo Ordzhonikidze, Kliment Voroshilov, Mikhail Frinovsky, Karl Radek, Mikhail Tomsky, Andrey Vyshinsky, Yevgenia Yezhova TermsGreat Purge, Yezhovshchina EventsThe Great Purge

제4장

“어머나, 굉장한걸!” 앨리스가 말했다. “이렇게 금방 여왕이 될 줄은 몰랐는데—”

그리하여 니콜레타는 마담 리코바가 소냐를 위해 지어 둔 의상의 가봉을 받게 되었다. 평범한 재단이지만 청백색 운모 가루를 뿌려, 무대 조명 아래서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나는 드레스였다.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니!” 말라니야가 황홀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여태 군무진 표준 치수의 의상을 니콜레타의 바느질 솜씨로 고쳐 입어 왔다. 그런데 이 드레스는 처음부터 니콜레타의 남다른 몸 비례를 돋보이게 지어진 것이라, 차이가 확연했다. “꼭, 아유, 영락없는 에투알이야!”

니쿠샤 세르게예브나랑 짝지어 놓고 와서 미안하긴 해.” 니콜레타가 말했다. 니쿠샤에게 트위들덤 역을 주기 전에, 임프레사리오는 농담을 하나 했더랬다. 말라니야가 이대로 가다간 혼자서 쌍둥이 둘을 다 하고도 남을 몸집이 되겠다고.

“미안할 게 뭐 있어. 웃음이야 걔가 다 가져가겠지, 그 익살에.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난 웃음 안 사고 싶은걸. 그 대신 포스터에 실리는 기분이 어떤지 꼭 말해 줘야 해!” 극장의 신화들에 관심 많은 말라니야는 벌써 일러 준 것도 있었다. 니콜레타의 초상이 1학년 기숙사 벽을 장식한 그 커다란 벽화 속, 역대 에투알들 틈에 걸리게 된다는 것을.

이 초상화의 모델은 의무실 침대에서 섰지만, 니콜레타는 금세 다시 일어나 춤추고 있었다. 그리고 춤출 것은 산더미였다. 소냐 배역을 저 때문에 고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니콜레타임프레사리오께 우겼기 때문이다. 임프레사리오는 건강과 빠듯한 연습 일정을 들어 주저했다. 이윽고 절충안이 나왔다. 기력을 되찾는 동안에는, 어차피 본무대에서 하는 연습이니, 공연 첫머리에 다는 와이어를 연습 내내 달고 있어도 좋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어지럼증 문제는 해결되었다. 와이어는 조금도 거치적대지 않았다. 도르래를 잡은 미샤니콜레타를 공중으로 홱 낚아채 대롱대롱 매달아 놓는 게 재미있겠다고 생각할 때만 빼면. (이렇게 균형이 쉬 무너지는 몸이 되고서야 니콜레타는 새삼 알아차렸다. 미샤라브렌티도, 저를 들어 올려 이리저리 내던지는 데서 재미를 톡톡히 본다는 것을.) 게다가 스텝이 기억나지 않을 때도 받아먹을 신호가 지천이었다. 소냐는 이상한 나라와 거울 나라의 그 드센 주민들에게 끝없이 이래라저래라 지시받고 끌려다니는 처지니까. 손 떨리는 것으로 말하자면, 연습 전 브랜디 한 모금이면 그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소냐』의 한복판에 놓여 독무자들하고만 연습하게 되니, 이 발레가 전보다 한층 대단해 보였다. 익살과 착상의 자잘한 조각들이, 니콜레타가 보기엔 이것이 임프레사리오의 작품임을 틀림없이 새기고 있었다. 살아 있는 꽃들의 정원은 프티파가 『해적』에 넣은 「자르댕 아니메」의 패러디였다. 하얀 여왕이 핀에 찔리는 대목은 경쟁 발레 극장이 올린, 과장이 심한 오로라 공주와 물레 바늘 장면을 그대로—단, 거꾸로—베낀 것이었다. 거꾸로 사는 하얀 여왕 역의 마드무아젤 루주타카는 그 극적인 고통의 몸부림을 다 먼저 해치운 다음에 바늘에 찔릴 참이었다. 그러나 공연의 꼴을 잡아내는 임프레사리오의 재능은, 이것을 신기하고 우스운 디베르티스망의 나열 이상으로 만들었다. 전통에 바친 대목도 있었다. 거울 나라 곤충들의 왈츠는 발레 블랑이었다. 1층 객석의 소박한 취향에 바친 대목도 있었다. 흥겨운 바닷가재 카드리유가 그랬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나는 동안 소냐는 아주 반듯하게 춤추었다. 책 속의 소냐가 상대의 뒤집힌 논리에 한 번도 물들지 않듯, 짝이 되는 잡스러운 몸짓들이 제 폼에 묻는 것을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소냐는 언제나 공정함과 정의와 예절의 감각을 지켰다.

“그렇지만 이를테면 살아 있는 꽃들은 소냐한테 그렇게 무례하게 굴고도 끝내 버릇을 못 고치잖아요. 책에서는요.” 임프레사리오가 병상을 찾아 준 초기의 어느 날, 니콜레타는 그렇게 말했더랬다. 그분은 겐리하를 처치한 방식을 두고—고맙기는 하다마는—니콜레타를 야단치고, 다시는 스스로를 위험에 밀어 넣지 말라고 엄명한 다음에야 공연 이야기로 넘어와 주었다.

“무대에 올려놓은 걸 보며 나도 같은 생각을 하던 참이었네.” 임프레사리오가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어떻게 고칠지 마땅치 않더군.”

“참나리가 다른 꽃들의 버르장머리를 꾸짖고, 꽃들이 제 잘못을 깨닫는 대목을 몇 마디 끼워 넣으면 아주 간단해요.” 니콜레타가 말했다.

“그리고 소냐한테 사과의 무릎 인사를 올리는 거지. 그래, 바로 그거야. 객석의 어린이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교훈이 좀 들어가야지.” 그분은 파이프를 뻐끔거렸다. “그러고 보니 소냐는 이상한 나라의 구원자 아닌가. 하트 여왕에게서 기니피그며 도마뱀이며 카드들을 다 풀어 주는데, 정작 그것들은 그리 고마워하는 기색이 없지 않나?”

“고마움을 표할 새도 없이 소냐가 잠에서 깨어 사라져 버리니까요.” 니콜레타가 곰곰이 말했다. “그리고 카드로 말하자면 몇몇은 여왕의 친자식이니, 여왕이 폐위되는 게 반갑지 않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여왕은 제 자식과 병정도 구별 못 한다고 화자가 짚어 주지 않나. 대접인들 다를 게 있겠나. 아무튼 1막 끝에 짤막한 팡파르를 하나 지어 붙여서, 좀 더 개선가답게 맺어 봐야겠네.”

“한 가지 더요.” 니콜레타는 자못 대담하게 운을 뗐다. “소냐한테 로맨스가 있으면 어떨까요? 뭘 새로 넣자는 게 아니라,” 서둘러 설명을 붙였다. “그냥 여운 있는 눈길 한 번이라도요? 사랑 이야기가 없는 발레라니 어쩐지 허전해서요.”

“소냐한테 구혼자는 좀 이르지 않나?” 임프레사리오는 미심쩍어했다. 그러나 적어도 거울 나라에 다다를 무렵의 소냐는 어른이 되기 시작한 참이라고 니콜레타는 우겼다. 그리하여 로맨스의 주인공감으로 하얀 기사가 나은가 모자 장수가 나은가를 놓고, 한바탕 활기찬 토론이 벌어졌다.

주역들은 대체로 예의 발랐다. 마드무아젤 오르조니키제를 비롯한 몇몇은 원래부터 니콜레타와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겐리하 그리고리예브나를 아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주역 여럿이 얽혀 있을 그 대규모 비리 조직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음에도—니콜레타는 그렇게 확신했다—애초에 인망 있는 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니콜레타가 그것을 안다고 의심하는 눈치는 없었다. 겐리하의 퇴출로 누군가는 안다고 짐작했다 한들, 내색을 잘도 감추었다. 그들도 말라니야처럼, 겐리하가 왜 하필 제 대역을 독살하려 했는지 사연을 듣고 싶어 안달이었다. 니콜레타는 이야기를 하나 지어 들려주며 남모르는 재미를 봤다. 겐리하의 어느 숭배자가 그만 저에게 반해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 숭배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배역이 자기네 중 하나한테 갔어야 한다고 꽁해 있는 축도 몇 있긴 하지.” 니콜레타임프레사리오의 주치의가 준 알코올램프 주전자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 물건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을 장뇌 냄새 나는 김구름으로 채웠다. 몸에 이롭기야 하겠지만, 니콜레타가 보기에 이 괴상한 물건의 으뜸가는 공로는 그 소음이었다. 밤에 말라니야를 깨우지 않겠다는 명목으로, 겐리하 그리고리예브나의 빈방으로 옮겨 갈 구실이 되어 주었으니까. “마드무아젤 소콜니코바가 그러는 걸 분명히 들었어. 공연까지는 아직 짬이 있으니, 좀 더 노련한 무용수를 조련해 세울 수도 있다나.”

말라니야가 겁먹을까 봐 일러 주지 않은 것이 있었다. 실은 벌써 야릇한 협박을 하나 받았던 것이다. 주역들 중 누군가의 짓이라 짐작할 수밖에 없는, 토슈즈 한 짝에 든 곱슬머리 한 타래의 형태로. 탈의실에서 부츠 끈을 풀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제 머리카락인 줄 알았다(수은염과의 만남 이후로 머리가 뭉텅뭉텅 빠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불빛에 비춰 보니 제 머리색이 아니었다.

“마드무아젤 소콜니코바가 무슈 브론시테인 밑에서 일하는 걸까?” 말라니야는 건성으로 궁금해하며, 옷장에서 겐리하의 캐시미어 드레스를 꺼내 거울 앞에 대 보고는 한숨과 함께 도로 걸었다. 말라니야도 이 방 바꾸기가 반가웠다. 옛 방에 혼자 남게 되어서가 아니라(그건 오히려 견디기 힘들어했다), 겐리하가 그 좋은 옷가지를 다 두고 갔기 때문이다. 그 전직 간수가 짐을 찾으러 오지 않는 것은 자존심 때문이거나, 복직될지 모른다는 헛된 기대 때문이리라. 어느 쪽이든 니콜레타는 친구에게 일러두었다. 갖고 싶은 건 뭐든 가지라고.

“내 생각은 말 안 하는 게 좋겠어.” 니콜레타가 말했다. “아직 최종 결정이 안 났으니까.”

“그래도 척 보면, 하는 애랑 안 하는 애가 구별돼?” 말라니야가 물었다.

“곤란한 건, 안 하는 애를 찾는 거야.” 무엇을 볼지 알고 나니, 무슈 브론시테인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도처에 보였다. 마드무아젤 소콜니코바는 값나가는 새 산호 장신구 일습을 번쩍였다. 핀으로 사람 찌르기를 재미로 아는 그 지독히 밉살스러운 마드무아젤 마랴시나는 새 코담뱃갑이 생겼다. “그리고 난 여태 마드무아젤 리트비노바가 무릎 위까지 미는 건 그냥, 그, 세상 물정에 밝아서인 줄 알았단 말이야.” 니콜레타가 말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아유, 말하지 마!” 말라니야가 빽 소리를 질렀다.

이제는 후원자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곱씹어 볼 일이었다. 니콜레타는 용의자들이 하나같이 뿌리는 값비싼 향수까지 의심했다. 그러다 임프레사리오가 비밀 하나를 일러 주었다. 마담 울리야노바 시절로 거슬러 오르는, 군무진은 모르는 전통이었다. 주역마다 고유한 향이 배정되어 있어서, 지도하는 마스터가 연습에 누가 빠졌는지 본능적으로 단박에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면의 균형을 잡는 데도 도움이 되네.” 그분은 이었다. 향은 무용수 각자의 개성과 기량에 맞춰 배정되었다. 부하리나는 장미, 코스트리코바는 제비꽃, 그런 식이었다. 꽃다발을 묶듯, 독무자를 둘러싸고 받쳐 줄 무용수들을 고를 수 있도록. 당분간 니콜레타겐리하의 향을 물려받기로 했다.

“감초 같아.” 겐리하의 방에서 찾아낸 분무 병의 냄새를 맡으며 말라니야가 말했다. “응, 그 사람다웠겠다.”

“어느 향이 누구 건지 아니까, 이젠 모퉁이 너머에서 누가 오는지 보기도 전에 냄새로 안다?” 니콜레타가 으스댔다.

“아유, 어쩜 하나같이 이렇게 흉측한 일이람. 프랑스나 뭐 그런 데서는 이런 일이 있다고 듣긴 했고, 이름은 말 않겠지만 다른 극장들에서도 그렇겠거니 했지만, 여기서라니! 그것도 다들, 마담 지노비예바가 문으로 들여보내는 아무한테나 다리를 벌렸다니. 상상이 되니, 니콜레타? 난 안 돼.”

그러나 니콜레타는 상상력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게 어떤 식이었을지 몸소 보여 주겠다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말라니야가 신사 역을 맡았고, 겐리하가 쓰던 반들반들한 상아 의료 기구 덕에 재현은 한결 실감을 얻었다.

물론 겐리하와 어울렸을 무대 일꾼들도 하나같이 용의선상에서 뺄 수 없었다. 그 수가 많기도 했다. 무슈 아그라노프, 슬루츠키, 세레브랸스키만 꼽아도 그랬다. 부하리나와 마드무아젤 크레스틴스카야임프레사리오에 대한 불평불만을 그리 요란하게 떠들어 댄 것만으로 자백이나 진배없었다.

“그리고 이름을 바꾼 애들이 꽤 있어요. 흔한 일이 아니잖아요.” 니콜레타라브렌티에게 말했다. 라브렌티는 이제 극장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매일 연습에 필요한 정식 연습 지도자가 된 것이다. 게다가 니콜레타가 병상에 묶여 있는 동안 문단속 일도 대신해 주고 있었다. 이 일은 극장 바깥 사람, 니콜레타가 캐는 음모에 얽힐 데도 걸릴 데도 없는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고 임프레사리오가 설명했던 것이다. 니콜레타는 그 말을, 라브렌티에게는 모험담 전부를 털어놓아도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흔한 일이 아닌가?” 라브렌티가 물었다. “너랑 마드무아젤 말렌코바도 그 어여쁜 프랑스 이름이 있잖나.”

“그렇긴 한데—그, 우린 이제 그 이름 안 쓸 거예요.” 니콜레타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필 마드무아젤 리트비노바를 본떠 논다는 게—입단하며 이름을 더 러시아식으로 갈아 치운 그 리트비노바를—이제는 어쩐지 온당치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너는 생일도 바꿨잖아.” 미샤가 말했다. 요즘 미샤는 그 배경화가가 니콜레타를 찾아올 때마다 라브렌티 뒤에 바짝 붙어 다녔다.

그러나 니콜레타미샤가 그 화제로 더 지껄이지 못하게 단속했다. “요즘 그림 그릴 짬은 나요, 라브루샤? 배경막은 잘돼 가요?”

“형편없지.” 라브렌티가 말했다. “그 양반이 밤낮없이 연습을 시키는데.”

“하긴, 대장님이 새 반주자 뽑을 시간은 있으셨을 텐데.” 미샤가 거들었다. “왜 자넬 계속 붙들고 계신대?”

“나야 기꺼이 물러나고 싶네만, 그 양반 눈에 내가 뭐가 보인다는군.” 라브렌티가 대답했다. “나는 도무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임프레사리오는 물론 아주 신중하게 판단하는 분이었다. 그래도 서재에서 니콜레타와 증거물을 검토하면서 두 가지는 인정해 주었다. 『에올리네』의 뤼베찰 소동이 마드무아젤 라데카가 무슈 브론시테인에게 보낸 신호였다는 것(잠정적으로). 그리고 브론시테인의 편지에 나오는 극장 재정 언급들이, 예산을 짜는 그 밉살맞고 굽실대는 마드무아젤 퍄타코바를 가리킨다는 것.

“그렇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 해.” 니콜레타말라니야에게 설명했다. “한꺼번에 다 잃을 수는 없어. 밖에서 보면 수상할 테고, 브론시테인이 눈치챌 테니까. 한 번에 두엇씩으로 만족해야지.”

라데카퍄타코바를 치울 기회는 라데카 쪽에서 굴러들어 왔다. 어느 날 탈의실에서 라데카가 소리 내어 궁금해한 것이다. 임프레사리오의 작고한 부인 생신을, 극장이 올해도 기념하려나?

“그러니까 말이야, 늘 그분을 위해 조촐한 희극 공연을 해 드렸거든.” 니콜레타말라니야에게 설명을 이었다. “그러니까, 돌아가시기 전엔. 지금이야 생신이랄 것도 없겠지만, 주역들은 다들 올해도 뭘 올리나 궁금해할 거란 말이지. 다른 애들한텐 안 한다고 할 거야. 그리고 마드무아젤 라데카랑 마드무아젤 퍄타코바한테만 주역을 맡기는 거지.”

말라니야는 이 말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반면 니콜레타임프레사리오가 이 구상을 내놓는 순간 그 논리를 알아보았다.

“사상 처음으로, 부득이 오디션을 열게 되었다고 공표하는 걸세.” 그분은 그렇게 정했다. 주역들의 기량을 문제 삼는 것. 그것이야말로 임프레사리오가 저들의 수작을 안다는 티를 내지 않고 썩은 가지들을 쳐내는 방도였다.

이 가짜 오디션을 두 죄인에게 제안하는 일은 니콜레타에게 떨어졌다. 명목은 공연이었다. 해마다 부인께 올리던 여흥의 전통대로, 『소냐』의 미친 다과회 장면을 패러디한 공연. 겉꼴은 끔찍하게 망해 버린 오디션이되, 퍄타코바라데카(모자장이와 3월 토끼)는 실제 공연 속 제 배역을 웃음거리 삼는 장난이겠거니 여기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앙부아테를 하다가 다리가 홀랑 꼬여 버린다든가요.” 그들만의 연습 자리에서 니콜레타라데카에게 제안했다.

“아니지, 봐, 난 벌써 다 짜 놨어.” 라데카가 두꺼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연습이 끝나고 니콜레타가 따로 불러 이 계획에 끌어들인 순간부터, 라데카는 신이 나 있었다. “식탁에서 새 찻그릇 쪽으로 자리를 한 칸씩 옮길 때—그러니까 의자들을 넘는 그 높은 파 드 샤를 할 때, 내가 내 의자에 보기 좋게 걸려서 글리케리야 야코블레브나 쪽으로 넘어지는 거야. 어때, 글리하? 살아남을 수 있겠어?”

겨울잠쥐 역의 마드무아젤 소콜니코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실감 나는 구석은 남겨 둬야 해요.” 니콜레타가 말했다. “진짜 실수처럼 보여야 하거든요, 왜냐하면……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게 바로 광대짓의 정수니까, 물론!” 라데카가 대신 맺어 주었다. 제 것이라 여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신나서 따라오는 그 자존심에, 니콜레타는 고마워할 이유가 있었다.

“이 일이 끝나면 물론, 더는 단원들한테 숨길 이유가 없어지네.” 임프레사리오가 말해서 니콜레타를 놀라게 했다. 그 낯빛을 보고 그분은 설명을 붙였다. “동료들이 재오디션을 보는 이유를 무엇으로든 설명해 줘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퍄타코바라데카의 퇴출이 확실해지고 나면, 모두에게 알려도 안전해진다고 그분은 이었다. “하기야 그들이 우리 안의 마지막 브론시테인 사람들은 아니네만, 그자와 직접 서신을 트고 지낸 건 아마 그 둘뿐일 걸세. 눈과 귀가 사라지면, 그자는 저들이 잘린 연유를 알 길이 없어지지.”

‘그럼 마드무아젤 소콜니코바도 같이 나가야겠구나. 그 장면에 끼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브론시테인한테 편지 쓴다는 확증은 없는데도.’ 니콜레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기야 그렇게들 좋은 친구 사이니, 하다못해 편지 부치는 심부름이야 해 주고도 남았겠지.’

그러나 니콜레타 자신이 임프레사리오의 눈과 귀임을 밝힐 때는 아직 아니었다. 주역들 틈에 심긴 밀정으로서의 그 자리는, 버리기엔 아직 너무 값졌다. 임프레사리오가 혐의 밖이라 여기고 계획에 끌어들일 만큼 믿는 아이가 몇은 더 있었다. 물론 슬라바가 있었고, 라자라 모이세예브나가 있었고,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마드무아젤 안나 야누아리예브나 비신스카야가 있었다. 니콜레타임프레사리오의 안목을 믿었다. 그래도 다른 극장에서 굴러들어 온 이 아이가 그 친정을 회고하는 애틋함의 정도는, 니콜레타가 보기에 수상쩍었다. 하지만 마지못해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손수 지어낸 소름 끼치는 살인 이야기로 기숙사생들을 새벽까지 잡아 두는 취미의 비신스카야야말로, 모여든 단원들 앞에서 음모의 전말을 설명하는 소임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비신스카야가 말해 줄 것이었다. 브론시테인의 협박이 어떻게 라데카와 나머지 둘을 그 배역들에 앉혔는지. 그러나 (임프레사리오는 그만큼 공정한 분이므로) 지금이라도 오디션만 통과하면 배역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물론 라데카소콜니코바퍄타코바는 이 이야기를 한마디도 듣지 못할 것이었다. 그 성대한 공연의 막이 오를 때까지 분장 대기실에 있을 테니까.

마침내 그 밤이 왔을 때 니콜레타가 무엇보다 즐긴 것은, 라데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었다. 저 스스로 짜 넣은 우스개 넘어지기에 객석이 웃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의 그 표정. “한마디로 자못 근엄한 반응이었죠.” 나중에 니콜레타임프레사리오에게 그렇게 회고하게 된다. 그래도 라데카는 어찌어찌 끝까지 해냈고, 무대 옆에서는 슬라바 미하일로브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훌륭한 공연이었다고, 보던 아이들이 피곤했을 뿐이라고 안심시키며, 슬라바는 세 주역을 무대 뒷문으로 데려갔다. 문밖에는 마차가 대기하고 있어서, 임프레사리오 부인의 생신을 늘 자축하던 그 고급 식당으로 데려다줄 것이라 했다. 그렇게 듣기로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실제로는 슬라바가 (건장한 무대 일꾼 몇의 조력을 받아) 세 사람을 뒷길로 기숙사로 호송해, 짐을 챙기게 한 뒤 내쫓을 것이었다.

(그날 밤 니콜레타는 잠자리에 누워 궁금해했다. 임프레사리오의 부인은 생전에 이 생일 소동을 조금이라도 반가워하셨을까. “여태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쉽지 않았을 거야, 그분의 아내라는 건.” 니콜레타는 혼잣말을 했다. “그분 둘레엔 늘 계집애들이 저렇게 몰려 찰랑대니까.”)

공연이 끝난 극장에서는 마드무아젤 비신스카야가 웅성이는 청중에게 일렀다. 이 딱한 화류계 아가씨들이 청탁이 아니라 실력으로 배역을 땄더라면 발레단에 남았을 거라고. 그러나 저들에겐 배역을 연습할 까닭이 없었다고. 무슈 브론시테인임프레사리오를 한층 욕보이려고, 공연에서 일부러 형편없이 추도록 저들을 사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도 배역을 부정하게 얻은 아이를 알거든, 나한테 말해 주는 게 좋을 거예요.” 비신스카야는 그렇게 연설을 맺었다.

그 뒤 며칠 동안 비신스카야는 그런 보고를 적잖이 넘겨 왔다. 다만 값어치가 미심쩍은 것이 많았다. 이런 식이었다. 연습에서 어떤 아이가 발을 헛디딘다. 줄에서 그 뒤에 선 아이가 이것을 그 애가 두 마담의 새끼들이라는 표징으로 받아들인다. 캐물어 보면, 피의자는 제 토슈즈에 핀이 꽂혀 있었다며 고발을 고발인에게 되돌려 보낸다. 이런 주장들이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판이라, 니콜레타는 진상을 캐는 데 좀 더 은밀한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연습 도중 속이 안 좋다고 빠져나와, 기숙사동으로 가서 제 열쇠로 주역 한둘의 방을 뒤지는 것이었다.

그러는 내내 니콜레타임프레사리오는 드러난 아이들의 후임을 의논했다. 이를테면 마드무아젤 소콜니코바가 비운 겨울잠쥐 역은 꼬마 나스탸가 맡을 것이었다. 그리고 마드무아젤 리트비노바가 붉은 여왕 자리를 비울 조짐이 갈수록 뚜렷했으므로, 그 자리엔 슬라바가 들어설 채비가 되어 있었다. “하트 여왕이랑 하얀 여왕 중에 어느 쪽 의상이 나은 것 같아?” 어느 날 말라니야가 머리를 종이로 말면서 물었다. 저에게도 자리 이동이 오려니 기대하고서.

그리고 다음 오디션을 궁리할 차례였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두 마담의 비밀이 다 알려진 마당에, 브론시테인의 남은 종들이 오디션에 응하도록, 떨어지도록, 그리고 떨어진 뒤 얌전히 떠나도록 무슨 수로 구슬린단 말인가?

“오디션에는 응할 걸세. 저들은 제 배역을 알 만큼 안다고, 라데카처럼 덜미 잡힐 일은 없다고 여길 테니까.” 임프레사리오가 파이프를 뻐끔이며 말했다. 그러나 저들이 어째서 반드시 떨어지는가는 여전히 큰 물음으로 남았다.

어느 날 밤 니콜레타는 세면실에서 바로 이 문제를 굴리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서 쉭쉭대는 커다란 구리 물통에서 더운물을 실어 나르는 물꼭지 하나를 틀어 놓고, 몸을 적시던 참이었다. 타일 바닥은 동료 무용수들이 애용하는 마그네시아 분 줄기로 하얗게 흘렀다. 하기야 그 낯빛을 감상해 줄 사람이라곤 마스터들과 무대 일꾼들뿐이었고, 그들 역시 몇 주째 실내에만 갇혀—볕이라곤 극장의 담 두른 정원 산책으로나 쬐는 처지라—이미 하나같이 창백했다. 분가루의 텁텁한 냄새가 공기에 짙게 걸려 있었다. 그 밑으로 니콜레타는 살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땀에 전 살과 눅은 무명 냄새를.

“저러면 순진무구해 보이는 줄 아나, 다들?” 니콜레타는 혼잣말을 했다. “뭐, 그런 거라면 그 가루로 눈처럼 하얗게 칠갑을 하시라지. 내 코는 향수로 단련된 몸이야. 쥐새끼 냄새라면 어느 사냥개보다 빨리 맡아낼걸.”

니콜레타는 세면실에서 미적대는 버릇이 들어 있었다. 아무리 눈 높은 신사 친구라도 깨끗이 씻겼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시점을 한참 넘겨서까지. 칸막이 위로 머리가 보이지 않는 덕에, 아무 눈에도 띄지 않고 대화를 엿듣기에 그만인 방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엔 방에 남은 사람이 저 하나뿐이었다. 슬슬 물기를 닦고 올라가 잘까 하던 참에, 타일 위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옆 칸으로 들어섰다.

니콜레타 이바노브나.” 소피코 오르조니키제의 목소리였다. 니콜레타는 잠자코 있었다. “너인 거 다 알아.” 소피코가 숨죽여 웃으며 말했다. “칸막이 위로 머리 안 보이는 건 너 하나거든.”

소피코 콘스탄티노브나, 이 시간에 나한테 무슨 볼일이에요?” 니콜레타가 물었다. 미끌미끌한 소피코와 한바탕 몸장난이라면 반가웠겠지만, 이 크고 왁자한 아이의 목소리에는 그런 놀이를 청하려는 게 아니라는 낌새가 있었다.

“난 네가 친구라는 걸 알아.” 소피코가 운을 뗐다. “귀한 친구, 오랜 친구지. 내가 언제나 우리 임프레사리오 편이었다는 건 너도 알잖니. 그분이 무슈 브론시테인이랑 싸우실 때, 마담 지노비예바랑—그러니까 두 마담이랑—그리고 부하리나랑 싸우실 때 말이야. 아 참, 마담 리코바도. 그러니까 그분을 흉보자는 게 아니야. 그건 알지, 니콜레타 이바노브나?”

“아—알죠.” 니콜레타는 갑자기 후끈 달아오르는 기분으로 말했다.

좀처럼 말문이 막히는 법 없는 소피코가 헛기침을 했다. “있잖니, 요전 날 클라라 베른가르도브나 오디션을 곰곰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라데카의 이름은 하도 드물게 들어서 알아듣는 데 한참 걸렸다. “그게 왜요?” 니콜레타는 경계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니콜레타, 걔가 연습에서 그렇게 춘 적은 정말 한 번도 없단 말이야. 셋 다 배역을 알 만큼은 알고 있었다고 내 장담해. 혹시 아팠던 건 아닐까? 고기가 상한 걸 먹었다든가, 아니면—”

“아팠든 안 아팠든, 무슈 브론시테인 밑에서 일한 사람들이에요.” 의도한 것보다 날카롭게 말이 나갔다. 김에 어질해져서, 니콜레타는 수도꼭지를 홱 잠갔다. “마드무아젤 비신스카야가 한 말 못 들었어요?”

“했다는 거야 이제 알지.” 소피코가 한숨지었다. “내가 좀 바보 같은 소릴 하고 있어, 그건 맞아. 그런데 자꾸 이 생각이 드는 걸 어떡해. 클라라는 제 배역을 알고 있었어. 그리고 얘, 걔가 낯선 남자들이랑 어울리는 건 본 적이 없단 말이야. 몇 주 내내 마드무아젤 퍄타코바랑 내 춤을 맞춰 왔는데, 이상한 건 한 번도 못 봤어.”

니콜레타는 머뭇거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무서운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마드무아젤 오르조니키제를 공모자 명단에서 지운 게 너무 성급했던 걸까?

“그게, 내 생각엔—우선, 두 마담이 돌아온 그날 밤에 네가 임프레사리오를 쫓아 무대 밑으로 달려 들어가는 걸 봤거든. 그래서 짐작해 본 거지. 겐리하가 널 독살하려던 것도, 걔가 한패였다는 걸 이제 알고 보니, 네가 그때 벌써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내 말이 맞지?”

“아뇨.” 니콜레타는 제 부주의를 속으로 저주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체가 드러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걔가 내가 안다고 지레짐작했나 보죠.”

“그럼 혹시 너도 밤의 그 음악을 듣고 있다가, 걔한테 그 얘길 꺼냈고, 그래서 걔가 널—”

“뭘 들어요?” 이건 니콜레타에게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음악 말이야. 우리가 다 방에 얌전히 갇힌 한밤중에 시작되는 음악.”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렸다. “그리고 그게 이 일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소피코?”

“그러니까, 그것만 아니면 나도 이럴 거야. 다들 제 배역을 잘 알고, 브론시테인 밑에서 일했을 만한 애들은 이미 다 나갔고, 그러니 우리 모두 서로 대견해하고 이만 자러 가면 된다고. 그렇게 말할 거야. 그런데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대목들이 자꾸 남는단 말이지. 잠자리에 누워서 말똥말똥.”

소피코.”

“혹시 두 마담이랑 무슈 브론시테인 밑에서 일한 게 클라라가 아니라 딴 사람이고, 그 누군가가 오디션 전에 클라라한테 독을 먹인 거라면, 있잖아—”

소피코.” 니콜레타가 다시 말했다. “가서 자요. 씻으려던 거면 내일 씻고. 정 안 되면 귀에 밀랍이라도 틀어막고 자라고요. 언니가 먼저 나가기 전엔 나 이 방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가요, 맹세코.”

“하긴 네 말이 맞다.” 소피코가 한숨지었다. “나한테 필요한 건 그거지, 그렇지? 네 말이 맞아.” 누가 봐도 거기서 그만두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무언가에 떠밀리듯, 소피코는 숨을 깊이 들이켜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니콜레타, 안나 야누아리예브나가 우리한테 들려준 그 이야기 말이야. 그게 이상하게 닮았단 말이지…… 우리가 지어낸 하찮은 이야기랑. 나랑 클라라세라피마랑, 다른 애들 몇이랑. 그냥 심심풀이였어. 마담 지노비예바한테 압수당했지만. 언젠가 뮤직홀에서 독심술사를 본 적이 있는데, 내가 독심술사는 아닐 텐데, 그런데 그게 다 이뤄지고 있는 거야. 우리가 상상한 그대로. 자꾸 이 생각만 들어. 나 미쳐 가는 걸까?”

소피코, 좀 그만해요! 밤의 음악이라니?” 니콜레타는 인내심이 바닥나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래, 말도 안 된다 이거지?” 소피코도 마침내 언성을 높였다. “세라피마 미로노브나는 내 제일 오랜 친구였어. 그런데 사라진 그 밤 이후로 편지 한 장이 없어! 그러고도 의심을 안 하나 어디 네가 해 봐. 밤잠을 잘 자나 네가 해 보라고. 그런데 이젠 내 남은 친구들까지 다 데려가려고 들어.”

“내가? 내가 데려가?” 니콜레타도 마주 고함치며 칸에서 뛰쳐나와, 문가 봉에 걸린 제 옷가지로 달려갔다. 퍄타코바의 결백을 비는 것만도 큰일인데, 이젠 소피코가 사건의 사실관계까지 의심하고 있었다. 이 대담을 임프레사리오께 고해바치고 싶지 않았는데, 이젠 도리가 없었다. 그때 새로운 생각이 스쳤다. 토슈즈 속의 그 곱슬머리 타래가 소피코의 것이라면? 그런데 그건 무슨 뜻이 되는 거지?

“내 방이 극장에서 제일 가까운 방인 거 몰라?” 소피코는 제 알몸은 아랑곳도 않고 칸막이 커튼을 홱 젖히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니콜레타는 부랴부랴 실내화를 꿰고 머리의 물을 쥐어짰다. 소피코가 정말 실성한 거라면 결국 몸싸움이 날지도 모르는데, 이걸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다가는 승산이 없었다.

그러나 소피코의 태도에 주먹다짐의 낌새는 없었다. “극장에서 제일 가깝고, 임프레사리오 서재에서도 제일 가깝단 얘기야.” 소피코가 설명했다. “네가 그분 뵈러 계단을 오를 때, 넌 바로 내 머리 위를 지나가는 거라고. 세라피마도 나랑 한방일 때 그 길로 몰래 그분을 뵈러 다녔고. 봐, 난 네 비밀을 지켜 줬어. 네 일이니까, 그리고 널 좋아하니까. 그런데 내가 마음먹고 조용히 물어보니까—우리 둘 다 임프레사리오의 친구인데—넌 대뜸 성부터 내고—”

이 말들을 니콜레타는 나중에야 되새기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는 다른 데 생각이 딱 걸려 있었다. 소피코의 방이 극장과 그렇게 가깝다는 사실에. ‘그럼 걔가 듣는 음악은 그냥 라브렌티 연습하는 소리잖아. 아유, 이렇게 허무한 일이 있나. 웃음이 다 나오려 그러네!’

“이번엔 왜 웃어?” 소피코가 물었다. 그러다 니콜레타의 손에 머리카락이 한 움큼 묻어나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숨을 삼켰다. “얘, 니콜레타, 너 요즘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니?”

니콜레타가 대답할 기회를 얻었는지 어쨌는지. 얻었다면 소피코가 무어라 대답했을지. 니콜레타로서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 사달이 나기 얼마 전부터 니콜레타는 시간을 통째로 잃어버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춤추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식탁에 앉아 있다. 그것이 차 시간인지 저녁 시간인지는, 둘레 사람들의 거동에서 실마리를 주워 맞추는 수밖에 없다.

때로는 눈앞의 그림을 이해하는 것부터가 난제였다. 세면실에서 소피코와 다툰 뒤, 몇 분인지 몇 시간인지 모를 시간을 잃고 정신이 돌아왔을 때가 그랬다. 눈앞의 그림은 희고 붉고, 악취를 풍겼다. 처음엔 제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맡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등불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대로, 어둠 속을 헤집는 빛줄기 속에 토막토막 보일 뿐이었다. 그림의 가장자리엔 슬리퍼며 부츠를 꿴 발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니콜레타 제 발은 시렸다. 그림의 주인공으로 말하자면. ‘가죽 벗긴 사람 그림을 본 적이 있지, 언젠가, 역사책에서.’ 니콜레타는 속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 개들은 순하고 착한 애들이에요.” 클레멘티나 예프레모브나의 목소리였다. 울고 있구나, 하고 니콜레타는 알아차렸다. “덩치만 큰 강아지들이라, 짖는 것 말고는 경비견 구실도 못 한다고요!”

‘개가 사람을 잡아먹기로 마음먹었으면 단숨에 먹어 치웠을 텐데.’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어쩌자고 저렇게 헤집어 놓기만 했을까?’

“그래서, 누구야?” 슬라바 미하일로브나가 물었다. ‘퍽 실없는 질문이네.’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누구인지는 마음속에 한 점 의심도 없었으니까. 엎드린 채였고, 살가죽이 벗겨 낸 오렌지 껍질처럼 몸 둘레에 흐트러져 있었는데도.

“키를 봐, 이 맹추야. 머리칼을 보라고.” 안드레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 덩치 큰 그루지야 애 말고 누구겠어?”

“아니야, 아니라고!” 클레멘티나가 울부짖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원, 안된 일이지.” 라브렌티가 말했고, 니콜레타는 그제야 소피코의 몸에서 눈을 들어, 그것을 둘러싼 무리에 이름을 붙여 보았다. 등불을 든 라브렌티 말고는 모두 무용수였고, 모두 이미 임프레사리오의 심복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들 등 뒤 하늘빛과 숲 가장자리의 새소리로 미루어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아주 가깝지는 않게.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이렇게 물어볼 수 없다는 게 아깝네. 「미안하지만 얘들아, 임프레사리오가 으르렁대는 소릴 들으시고 우릴 눈밭에 내보내신 거니, 아니면 우리가 다들 제 발로 나온 거니?」’ 새 생각이 떠올랐다. 소피코가 반쯤 뜯어먹혔다는 걸 임프레사리오는 벌써 아실까, 아니면 설명해 드려야 할까? 소피코는 대체 어떻게 기숙사 밖으로 나왔지? ‘씻고 나서 통금 언저리까지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어디 숨어 있다가 다들 잠긴 다음에 빠져나왔겠지. 그런데 왜? 아, 그 밤의 음악이 라브렌티일 뿐이라는 걸 내가 미처 설명 못 해서인가!’

“아무도 못 빠져나가게 지키는 게 네 소임이었잖아!” 슬라바니콜레타에게 씨근댔다.

“이 아가씨한테 그런 말투를 쓰시겠다면, 아가씨,” 니콜레타가 입을 떼기도 전에 라브렌티가 받아쳤다. “우린 기꺼이 등불 들고 가 버리는 수가 있어.”

‘어젯밤에 내가 문단속을 하긴 했나, 안 했나?’ 니콜레타는 속으로 궁금해했다. ‘라브렌티가 날 감싸고 나선 건 무슨 뜻일까? 나랑 같이 온 건가, 아니면……?’

“나 저 개들이랑 놀아 본 적 있어.” 아나스타시야가 곰곰이 말했다. “풀어놓고 뛰노는 옆에서 잔디밭 소풍도 했는걸.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지.”

“싸움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애 아니었나?” 안드레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묻는다기보다 단정하듯 말했다. 편두통 때문에 머리에 띠를 두르고 있어서 그 꼴이 자못 우스꽝스러웠다. “한판 붙자고 뛰쳐나와서는, 개들을 두들겨 대다가 저 지경을 자초한 거겠지.”

“한마디만 더 하면 계단 아래로 걷어차 줄 테다.” 라자라가 대꾸했다.

“개들은 지금 우리에 있어.” 슬라바가 말했다. “나오다가 차 마시러 들어가는 마구간지기를 만났는데, 그 사람은 별일 없었다더군.”

“개가 아니었다면요?” 니콜레타가 물었다. “만약에—”

“눈밭에 누워 있다 감기 들라, 얼른 깨우는 게 어때요?” 클레멘티나가 훌쩍이며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아주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 제 꼴을 한층 우습게 만들려는 것을, 라자라가 붙들어 말려야 했다.

니콜레타 이바노브나, 무슈 브론시테인이 요즘은 그 큰 이빨로 사람을 짝짝 씹어 놓는 취미가 생겼다는 걸 믿으란 말이야?” 니콜레타의 암시를 알아들은 아나스타시야가 물었다.

그러나 작은 무리는 잠잠했다. 무슈 브론시테인에 관해서라면, 믿기 어려운 일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슬라바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왜 이 애가 한밤중에 여길 나왔느냐야.”

‘쫓겼을까, 꾀였을까, 아니면 잠결에 걸었을까?’ 니콜레타는 궁금해했다. ‘용감하게 원수와 맞서러 나온 걸까, 몰래 울 데를 찾던 걸까, 도망치던 걸까?’ 소피코는 트렁크를 갖고 있지 않았다. 오래 떠나 있을 작정이었을 성싶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게 다른 애들 눈에 어떻게 보이겠느냐지.” 안드레야가 말했다.

“글쎄, 겁나 보이겠지.” 아나스타시야가 모두를 대신해 대답했다.

“지금은 네 머리가 자못 겁나 보인다, 니콜레타.” 아까부터 니콜레타를 골똘히 뜯어보고 있던 라브렌티가 한마디 했다.

‘이제 안 젖어 있네.’ 니콜레타는 속으로 생각하며, 머리를 감고 나서 대체 무엇을 했는지 다시 궁금해졌다. 소피코가 한 그 괴상한 말들을 전하러, 임프레사리오의 서재까지 올라가긴 갔던 걸까?

“그리고 브론시테인의 종자들 눈엔 어떻게 보이겠어?” 안드레야가 말을 이었다. 다행히도 라브렌티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축하할 일로 보일까? 아니면 경고로 보일까, 응?”

“그런 소리 집어치워.” 라자라가 으름장을 놓았다. “이 애 험담은 한마디도 못 들어준다. 임프레사리오도 마찬가지실 거야. 소피코는 착한 애였어. 이 피비린내 나는 일하곤 아무 상관없는 애라고. 뻔뻔하기는.”

“어쨌든, 억측이 싫으면 이야기를 하나 줘야지.” 안드레야가 맺었다.

“순회공연 배역을 받아서, 기차 시간에 맞추느라 급히 떠났다고 할까.” 아나스타시야가 제안했다.

“시즌 중엔 그런 게 허락된 적이 없잖아.” 니콜레타가 짚어 주었다.

“그럼 폐병 든 할머니 병구완하러 고향 갔다고 하지, 뭐. 어때?”

모두가 그것으로 만족했다. 누구보다 클레멘티나가 그랬다. 무엇이든 믿을 것이 간절히 필요하던 참이었으니까. 소피코가 집에서 식구들과 무사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클레멘티나는 훌쩍임을 그치고 제 발로 일어섰다. 그러고는 “아유, 그래도 소피코네 할머니가 꼭 나으셔야 할 텐데!” 하며, 석탄 삽을 가지러 보내졌다. 언 땅을 파는 데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바깥이 밝아 오기 시작해 아침 연습이 머지않았으므로—“오늘은 첫 드레스 리허설이지.” 니콜레타는 떠올렸다—남은 아이들은 누가 임프레사리오께 말씀드릴지 정해야 했다. 그러니까 아직 그분께 알려 드려야 할 무언가는 있는 셈이었으니까. 니콜레타가 그분의 각별한 총아라는 것쯤은 이제 모두 눈치챈 터라, 뽑힌 것은 니콜레타였다. 그리하여 무엇을 설명하게 될지 짐작조차 못 하는 채, 젖은 슬리퍼로 눈밭을 터벅터벅 걸어 그분을 찾아 극장으로 들어간 것도 니콜레타였다.

라브렌티 말로는 임프레사리오가 무대장치 도안을 손보고 계실 거라 했다. 그러나 서재에도, 무대장치 공방에도, 무대 위에도—의상을 입거나 몸을 풀거나 토슈즈에 로진을 바수어 넣는 무용수들 틈에도—그분은 없었다. 그때 위층 객석에서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임프레사리오가 당신의 칸막이 관람석에 계신 것이었다. ‘저 거리에서 무대장치가 어떻게 보일지 가늠하시려는 게 분명해.’ 과연 그 자리까지 올라가 보니, 그분은 라브렌티의 종이 오리개 하나를 눈앞에 들어, 저 멀리 무대 위 조그만 무용수들을 그 틀 안에 담아 보고 계셨다. ‘일을 하실 수 있는 걸 보니 심기가 아주 어지럽진 않으신가 보다.’ 니콜레타는 속으로 말했다. 마드무아젤 오르조니키제를 그리 아끼셨으니, 매우 언짢으시리라 걱정했던 것이다.

(니콜레타 자신의 심경으로 말하자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눈밭에 엎어져 있던 그 딱한 사람이, 여름마다 함께 크로케를 치던 그 소피코라는 것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옛 친구가, 사실상 대놓고 니콜레타더러 임프레사리오의 정부라 말한 그 소피코라는 것도 실감 나지 않았다. 이 새로운 마드무아젤 오르조니키제를 애도하는 일은, 낯선 시신을 애도하는 일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제 병약한 몸을 이해해 보겠다고 이따금 드나들던 해부학 극장의, 석판 위 시신 말이다.)

‘하기야 임프레사리오가 심기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있어야지.’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그래도 시간을 또 놓쳐 버렸다는 얘긴 않는 게 좋겠어.’ 조심성이 얌전함으로 보이도록, 두루뭉술하게 가 보기로 했다.

“저희가 보고 왔어요, 선생님.” 니콜레타는 무겁게 운을 뗐다. “걱정하던 대로였어요.”

“어여쁘지 않은가, 다들?” 임프레사리오는 들은 체도 않는 듯 말했다. “이리 와 잠깐 앉게, 니콜레타. 의상이 어떤 것 같나?”

‘자, 조짐이 좋은데!’ 니콜레타는 그분 곁 관람석 의자에 앉으며 생각했다. 그러나 곧 새로운 생각이 덮쳤다. ‘아무것도 모르셔서, 내가 처음부터 다 설명해 드려야 하는 건지도 몰라.’ 의상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아주 예뻐요.” 실은 이 거리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무용수들은 초점 안 맞은 현미경 아래 꼬물대는 미생물이라 해도 무방했다.

“기사들 머리 장식이 특히 마음에 드는군, 우리 의상장이 꿈꿔 낸 것 말일세. 그리고 저 앙증맞은 굴 유령들 좀 보게!” 부속학교 꼬마 합창단이 슬리퍼 끈을 매어 달라고 줄지어 나오는 참이었다. “그래, 마담 리코바가 이번엔 저를 뛰어넘었어. 어떤가—리코바는 역시 남겨 둘까, 니콜레타.”

마치 그런 일을 정하는 사람이 니콜레타이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그야, 선생님이 그게 최선이라 여기시면요, 그런데—”

“아니, 아니겠지. 미안하네. 그래도 그리핀 역은 늠름하게 해낸단 말이야.”

‘옛 친구 일이라면 참 못 끊으시는 분이라니까!’ 니콜레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나저나 하얀 여왕 드레스가 자네 말라니야한테는 남학생 제복보다 훨씬 잘 받는군. 그 애가 남자 역이라면 늘 그렇게 질색이었지. 제 떡 벌어진 어깨를 남부끄러워하는 탓이겠지. 그리고 아이들이 그 애를 부르는 별명이…… 뭐였더라?”

“상승장군 게오르기요.” 니콜레타가 일러 드렸다. 이 빈정대는 별명이 생긴 것은 성탄절 성인전 야외극에서였다. 말라니야가 저와 도무지 안 어울리는 바로 그 역을 맡았다가, 처치해야 할 뱀의 몸통에 저 자신이 휘감겨 버렸던 것이다.

“아, 그래. 하기야 배역이 싫다는 그 마음이 되레 연기를 살리기도 하는 법이네만. 그래도 이번엔 그 애를 가엾이 여겨 주길 잘했어. 그 애가 자넬 그렇게 부러워해 왔으니, 여태 내내.”

니콜레타는 그런 기색을 본 적이 없었다. “말라니야한테까지 그렇게 마음을 쓰시는 줄 몰랐어요.”

“내 아이들 누구한테나 쓰는 만큼이지. 내가 연출 일에서 무얼 제일 좋아하는지 아나?” 그분은 새 생각이 떠오른 듯 물었다. 니콜레타가 대답할 새도 없이 스스로 답했다. “객석의 그 누구도 나의 절반만큼도 우리 공연을 즐기지 못한다는 걸세. 무대 위에서 모두가 같은 것을 보지. 그러나 이를테면 저 마드무아젤 즈다노바가 저 꼴사나운 차림을 속으로 얼마나 싫어하는지는—남들 의상은 잘도 비웃으면서 말이지—나만 알거든. 저기 마드무아젤 불가니나는 남자 역을 남자가 추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마드무아젤 안드레예바는 마담 울리야노바를 그리워하지. 부하리나가 바라는 건 오로지 비극 장면 하나뿐인데, 못 받을 걸세. 클레멘티나 예프레모브나는 드레스 리허설 끝나면 나한테 달려와서, 저 왔던 오케스트라로 돌려보내 달라고 빌겠지.” 그분은 한숨을 쉬며 이었다. “그래도 안 보내 줄 걸세, 우리는. 무대 공포증이야 달래서 떼어 주면 그만이고. 대단한 재주는 없지만, 저리 정겨운 몸이니.”

소피코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이해 못 하고 계신 건지도 몰라.’ 니콜레타는 속으로 말했다.

“이 애는,” 그분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었다. “의상 가봉 때문에 굶다가 허기로 어질해 있고, 이 애는 막간에 뭘 팔아 한 푼 벌까 그 생각뿐이고, 여기 이 애는 다른 발레단이라면 저를 받아 줄까 궁리하는 중이네. 하기야 궁리로 끝날 테고, 받아 주지도 않겠지만. 이 애와 저 애는 서로 제 기술을 훔쳤다고 반목 중이야. 주먹다짐 나기 전에 내가 갈라놔야 하네.” 그분은 혼자 나직이 웃었다. 그 흠결들에도 불구하고, 아니 흠결째로 아이들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런데 이 많은 걸 무슨 수로 다 꿰고 계시지?’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나?” 임프레사리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물음을 소리 내어 묻지 않았다는 것을 니콜레타가 떠올린 것은 며칠이 지나서였다. “다들 제 자잘한 근심을 나한테 가져오거든, 조언을 구한다고. 다행한 일이지. 저들의 근심을 아는 게 배역의 요체니까. 그래야 저마다의 진짜 감정, 진짜 동기를 쓸 수 있는 역에 앉힐 수 있는 걸세. 배역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리트비노바 대신 붉은 여왕은 슬라바로 정했었지?”

“그간의 노고에 상을 줄 때가 됐다고 하셨잖아요.” 니콜레타가 상기시켜 드렸다. 하기야 니콜레타 저로서는 슬라바에게 상을 안 줘도 아무 아쉬움이 없었지만. 적어도 슬라바 저 혼자만의 생각으로는, 임프레사리오의 애정을 놓고 니콜레타와 겨루는 사이였으니까.

“그랬지. 아, 보게, 니콜레타, 슬라바가 자네가 나랑 여기 있는 걸 봤네. 저런, 연습에 자넬 기다리는군. 뭐, 내주지 않을 걸세. 자네 배역 걱정은 없으니, 내가 보고 싶은 건 자넬 둘러싼 나머지 공연이야. 우리가 자네한테 지어 준 집 말일세, 응?” 그분은 한 손을 들어, 무대 위의 슬라바에게 총연습을 시작하라 일렀다. “그럼 배역표를 짚어 보지, 니콜레타.”

“네. 리트비노바 자리엔 몰로토바.” 니콜레타는 외고 있었고, 두 사람이 정한 나머지 교체 명단을 차례로 짚어 나갔다. 무용수가 정말로 모자라져서, 배역을 겹치기 삼겹치기로 돌려 막아야 할 판이었다. 두 사람은 벌써 다음 시즌 계획도 세우기 시작했다. 바깥 대중에서 새 무용수를 뽑는 공개 오디션은 논외라는 데 뜻이 모였다. 그랬다가는 브론시테인이 가장 교활한 밀정들을 들여보낼 게 뻔했다. 최선책은 부속학교 저학년을 어느 때보다 많이 뽑고, 무용 학생이 발레단 무대에 오를 수 있는 나이를 낮추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가 소피코 얘길 다시 꺼낼 완벽한 자리야.’ 새 배역들이 당장은 다 정리되었을 때 니콜레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의상 다 지어 놓고 나서야 자리바꿈이라니 아까운 노릇이지. 니콜레타, 수선 몇 벌 맡아 줄 수 있겠나?” 임프레사리오가 말했다.

“선생님.” 니콜레타는 조심스레 말했다. “마드무아젤 오르조니키제 말인데요…….”

“그건 정말 아까운 노릇이지.” 임프레사리오가 말했다.

‘역시 알고 계시는구나!’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그럼 무슈 브론시테인에 대한 내 생각을 밀고 나가 볼까.’

“하기야 저 애도 남은 시즌이 몇 없긴 했네.” 그분이 덧붙였다. 자못 뜻밖의 말이었다.

“선생님?”

“마담 울리야노바가 늘 말씀하셨듯, 무용수는 시들기 전에 물러나게 하는 게 제일이야. 좋은 그림을 객석에 남기고, 기억을 지켜 주는 걸세.”

“그야 맞는 말씀이죠.” 니콜레타는 머뭇머뭇 동의했다. 하기야 소피코보다 먼저 물러나야 할 무용수라면 몇 명 떠오르긴 했지만.

임프레사리오의 눈길은 저 아래 무대에 쏠려 있었다. “좀 더 어릴 때 내 손에 들어왔더라면. 그 또래 전부가 말일세. 다들 다른 발레단에서 우리한테 왔지 않나. 마담 울리야노바가 가르치기도 전에 딴 데서 춤을 익혀 온 게야. 이젠 너무 늙어서 그 끔찍한 겉멋을, 구파의 그 구제 불능으로 꾸민 몸짓들을 도로 벗겨 낼 도리가 없네. 못된 버릇에 폼이 뒤틀린 꼴을 오래 보고 있자면 낯이 절로 찌푸려져.”

“그런데요,” 니콜레타가 말을 꺼냈다. “마드무아젤 오르조니키제가, 라고 하시면—”

“그 애는 애를 쓰긴 했네만, 내가 이 극장에 그리는 것을—내가 여태 하려던 일을, 내가 두 마담과 무엇이 다른지를—끝내 못 본 것 같네.”

“저는 보여요.” 니콜레타가 조용히 말했다. 세면실에서 소피코가 한 말은 아뢰지 않기로 했다. 이미 다 알고 계신 듯했으니까.

임프레사리오는 고개를 돌려 니콜레타를 오래 바라보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래. 나한텐 자네가 있지, 니콜레타. 바라던 만큼 일찍 손에 넣진 못했네만, 자네한테서는, 자네 기술에서는 지노비예바의 자국을 본 적이 없어.”

“그 사람 지도는 받아 본 적이 없는걸요.”

“없지. 받아 본 애들이 가엾을 뿐. 오래도 걸렸네만, 이제야 그 물을 뽑아내기 시작한 걸세.”

이 말에 니콜레타의 머릿속에 갖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우리가 뽑아내고 있는 건 마담 지노비예바의 유파가 아니라 무슈 브론시테인의 조력자들이잖아요.” 니콜레타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 뭐, 좋을 대로.” 임프레사리오는 무대장치 그림이 담긴 투명판을 또 하나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네?”

임프레사리오는 곁눈으로 니콜레타를 잠깐 살피더니, 긴 한숨과 함께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매한가지라는 뜻일세.” 몹시 지친 목소리였다.

“글쎄요, 네,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니콜레타는 잘 따라가지 못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말했다.

“그래도, 이건 인정해 줘야겠지. 재미는 있지 않았나? 재미가 없다면야, 자네가 왜 장단을 맞춰 주겠나? 왜 나를 여기서 꺼내 주지 않겠나?”

“꺼내 드리다뇨, 어디서요? 왜 그러세요, 선생님?” 니콜레타는 벌떡 일어났다. 어디서든 그분을 꺼내 드릴 채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면 그저 비겁해서인가? 그래서 아무도 이 안까지 나를 찾으러 들어와 보지도 않는 겐가?” 그분은 계속했다. 니콜레타는 그분이 너무 걱정된 나머지 문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연습을 멈추게 하고 의사를 부르러 달려갈 참이었다. 그러나 그분이 손을 뻗어 니콜레타의 손을 붙들었다. “가지 말게.” 그분이 말했다. “다들 어떻게든 내게서 빠져나가. 상투적인 말을 시작하고, 그렇게 나를 떠나가네.”

그래서 니콜레타는 도로 자리에 천천히 가라앉아, 그분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그분은 똑바로 앞만 응시했다.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니콜레타가 남아 주었다는 것을 안다는 기색도 없이.

“선생님, 제가 뭐라도—” 니콜레타가 말을 꺼냈다.

“아, 아, 아.” 그분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보게.”

저 아래 무용수들이, 니콜레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대신 세워진 라브렌티를 둘러싸고 피루엣 도는 것을 얼마간 지켜보다가, 니콜레타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마드무아젤 오르조니키제는 고향에 갔다고 아이들한테 말할까 해요.”

임프레사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몇 분이 더 지나서야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로 괜찮아요.” 니콜레타는 안심시켜 드리고, 참을성 있게 뒷말을 기다렸다. 뒷말은 오지 않았다. ‘저러다 벽지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지시겠어.’ 니콜레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심기 걱정은 내가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었네. 소피코의 죽음을 이보다 더 아파하실 수는 없을 텐데.’

“나는 그런 말은…….” 임프레사리오가 몇 분이 더 지나 속삭였다. “딴 얘길 하고 있었네, 실은. 자네가 혹시 그렇게 들었다면 미안—” 그분은 다시 말을 꺼냈으나, 끝내 맺지 못했다. 니콜레타는 그분 곁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막이 닫히고 아이들이 점심을 먹으러—좀 머뭇대며, 몇몇은 임프레사리오의 관람석을 미심쩍게 올려다보며—통로를 줄지어 빠져나갈 때까지. 니콜레타는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그분 곁을 지켰다. 관람석 위 등불이 다 타서 저 혼자 꺼질 때까지.

제5장

경기가 계속되는 내내 여왕은 다른 선수들과 쉬지 않고 싸우며 “저놈의 목을 쳐라!”, “저년의 목을 쳐라!” 하고 외쳐 댔다. 여왕이 선고를 내린 이들은 병정들에게 붙들려 갔는데, 그러자면 병정들은 물론 아치 노릇을 그만두어야 했으므로, 반 시간쯤 지나자 아치는 하나도 남지 않았고, 왕과 여왕과 앨리스만 빼고 선수 전원이 붙들려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 되어 있었다.

이윽고 임프레사리오는 그날 아침 별안간 그분을 덮친 뇌열에서 회복했고, 니콜레타는 제 가설을 말씀드릴 수 있었다. 마드무아젤 오르조니키제를 죽인 것은 개들이 아니라 무슈 브론시테인의 하수인 중 하나라는 것. 어쩌면 옛 친구이자 한방을 쓰던 마드무아젤 코스트리코바의 실종 경위에 대해, 알아서는 안 될 것까지 알아 버린 탓인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무용수 짓일 성싶지는 않아요. 우린 다들 안에 갇혀 있었으니까요.” 니콜레타는 그분께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저희 내킬 때 드나들잖아요.”

처음에 그분은 이 발상에 자못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나 새 위협에 극장이 어떻게 대응할지 계획을 함께 짜고 나자 크게 안도한 듯했다. 몇 주 만에 보는 가장 평온한 모습이었다. 니콜레타로서는 물론 기쁜 일이었다. “그분을 달래 드릴 길을 찾았다는 게.” 훗날 니콜레타는 그렇게 회고하게 된다. “그 불행 속에 계신 그분께, 아주 조그만 위안이나마 가져다드릴 길을.”

제6장

그러다 여기서 앨리스는 어지간히 졸음이 오기 시작해서, 꿈결 같은 소리로 혼잣말을 계속했다. “고양이가 박쥐를 먹나? 고양이가 박쥐를 먹나?” 그러다 이따금은, “박쥐가 고양이를 먹나?”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어느 쪽 물음에도 답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어느 쪽으로 묻든 별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극장의 무용수들은 원칙적으로 평론을 읽지 않았다. 읽었다가는, 정체가 수상한 평론가들이 꼬집은 순전히 주관적인 흠들을 고쳐 보겠다고 들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대배경 화가 라브렌티 파블로비치에게는 전통이 하나 있었다. 새 공연의 둘째나 셋째 밤—신문마다 공연평이 실려 나오는 밤—에 니콜레타에게 읽을거리로 신문 몇 부를 몰래 들여다 주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니콜레타는 군무진의 매력적인 신출내기라고 지나가듯 언급이나 되면 운수 대통이었다. 그런데 오늘 밤은 반대로 니콜레타가 지면 한복판에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밤 니콜레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신문쟁이란 신문쟁이는 거의 다 무슈 브론시테인의 벗이라는 것을. 그 어린이 책을 읽어 봤다는 어느 평론가는, 책의 미덕이 말 없는 무대로 옮겨지며 다 사라졌다는 의견이었다. 다른 하나는 니콜레타의 병색이 완연하다고 꼬집었다.

“아, 이 사람은 우리더러 실험적이래!” 『불레틴』의 문예면 뒤에서 말라니야가 말했다. 라브렌티가 밀수품 꾸러미를 들고 왔을 때 마침 니콜레타의 분장실에 함께 있다가, 이 시즌 의례에 끼게 된 것이다. “들어 봐, ‘이런 것은 확실히 여태 어디서도 시도된 바 없다…….’ 어머, 놀리는 소리네.”

“이번 공연의 악보는 반복이 잦고 군데군데 묘하게 성기다.” 니콜레타는 혼자 읽었다. “다른 데서는 다른 작품들을 겨눈 몸짓에 크게 기대고 있다. 이 극장은 오케스트라 단원을 적잖이 잃은 모양이며, 그 재능 있는 지휘자 무슈 투하쳅스키를 뉘앙스라고는 한참 모자란 초심자로 갈아 치운 듯하다.”

“뉘앙스가 저희를 물어도 모를 인간들이.” 니콜레타는 소리 내어 말하고, 다시 기사에서 제 이름을 찾아 훑기 시작했다.

“안무는 자그마한 마드무아젤 예조바를 와이어에 매달아 공중 곡예로 해결하는 수법에 지나치게 기댄다. 처음 한 번은 창의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소냐가 눈물 바다를 헤엄치고, 물담배 연기구름을 타고 날고, 멀쩡한 무용수라면 제 두 발로 능히 해냈을 카드리유까지 공중에서 추는 것을 보고 나면, 신선함은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마음에 담지 마라, 니콜레타. 어린애 같은 경이라곤 모르는 자들이니.” 니콜레타가 얼굴을 잔뜩 구긴 것을 보고 라브렌티가 다독였다.

“어린이만 보라고 만든 게 아니란 말이에요.” 니콜레타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자, 이건 좋다.” 말라니야가 말했다. “‘젊은 니콜레타 예조바는 확실히 보기 드문 무대 존재감의 소유자로, 무섭고 변덕스러운 세상 속의 작고 여린 사람을 그리는 데 이보다 나은 무용수는 상상하기 어렵다.’”

“뭐, 그냥 내 키 얘기겠지.” 니콜레타가 말했다. “이리 줘 봐, 혹시—”

“어, 그다음 대목은 그냥 비슷한 얘기가—”

“‘군무진의 절반은 마취라도 된 듯 움직인다.’” 말라니야가 기사를 감추기 전에, 라브렌티가 어깨너머로 읽었다.

‘그야 그럴 만한 사정이 있지.’ 니콜레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발상을 준 것은 소피코였다. 라데카가 오디션을 망친 게 아파서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 그것이 임프레사리오가 머릿수 문제를 비껴가는 방도가 되었다. 무용수를 더 잃는 대신, 남은 브론시테인의 밀정으로 지목된 아이들에게 날마다 차 시간에 모종의 수면제 몇 방울을 먹이는 것이다(임프레사리오의 단골 약제사가 대 주었다). 졸음이 올 만큼은 아니고, 딱 나른하고 고분고분해져서 더는 말썽을 못 피울 만큼만. 효과는 기막혔다. 한때 그 왈패 같던 부하리나는 나날이 유순해졌다. 하기야 그 결과로 그 춤이 자못 느긋해진 것도 사실이겠다고, 니콜레타는 짐작했다.

“그럼 이 평론가도 결국 브론시테인이랑 한통속인가 보네.” 그 관찰을 내놓은 평론가를 두고 말라니야가 말했다.

브론시테인 본인의 평은 봤나?” 라브렌티니콜레타에게 물었다. “여기 있는데.”

“아뇨. 잠깐만요.” 니콜레타는 대답하고, 개막일 밤 예브게니가 선물한 카시스 술병을 한 모금 기울였다. 이것만으로는 이제 떨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나 임프레사리오의 약제사가 처방을 한 벌 지어 준 터였다. 팔다리와 목의 온갖 불편은 물론 불면증까지 거의 몰아내 준 갖가지 약. 머리맡에 두는 묵 같은 달임약 한 병. 아침에 눈뜨자마자 먹는 가루약. 만일에 대비한 이런저런 잡동사니들. 처음엔 몸에 꽤 부대꼈지만, 시간이 지나며 니콜레타는 약과 약 사이 균형을 잡는 요령을 터득했다. 이것 한 모금에 저것 몇 알을 얹어, 평소만큼의 또렷함까지 저를 끌어올리는 요령을.

“자, 이제 줘 봐요.” 니콜레타가 말하자, 라브렌티는 분장실을 가득 메운 커다란 꽃다발 하나를 빙 돌아 신문을 건네주었다. 니콜레타는 읽었다.

“이 극장의 지난 공연들은—어찌나 문을 꽁꽁 걸어 잠그는지 책임자의 견해 한 줄 받아 볼 도리가 없는 곳이지만—발레에서의 거짓이라는 관념을 만지작대 왔다. 이번 공연은 거짓 그 자체다. 전부가 거짓이되 제 거짓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되레 뽐내며, 관객더러 어디 한번 따져 보라고 을러댄다. 도무지 상상이 안 가는 것은, 이 모든 것이 관객에게 대체 어떤 효과를—어리둥절함 말고—겨냥한 것이냐다.”

“뭐래?” 말라니야가 물었다.

“우리랑 얽힌 사이라는 건 내색도 안 하지, 당연히.” 니콜레타는 대답하고 계속 읽었다.

“배역 선정도 태반이 그만큼 어리둥절하다.” 브론시테인의 넋두리는 계속되었고, 니콜레타의 머릿속에는 그 가늘고 좀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연출가가 이 못나고, 뚱뚱하고, 안짱다리에 병색으로 창백한 계집애들을 대체 어디서 구해 오는지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는, 계집애들을 어디서 구해 오기는 하는 것인지 묻는 편이 나으리라. 바로 하루 전 극장을 그만두고 그 안의 괴상한 일들을 본지에 제보한 무용수, G. S. 류시코바 양의 말을 믿을 수 있다면 말이지만.”

여기서 지면의 활자들이 니콜레타의 눈앞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류시코바. 군무진 아이. 그런데 이번 주 내내 연습에 나오지 않았나? 통금 때 방에 있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벌써 며칠째 총연습 첫머리에 점호를 부르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라브렌티!” 니콜레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외쳤다. “허풍이죠, 그렇죠? 류시코바가 문 두드려도 대답이 없었으면 아저씨가 알아차렸을 거 아니에요?” 그와 니콜레타가 밤마다 번갈아 문단속을 맡아 온 터였으니까.

“응? 지난주에 대답이 없더라고 내가 말했잖나.” 라브렌티가 말했다. “걱정 말라고, 더 캐묻지 말라고 한 건 너였고.”

니콜레타는 발을 굴렀다. “나 절대 그런 말 안 했어요!”

“무슨 일이야?” 말라니야가 신문을 접으며 물었다. “왜 그래?”

라브렌티가 우리한테 못된 장난을 치는 거야.” 니콜레타는 그를 홱 돌아보며 말했다. “그거지, 그 콜로디오 뭐시기로 가짜 신문을 찍어낸 거지!”

“콜로디온 유리판이고, 그건 사진에나 쓰는 거다. 게다가 나는 공짜로는 절대 그런 수고를 안 해.” 라브렌티가 태연히 말했다. “너야말로 왜 이러는 거냐?”

‘그분이 내보내신 거야.’ 니콜레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분이 빠져나가게 두셨고, 걘 브론시테인한테 가서 다 불었고, 다 끝장이야. 임프레사리오는 내 잘못이라고 여기실 거야. 신문을 보시기 전에 내 사정부터 말씀드리지 않으면!’

문으로 내달리며 마지막으로 한 기억나는 생각은 대충 이랬다. ‘그런데 두 마담이랑 겐리하라데카랑 나머지는, 왜 여태 신문사로 달려가지 않았지?’ 그럴듯한 설명이 있다는 건 알았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엔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또 달아나 버렸기 때문이다. 정신이 들었을 때 니콜레타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라브렌티는 곁에 앉아 여전히 태연하게 신문을 읽고 있었다. 우스운 것은, 그것이 제 침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말라니야의 침대도 아니었다. 시트에서는 기분 좋은 꽃향 화장수 냄새가 났고, 라브렌티의 촛불에 의지해 보니 머리 위 천장이 가파르게 비탈져 올라가고 있었다.

“여기 누구 방이에요?” 니콜레타가 물었다.

“오, 안녕하신가.” 그가 말했다. 코안경이 촛불에 반짝였다. “또 깨셨나?”

“네.” 니콜레타는 대답했다가, 더 급한 물음이 떠올랐다. “류시코바는요.” 목이 사포처럼 껄끄러웠다.

“그분이 골이 나긴 나셨지. 그래도 용서해 주신단다.” 라브렌티가 말했다. “너한테 소임을 몇 개 너무 얹었다는 걸 아시는 거지, 응? 그 조그만 어깨에 너무 많이 실렸다고. 그래서 너한테 옷시중꾼을 붙이자고 하셨어. 네가 또 얼굴로 고꾸라지는 일이 없게. 그리고 차차, 내 짐작엔, 술도 떼게 하시려고.”

“아저씨가, 내 옷시중꾼을요? 그럴 짬이 어디 있어서요?” 니콜레타는 고개를 저었다. 술을 떼다니, 말은 좋다. 임프레사리오 앞에서 얼굴로 고꾸라질 정도가 되려면, 그날 밤 마신 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못 믿겠어요. 나 임프레사리오랑 말도 못 섞은 것 같은데.”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얘야?”

“그분 계신 데까지 못 갔던 것 같다고요. 문턱도 못 넘었는데 아저씨가 날 싸매 들고 여기 옮겨 놓은 것 같단 말이에요. 자, 지금 몇 시예요?”

“쉿, 조용히 하시고. 평소처럼 쏘다닐 몸이 아니야. 푹 쉬어.”

‘연습에 못 가게 붙들어 두는 건지도 몰라! 아니면 공연에!’ 니콜레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몇 시냐고요?” 한층 다그쳐 물었다.

“한밤중이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가 되풀이했다. “니콜레타 이바노브나, 내가 이런 걸로 너한테 거짓말할 까닭이 뭐가 있어?”

니콜레타는 그가 거짓말할 만한 까닭을 따져 보았다. 그럴듯한 까닭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침대 신세 말고는 어쩔 도리가 없는 몸이라는 라브렌티의 말은 맞았다. 코가 아팠는데, 그건 얼굴로 넘어졌다는 설명과 맞아떨어졌다. 그보다도 팔다리가 너무 무거웠다. 문가 등잔의 그 옹색한 불빛조차 눈에 겨워서, 바라보면 눈 안쪽이 욱신댔다. 눈꺼풀이 도로 감기게 두는 편이 절반은 수월했다. 침대는 아주 폭신했고, 정말 한밤중인 것 같은 느낌이긴 했다.

“옳지, 그래야지.” 라브렌티가 이불을 펴서 덮어 주며 말했다. “여기 가만히만 있으면 아무 일 없을 거다. 참, 여기가 누구 방인지는 나도 몰라. 너를 업고 오느라, 처음 나온 문으로 비틀비틀 들어온 거니까.”

‘어련히 자상하시겠어.’ 니콜레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지각의 맨 가장자리에서 피아노 소리가 아련히 딸랑거렸다. ‘아, 라브렌티가 연습하는 거잖아.’ 니콜레타는 기억해 내고, 그 좋은 침대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아니지, 뭔가 이상한데.’ 잠시 뒤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라브렌티는 나랑 여기 있으니까, 피아노 치는 게 라브렌티일 수는 없잖아.’

한순간에 니콜레타는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뛰어내려, 네 발로 바닥을 짚고 하이에나처럼 기어 문으로 내달렸다. 문에서 잠깐 씨름했지만, 라브렌티가 욕설을 뱉으며 의자를 내동댕이치는 소리가 들릴 즈음엔 이미 복도로 나와 있었다.

소피코 방이었나 보다.’ 방향을 가늠하며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그러니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거지.’ 음악은 극장 쪽에서 오고 있었다. 니콜레타는 스타킹 바람의 발로 바닥을 지치고 모퉁이마다 벽에 부딪히며 그리로 내달렸다. 어질증이 밀려왔다. ‘약을 못 먹고 나와서 그런가 봐.’ 시야가 흔들려서, 드문드문 박힌 벽등만이 밝히는 복도가 자꾸만 부풀었다 오그라들었다 했다. ‘꼭 커다란 아코디언 같네! 못 빠져나가겠다 싶으면 딱 그때 도로 벌어진단 말이야!’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을 때는, 라브렌티 파블로비치 두 명이 쫓아오는 우스운 꼴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리고 복도가 어쩜 이렇게 요상하게 꼬였담! 원래 이렇게 여러 갈래였을 리가 없는데.” 그래도 극장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귓속에서 쿵쿵대는 제 핏소리 너머로, 기계실 도르래 밧줄 도는 소리와 무대장치를 올리고 내리는 태엽 톱니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아유, 공연을 놓치고 있는 것만 아니면 좋겠는데!’

불현듯, 유난히 좁다란 복도 한 굽이를 빠져나오자 극장의 크고 어둡고 웅웅 울리는 공간이 나왔다. 좌석들 생김새로 여기가 2층 갈레리 높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라브렌티가 여기까지 찾아오면 도망갈 데가 없다는 얘기네.’ 니콜레타는 구석진 자리 벽에 몸을 붙이고, 들키지 않기를 빌었다. 다행히 공연에 빠져 있는 사정은 아닌 듯했다. 극장은 텅 비어 있었다. 좌석은 공연과 공연 사이면 늘 그렇듯 하얀 먼지막이 천을 쓰고 있었고, 벽의 등불은 하나도 켜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무대만은 여느 때보다도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피아노는, 정말 연주되고 있었다. 치는 사람 없이. ‘어머, 저 혼자 치네! 저런 것까지 되게 만들어 둔 줄은 몰랐는데.’ 무대 위에서는 기계장치 극장이 저 스스로 무대장치를 갈아 끼우고 있었다. ‘아! 혹시 임프레사리오가 관람석에 계시다면’ (니콜레타의 자리에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배경막 순서가 제때 맞는지 점검하고 계신 걸 거야. 착하기도 하시지, 공연이 완벽하게 돌아가라고 이 밤중까지 안 주무시고. 하긴 나는 늘 배경막 앞에서 춤추느라 여태 제대로 본 적이 없구나. 우습기도 하지!’

그때 손 하나가 니콜레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와 동시에 무대 위 천장에서 물건 한 벌이 또 내려왔다. “소리 내지 마라.” 라브렌티가 속삭이며 니콜레타를 제 무릎에 끌어안아 꽉 붙들었다. 와이어에 매달려 내려오는 저 형체들이 결국 모래주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니콜레타는 그가 왜 제 비명부터 막았는지 이해했다. 니콜레타는 몸부림을 그쳤다. 이제 값어치 있는 일은 저 아래 괴상한 구경거리를 지켜보는 것뿐인 듯했다. 무용수들이 플리에로 까딱까딱 오르내리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와이어가 그들을 올렸다 내렸다 하기 때문이었다. (와이어가 어떻게 매여 있는지는 알아보기 어려웠다.) 고개들은 목에서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마치 참회하듯이.

“대개는 그냥 저렇게 무릎 인사를 시키셔.” 라브렌티가 속삭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니콜레타는 알아보았다. 안경 낀 깡마른 라데카. 겐리하. 봉두난발의 퍄타코바. 그리고 마담 지노비예바. 다만 지노비예바는 예전의 그 절반만큼도 뚱뚱하지 않았다. 처음엔 죽은 사람들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지켜보고 있자니, 이따금 누군가 다리를 옴찔하거나 고개를 조금 굴릴 때마다 와이어가 흔들렸다.

“박제로 가실 수도 있었겠지만,” 라브렌티가 말했다. “내가 알기로 그분은 저들을 영원히 두실 생각은 없으셔. 사과를 제 몫만큼 했다 싶어질 때까지만이지. 그쯤 되면 그분도 물리시니, 마침 잘된 일이고.”

줄지어 선 형체들 중 하나가 빈다는 것도 니콜레타는 알아차렸다. “마담 카메네바는 빠져나갔어요?” 라브렌티가 입을 막은 손을 늦춰 준 참이라 속삭여 물을 수 있었다. 그의 숨소리와 심장 소리도 가라앉아 있었다. 그도 니콜레타만큼이나 공연에 사로잡힌 듯했다. 이상하게도 위험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무대의 빛나는 네모 안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을 지켜보는 모든 관객이 느끼는 설렘, 그것 말고는 별다른 설렘도 없었다.

“음, 이젠 너도 알아 둘 때가 됐지. 아니, 그 마님도 남들처럼 매달려 계셨는데, 지노비예바만큼 브롬을 못 버티셨어. 몸집 문제겠지, 아마. 그분이 그걸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하게 해 두시는 건데, 아무래도 그게…… 몸 안에 쌓이는 모양이야, 오래되면.”

이것을 니콜레타는 발레 관객이 여느 줄거리 전개를 받아들이는 만큼의 순순함으로 받아들였다. 이윽고 음악이 바뀌자, 무용수들은 일제히 무릎 인사를 그치고 팔을 3번 자세로 들어 올리며 다시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그분은 어떻게 했어요?” 니콜레타가 물었다. “지노비예바 말고, 카메네바요.”

“아, 결국엔 다들 가는 데로 가셨지.” 라브렌티가 심상하게 말했다. “아, 마드무아젤 코스트리코바 나오신다.” 기계 극장의 변덕에 따라, 무대 천장에서 새 배경막이 내려오는 참이었다. 2막의 「이름이 없는 숲」. 어둡고 스산한 숲 한가운데로 난 하얀 오솔길에, 그 순한 아기 사슴이 서 있는 그림.

“나오시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니콜레타가 숨죽여 따졌다. 무용수들은 그새 위로 딸려 올라가 보이지 않았고, 새로 나타난 사람도 없었다.

“아주 경제적이지.” 라브렌티가 말을 이었다. “캔버스값 아끼신 걸 생각해 봐라. 게다가 펴서 메우고 나면 피지처럼 매끈해서 그리기엔 그만이야. 물론 가죽 무두질을 제대로 배우기까진 골치가 아팠지만. 부산물 처리도 그렇고.”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몸이 좀 성한 상태였다면 무슨 뜻이든 찾아냈을지 모른다. 지금으로서는 아무 뜻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라브렌티가 이 괴상한 설명을 늘어놓는 동안, 니콜레타의 시선은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아기 사슴의 눈으로 향했다. 풋라이트뿐인 어둠 속에서 보니, 그 눈만이 은은히 반들거리며 배경막 위로 도드라져 있었다.

“그분이 코스트리코바랑 그렇게까지 가까운 줄도 몰랐는데, 어지간히 각별했던 모양이야.” 라브렌티가 말했다. “눈을 수지로 뜬 것도 저 한 번뿐이거든. 오래는 못 가. 속에서 벌써 식초가 되고 있으니. 그래도 정이란 놈은 도리가 없는 거지.”

여기서 니콜레타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정신을 잃었다.

* * *

깨어나 보니 니콜레타는 의무실 간이침대에 누워 있었다. 의무실은 부속학교 동쪽 별관의 낡은 천문대 탑을 물려 쓰고 있었다. 곁엔 아무도 없었고, 분장실의 그 꽃다발들이 침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해는, 보아하니, 하늘 높이 떠 있었다.

“그러니까 다 끔찍한 꿈이었던 거야!” 니콜레타는 혼잣말을 했다. 그럴듯한 설명은 그것뿐이었다. 간밤의 그 흉측한 광경은 악몽에서밖에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 순간엔 그냥 받아들였잖아, 꿈에서 늘 그러듯이. 하기야 꿈이 아니었으면 코가 아플 텐데, 지금 아픈 데라곤 하나도 없단 말이지. 그런데 꿈이 어디서부터였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멀쩡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아, 신문 읽다가 잠든 거면 좋겠다. 류시코바가 도망친 것도 다 꿈이고. 그런데 얼굴로 넘어진 게 아니라면, 왜 의무실에 실려 온 거지?” 여기서 일어서 보려 했지만, 두 다리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우 발가락을 꼼지락대는 데 성공했을 즈음, 말라니야가—듬직하고 낯익은 말라니야가—수프 그릇을 들고 부산하게 들어왔다.

니콜레타, 깼구나!” 말라니야는 그 모습에 살짝 움찔하며 외쳤다. “그래, 좀 어때?”

“이상해.” 니콜레타가 대답했다. “온몸이 다 얼얼해. 얘, 말라니야, 나 간밤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니?” 그리고 더는 숨길 까닭이 없다 싶어,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이 「시간」과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불러 주는 게 도리일 것 같았다) 얼마나 소원한 사이가 되었는지를.

“어머나.” 수프를 그릇에 뜨던 말라니야가 고개를 들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라면 몰라도, 니콜레타와 단둘일 때는 좀처럼 안 보이던 안절부절이었다. “어머, 어머, 어쩌면 좋아. 여태 내내 잠결에 걸어 다녔단 말이야?”

“글쎄, 꼭 몽유병 같지는 않아. 이를테면 간밤엔, 내가 신문 읽다 잠들었니, 아니면 일어나서 달려 나갔니?”

“뒤엣거.” 말라니야가 수프 그릇을 건네며 말했다. “한바탕 소리소리 지르더니 방에서 곧장 뛰쳐나갔어. 라브렌티가 쫓아갔고.”

니콜레타는 속이 철렁했다. 그럼 적어도 이건 실제였다. 그래도 임프레사리오가 골이 나셨다는 것, 라브렌티를 옷시중꾼으로 붙이셨다는 것까지 사실이라는 법은 없었다.

“나더러는 아무 데도 가지 말라길래,” 말라니야가 이었다. “남아서 네가 떨어뜨린 신문을 마저 읽었지. 그런데 니콜레타, 임프레사리오가 그 신문 일을 너한테 물어보라셨어. 그러니까, 조금 더 내려가면 무슈 브론시테인이 이러거든. 우리가 내보낸 무용수들이—류시코바 말로는—단 한 명도 신문사에도, 다른 극장에도, 비시즌 일터에도, 제 집에도 나타나지 않았대. 우리한테 경위를 물으러 경찰 조사관을 보낸다는 거야!”

“경찰 조사관?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니콜레타는 놀라 팔꿈치로 몸을 일으켰다.

“그야, 너 심란해질까 봐.” 말라니야가 달래듯 말했다. “괜찮아, 너한테 면담을 청하진 않을 거야. 임프레사리오가, 너는 폐병이 도져서 아무도 못 만난다고 말해 두신대.”

“내 폐병 얘길 임프레사리오한테 했다고?” 니콜레타가 믿기지 않아 물었다.

“어머, 네 폐병이야 단원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걸.” 말라니야가 말했다. 놀랍게도 그 목소리엔 짜증 한 가닥이 비쳤다. “너를 보기만 하면 아는걸, 뭐.”

말라니야가 저를 질투한다던 임프레사리오의 말에, 니콜레타는 처음으로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그럼 이젠 온 시내가 알겠네.” 니콜레타도 같은 투로 받았다. “폐병쟁이 병자로 알려진 몸이면, 이제 춤은 안 춰도 되는 거니?”

“아—니, 추고 싶으면 계속 추라셨어.” 여기서 말라니야는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 나을지도 모르잖아. 소피코네 할머니처럼.”

‘그건 클레멘티나 달래려고 우리가 지어낸 얘긴데.’ 니콜레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나저나 조사관이 왜 나랑 얘기하겠다고 청해?” 니콜레타말라니야에게 물었다.

말라니야는 눈을 내리깔고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있잖아, 나는 안 믿어.” 말라니야가 말했다. “수프는 왜 손도 안 댔어?”

“말해, 말라니야!”

“그러니까, 우리끼리 이야기를 좀 해 봤는데—”

“우리끼리?”

임프레사리오라브렌티랑 나랑.” 말라니야가 말했고, 니콜레타는 까닭 모를 오한을 느꼈다. “두 마담이든 겐리하라데카네든, 다들 마지막으로 목격된 게 짐 챙기러 방에 갔을 때거나 하룻밤 묵으러 갔을 때인데, 알고 보니, 그, 우리 방 열쇠를 다 가진 사람이 너 하나뿐이었다는 거야.”

라브렌티랑 나랑 이젠 하루씩 번갈아 맡는다고!” 니콜레타가 발끈하며 끼어들었다.

“그래도 두 마담이 사라졌을 땐, 적어도, 열쇠 가진 건 너뿐이었잖아.” 말라니야가 물러서지 않았다.

“그건 사실이 아니지. 겐리하도 있었는데!”

“글쎄, 그 사람이 설마 처리까지 했을 것 같진—”

“처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말 하려던 참이었는데 네가 끊었잖아. 임프레사리오라브렌티랑 신문 얘길 하고 있는데, 마구간지기 애가 뛰어 들어왔어. 개들이 잔디밭 가장자리에서 파낸 게 있다고.”

“그렇지만 간밤엔 다들 안 죽어 있었단 말이야!” 니콜레타는 미처 말을 삼키지 못하고 외쳤다.

“간밤에?” 말라니야가 제 수프 그릇에 숟가락을 쨍그랑 떨어뜨리며 물었다. “다들이라니?”

말라니야의 낯빛이 니콜레타에게 모든 것을 아주 선명하게 그려 주었다. 내가 미쳤거나, 임프레사리오가 미쳤거나. 그 순간엔 어느 쪽이 더 나쁜지도 알 수 없었다.

“꿈에서 말이야.” 니콜레타는 조심조심 말했다. “아니, 그, 꿈이었다고 생각은 하는데. 아무튼 거기선 다들 살아는 있었어. 아유, 말라니야, 내 말 좀 들어 봐!”

“다리는 이제 좀 움직여져?” 말라니야가 물었다. 의자 끝에 바짝 걸터앉아, 살기가 비치면 곧장 튈 태세였다. “마구간지기 애가 숲가에서 찾은 시신은 하나뿐이래.” 말라니야니콜레타에게 말했다.

“그야 소피코겠지. 그렇지만 그건 우리 다 같이 찾았잖아!” 니콜레타가 우겼다. “안드레야한테 물어봐, 나스탸슬라바든! 라브렌티한테라도, 제발! 다 같이 잔디밭에 쓰러져 있는 그 앨 발견했잖아, 개들한테 물어뜯겨서!”

“그러고는 도로 묻었다고?” 말라니야가 미심쩍어했다. “그것도 딴 꿈 아니었을까? 있잖아, 임프레사리오의 주치의가 왔을 때 그랬거든. 수은 김을 마시면 정신병원 가는 수가 있다고. 그리고 네가 그걸 마신 뒤로 조금이라도 변한 것 같으면 알려 달라고 했어. 아주 솔직히 말하면,” 말라니야는 조심스레 말했다. “너 정말 변한 것 같긴 해, 조금. 스스로도 변한 것 같니?”

말라니야! 설령 수은에 내가 미쳤다 쳐도, 마담 지노비예바카메네바는—네 말마따나—사라진 건 내가 수은을 마시기 전이잖아!”

“그치만 요양원에서 수은 치료 받은 뒤이긴 하지.” 말라니야가 조그맣게 말했다.

“뭐, 몇 년 전 일을? 너 설마—그 얘길 임프레사리오한테 한 건 아니지?” 니콜레타가 물었지만 말라니야는 잠자코 있었다. “너 정말 여태 내내 나를 질투해 왔구나! 그래, 나를 치우고 네가 내 배역을 차지할 셈이면, 어림도 없을 줄 알아, 이 뚱보야!”

말라니야의 콧구멍이 분노로 벌름댔다. 그러더니 이내 낯빛을 가다듬어, 공들인 무심함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질투했는지도 모르지, 이따금. 네 남자들이야 태반이 시시하다 여겼지만, 라브렌티 파블로비치가 불쑥불쑥 나타나 널 데리고 놀러 다니는 건 좀 이상하다 했어. 네가 그렇게 재미있는 애라서겠거니 했지. 그렇게 가녀리고—옆에 서 있기만 해도 이렇게 창피할 데가 없으니—예쁘고, 그렇게 재미있는 애라서.” 말라니야는 도도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말이야, 알고 보니 나도 재미있는 사람이더라. 내 나름으로.”

“그건 대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니콜레타가 물었다.

“지금 질문할 처지는 아닐 텐데, 니콜레타.”

니콜레타는 울고 싶었다. 울어 봤자 득 될 게 없다는 것도 알았다. “임프레사리오랑 얘기하게 해 줘.”

말라니야는 고개를 저었다. “그분께 전할 말은 나한테 하면 된다셨어.”

“좋아, 그럼 네가 받아 적는 걸 지켜보겠어.” 니콜레타가 정했다. “내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 할 테니까, 네가 받아쓰기 해.”

“몸도 풀고 옷도 입어야 하는데.” 말라니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일어나, 펜과 종이를 가지러 문 쪽으로 물러갔다. 한순간도 니콜레타에게 등을 보이지 않으면서. 사정이 이렇게 험악하지만 않았다면, 니콜레타는 웃음이 났을지도 모른다.

말라니야, 너 설마 정말로 내가 살인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니콜레타가 말했다.

말라니야의 눈에도 니콜레타처럼 눈물이 그렁그렁 차 있었다. “제일 아끼는 친구가 딴사람이 되어 가는 걸 지켜보는 게 어떤 건지 아니?” 말라니야가 물었다. “아주 괴상한 짓만 골라 하고. 처음엔 있지도 않은 벌레가 보인다더니, 바로 지난주엔 복도에서 미행당한다면서 요리 승강기 안에 웅크려 들어가 있었잖아. 아니, 그저께 밤엔 네가 저녁밥이랑 담소를 나누는 걸 내가 봤다고!”

“그땐 그게 예의 같았단 말이야.” 니콜레타는 그 일을, 그리고 그게 어떻게 보였을지를 떠올리며 우물거렸다.

“나한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말라니야가 되풀이했다. “네가 이상해져 간다고 누구한테 말을 할지 말지 정하는 게.”

“왜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니콜레타가 외쳤다. “왜 나한테 어떠냐고 물어봐 주지 그랬냐고!”

말라니야는 침을 삼켰다. “네 재미를 망치고 싶지 않았어.” 말라니야가 말했다. “너 좋은 일이니 나도 좋아해 보려 했다고. 질투한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그리고—그리고 나를 돌봐 준 건 언제나 너였으니까.”

여태껏 이 둘 사이가 틀어졌던 드문 순간들이라면, 여기가 바로 한쪽이 다른 쪽을 끌어안았을 대목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언가가 둘 모두를 막아섰다.

“오늘 밤 춤을 추긴 해야 한다면, 약부터 먹어야겠어.” 니콜레타는 헛기침하고 말했다. “내 방 침대 밑에 있는 쟁반이야.”

“사람 부려먹는 버릇은 어지간히도 드셨지.” 말라니야는 이 재치 있는 소리를 아무 재미도 없이 내뱉고는 문을 닫았다. 잠그는 소리가 났다고, 니콜레타는 알아차렸다.

“이런 처지에 놓인 사람 얘기를 옛날얘기에서 들은 것 같은데.” 혼자 남은 니콜레타는 중얼거렸다. “술탄의 아내가 무슨 수로 빠져나갔는지가 도무지 생각이 안 나네. 자, 내가 정말 변했다면, 소냐가 저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했듯이, 언제 바뀐 걸까. 아니, 한꺼번은 아니었는지도 몰라. 차츰차츰이었을 수도 있지. 그럼, 지금의 나는 누구게?”

말라니야는 돌아와서, 약속대로, 겸연쩍은 침묵 속에 니콜레타의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그런데 예전 같으면 술술 나왔을 대목들이 꽤 여럿 기억나지 않았다. 말라니야가 시간이 없다며 읽어 주기를 거부했지만, 아무래도 다 딴판으로 적혔지 싶었다. 그러고 니콜레타는 홀로 남아, 그 조그만 물약 쟁반과 저녁밥의 힘으로 기운을 그러모은 끝에, 옷을 입고 분장을 했다.

“애초에 내가 왜 여기 실려 왔는지를 말라니야한테 못 물어봤네.” 넘길 수 있는 만큼의 수프를 다 넘기고 나서 니콜레타는 깨달았다. 그래도 이제 따져 볼 짬은 생긴 셈이었다. 두 마담과 그 일당이 극장 바깥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데 대해, 말라니야가 사실상 내놓다시피 한 그 설명을.

“내가 미쳤거나, 임프레사리오가 미쳤거나.” 마그네시아 분을 처덕처덕 바르며 니콜레타는 되뇌었다. “임프레사리오가 미쳤거나, 내가 미쳤거나.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자, 만약 내 꿈이 실제였고,” 꿈의 세부를 떠올리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임프레사리오가 미쳤다면—어디까지나 가정이야—그럼 그분이랑 라브렌티브론시테인의 수하를 몽땅 인형으로 만들었단 얘기가 되지. 그런데 배경막으로 만들기 전까지 그 인형들을 어디에 뒀길래 아무도 못 봤을까? 영 그럴듯하지가 않은데.”

“물론,” 니콜레타는 대화의 반대편을 맡으며 말했다(이 별난 아이는 혼잣말을 어지간히 즐겼던 것이다). “소피코가 밤의 음악 얘길 해 줬을 때만은 확실히 꿈이 아니었지. 그리고 그 애 말대로, 극장에 들어가 보니 피아노가 저 혼자 치고 있었고. 하지만 그건 자는 머리가 깨어 있을 적 수수께끼에 답을 지어 준 걸 수도 있어. 어느 의사가 그러는 걸 들은 적이 있는걸.”

“거꾸로 꿈속 일이 하나도 실제가 아니라면, 뭐, 그럼 내가 미쳤고, 두 마담이랑 겐리하랑 다른 주역들을 내가 어떻게든 한 거겠지. 대체 무슨 수로 해냈을까! 그리고 말라니야는 내 동기가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신 차려, 니콜레타.” 니콜레타는 고개를 저으며 저를 타일렀다. “그래, 네 이름은 니콜레타 이바노브나 예조바고, 너는 변하지 않았고, 미치지 않았고, 임프레사리오도 미치지 않으셨어. 다들 사라졌다는 얘기 자체가 무슈 브론시테인 말 한마디뿐이잖아! 우리가 언제부터 그걸 믿었다고? 그 작자가 다 트렁크에 가둬 놓고, 여기 라브렌티를 시켜 임프레사리오한테 내 짓이라고 불어넣는 중인지도 모르지.” 라브렌티브론시테인의 한패라는 생각은 놀랄 만큼 쉽게 머리에 떠올라 주었다. “라브렌티야 물론 좋아하지만, 요즘 그 사람 건방진 건 사실이잖아. 내가 깨어 있든 꿈꾸는 중이든!”

그러는 사이 개장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토슈즈 끈을 매며 니콜레타는 혼잣말을 했다. “힘껏, 여태 춘 적 없이 잘 추는 것. 그래서 그 춤이 ‘저는 선생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는 뜻인 걸 그분이 알아주시길 비는 것. 그래, 여태 춘 적 없는 춤을 추겠어. 그러면 그분도 아실 거야. 그러니까, 내가 그분을 사랑한다는 걸! 그 말을 못 할 게 뭐람?” 그러고 니콜레타는 약제사가 일러 준 양보다 훨씬 많은 약을 먹었고, 이윽고 말라니야가 다시 나타나 극장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래, 나는 그분을 사랑해.” 니콜레타는 곱씹었다. “이 일이 다 끝나면 그렇다고 말씀드릴지도 몰라.”

그러나 계단을 내려가는 니콜레타에게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오르는 것까지, 약이 막아 주지는 못했다. “다시, 어디까지나 가정으로, 그분이 정말 미쳤다면. 내가 부추긴 걸까, 아니면 심기를 건드린 걸까. 겐리하가 문단속을 게을리한다는 내 그 말로 말이야. 글쎄, 만약이라니까. 아유, 아득한 옛날 일 같네!”

그날 밤 니콜레타는 있는 힘껏 잘 추었다. 그러나 두 다리는 제 할 일을 다 해 주지 않았고, 피루엣을 돌 때마다 바닥을 가로질러 나동그라질 고비였다. 게다가 춤에만 마음을 쏟지 못하게 막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첫째는 와이어였다. 무대 일꾼이 하네스에 다시 채우려 들 때마다 니콜레타는 몸을 사렸다. 그 꿈이 꿈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뻔히 알면서도. 둘째는 객석의 규모였다. 발코니는 사람 무게로 신음했고, 1층 객석은 일렁이는 바다 같았다. 웃어 주는 것이야 좋았다. 첫 며칠 밤엔 웃음이 영 인색한 객석이었으니까. 그런데 니콜레타가 듣기엔 웃음이 터지는 데가 죄다 엉뚱한 대목이었다. 셋째는 동료 무용수들이었다. 다들 니콜레타에게서 일정한 거리를 지켰다. 저들 모두 니콜레타의 폐병에 대해 새로 주의를 들은 참이라는 걸 떠올린 것은 몇 장면이 지나서였다. 그 바람에 짝춤이란 짝춤은, 상대가 몸을 빼는 통에 여간 힘들지 않았다. 넷째로, 니콜레타는 자꾸 한눈을 팔았다. 피아노가 저 혼자 치고 있나 오케스트라석을 들여다보고, 배경막이 정말 캔버스가 아닌 다른 것일 수 있나 곁눈질했다. 판별은 나지 않았다. 다만 「이름이 없는 숲」이 내려왔을 때, 아기 사슴의 눈은 사람 눈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싸구려 유리구슬 같은데.’ 뜯어보아서 그런지 몰라도, 무대장치 전체가 갑자기 날림으로, 죄다 싸구려로 추레해 보였다.

그러다 마지막 장면—소냐가 꿈에서 깨어나 새끼고양이들을 어르는 장면으로, 고양이 역은 옛 주역들 중 제일 유순한 아이들이 맡았다—에 막이 내린 뒤였다. 니콜레타는 등에 채워진 와이어에 이끌려, 여느 때보다 우악스럽게 무대 천장으로 낚여 올라갔다. 보기도 전에, 어쩐지, 공중 통로에서 줄을 감는 것이 라브렌티라는 것을 알았다.

“꼭 이래야겠어요?” 니콜레타가 씩씩댔다.

“너를 최대한 빨리 빼내야 해서 말이다.” 라브렌티니콜레타를 통로로 끌어올려 곁에 세우고, 하네스를 벗기려 들며 말했다.

“나는 이제 동물원의 진기한 괴물처럼, 챙겨 넣어 뒀다가 공연 때만 꺼내지는 몸인가요?” 니콜레타가 뾰로통하게 물었다.

“아, 공연도 이제 없을 것 같구나, 유감이지만.” 라브렌티가 말했다. “나머지 시신들이 나왔거든, 드디어.”

“나머지 시신이라니 무슨?” 니콜레타는 소스라쳐 물었다. 그러고는 대답을 기다리느니 도움을 부르러 달려가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팔을 비틀어 빼려 했지만 그는 너무 힘이 셌다. “누구 없어요! 이 사람이 지금 헛소리를—” 니콜레타는 외쳤지만, 목은 쉬었고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누굴 불렀다간 네 목숨이 끝나.” 라브렌티가 일러 주었다. “그분은 너를 숨겨서 살려 두실 생각이야. 지금쯤 조사관한테 말씀하고 계시겠지. 막이 닫히자마자 네가 내빼더라고.”

“조사관 같은 건 있지도 않은 것 같은데요.” 니콜레타가 사납게 말했다. “나는 한 번도 못 봤어요. 그리고 장담하는데 임프레사리오는 이 일을 아직 하나도 모르셔. 아시기만 해 봐요!”

“너를 몰래 빼돌려 내 것으로 삼아 둘까 생각도 해 봤는데.” 라브렌티가 아쉬운 듯 말했다. “그래 봤자, 아무래도 넌 이 세상에 오래 있을 몸이 아니라서 말이지, 얘야.” 그 말과 함께 그는 커다란 캔버스 자루를 꺼내, 니콜레타가 항의할 새도 없이 머리 위로 뒤집어씌우고는 어깨에 둘러멨다. 그 서슬에 숨이 턱 막혀, 비명도 눌려 버렸다.

‘어머, 나 지금 영락없이 모래주머니 꼴이겠다!’ 니콜레타는 절망하며, 있는 힘껏 몸부림치고 자루 너머로 제 납치자를 물어뜯어 보았다. 별무소득이었다. ‘그건 머리를 잘 썼네.’ 달리 싸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 오줌을 놓아 보았지만, 이것도 사정에 보탬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루에서 이상하게 들큼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아차릴 겨를이 있었을 뿐, 이내 생각이 미쳤다. 지금 제일 슬기로운 길은 눈을 감고 한숨 쉬어 두는 것이라고. 의심할 나위 없이 훌륭한 계획이었고, 아주 깔끔하고 단순하게 정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