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한가지
인물니콜라이 예조프, 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말렌코프, 라브렌티 베리야, 겐리흐 야고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세르게이 키로프, 레프 트로츠키, 블라디미르 레닌,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니콜라이 부하린, 라자르 카가노비치, 니키타 흐루쇼프, 아나스타스 미코얀, 세르고 오르조니키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미하일 프리놉스키, 카를 라데크, 미하일 톰스키, 안드레이 비신스키, 예브게니야 예조바 용어대숙청, 예조프시나 사건대숙청
제1장
니콜레타 이바노브나는 제 방에 혼자 앉아 아무 할 일도 없이 있자니 슬슬 지겨워 죽을 지경이었다. 잠이야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래 안뜰에서는 새 시즌 개막을 축하하는 파티가 한창이었고, 말라니야 막시밀리아노브나가 물어 올 소식을 한 톨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니콜레타는 파티에 나가지 않기로 정해져 있었다. 내일 첫 연습에 대비해 기력을 아껴야 한다는 이유였는데, 니콜레타가 보기엔 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이제 아픈 데라곤 거의 없으니까. 하기야 나갔더라도 군무진(코르 드 발레) 말단 신세라 시중드는 하녀 노릇이나 했을 테지만. “그래도 난 상관없었을 텐데.” 니콜레타는 혼잣말을 했다. 짧은 휴가에서 돌아온 친구들과 발레 마스터들과 임프레사리오를 볼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실은 남몰래 이런 상상까지 해 본 참이었다. 이렇게 혈색 좋고 건강해진 모습을 보면, 임프레사리오가 몸소 춤을 청할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머리가 아픈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니콜레타는 혼자 곰곰이 따져 보았다. 후텁지근한 좁은 방 공기에 졸리고 멍해진 머리로 할 수 있는 데까지. 브랜디 한두 모금의 위안이,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까지 가서 병을 가져오는 수고만큼 값어치가 있을까? 결론은 위안 쪽으로 났다. 병을 침대로 가져온, 공상 잘하는 니콜레타는 자기가 정말 파티에 와 있는 셈 치기로 했다. 그리하여 심심풀이로, 눈에 띄는 모든 것에 축배를 들기 시작했다. 맨 먼저 맞은편 벽에 도배된 공연 프로그램 속 인물들. 다음은 옷걸이에 걸린 자기 드레스들. 전부 버려진 무대의상을 뜯어 지은 것으로, 전부 니콜레타의 솜씨였다. 니콜레타는 바느질 솜씨가 아주 좋았다. 극장의 지난 몇 시즌을 장식한 여주인공들이 거기 나란히 걸려 있었다. 파르팔라, 리즈, 마드무아젤 카마르고, 이조르, 피아메타, 에올리네. 모두의 건강을 위해 한꺼번에 마셔도 나쁠 것 없겠다고 니콜레타는 판단했다. 그중 몇몇은 (지금은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제 공연의 마지막 막이 내릴 즈음 건강이라곤 남아나지 않은 신세였다 해도 말이다. 발레의 여주인공이란 대개 그렇게 되는 법이니까.
“말라니야는 아직 안 오고 나는 조금도 안 졸리니, 계속하는 수밖에.” 니콜레타는 그렇게 정하고, 침대 위에 일어서서 새로 채운 잔을 창 쪽으로 들어 올렸다. 목을 빼면 극장과 부속학교 사이에 줄줄이 매달려 흔들리는 종이 초롱의 붉은 불빛이 간신히 보였다. 그 불빛이 파티 손님들의 그림자를 거대하게 키워 안뜰에 드리우고 있었다. 니콜레타는 한동안 그중에서 임프레사리오의 옆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그림자들은 너무 빨리 움직였고 너무 괴상하게 뒤틀려서, 어느 것이 그분인지 도무지 가려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그림자에나 축배를 들 수는 없었다. 손님 중에는 니콜레타가 조금도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축들도 있었으니까.
마침내 시야에 남은 것은 어수선한 라임나무 화장대와 그 위의 거울, 그리고 약병들 틈에서 빼꼼 올려다보는 자기 얼굴뿐이었다. 기절할 때 쓰는 각성 암모니아수, 발에 쓰는 변성 알코올, 불면증에 쓰는 에테르, 그리고 무용수들이 분 대신 바르는 마그네시아 한 덩어리(말라니야 막시밀리아노브나는 워낙 핏기가 없어서 그것조차 거의 필요 없었지만). 그러는 사이 두통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잘된 일이야.”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자기 건강을 위해 마시는 건 아무래도 우쭐대는 짓이니까. 하긴 그러면 건강이 좋아질지도 모르지. 아유, 그런데 축배를 들 만한 경치는 못 되는걸!” 거울 속에는 누르께하고 원숭이 같은 조그만 것이 있었다. 온통 귀만 크고, 턱에는 흉터가 있고, 이는 누렇고, 덥수룩한 머리는 마카사르 기름을 듬뿍 발라야 겨우 눕는다. 하기야 유난히 작은 키 덕에 극장의 충성스러운 발레 애호가들 사이에 열성 팬이 제법 생기긴 했다. 그 팬들은 니콜레타의 이목구비에도 별 불만이 없는 눈치였다. 못난 구석이야 분장과 꼭대기 객석까지의 거리가 가려 주었으니까. 그래도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하기야 이 발레단은 미모로 유명한 곳이 아니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단 하나 쓸 만한 데는 눈이었다. 운모판처럼 옅고 맑은, 묘하게 투명한 눈. 그 위에 먹칠 자국 같은 짙은 눈썹.
“미모 문제는 접어 두고, 이 방에서 축배 들 거리는 이제 바닥났다고 선언하는 바이다.” 니콜레타는 혼잣말을 했다. “아, 그런데 마침 말라니야가 새 안줏거리를 들고 오시는군!” 다시 잔을 들고, 무대 일꾼 미샤에게 배운 신나는 노랫가락을 거의 다 떠올렸을 즈음이었다. 문을 아주 조용히 열어 보려던 말라니야가, 니콜레타가 자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니, 아직도 안 자고, 미친것처럼 팔짝팔짝 뛰기나 하고! 어머 얘, 너 담배 피웠니?” 말라니야는 인사 대신 그렇게 말하며 부랴부랴 창문을 비집어 열었다. “겐리하 그리고리예브나가 곧 방 점검하러 올 텐데! 그리고 그거 네 열병에 좋을 리 없어. 아니, 좋던가?” 말라니야는 창문을 반쯤 연 채 손을 멈추고, 자못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열은 이제 없어.” 니콜레타는 노래를 포기하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좋고 말고는 상관없지. 말라니야, 파티 얘기 해 줘야지!”
말라니야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니콜레타를 마주 보았다. 그 넓적한 얼굴에 다 씌어 있었다. 비밀이 있다는 것. 지키고 싶다는 것. 그러면서도 니콜레타가 살살 캐내서 결국 같이 나눠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 둘은 무엇이든 나누는 사이,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머리도 똑같이 포마드를 발라 넘기고, 옷도 비슷하게 입었다. 무용학교 시절부터 손을 꼭 잡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학교에서는 조금 위인 니콜레타가, 딱할 만큼 수줍고 새침한 이 아이의 보호자 노릇을 했다. 둘이 나란히 서면 우스운 그림이 되었고, 둘 다 그걸 알았다. 니콜레타는 어릴 때부터 거의 자라지 않았는데 말라니야는 무럭무럭 자랐기 때문이다. 말라니야는 지금도 계속 커지는 중이었고 그것 역시 알고 있었으며, 다른 이유들에 더해 그 이유로 대체로 우울했다. 니콜레타 쪽은 웃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나마 내세울 얼굴을 이가 다 망쳐 놓는 걸 알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춤출 때는 더했다. 비극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싱글벙글 웃으며 지나가 망쳐 놓은 죄로, 극장의 명령 일지에 몇 번이나 지적을 당했을 정도다.
“파티? 뭐, 아주 재미있었어.” 말라니야는 기계적으로 말했다. “다들 네가 없어서 무척 아쉬워했어, 정말이야.” 그러고는 홱 돌아서서 숄과 하얀 타를라탄 드레스를 벗기 시작했다. 군무진 봉급으로 마련할 수 있는 한에서 그나마 나들이옷에 가장 가까운 차림이었다.
물론 니콜레타와 달리, 말라니야가 이런 가난한 살림을 사는 것은 선택이었다. 말라니야의 어머니는 딸을 신부 수업 학교 대신 극장 부속 무용학교에 넣었다. 춤을 배우면 사교계의 자잘한 교양이 몸에 밴다니 구애와 결혼에 대비도 되고, 지체 있는 집안 아가씨들과 사귀게도 되리라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말라니야가 사귄 것은 니콜레타였다. 그리고 니콜레타를 따라 사귄 것이, 위풍당당한 태도에 그보다 더 위풍당당한 가슴을 지닌 라자라 모이세예브나, 언제나 농담이 준비된 아마빛 머리 니쿠샤 세르게예브나, 자그맣고 가무잡잡하고 부지런한 아나스타시야 이바노브나였다. 한번은 발레 애호가들이 가득한 관람석 칸 하나를 통째로 사귄 일도 있었다. 막간의 약속 자리에 나간 니콜레타를 데리러 갔다가, 친구의 신사 동무들이—이를테면 말라니야를 평론에서 소기름 덩어리라 부른 그 평론가보다는—눈이 덜 까다롭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유익한 오락을 거듭하면 친구의 자신감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니콜레타는 여겼다. 몸매를 줄이는 데는 여태 별 도움이 없었지만. “그런데 글쎄,” 니콜레타는 여러 번 곱씹었다. “말라니야네 어머니는 걔가 극장에 눌러앉아 제 밥벌이하는 걸 반대한단 말이지.” 어머니가 용돈을 끊은 것도 그래서였다. 딸이 햇빛 드는 세상으로, 그리고 차갑고 무덤덤한 약혼자 발레리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아, 털어놔 봐, 멜라니!” 니콜레타가 외쳤다. (그러니까 이 둘은 막시마 막시모브나가 대륙 순회공연에서 돌아와 군무진에 외국 이름 유행을 퍼뜨린 뒤로, 줄곧 서로를 “멜라니”와 “콜레트”라고 불러 온 것이다.)
“털어놓긴 뭘?” 말라니야는 시치미를 떼며 타이츠를 만지작거렸다.
“새 공연이 뭐냐고!” 공식 공고가 붙기 전날 밤, 임프레사리오가 비공식 발표를 하는 것이 늘 있는 관례였다.
“새 공연 맞아.” 말라니야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완전히 새거야. 제목은 제대로 못 들었어. 누구랑 무슨 나라의…… 아이, 애초에 한마디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럼 창작 발레라는 거야? 누가 지었대?”
“응, 그걸 두고 아주 난장판 싸움이 났는데, 더는 절대로 말 안 할 거야.”
“말라니야!” 니콜레타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 별난 아이를 모르지 않았다. 좀처럼 없는 소문 배달부 노릇에서 말라니야는 분명 재미를 보고 있었다. “다 말해 주기로 약속했잖아!”
“라자라 모이세예브나가 말하면 귀싸대기를 올린댔단 말이야!”
“모를 거 아냐. 그리고 지금 안 말해 줘도,” 니콜레타는 조리 있게 따졌다. “내일 아침 배역 발표 때 어차피 알게 될 텐데, 그 전에 내가 누구한테 옮길 틈도 없을 거고.”
“있을지도 모르지.” 말라니야는 그렇게 말했다가 생각을 굴려 보고는 고쳐 말했다. “내일 알게 될 거야.”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덧붙였다. “공연이란 게 있기나 하다면 말이지만…….”
니콜레타는 이 마지막 말이 여간 약 올리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새 말라니야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둘이 함께 쓰는 침대의 제 자리에 파고든 뒤였다. 니콜레타로서는 비밀을 캐낼 아주 손쉬운 방도가 생긴 셈이었다. 말라니야는 소스라치게 놀라 통통한 허벅지를 딱 붙이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침대는 아주 좁았고, 니콜레타의 손은 보기 드물게 영리했다. 이내 몸집 큰 소녀는 그 밑에서 흐물흐물 풀어져 고분고분해졌다. 이제 니콜레타가 홱 손을 거두어 그 빈자리를 사무치게 만들기만 하면, 말라니야는 항복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감질나게 굴지 마!” 말라니야가 앓는 소리를 냈다.
“자, 멜라니, 자백해! 무슨 싸움이 났는데?”
“그게, 임프레사리오가 새 공연을 발표하기 시작하는데, 마담 지노비예바가 말을 끊었어. 시나리오에 자기 공로를 제대로 안 밝혔다는 거야. 마담 카메네바가 맞장구를 쳤고.”
“쳤겠지, 안 봐도 훤하다!” 니콜레타가 말했다. 시나리오 작가와 합창단장이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라는 것, 늘 한통속으로 임프레사리오에게 대든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몇 시즌 전에는 「두 마담」(다들 그렇게 불렀다)을 따르는 단원들이 마담 지노비예바의 무슨 불만 때문에 춤추기를 거부해서, 극장이 해산될 뻔한 일도 있었다. 물론 임프레사리오가 때맞춰 다 수습하고 배신자들을 복직시켜 주었다. 그런데 그중 여럿은 제가 일으킨 소동을 부끄러워하는 예의조차 차리지 않았다.
“그런데 임프레사리오가, 대본도 시나리오도 악보도 다 마담 울리야노바가 쓰신 거라고 했어.” 말라니야가 말했다. “그러니까, 돌아가시기 전에.”
그건 어렵잖게 상상이 갔다. 극장의 초대 극장장은 얼마나 무서운 분이었는지, 니콜레타는 이따금 그분이 정말 돌아가셨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아주 끔찍한 난리가 났는데,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팔이라도 좀 놔줘, 니콜레타…….” 니콜레타는 대신 제 손을 밀어 넣었고, 말라니야는 놀람 반 안도 반으로 몸을 떨었다. “알아 둬, 이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오간 말을 옮기는 것뿐이야.” 그렇게 운을 떼고 말라니야가 전한 바는 이랬다. 마담 지노비예바는 얌전하다고는 못 할 만큼 거나하게 걸친 상태였다. 그러다 급기야, 임프레사리오가 무대를 기계장치로 바꿔 놓는 바람에 관객이 절반은 달아났다는 소리까지 내놓았다. “그랬더니 임프레사리오가, 마드무아젤 코스트리코바를 달아나게 한 건 되레 마담 지노비예바가 아니냐고—”
니콜레타는 숨을 삼켰다. “내가 늘 뭐라고 했어? 뭐라고 했냐고, 말라니야? 그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야.”
“어머, 너 또 그 발작 시작이구나?” 말라니야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자기 전에 이렇게 들뜨게 하려던 게 아닌데.”
“이렇게 됐으니 자초지종을 다 듣기 전엔 잠이 안 올 게 뻔하지! 어떻게 달아나게 했다는지도 말씀하셨어?”
“그게, 그러니까…… 수업에서 편애를 해서라고…….”
“그리고 새 무대장치에 맞춰 스텝 고치기를 거부해서. 한마디로 지난 공연을 통째로 망쳐 놔서.” 니콜레타가 보탰다.
“그리고 마드무아젤 코스트리코바 얘기가 나오고부터는, 정말 서로 무, 물어뜯을 것처럼 달려들었어. 아, 아!” 말라니야는 소리를 지르며 널빤지처럼 뻣뻣해졌다가 도로 늘어졌다. “그러니까, 두 마담이 그분한테 달려든 거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라 웅웅대는 소리로, 말라니야가 고쳐 말했다.
“그러고는 둘이 씩씩대며 나가 버렸다?” 니콜레타가 넘겨짚자 말라니야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브론시테인 사건을 다 용서해 주시고, 수습해 주시고, 새 출발까지 시켜 주신 그 수고가 무색하게!”
원하는 것을 다 얻어낸 니콜레타는 말라니야에게서 굴러 내려와 반듯이 몸을 뻗었다. 이 발레단의 무용수라면 누구나 그렇듯, 니콜레타도 마드무아젤 코스트리코바가 사라지던 순간 자기가 어디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했다. 막내 기숙사생들을 침대에 뉘어 주고 있었다. 때는 겨울, 니콜레타가 부속학교에서 보모 노릇을 하던 시절이었다. 임프레사리오가 기숙사 방으로 뛰어들어 손에 등불을 쥐여 주었을 때는 혼이 반쯤 나가게 놀랐다(그때는 아직 그분을 지금의 절반만큼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몇 시간이고 눈 덮인 극장 경내를 헤매며 코스트리코바를 불렀다. 소용은 없었다. 니콜레타는 지금도 생생했다. 제 손을 덮던 그 손의 온기가. 어깨에 걸쳐 주던 그 외투의 무게와 냄새가. 그리고 그분이 맨 처음 나온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한 말을, 이따금 혼자 되뇌곤 했다. “아니, 니콜레타 이바노브나, 자네가 여기 있어 주니 이 얼마나 반가운가!”
어떤 아이들은 마드무아젤 코스트리코바가 애인 손에 몰래 빼돌려졌다고 했다. 심지어 미묘한 사정 탓에 공연 도중 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아이들도 있었다. 더없이 공정한 임프레사리오는 니콜레타가 듣는 데서 이렇다 저렇다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분이 마침내 하나의 가설을 내놓았다는 것부터가 대단한 소식이었다. 게다가 그 결론이 니콜레타 자신의 결론과 같다니. 아무리 적게 말해도, 짜릿했다.
“무슨 생각 해?” 말라니야가 불안하게 물었다. “이제 잘 거야? 원한다면 내가…… 어, 그러니까, 나도 해 줄 수는…….”
니콜레타는 고개를 저었다. “마드무아젤 코스트리코바 말이야. 난 처음부터 생각했어. 마담 지노비예바가 돈을 주고 내보냈거나, 무슨 수를 써서 몰아냈거나. 아무튼 누군가 그랬다고.” 그러면서 무슈 브론시테인을 떠올렸다. 극장에 끔찍한 원한을 품은 그 실각한 음악감독은, 지금도 멀리서 신문 지상으로 극장을 물어뜯고, 알 수 없는 경로로 임프레사리오에게 갖은 골탕을 먹이고 있었다. “그 패거리는 코스트리코바가 저희 귀한 부하리나를 제치고 『라 피유』 주역을 딴 걸 끝내 용서 못 했으니까.”
“부하리나는 마담 카메네바랑 사이가 나쁘지 않았어?” 말라니야가 말했다. “나스탸 말로는 둘이 맨날 템포 갖고 싸웠다던데.”
그 둘도 그새 앙금을 풀었을 게 틀림없다고 니콜레타가 설명해 주려는데, 복도에서 겐리하 그리고리예브나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말라니야에게도 들렸다. 니콜레타가 머리맡 등불을 끄는 사이 둘은 숨을 죽였다. 마드무아젤 코스트리코바가 사라진 뒤로 무용수들은 시즌 중 모두 극장에서 기숙해야 했고, 밤마다 전원이 방에 무사히 들었는지 확인하는 일이 겐리하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겐리하가 한 일이라곤 문을 두드리고 건성으로 “소등” 하고 외친 것뿐이었다. 안에서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자물쇠에 열쇠를 돌리고는 가 버렸다.
“우리가 방에 아예 없었대도 몰랐을 거 아냐!” 니콜레타가 씩씩거렸다. “게으른 것 같으니! 최소한 고개는 들이밀어야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 저래서야 방에 남자 하나 숨기기가 얼마나 쉬워!”
“그거야 본인이 제일 잘 알겠지.” 말라니야가 한마디 했다. 말라니야에게도 재치는 있었다. 다만 내보이기를 부끄러워해서, 니콜레타의 농담에는 꼬박꼬박 얼굴을 붉혀 주었다. 깜박할 때만 빼고. 겐리하 그리고리예브나는 미인도 아니고 아주 뚱한 위인이었지만, 어찌 된 노릇인지 추종자를 꽤나 거느렸고, 극장 밖에서의 행적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니콜레타는 고개를 돌려 말라니야의 귀를 다정하게 핥아 주었다. 아까 거칠게 군 데 대한 사과였다. “그래, 우리가 여기서 못된 짓, 아주 못된 짓을 하고 있어도 걘 몰랐을걸. 그건 그렇고, 아까 그 제목이 뭐라고, 멜라니? 누가 무슨 나라에 어쨌다고?”
“뒷부분은 나도 못 들었어. 미안해, 기억하려고 하긴 했는데.”
“괜찮아. 중요한 건, 운이 좋으면 두 마담이 아예 손을 뗄지도 모른다는 거야!” 지난 시즌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마드무아젤 코스트리코바가 없어서만이 아니었다. 공연의 각 부분이 서로 부딪쳤다. 임프레사리오의 기발한 무대 술책은 둔하게 터덜대는 안무와, 가볍고 익살맞은 대본은 카메네바의 심각한 곡조와. “무슨 나라랬지? 우리가 왕과 왕비가 될지도 몰라.” 니콜레타는 신이 나서 다리를 파닥거리며 말했다.
“난 뭐, 시녀 2 이상은 기대도 안 해.” 말라니야가 말했는데, 아마 맞는 말이었을 것이다. 극장은 오디션이란 것을 열지 않았다. 지난 공연들과 수업의 평가만으로 배역을 공정하게 정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고, 그래서 배역표에는 발레 마스터 전원의 입김이 닿았다. 그러나 마스터들에게는 저마다 총애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역시 발언권이 있는 임프레사리오로 말하자면, 니콜레타나 말라니야 같은 군무진 아이들은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보여 드릴 기회조차 좀처럼 없었다. 둘 다 독무 배역은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시녀 2가 싫다는 건 아니지만.” 말라니야가 덧붙였다. 언제나 기뻐해 보려고는 하지만 좀처럼 성공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니콜레타는 이 가엾은 것에게 다시 입을 맞추고 다독여 주려던 참이었다. 너는 그보다 한참 나은 배역을 받아 마땅하다고, 아무도 네 귀싸대기를 올리지 않을 거라고. 학창 시절 밤마다 피보호자의 침대맡에 앉아 머리를 쓸어 주며, 마음이 풀릴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대로. (이 우스운 아이는 왜 밤마다 우는지 끝내 설명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보일러가 멎었다. 관 울리는 소리가 사라지자 위층의 삐걱대는 마룻바닥 소리와 아래층 방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들어 봐.” 니콜레타가 말했다. 귀 기울이는 사이, 파티에서 돌아와 기숙 첫 밤을 준비하는 무용수들의 소리로 기숙사동이 살아났다. 니콜레타에게는 오랜 불면 끝에 갈고닦은 자장 놀이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하나하나 그림으로 그려 보는 것이다. 경내에 풀려나 뛰노는 경비견들이 멀리서 장난스레 짖는 소리. 머리 위에서 슬라바 미하일로브나가 포지션 연습을 하는 메트로놈 소리와, 마룻바닥을 쓸고 가는 슬리퍼 소리. 저 아래 세면실 타일에 울리는 웃음소리와 물 튀기는 소리. 재봉틀 소리에 겹치는 소곤거림.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자존심 세고 지독히 미신 깊은 지휘자, 무슈 투하쳅스키가 아끼는 낡은 바이올린의 구슬픈 톱질 소리. 그 모든 소리의 맨 밑바닥에서는, 극장 맨 안쪽 서재에서 임프레사리오가 파이프 재를 터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가서 알려 드릴 거야.” 니콜레타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음을 정하려 애쓴 것도 아닌데, 어느새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코스트리코바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분이 우리보다 훨씬 많이 아셔. 그러니 그분이 두 마담 짓이라고 여기시면 정말 그런 거야. 말라니야, 그분은 너무 마음이 좋으셔. 사람들을 계속 곁에 두시잖아. 기회를 또 주시고. 가서 조심하시라고 말씀드려야겠어. 그렇지 않니, 말라니야?”
대답은 없고, 새근새근 코 고는 소리만 들려왔다.
제2장
앨리스는 벌떡 일어났다. 조끼 주머니가 달린 토끼도, 그 주머니에서 꺼낼 시계를 가진 토끼도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데 퍼뜩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호기심에 몸이 달아 들판을 가로질러 토끼를 쫓아간 앨리스는, 토끼가 산울타리 밑 커다란 토끼 굴로 폴짝 뛰어드는 것을 다행히 늦지 않게 목격했다.
다음 순간 앨리스도 토끼를 따라 뛰어들었다. 대체 무슨 수로 도로 나올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채.
이튿날 임프레사리오의 공식 발표는 여느 때와 똑같이 흘러갔다. 어찌나 똑같았는지, 배역 낭독 순서에 이르렀을 무렵 니콜레타는 그분께 경고해 드린다는 계획은 접어 둔 채였다. 대신 파티를 두고 그런 허튼소리를 지껄인 죄로, 말라니야의 귀를 아주 흠씬 핥아 주리라(말라니야는 이것을 질색했다) 벼르는 중이었다. 하기야 말라니야의 말은 다 맞았다. 연극의 제목은 『이상한 나라의 소냐』였다. 마담 울리야노바가 지은 것도 맞았다. 임프레사리오가 고인의 옛 방을 정리하다 트렁크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마담 지노비예바도 마담 카메네바도 단원들과 함께 1층 객석에 없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다만 단원 총회에 나오는 마스터는 원래 몇 되지 않았다. (이날 아침 나온 이들은 무언극을 가르치는 늙은 마담 칼리니나와 의상 담당 마담 리코바였다. 리코바는 코리페 출신으로 지금도 극장 공연에 곧잘 섰는데, 남장 역(앙 트라베스티)일 때가 많았다.)
그러나 1층 객석 앞쪽 보면대 뒤에 선 임프레사리오는 조금도 동요한 기색이 없었다. 원래 언제 어느 때든 목소리가 나직한 분이었다. 누구에게든—그 사람 잘 들볶는 마담 지노비예바에게조차—언성을 높이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군무진 고참들 말로는, 옛날에도 그분은 무슈 브론시테인에게 한 번도 예의를 잃은 적이 없다고 했다. 반면 브론시테인의 목소리는 걸핏하면 빽빽대는 비명까지 치솟았다던가. 임프레사리오는 언제나 모두의 사정을 다 들어 보려 하시는 분이었다! 니콜레타가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그분이 부속학교 교장이던 시절이었다. 마드무아젤 페트로바라는 학생과 벌인 말다툼을 해명하러 교장실에 불려 갔던 것이다. 다른 마스터들과 달리 그분은 귀 기울여 들어 주었다. 니콜레타의 진술을 믿어 주었다. 그리고 페트로바가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데 동의해 주었다.
“이번에 올릴 작품은,” 그분이 말하고 있었다. “온전히 여러분의 즐거움을 위해 씌어진 것입니다. 마담 울리야노바께서는 우리 단원들의 강점과 우리 극장이 부릴 수 있는 온갖 효과를 유감없이 보여 줄 작품으로 구상하신 듯합니다. 지금껏 우리가 올려 온 발레들과는 분명 딴판일 겁니다. 줄거리가 어린이 책에서 왔으니, 유감스럽지만 간통도 없고, 사랑에 못 이겨 죽는 이도 없고, 산적도 하렘도 사악한 백작의 납치극도 없을 겁니다…….” 발레 상투 수법의 목록에 단원들이 웃음을 터뜨리자 그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야기도 인물도 허무맹랑합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다른 어느 발레보다 더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발레나 그렇듯, 무용수가 이야기를 믿고 제 배역을 믿는 한 관객도 믿게 됩니다.”
과연 등장인물 몇몇의 이름은 허무맹랑하게 들렸다. 그래도 그중에는 왕과 왕비도 몇 있기는 있었다. 그런 배역은 모두 주역 무용수들에게 돌아갔다. 주역들은 객석 뒤쪽에 몰려 앉아 있었다. 여럿이 의자에 늘어져 있었고, 몇몇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난징 무명 연습복 위에 외투를 걸치는 것이 허용되었다. 군무진은 창문 없는 극장의 새벽 한기에 오들오들 떨었다.
주역 소냐가—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겐리하에게 돌아간다는 말에 니콜레타는 놀랐다. 겐리하는 최고참도, 제일 기량이 뛰어난 축도 아니었으니까. 하기야 마드무아젤 코스트리코바가 떠난 뒤로 이 발레단에 진짜 스타가 없기는 했다. 그리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겐리하의 포르 드 브라에는 이따금 뭉클하도록 나른하고 사색적인 기품이 어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느 장면의 반주에 유난히 사로잡힐 때면 그랬다(오케스트라 단원들과의 염문으로 미루어, 음악을 대단히 애호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지젤』의 윌리 여왕 역도 그러고 보면 훌륭했다.
그렇다 해도, 부스스하고 시무룩하고 눈이 반쯤 감긴 겐리하의 초상이 코스트리코바의 포스터 옆에 나붙는 그림은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부하리나의 포스터 옆에조차도. 부하리나는 그렇게 끔찍하게 제 망신을 사기 전까지는 무언극의 천재쯤으로 통하던 인물이었다. 『파피용』에서 나비 공주 파르팔라로 분한 부하리나에게는, 니콜레타의 세련된 신사 친구 예브게니처럼 감상이라면 이골이 난 평론가조차 눈물을 쏟았을 정도다. 부하리나는 그 시즌의 스타이던 시절의 몸가짐을 여태 버리지 못했다. 어린애 같았고, 귀엽게 익살맞을 때도 있었지만 참을 수 없이 오만할 때가 더 많았다. 전 단원 앞에서 울음보를 터뜨리는가 하면, 꼬마 연출가 행세를 하며 저만큼 잔뼈가 굵은 무용수들의 에폴망을 고쳐 주고, 제 배역의 동기를 놓고 마스터들과 시비가 붙곤 했다.
니콜레타는 전날 밤의 예상과 달리 작은 독무 배역을 받았다. 2막에 파 드 되가 있는 익살꾼 쌍둥이 중 하나였다. 다른 쌍둥이는 말라니야였다. ‘이거야말로 임프레사리오가 우리 둘이 친구라는 걸 아실 만큼 마음을 써 주셨다는 증거지.’ 배역표 낭독이 끝나고 단원들이 모두 일어설 때까지도 니콜레타는 그 생각에 취해 있었다.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주역 중에 제일 좋아하는 소피코 오르조니키제가 한 팔로 니콜레타를 덥석 끌어안더니, 축하랍시고 머리를 사납게 헝클어 놓은 것이다. 소피코 자신의 머리만큼이나 봉두난발이 되도록.
그런데 무언가가 니콜레타의 발길을 붙들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도로 묶는 일 말고, 군무진을 따라 연습실로—반쯤 언 무용수들이 스트레칭하겠다고 몰려드는 높은 창과 햇살 조각의 방으로—가지 못하게 막는 무언가가. 그 무언가에 이끌려 니콜레타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임프레사리오의 서재로 통하는 복도로 꺾어 들었다.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겐리하가 (일부에서 부르기 시작한 대로) 간수라는 특별 소임에 더해 이번 주역까지 꿰차게 된, 그 아리송한 연유와 관계있는 무언가였다. 나스탸 이바노브나는 이것만으로 겐리하가 임프레사리오의 정부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니콜레타는 반대 증거를 놓칠 수 없었다. 애초에 지난 발레들의 스타가 죄다 임프레사리오의 정부였다는 통설부터 믿지 않는 니콜레타였다.
‘겐리하는 문단속 소임이 내키는 것 같지 않고,’ 서재로 오르는 좁은 계단에서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임프레사리오는 겐리하가 마음에 드시는 것 같지 않단 말이야.’ 게다가 임프레사리오는 두 시즌 전까지 금슬 좋은 유부남이었다. 젊은 부인이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여태 이어 붙여 생각을 못 해 봤네.’ 서재 문의 노커에 발돋움하며 생각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면 그분은 스승이신 마담 울리야노바와, 부인과, 주역 무용수를 잇달아 잃으신 거잖아.’ 그러나 이 생각을 더 짚어 볼 겨를은, 지금은 없었다.
“들어오게.” 임프레사리오가 말했다. 니콜레타가 들어서자, 들여다보던 악보 뭉치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니, 니콜레타 이바노브나 아닌가! 앉게, 앉아. 그래 좀 어떤가, 아가? 요양 수칙은 잘 지키는지 따끔하게 캐물어야지 하던 참이었네.”
니콜레타는 방긋 웃으며 책상 옆 오토만에 앉았다. “아주 다 나았습니다, 선생님.”
“배역은, 마음에 드는가?”
“아, 네.” 니콜레타는 서재 맞은편에 놓인 침대 겸 소파를 발견하고, 그분이 저기서 주무시는 걸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새로 생긴 버릇이야. 전엔 분명 저런 게 없었으니까.’
임프레사리오는 앞에 놓인 악보로 눈을 돌리고, 말하는 동안 연필로 마디에서 마디로 줄을 그어 갔다. “실은 더 나은 걸 주고 싶었네만, 배역이란 게 얼마나 타협 덩어리인지 자네는 모를 걸세. 나는 아무래도 마담 울리야노바 같은 배역 솜씨는 없어. 모두가 만족해야 하거든. 마스터들도, 무용수들도, 총애하는 아이가 독무를 못 받으면 내 방문을 부수러 올 중이층 관람석의 후원자들까지도. 자네는 후원자가 있는가?”
“아—아뇨.” 니콜레타가 대답했다. 신사 친구야 많았고, 그중에는 신문에 칼럼을 가진 예브게니처럼 영향력 있는 남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를테면 커튼콜 때 다른 박수부대의 박수를 눌러 줄 박수부대를 사 줄 부류는 없었다. 니콜레타는 아주 높은 사교계와는 물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공작님들과의 고정 약조도, 별장도 브로치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클레멘티나 예프레모브나가 숭배자에게 귀 뚫는 것을 허락해 주고 받았다는 금귀걸이 같은 것도.
“그편이 낫네.” 임프레사리오가 흡족하게 말했다. “후원자란 득보다 성가심이 많은 법이지. 그래, 군무진의 자네 친구들은 제 배역이 마음에 든다던가?”
발레는 아직 수수께끼에 싸여 있고 제 배역이 뭘 하는 배역인지도 모르는 판이니, 다들 궁금해할 따름이라고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입으로는 예의 바르게 말했다. “마음에 들어 할 거예요, 분명.”
“주역들은?”
“지금까지는 좋아하는 눈치예요.”
“그래, 다들 예의 바르더군, 안 그런가. 나는 야유가 반쯤 나오려니 했는데. 아, 하기야 그러니 내가 그리 오래 눈치채지 못했겠지.”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임프레사리오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말할 이유가 하나 없는데 왜 자네한테는 말하고 싶어지는 걸까? 자네한테 뭔가 있는 게야, 니콜레타. 사람들이 자네한테 곧잘 속엣말을 털어놓지 않던가?”
“네, 맞아요, 다들 절 붙들고 자기 살아온 얘기를 늘어놓지 뭐예요!”
“그 눈 때문일 걸세, 아마.” 임프레사리오가 말했고, 이 말에는 니콜레타도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알고 보니 대꾸는 바라지도 않으신 것이었지만. “아무튼, 이게 비밀이기나 한지 내가 착각하는 건지도 모르겠군. 군무진에 벌써 다 퍼진 얘긴지 자네가 말해 줄 수 있겠지. 혹시 기억하나, 지난 시즌에 마드무아젤 라데카가 맡았던 배역? 『에올리네』의 악역 말일세.”
기억했다. 『에올리네』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라곤 산의 정령 뤼베찰뿐이었다. 표제의 나무 요정에게 반해서, 구애랍시고 숲을 절반이나 베어 넘기다가, 요정이 딴 남자와 혼인하자 살기 어린 분노로 숲을 몽땅 태워 버리는 역이었다. “거울 장면은 좋았어요.” 니콜레타는 기억을 더듬었다.
“마드무아젤 라데카가 워낙 희극이라면 사족을 못 쓰니, 그 역을 한 팔은 늘어뜨리고, 콧수염을 붙이고, 이는 노랗게 칠해서 하자는 것도 본인 생각이었겠지.”
니콜레타는 기가 막혀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뤼베찰이 임프레사리오를 빗댄 희화라는 것쯤은 알아보았었다. 다만 애정 어린 희화이려니 여겼던 것이다. “저는 그냥, 그 역이 불을 뿜으니까—선생님 파이프 때문에요—그리고 선생님이 산악 지방 출신이시니까 그런 줄 알았어요. 다 좋자고 하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
“그래, 온 단원이 함께 즐기는 순진한 농담이지.” 그 어조는 놀랍게도 조금도 쓰지 않았다. “라데카의 발상인 건 분명하네만, 적어도 의상 담당들은 거들었을 게야. 니콜레타, 자네는 혹시—아니, 자네가 혼자만 농담에서 따돌려진 적이 있을 리 없지.”
있었다. 그러나 니콜레타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그게 선생님을 놀리는 농담인 줄은 정말 몰랐어요. 군무진의 다른 아이들도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그럼 주역들만 알았군. 생각해 보게. 매일같이 보아 오고 아껴 마지않게 된 아이들인데, 커튼 한 장 걷히니 나를 무슨 흉측한 색골 영감쯤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걸세. 여태 내내 미움받고 있었다는 걸. 물론 지금도 나는 그 아이들이 다 끔찍이 예뻐. 어쩔 수가 없네, 하나같이 그렇게 사랑스러운 것들인걸. 하기야 그 청원서 소동 때 알아차렸어야 했네만—”
“그렇지만 너무 불공평해요! 선생님이 그 사람들한테 뭘 어쨌다고요?” 니콜레타는 저도 놀랄 만큼 대담하게 외쳤다. 이야기를 듣는 사이 심장이 두방망이질하고 있었다. 이런 모욕이 그분께는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 되레 그분을 대신한 분개에 불을 붙였다. 임프레사리오를 극장에서 몰아내자는 그 청원서가 부하리나의 작품이라는 것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 부하리나가 『에올리네』 주역에서 밀려난 직후에 나온 청원서였으니까. 지금 부하리나는 그분 앞에서는 굽실대면서 뒤에서는 헐뜯었다. 제 지위가 위태로워질 짓은 감히 못 하는 것이다. 자기가 한때 이 여자를 매력 있다 여겼다는 게 니콜레타는 믿기지 않았다. “선생님이 안 계셨으면 우린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니콜레타는 계속했다. “선생님이 나서서 마담 울리야노바 자리를 이어받지 않으셨다면, 편찮으실 때 돌봐 드리지 않으셨다면, 저 사람들은 춤출 무대도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임프레사리오는 씩 웃을 뿐이었다. “아이고, 니콜레타.” 그분이 일어나 어깨를 토닥여 주었을 때에야, 니콜레타는 자기가 분김에 벌떡 일어서 있었음을 깨달았다. “고맙기야 고맙네만, 자네를 속상하게 하려던 게 아니야. 이런 얘기를 늘어놓은 건 그저, 예술 속의 삶이란 게 얼마나 묘한 것인지 알아주었으면 해서일세. 막이 오르는 순간부터 무용수들이 뭘 하든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네. 그게 극장의 본성이지. 나는 그 아이들한테 아무 원한 없어. 자네도, 군무진의 다른 아이들도 부디 품지 말게. 춤에 지장만 없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좋아. 다만 그 억측만은 말아 주었으면 하네. 억측이 고약한 소문을 낳거든. 그렇게들 남의 사람됨을 완전히 그릇되게 넘겨짚게 되는 걸세.”
“소문이 들리기만 하면 제가—!” 니콜레타가 말을 시작했다.
“아니, 아니, 아가, 애쓸 것 없네. 그나저나 내가 자네를 너무 오래 붙들었군. 나한테 하려던 얘기가 무엇이었나?”
여기서 니콜레타는 마담 카메네바와 지노비예바에 관해 하려던 말을 다시 저울질했다. 그것이야말로 억측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는 소리였으니까. ‘그렇지만 이만큼 속을 터놓아 주셨는데, 무슨 말이든 해 드리고 싶단 말이야!’ 게다가 주역들에 대한 분은 풀리지 않았고, 임프레사리오는 걱정스러웠고, 눈 얘기에 마음은 아직 달떠 있었다. 그래서 앞뒤 잴 것도 없이 말해 버렸다. “선생님, 겐리하 그리고리예브나가 밤에 문단속을 그리 야무지게 하는 것 같지 않아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 처음에는 자못 근엄한 말투였다. 그러나 니콜레타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사이 그분은 다시 씩 웃기 시작했고, 니콜레타는 아무 말도 하지 말 것을 하고 간절히 후회하기 시작했다.
임프레사리오는 그 곤혹스러운 낯빛을 보고 다독여 주었다. “고맙게 생각하네, 니콜레타. 내가 자네를 아주 속 깊은 아이라 여겨 온 게 역시 옳았어. 하지만 밤새 그런 걱정으로 지새우는 건 바라지 않네. 춤에나 마음을 쏟게! 겐리하 그리고리예브나한테는 내 단단히 일러두지.”
“저는 그저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이에요.” 니콜레타는 땅속으로 꺼지고 싶은 심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이 임프레사리오에게 무슨 생각을 심어 준 모양이었다. 그분은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래.” 그분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래, 실은 자네가 도움이 될 수 있겠어. 니콜레타.” 그러면서 조그만 금열쇠 두 개를 꿴 고리를 들어 보였다. “마음이 놓이겠다면, 자네가 겐리하가 일을 제대로 하는지 검사해 보게. 첫째 열쇠는 자네 방문을 안에서 열 수 있고, 둘째 열쇠는 복도의 다른 방들을 모두 잠글 수 있네. 겐리하가 순찰을 돈 뒤 한 시간쯤 지나서 슬쩍 나가면 되겠지. 겐리하한테는 모르게 하는 게 좋아. 그리고 방이 다 자네 성에 차게 잠겼는지 보는 걸세. 물론 그래야 잠이 오겠다면 말이지만.”
‘이렇게 선선히 나를 믿어 주시다니!’ 니콜레타는 속으로 감격했다. 그러나 (나중에 깨달은 일이지만) 임프레사리오는 그 벅찬 표정을 달리 읽은 모양이었다. 왜 겐리하에게 비밀로 해야 하는지 몰라서 짓는 표정으로.
“그러니까, 내가 저를 못마땅해한다고 여기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네.” 그분이 설명했다. “그 사람이 여간 잘 삐치는 게 아니라서 말이지. 하지만 자네가 말을 꺼냈으니 말인데, 겐리하가 문을 가지고 무슨 못된 장난을 치는지—제 친구들을 밤놀이 삼아 풀어 준다든지 하는 것 말일세—나도 알고 싶기는 하군.”
“아,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어요.” 니콜레타는 서둘러 말했다. “저지른 게 없는데 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다른 아이들도 절대 깨우지 않을게요. 제가 다녀간 줄도 모르게 할게요. 문지방 밑으로 불이 꺼졌나 보고, 소리에 귀 기울이고, 손잡이를 돌려 보고요. 덜컹대지 않게요, 물론.”
“혹시 아는가? 자네가 소문 한둘을 잠재워 줄 수 있을지. 다른 발레단에서 우리 무용수들 두고 하는 고약한 소리들, 자네도 들었겠지?”
“못생겼다는 거요.” 니콜레타가 기억을 떠올렸다.
임프레사리오는 웃음을 삼켰다. “그 문제는 유감스럽게도 아직 해결책을 못 찾았네. 아무렴 어떤가. 그건 그렇고 말인데, 이번 시즌엔 주요 배역마다 대역을 두어 볼까 한다네. 혹시라도…… 뭐, 그저 그게 현명하니까. 자네가 이렇게 고맙게도 겐리하 일을 알려 주러 와 주었으니, 자네를 겐리하의 대역으로 세우면 어떻겠나? 이렇게 재능 있는 젊은 무용수가 뒤꿈치를 바짝 쫓아오면, 그 사람 발놀림에도 생기가 좀 돌 테지.”
‘그것 봐, 겐리하가 그분의 총애를 받는 몸이라면 방금 그 말씀은 설명이 안 되지!’ 니콜레타는 내심 흡족했다. 입 밖에 낸 말은 이것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 참, 자네가 버틸 만큼 튼튼한지 묻지를 않았군.” 임프레사리오가 불쑥 말했다. “자네 체질에 이 일을 다 얹는 건 좀—”
“튼튼하고도 남아요!” 니콜레타는 장담하며 열쇠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저는 얼마든지 조용조용 다닐 수 있어요. 말라니야는 잠이 어찌나 깊은지, 비밀은 문제없이 지켜질 거예요.”
나중에 떠올린 일이지만, 그 자리에서 임프레사리오는 겐리하 말고는 누구에게도 비밀로 하라고 청하신 적이 없었다. 물론 니콜레타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청하셨을 테지만. ‘이건 무슨 뜻일까?’ 니콜레타는 두고두고 생각하게 된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같은 생각에 같은 순간에 이르렀다는 건.’ 감히 바랄 수는 없었다.
임프레사리오는 새 소임을 대하는 니콜레타의 자세가 흡족했던지, 너무 오래 붙들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연습실로 보내 주었다.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되겠나.” 그분이 말했다. “이걸 무대배경 화가 라브렌티 파블로비치한테 갖다주겠는가? 오늘 연습을 거들러 와 있을 텐데, 배경막 지시서를 달라고 나를 들볶는 중이라서. 아, 자네들 아는 사이지, 아마?”
니콜레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받았고, 문까지 배웅해 주시는 그분 앞에서 무릎을 굽혀 절했다. 그분은 그것을 아주 즐거워하셨다.
* * *
실인즉 니콜레타는 무대배경 화가 라브렌티 파블로비치와 아주 잘 아는 사이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안 되어 니콜레타가 크게 앓아누웠을 때였다. 라브렌티 파블로비치가 시골 다차에서 요양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마침 임프레사리오의 배경막 한 벌을 마무리하느라 빌려 둔 집이었다. 거기서 두 사람은 서로를 알게 되었고, 요양이 끝나자 니콜레타는 그의 작업을 거들기 시작했다. 그는 배경막을 모두 실경을 보고 그렸다. 그리고 공연에 쓸 색을 정확히 맞추려면, 임프레사리오가 트렁크에 담아 올려 보내는 갖가지 의상을 입어 볼 무용수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라브렌티가 이젤에 캔버스를 메우거나 참고 사진을 찍을 사진기를 세우는 동안, 니콜레타는 둘이 끌고 온 트렁크를 뒤져 하나하나 선보였다. 이 드레스는 분홍바늘꽃 만발한 들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저 드레스는 주목 숲을 등지면 어떤지. 화가가 소임에서 놓아줄 때까지. (그러고 나면 산딸기를 따러 가도 되었다. 산딸기를 치마폭에 담아 오면 안 된다는 것은, 마담 리코바에게 붙들려 못 쓰게 만든 드레스를 다시 짓고서야 배웠다.) 라브렌티는 그 도움을 무척 고마워했고, 니콜레타는 그의 자연 연구를 거드는 일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무척 즐거웠다. 그래서 이제는 날씨가 좋고 연습이 너무 바쁘지만 않으면, 니콜레타가 늘 이 소풍에 따라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라브렌티 파블로비치가 오늘 연습에서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건지, 니콜레타로서는 수수께끼였다. 그가 피아노를 친다는 것을 떠올리기 전까지는. 과연 연습실에 내려가 보니 건반 앞에 앉은 것은 라브렌티였다. 거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슬라바 미하일로브나가 군무진의 에샤페를 지도하는 동안 치고 있는 가락은 그럭저럭 단순했다. 게다가 복도에서 살금살금 들어오는 니콜레타를 놓칠 만큼 연주에 몰입해 있지도 않았다.
“이게 누구야, 니콜레타 이—반—오브—나 아니신가?” 라브렌티는 니콜레타의 이름을 엉터리 음계로 노래하더니, 토슈즈 끈을 맬 틈도 주지 않고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간 떨어질 뻔했잖나, 나의 제일 프티한 프티 라야! 못 본 사이에 쪼그라들어 없어져 버린 줄 알았지.”
“저는 임프레사리오가 무대장치를 네스토르 아폴로노비치한테 맡기신 줄 알고 간 떨어질 뻔했는데요.” 니콜레타는 대꾸하며 총총 다가가 피아노 위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네스토르 아폴로노비치?” 미워하는 경쟁 화가의 이름에 라브렌티는 니콜레타를 험악하게 흘겨보고는, 연주를 멈추고 임프레사리오의 지시서를 읽었다. “오늘 아주 기세등등하시군. 네스토르 아폴로노비치라면 우선 이런 대접부터 참지 않을 텐데.”
“자, 잠깐 쉬어!” 슬라바 미하일로브나가 그 새된 목소리를 한껏 높여 외쳤다. “라브렌티 선생, 그건 얼른 읽어 치우시길 권합니다. 우린 벌써 늦었으니까.”
“네스토르 아폴로노비치라면 배경막 아홉 장은 어림도 없지.” 라브렌티는 슬라바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투덜댔다. 힘주어 지시서를 흔들면서. “서로 다른 배경막 아홉 장에 사이클로라마까지. 나뭇잎 사이에 너희들이나 관객한테 보내는 숨은 쪽지는 넣지 말 것—그 양반은 제 후원자들을 과대평가한단 말이야, 1층 객석 절반은 내 논평 읽는 재미로 오는 건데. 속살 비치는 님프도 이제 그만—나머지 절반도 저렇게 떨어져 나가는군. 나는 지루해 죽고—”
“음악으로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라브렌티 선생?” 슬라바 미하일로브나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슬라바는 주역이었지만, 단원 모두에게 워낙 낯익은 존재이자 워낙 가정교사 같은 위인이라, 아무도 마드무아젤 스크랴비나라 부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양반은 천재라서, 나 같은 필멸자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신단 말이지.” 라브렌티는 말을 맺고 지시서를 치우더니 터덜터덜 음계를 짚기 시작했다. “하지만 맞는 말이야, 슬라바, 내 사랑. 내가 이렇게 급할 때 연습 반주자로 뛰어 줄 수 있는 몸이니, 흥정이 되지 않겠나. 여섯 장으로 깎아 보자고, 응?”
“흥정요? 네스토르 아폴로노비치는 어쩌고요?” 니콜레타는 한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었다. 말라니야와 피아노 사이, 웬일로 텅 빈 바 한 자리에 서면서였다. 임프레사리오를 헐뜯는 것은 질색이었지만, 라브렌티의 그 비꼬는 솜씨에는 그분을 깎아내리지 않으면서 그분을 두고 농담하는 재주가 있었다. 라브렌티를 놀리는 것이, 놀림받는 것이, 그리고 벌받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는 것도 그 재주 덕이었다.
“네스토르 아폴로노비치는 귀가 꽉 먹었다는 걸 잘 알면서 그러시나. 그러고 보니 그 작자는 그림도 못 그리지! 흠!” 라브렌티는 의기양양한 콧노래로 말했다. “「토끼 굴 속으로」라. 이건 뭔가를 암시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내 배경막에는 그걸 담지 말라시는군.”
“그랑 바트망, 시작!” 슬라바가 한 손으로 박자를 치며 외쳤다. “하나, 그리고 둘…….”
“안드레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안 왔어?” 니콜레타가 말라니야에게 속삭였다. 프로그램에 제 고집으로 「앙드레」라고 올리는 이 젠체하는 군무진 아이가, 마담 카메네바가 바쁠 때면 대개 반주를 맡았던 것이다.
“주역들 쪽에 가 있어!” 말라니야가 소곤소곤 대답했다.
‘그럼 마담 카메네바가 없다는 것도 설명이 안 되네.’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말라니야의 귀는 그날 밤 청소를 면하게 되었다. 말라니야의 그림이 맞다는 증거가 갈수록 쌓이고 있었으니까.
“너희들 서로 돕는 걸 보니 이 가난한 환쟁이 가슴이 다 따뜻해지는군.” 라브렌티가 둘을 지켜보며 말했다. “말라니야 막시밀리아노브나한테 본보기가 되어 줄 사람이 나타나길 바라던 참이었지. 보고 배울 사람이 없으니 저 폼이 독학으로는 늘지를 않아. 휴가 뒤끝이라 좀 뻣뻣하신가? 니콜레타, 연습하라고 일러 주지도 않았나?”
말라니야의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대답은 없었다. 라브렌티 파블로비치는 이 아이가 저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고, 질문을 절대 말라니야에게 직접 던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니콜레타가 학창 시절 잠자리에서 제일 즐겨 들려준 이야기가 그와 보낸 즐거운 시간들의 회고담이었는데도 그랬다. 니콜레타가 보기에 그는 말을 걸지 않으면서 말라니야를 나무랄 온갖 방도를 찾아내는 데서 큰 재미를 얻는 듯했다.
“「눈물 웅덩이」라. 『백조의 호수』의 어머니 눈물 호수를 되살려 써도 넘어가려나.” 라브렌티가 골똘히 말했다. “원, 발레판에는 지겹게도 흔한 모티프란 말이지. 자, 그다음은, 「퓨리가 생쥐에게 말하길」…….”
여느 때 같으면 니콜레타는 새 발레의 줄거리를 짜맞추려 귀를 쫑긋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딴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임프레사리오는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는지 모르고 계신다는 생각에. 변덕스러운 주역들이 지금 그분을 미워한다면, 그건 그분이 저희 유혹을 거들떠보지 않아서일 게 뻔했다. 군무진 중에 임프레사리오를 향한 남모를 연정을 한 번쯤 고백해 보지 않은 아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못생긴 슬라바 미하일로브나가 얼마나 그분을 그리는지, 클레멘티나 예프레모브나가 어떤 구혼자들을 물리쳤는지 그분이 아신다면. 뻔뻔한 앙드레가 그분께 대본술을 배운다며 넌지시 자랑하는 소리와, 그 소리에 다른 아이들 속이 얼마나 뒤집히는지 들으실 수 있다면. 그 과묵한 라자라마저 그분을 사랑했다. 말없이, 맹렬하게, 고집스럽게.
니콜레타 자신은 임프레사리오에 대한 제 감정을 깊이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조심조심 다가가는 것만으로 뜨거운 숯불을 쑤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것만은 알았다. 그 감정은 박식한 평론가 예브게니에 대한 감정과 달랐다. 마구간 뒤로 곧잘 함께 새던 무대 마차꾼 반야에 대한 감정과도, 어느 잊지 못할 휴가 동안 제 아파트에 묵게 해 준 오페라 가수 필리프에 대한 감정과도, 무대 일꾼 미샤에 대한 감정과도, 심지어 라브렌티 파블로비치에 대한 감정과도 달랐다. 하기야 임프레사리오에 대한 그 감정도, 연습이 끝난 뒤 재회의 자축으로 라브렌티가 니콜레타를 번쩍 들어 피아노 위에 앉히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지만.
‘결국 파티의 언쟁에 대해서도, 겐리하에 대해서도 진실에는 한 발짝도 못 다가갔네.’ 그날 밤 복도를 소리 없이 (앞서 말한 재회의 여파로 살짝 어기적대며) 걸으며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밖에서 문이 잠기고 한 시간 뒤, 임프레사리오가 일러 준 그대로 금열쇠로 복도에 나온 것이었다. ‘그래도 그분과 비밀을 나눈다는 건 새로운 일이야. 그냥 장단을 맞춰 주신 것뿐이라 해도.’ 니콜레타는 결론지었다. ‘그리고 이 시간에 깨어 돌아다니는 것도 그 자체로 재미있고. 내가 방에 얌전히 없다는 걸 세상에 단 한 분만 아신다는 것도.’ 그러나 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 두 마담이 비운 방의 문까지도. 어긋난 곳은 아무 데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제 방으로 돌아온 니콜레타는, 나올 때 미처 못 본 무언가에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마담 울리야노바가 발레의 원작으로 삼았다는 바로 그 책이었다. 그러니까, 책 좋아하는 니콜레타는 시즌마다 공연의 문학적 원전을 꼭 찾아 읽어 왔던 것이다.
‘어머, 임프레사리오의 선물인가 봐.’ 다시 따뜻한 침대로 파고들며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이걸 갖고 싶어 하는 줄은 어떻게 아셨을까?’
제3장
“아니, 아니야!” 여왕이 말했다. “선고가 먼저—평결은 나중에.”
읽을 책이 생기고 연습이 매일 이어지니, 니콜레타는 『소냐』의 줄거리와 금세 친숙해졌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토끼를 쫓아 들어간 곳이 알고 보니 우물이어서, 그 깊이를 따라 오래오래 떨어져 내리는 데서 시작했다. 무대에서는 이 효과를 와이어로 낼 참이었다. 『라 실피드』의 탈리오니처럼 겐리하를 천천히 무대로 내려보내는 것이다. 와이어 곡예란 발레의 맨 끝에나 나오는 법이라고 극장 관습에 길든 관객은 깜짝 놀랄 터였다.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환등회 한 판 분량의 무대 술책이 필요했고, 임프레사리오는 그것을 다 설계해 두었다. 뒤에서 불 밝힌 망사막과 옮겨 다니는 조명이 소냐의 그림자를 키웠다 줄였다 한다. 무대 앞턱 틈에서 파란 장막이 솟아올라, 소냐의 분한 눈물이 차오르는 바다를 흉내 낸다. 소냐와 붉은 여왕이 달릴 움직이는 길바닥이 있고, 애벌레의 물담배에서는 향긋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2막은 무대 전체가 회전하며 열린다. 소냐가 거울 같은 장막을 지나, 체스 말들이 살아 움직이는 거울 나라로 넘어가는 것이다. 대단원에서는 무용수들이 저녁 식탁 쟁반에 실려 굴러 나왔다가, 악보를 마무리하는 광란의 스케르초가 시작되면 무대 천장으로 쏘아 올려질 것이었다.
이 장치들을 다 짓는 것은 큰 공사였다. 연습 첫 주가 끝날 무렵 무대장치 공방은 완전 가동에 들어갔고, 무대 전환수와 소도구 제작자 들이 밤낮없이 연습실 언저리를 어슬렁대게 되었다. 니콜레타는 싫지 않았다. 그리운 옛 친구 미샤를 볼 수 있게 됐으니까. 미샤는 공연에 나오는 수많은 거대 인형을 거들 참이었다. 니콜레타와 말라니야의 파 드 되를 끊으며 객석 위로 내리덮칠 까마귀도 그중 하나였다. 중국 용춤처럼 장대에 얹혀 다니는 큼직한 잿빛 짐승 체셔 고양이도 있었는데, 노랗게 빛나는 두 눈은 나트륨을 태우는 유리 등잔이었다. 미샤는 이 고양이로 니콜레타를 곧잘 놀래 주었다. 짓궂어서라기보다는, 그래 놓으면 짐승이 궤짝에 들어간 지 한참 뒤까지 니콜레타가 제 옆구리에 매달려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 나트륨을 대 준 게 겐리하 그리고리예브나네 아버지라던데.” 미샤가 곰곰이 말했다. “그만하면 주역 줄 이유가 되나? 그 물건 시세를 내가 몰라서.”
“허튼소리 마!” 니콜레타는 미샤를 살짝 떠밀었다. 겐리하의 아버지가 약제사라는 것은 모두가 알았다. 몇 시즌 전 『푸른 수염』 개막을 앞두고 단원 절반이 배앓이로 드러누웠을 때, 어쩐지 겐리하 짓이라는 설익은 소문이 돈 덕이다. 겐리하가 미워도, 독살범 겐리하라는 그림만은 니콜레타도 믿지 않았다. 동기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소문을 더 보태지는 말자.” 억측에 대한 임프레사리오의 말씀을 떠올리며 니콜레타는 말했다. “그분이 뇌물을 받으실 리 없다는 건 너도 알잖아.”
“그분 얘기가 아니야.” 미샤가 대답했다. “배역에 관여하는 게 그분 혼자는 아니잖나? 아니, 밥줄 쥐고 계신 분을 내가 감히 왈가왈부하겠냐고. 그분이 인형을 그렇게 좋아하시지 않았으면 난 지금쯤 길바닥 신세야. 요즘 극장은 나머지는 저절로 굴러가. 무슨 거대한 오르골처럼.”
“아니면 상점 진열창의 태엽 성처럼.” 니콜레타가 꿈꾸듯 말했다.
니콜레타가 학교를 갓 졸업하고 발레단에 들어왔을 때, 눈꺼풀 무겁고 익살 메마른 곰 같은 미샤가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무용수들의 괴상한 관습과 미신을. 임프레사리오와 마담 울리야노바와 무슈 브론시테인과 그 밖의 모든 내력을. 지금도 니콜레타가 새로 알아낸 것을 제일 먼저 듣는 것은 미샤였고, 답례로 미샤도 제가 들은 것을 다 니콜레타에게 넘겼다. 두 사람은 무대 위 높은 공중 통로에 나란히 앉아 연습을 구경했고, 또—기회야 드물었지만—남의 대화를 엿듣기도 했다. 지금 당장의 오락거리라곤 오케스트라의 조율 소리뿐이었다. 니콜레타는 『이상한 나라의 소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미샤가 내기를 걸었다. 침 뱉기의 명수인 네가 저 아래 악사 하나의 정수리를 맞히면 술병을 한 모금 주마. 니콜레타가 통로 가장자리 너머로 몸을 내밀고 조준하는 동안, 미샤는 책장을 넘겨 보았다.
“이거 어떻게 생각해?” 미샤가 물었다. “그럴듯한 발레가 되겠어?”
“또 빗나갔네.” 니콜레타는 투덜대며 주저앉아 턱에 늘어진 침 줄기를 닦았다. “응, 그게 재미있단 말이지. 음악이랑 춤으로 보면 아주 명랑한 발레인데, 이야기는 쓸쓸해. 군데군데 무섭고.”
“그건 무슨 계산이야? 애들 얘기잖아.” 미샤는 소냐가 홍학을 크로케 방망이로 쓰는 그림을 펼쳐 보였다. 그의 말에 힘을 실어 주는 그림이었다. “슬퍼 봤자 얼마나 슬프다고?”
“아주 슬프다니까!” 니콜레타가 우겼다. “여주인공은 외톨이인데, 이상한 나라에는 모든 게 얼마나 거꾸로고 잘못됐는지 알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단 말이야!” 특히 분통 터지는 것은 비둘기였다. 소냐가 제가 누구인지 스스로 헷갈리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소냐더러 뱀이라고 우겨 대다니. 소냐를 괴물이라 부르는 사자와 유니콘은 말할 것도 없고. 물론 거울 나라의 주민들은 결국 소냐를 알아주게 된다. 급기야 왕관을 씌워 저희 여왕으로 삼기까지 한다.
“결국 다 꿈이잖아?” 미샤가 건성으로 말했다. “적어도 발레에서는. 관객 대가리에 그거 하나 심어 주자고 끝에 새 무대장치까지 끌어올리는 판인데.”
“그렇지만 소냐는 자기가 꿈꾸는 줄 모르고, 소냐가 만나는 것들도 몰라.” 니콜레타가 따졌다. “하긴, 트위들덤이 그 문제를 꺼내긴 하지. 그 전에도 소냐가 짐작은 할 수 있었을 거야.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소냐는 늘 용케 알아맞히잖아. 아기가 돼지로 변하는 것도, 숲에서 이름을 잃는 것도, 그 괴물 같은 까마귀도. 이야기가 소냐의 소원을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소냐가 이야기에 뭐가 필요한지 아는 것 같기도 해. 게다가 장면이 다음 장면으로 흘러드는 게 꼭 꿈 같잖아. 아유, 하긴 발레란 발레는 다 그렇지!”
미샤는 셔츠 자락으로 니콜레타의 드레스 앞섶에 남은 침 얼룩을 닦아 주었다(방금 전까지 둘이 하던 일을 생각하면 그건 미샤 자신의 침일 공산이 컸다). “그 할망구는 왜 하필 이걸 골랐을까?” 미샤가 물었다.
실은 니콜레타가 책을 그리 골똘히 판 것도 그래서였다. 이 이야기가 마담 울리야노바에게 무슨 의미였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주역들 몇이 이 문제를 논하는 것도 엿들은 적 있는데, 결론이 야박했다. 극장장님이 이 발레에 착수했을 땐 이미 정신이 오락가락했고, 끝냈을 즈음엔 혼수상태였으리라는 것이다. 그분의 옛 작품들에 맞춰 춤춰 본 축들은 이번 악보가 영 다듬어지지 않았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니콜레타는 음악을 보는 눈이 대단치 않았다.
“마담 울리야노바한테도 유머 감각은 있으셨잖아.” 니콜레타는 따져 보았다. “그리고 이건 아주 웃겨. 그게 제일가는 매력이지. 아, 그런데 미샤, 소냐가 잠에서 깨면 다른 것들 눈에는 뭐가 보일까? 소냐가 어디로 갔다고 생각할까?”
“그건 됐고, 문단속은 어때?” 미샤는 발레단 바깥 사람이나 다름없으니 말해도 해될 것 없다고 니콜레타는 판단했었다. 게다가 누구한테든 말하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기도 했다.
“이젠 그냥 일과가 됐지, 뭐.” 여기서 니콜레타는 제2바이올린 하나가 저 아래 좋은 자리로 옮겨 앉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무릎을 짚고 몸을 내밀어 조준했다.
“잠긴 안 문은 아직 하나도 없고?”
“없—어. 이상한 건 하나도 못 봤어. 그런데—그런데 말이야—여간 감질나는 게 아니야.”
“뭐가 감질나?”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로.” 니콜레타는 대답하고 침을 한 방 날렸다. 침은 마드무아젤 로코솝스카야의 틀어 올린 머리에 명중했고, 바이올린 주자가 위를 올려다보기 전에 니콜레타는 통로 가장자리 뒤로 몸을 뺐다.
실은 니콜레타는 극장에 무언가 온당치 않은 일이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한 가지가 잘못됐다고 꼬집을 수도 없었다. 밤에 복도를 돌 때면 어쩐지 으스스했다. 말썽에 얽혀 있을 성싶은 아이들 방문에 오래오래 귀를 붙여 봐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소리는 꼭 내가 침대로 물러난 다음에야 시작된단 말이야. 그러니 어디서 나는 소린지 알 도리가 있어야지.”
“저런, 너희들은 우리 임프레사리오 밑에 들어가면 소리 한 번 낼 권리도 반납하는 거였나?” 미샤가 놀리며 술병을 넘겨주었다.
“그런 소리가 아니라—” 니콜레타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꺼냈다가 그만두었다. 그것이 예사 소리가 아니라는 걸 설명해 봐야 소용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잖아, 응? 아유, 네가 알아줄 거라고 기대도 안 했어!” 그러고는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져서, 의심은 혼자만 품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의심할 만한 거리를 제대로 찾아낼 때까지는.’
과연 새 시즌의 출발은 대체로 여느 시즌과 다를 게 없었다. 니콜레타는 평소의 전통대로 시즌의 발레에 흠뻑 빠져들어, 제 삶의 자잘한 사정일랑 거의 다 팽개쳤다. 연습 둘째 주에 접어들자, 처음에 그리 마음을 차지하던 무대 뒤 사건들도 뒷전으로 물러나 있었다. 밤 순찰에서 겐리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그 간수에게 쓰는 생각이라곤 대역이 제가 따르는 무용수에게 늘 바치는 관심 정도였다. 그러니까 니콜레타의 사견으로 겐리하는 소냐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소냐는 겸손하고, 캐묻기 좋아하고, 규칙과 예절을 그렇게나 존중하잖아. 게다가 이 책은 작은 사람으로 사는 게 어떤 건지에 그렇게나 공을 들이는데, 겐리하는, 아유! 걘 그냥 예사 키란 말이야!’ 그러나 니콜레타는 저 자신을 꾸짖기 좋아한다는 점에서도 소냐를 닮은 데가 있어서, 이런 공상에 빠진 저를 호되게 꾸짖었다.
물론 마담 지노비예바와 카메네바가 계속 보이지 않는 것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군무진 중에 임프레사리오께 여쭐 배짱이 있는 아이는 없었고, 그분도 입을 다무셨다. 니콜레타가 진상을 알게 된 것은 어느 날 밤이었다. 순찰 나가기 반 시간쯤 전, 기숙사동 서쪽 별관에서 멀리 웅웅대는 소동이 들려왔다. 니콜레타는 곧장 그쪽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건물 반대편 끝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고, 도착한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 일어나 돌아다니는 게 분명해!’ 과연, 두 마담이 함께 쓰던 방의 문이 잠기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빠끔히 열려 있었다. 니콜레타는 숨을 훅 들이켜고, 용기를 그러모아 문을 활짝 밀었다.
“방 안에 뇌우가 한바탕 굴러다닌 것 같았다니까!” 나중에 니콜레타는 그렇게 말했다. 누군가 책장의 책을 다 끌어내려 악보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다리 셋 달린 작은 탁자 위에, 놓아두고 잊어버린 것처럼, 그것이 있었다. 니콜레타가 (미샤에게 이 모든 내력을 들려주면서) 「증거물」이라 부르게 되는 것이. 다급하게 뜯긴 그 수수한 봉투에서 나온 것은 편지 묶음이었다. 두 마담과—이름이 지면에서 튀어오르는 것 같았다—무슈 브론시테인 사이에 오간 편지들. 니콜레타는 순식간에 방을 빠져나왔고, 임프레사리오의 서재로 달려 내려가는 두 발은 계단을 스치는 둥 마는 둥 했다.
“무슈 브론시테인이 코스트리코바 앞으로 보낸, 자기의 그랑드 파시옹을 고백하는 편지.” 니콜레타는 미샤에게 설명했다. “처음엔 그냥 그 사람이 코스트리코바를 우리 발레단에서 빼가려는 수작인 줄 알았어. 코스트리코바가 퇴짜 놓는 편지. 답장 못 받은 그 사람 편지가 세 통 더. 그리고 마지막에 두 마담이 보낸 편지가 있는데, 보내 준 돈은 잘 받았고 그 애를 손에 넣는 데는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안심시키는 내용이야. 세상에! 우리가 학교 다닐 때부터 우릴 맡아 온 선생님들이. 안뜰에서 우리 손 잡고 산책시켜 주시던 분들이 말이야. 코스트리코바도 그분들을 믿었을 거 아냐. 그런데 그 짐승 같은 자한테 그 앨 팔아넘긴 거야! 알겠니, 미샤? 코스트리코바가 사라진 게 그래서라고! 브론시테인이 데려갔거나, 아니면 더한 짓을 했거나!”
“계산서를 챙겨 둔 보람들이 있으시군.” 미샤가 한마디 얹었다. “돈을 받았다, 응? 너는 손에 넣어지는 값을 받아 볼 생각은 없나? 넣는 손이 어지간히 많은데.”
“점잖게 못 굴 거면 뒷얘기는 혼자 알아서 마저 지어내시지.” 니콜레타는 미샤를 나무랐다. 그러나 실은 그때도, 본의 아니게 이 일에서 어떤 끔찍한 우스움을 발견하기는 했다. “농담할 정신이 아니었는데도 농담이 저절로 되더라니까. ‘마담’과 ‘포주 마담’, 알잖니.”
“알지.” 미샤가 말했다. “자, 그럼 나머지도 들어 보자고.”
“무슨 일이 터질 거예요!” 서재에 다다른 니콜레타는 그렇게 헐떡이며 말했더랬다. “부인을 잃으신 뒤로 줄곧 거기서 주무시는 것 같아.” 미샤에게는 그렇게 덧붙였다. “증거물을 드리고, 누가 두 마담 방을 뒤졌더라고 말씀드렸지. 그런데 어두워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어. 등불이 하나뿐이었거든.”
“이럴까 봐 걱정했네.” 편지를 읽으며 임프레사리오가 한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그러고는 니콜레타를 올려다보았다. “니콜레타, 가서 아이들을 방에서 모두 데리고 무대로 내려오게. 전원이 지켜봐야 하네.”
니콜레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도, 무엇을 지켜본다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그리고 다시 계단을 뛰어올라 군무진과 주역을 가리지 않고 모두 깨웠다. 방문을 하나하나 따고, 잠이 덜 깨 옷도 덜 입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어중간한 설명을 주어 극장 쪽으로 보내야 했다. 무용수들 모두 니콜레타를 보고 놀랐지만, 호사스러운 실내 가운 차림의 겐리하 그리고리예브나만큼 놀란 이는 없었다. 그래도 겐리하는 설명할 시간이 없다는 것쯤은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런 사정으로, 극장에 맨 꼴찌로 돌아온 것은 니콜레타였다.
도착해 보니 마담 카메네바가 오케스트라석의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곁에는 마담 지노비예바가, 그 둘레에는 커다란 무리가 있었다. ‘그럼 자기들 방을 뒤진 게 자기들 본인이었단 거네!’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임프레사리오는 겐리하와 슬라바 미하일로브나, 그리고 그 밉살맞은 마드무아젤 비신스카야를 가까이 두고 오케스트라석에 앉아 있었다. 군무진과 주역 전원이 잠자리 모자에 땋은 머리에 풀어헤친 곱슬머리로—맨발인 아이도, 가운 바람인 아이도, 하나같이 골이 나고 불편한 채로—1층 객석 앞줄과 무대 가장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니콜레타는 풋라이트 두 개 사이, 임프레사리오와 최대한 가까운 자리를 찾아냈다. 그러다 보니 두 마담과도 아주 가까워졌다. 둘이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마담 지노비예바의 곱슬머리는 평소보다 한층 헝클어져 있었고, 마담 카메네바의 코안경은 콧등에 비뚜름히 걸려 있었다.
“애들을 가둬 두는 게 버릇이시지 않았나요,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마담 지노비예바가 그 괴상한 몰골의 청중을 도도하게 훑어보며 새침하게 말했다.
슬라바가 조용히 하라고 피아노에 슬리퍼를 내리칠 필요도 없었다. 극장이 지금처럼 완벽하게 조용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임프레사리오가 헛기침을 했다. “밤늦게 미안하네. 내가 이해하기로는, 마담 카메네바와 마담 지노비예바께서 우리 발레의 악보와 시나리오를 회수하시겠다고 오신 걸세.”
‘그 짓들을 하고 있었구나.’ 니콜레타가 속으로 말하는 사이, 마담 지노비예바가 여전히 꼼짝 않고 창백하게 앉은 마담 카메네바에게 씨근댔다. “당신이 이해하기로는, 이라셔.”
“내가 이해—뭐, 내 이해로는 악보와 시나리오가 마담 울리야노바의 작품이었네만.” 임프레사리오는 애용하는 어구를 꼬집는 그 빈정거림을 못 들은 체했다. 그 어구가 나올 때마다 니콜레타의 가슴은 그분을 향한 애틋함으로 저릿해지는 것이었다. 그분의 태도는 여느 때처럼 침착했고, 두 마담을 배려해 그들의 범죄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했다. 다만 매무새가 좀 구겨져 있었다. 옷 입은 채로 주무셨구나, 하고 니콜레타는 알아차렸다.
“그러니 시연으로 이 문제를 정리하기로 하지.” 그분이 이었다. “마담 카메네바가 곡 하나를 기억으로 연주해 주기로 했네. 마담 지노비예바는 무언극을 해 보이고. 그러면 너희들이, 얘들아, 이 공연이 과연 이분들 것인지 판정해 다오.”
“그게 얼마나 기막힌 수였는지 몰라.” 나중에 니콜레타는 미샤에게 말했다. (임프레사리오의 기지에 이 비슷하게 감탄한 일이 전에도 있었다. 학교 겨울방학의 어느 만찬에서, 그루지야인 요리사가 광에서 슬쩍슬쩍 빼돌리다 붙잡혔다. 임프레사리오는 그 처분을 모인 학생들 손에 맡겼다. 요리사 아벨 영감이 『라 조콘다』의 산적 바르나바의 아리아를 해내면 일자리를 지킨다는 조건이었다. 그 무렵 극장은 아직 오페라 극장과 사이가 좋았고, 마침 그 오페라의 「시간의 춤」에서 극장 무용수들이 거둔 성공을 자축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요리사는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선생의 바이올린 반주에 맞춰 아리아를 뽑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임프레사리오는, 다른 사람이 주인이었다면 저녁을 통째로 망쳤을 발각 사건에서 하룻저녁의 여흥을 뽑아냈다. 오히려 그날은 참석한 모두의 훈훈한 추억으로 남았다. 대본의 명수인 임프레사리오가 한 판의 성대한 놀이로 만들어 명절 기분을 지켜 낸 덕이다. 모두가 웃으며 돌아갔다. 도둑질 솜씨만큼 노래 솜씨는 못 되던 아벨만 빼고, 아마. 덧붙이자면, 그 영감이 실은 처음부터 무슈 브론시테인의 사람이었다는 것도 나중에 드러났다.)
“꼭 한밤중이어야 했나요?” 마담 지노비예바가 볼멘소리를 했다.
‘뻔뻔하기도 하지. 한밤중에 숨어들자는 건 자기 생각이었으면서!’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뚱뚱한 마담 지노비예바가 창문으로 기어들겠다고 가엾고 근엄한 마담 카메네바의 어깨를 밟고 올라선 우스운 그림이 떠올랐다. ‘한밤중이라니, 말은 잘하셔. 옛 제자들 앞에서 피해자 행세라니, 부끄러움도 없나?’ 그러고는 동료 무용수들의 졸음 겨운 얼굴들을 둘러보며, 이들이 어떤 배심원이 되어 줄지 가늠해 보았다. 지금 임프레사리오의 겨드랑이에 끼워진 그 봉투의 내용물을 이 아이들도 봤더라면! 이런 요상한 시간에 찾아온 연유를 해명할 부끄러움을 덜어 주시다니, 그분은 저들에게 유별나게 인자하신 것이었다.
“「바다코끼리와 목수」로 하지.” 마담 지노비예바가 마담 카메네바에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춤 흉내를 시작했다. 마담 카메네바는 피아노 덮개를 열고 반주에 들어갔다.
니콜레타가 연습에서 들은 곡과 조금 비슷하기는 했다. 딱 조금이었다. 춤으로 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틀렸다. 게다가 치맛자락을 흐트러뜨린 채 쿵쾅대고 씩씩대며 무대를 가로지르는 마담 지노비예바의 꼴은 우스꽝스러웠다. ‘실성을 했나 봐.’ 니콜레타는 생각했고, 이 구경거리에서 다른 인상을 받고 갈 사람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여전히 저리 이성적이고 반듯한 임프레사리오가 비교 대상으로 있는 한은. 그분이 피아노 앞에 앉으시자, 모두에게 낯익은 그 곡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도움을 받았지, 당연히!” 몇 마디 치기도 전에 마담 지노비예바가 벌떡 일어나 악을 썼다. “알았어, 처음부터 알았다고! 이 짓을 시작할 때부터 저이가 어떻게 나올지 내가 다 말해 줄 수 있었어. 뜯어고친 거야! 저인 연주라곤 할 줄 모르니 누굴 시켜서 악보를 다시 짜고, 몇 곡만 골라 제 손에 익힌 거지. 안무도 누굴 시켜 다시 짰어. 그렇지만 음악을 들어들 보라고, 다른 걸 들어 봐! 저이가 의미를 몽땅 발라내 버렸잖아. 안 들려?”
임프레사리오는 말없이 일어나 피아노를 마담 카메네바에게 내주었다. 카메네바는 벗의 청을 좇아, 임프레사리오가 전한 대로의 마담 울리야노바 악보 몇 마디와 자기네 판본을 차례로 쳐 보였다. 지켜보는 무용수들은 잠잠했다.
“자, 얘들아? 내가 떠나야 할까?” 임프레사리오가 차분하게 말했다.
임프레사리오를 가장 표독하게 헐뜯던 축조차, 눈앞에 들이밀어진 그 미래 앞에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도자의 어떤 본질적 자질이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없다는 것을. 저들이 그분에 대해 한 말이 다 사실이라 해도, 무슨 알 수 없는 연유로 그분이 악보의 출처를 숨기고 계신 것이라 해도, 두 마담 손에 맡겨진다는 것은…….
‘우린 어떻게 되는 건데?’ 배심원 여인들이 입을 모아 그렇게 생각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는 동안 피아노 앞의 마담 카메네바는 같은 대목을 제 방식으로 한 번, 마담 울리야노바의 방식으로 한 번,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했다. 몇 마디마다 돌처럼 굳은 얼굴로 옛 제자들을 올려다보면서.
“여기다 푸에테를 몇 개 박아 넣으셨겠지, 응?” 마담 지노비예바가 푸에테를 조롱하듯 흉내 내며 으르렁댔다. “너무, 너무 뻔해. 상투의 극치야. 그래도 1층 객석은 사족을 못 쓸 거라 이거지—”
“화를 참는 게 고작이었다니까.” 니콜레타는 미샤에게 말했다. “혀를 깨물어야 했어! 다른 애들도 다 마찬가지였다는 걸 알아. 끝나고 나서 다들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었는지 얘기했거든. 그 여자 유럽 순회 얘기로 새 아이디어도 몇 개 만들었지. ‘두루 굴러다닌 몸’을 두고 아주 좋은 농담이 하나 나왔던 게 기억나네.”
“그래서, 바로 그 순간에는?” 미샤가 채근했다.
“바로 그 순간에는, 그 여자 편도 반대편도 아무도 입을 안 뗐어. 그런데 다들 고개가 임프레사리오 쪽으로 스르르 돌아가는 거야, 지시를 바라고.” 여기서 니콜레타는 킥킥 웃었다. “어찌나 머쓱하던지. 절반은 자기가 뭘 판정하는 중이었는지도 잊었을걸. 그래도 부하리나와 그 패거리까지도, 누굴 주인으로 모시고 싶은지는 알고 있었단 말이지!”
한순간에 마담 지노비예바의 골이 씻은 듯 사라졌다. 자기가 어떤 처지인지 정확히 깨달은 것이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고, 몸가짐에서 오만이 빠지더니—군무진이 나중에 이 대목 흉내로 큰 재미를 보게 되는데—여왕님은 빌기 시작했다.
“‘우리 그렇게 좋은 친구였잖나,’ 어쩌고. ‘전에도 싸웠다가 화해했잖나,’ 어쩌고. ‘왜 애들이 우리 사이에서 편을 골라야 하나? 이게 옳다고 생각하나?’ 그러면서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거야. 심지어 우리 중 하나를 붙들고 마담 울리야노바 판본 춤을—진짜 판본을 보여 달라고까지 했다니까. 자기가 그대로 추겠다고. 자기가 지었다는 시늉일랑 깨끗이 걷어치우고 말이야. 글쎄, 그 여자가 임프레사리오 이름을 진흙탕에 끌고 다니는 걸 방금 막 들은 참인데, 우리가 동정할 기분이었겠니.”
마담 카메네바의 반주는 점점 빨라졌다. 이윽고 마담 지노비예바는 객석으로 돌진해 내려와, 변호인을 찾아 이 아이 저 아이에게 매달렸다. 아이들은 차례차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움츠러들 뿐이었다. 마침내 지노비예바는 소도구를 관리하는 최고참 주역, 마드무아젤 톰스카야를 붙들고 말했다. “얘야, 이 모든 게 정말로 무엇을 위한 판인지 생각해 보렴!”
하기야 니콜레타의 자리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다. 대충 그런 말이었으리라 확신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중에 군무진과 그날 밤 일을 복기할 때 모두가 니콜레타의 표현이 맞다고 입을 모았고, 그 뒤로는 저마다 제 차례에 이 이야기를 꼭 이대로 옮기게 되었다.
마드무아젤 톰스카야의 눈이 접시만 해졌다. 톰스카야는 역력한 혐오와 함께 몸을 홱 빼더니, 폭죽처럼 오케스트라석을 튀어 나갔다. “좋아요, 이게 어디로 가는 판인지 잘 알겠으니까.” 계단 꼭대기에서 톰스카야는 무겁게 말했다. 그리고 임프레사리오를 흘긋 볼 때 그 얼굴을 스친 표정에는, 이 심각한 아이에게서 여태 본 어떤 것보다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러고는 그길로 발레단을 그만둬 버렸다니까!” 니콜레타가 미샤에게 말했다.
이어서 마드무아젤 톰스카야는 (축 늘어져 흐느끼는 마담 지노비예바를 부축하고 있던) 겐리하 그리고리예브나를 똑바로 가리키며 선언했다. 자기는 여태 “저 사람이 옳고 마땅하다는 것”만 해 왔노라고. 그 말과 함께 발길을 돌려 로비 문을 향해 통로를 뛰어올라갔고, 붙잡아 달래 보려는 두 아이가 곧장 그 뒤를 따랐다.
여기까지 이 소동은 니콜레타에게 그저 수수께끼였다. 그런데 이제, 어렴풋이 그림이 잡히는 것 같았다. 니콜레타는 아수라장이 된 장내에서 임프레사리오를 찾았고, 눈을 뗀 것을 후회했다. 그분은 오케스트라석에서 무대 밑 기계실로 통하는 낮은 문으로 몸을 숙여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게다가 증거물을 피아노 위에 두고 가셨다. 그분이 자리를 뜨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달리 없는 듯했다. 장내는 온통 새된 목소리들로 가득했다.
“저 광대극을 저리 오래 두고 본 우리 모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요!” 부하리나가 일어나 선언했다. ‘사후약방문이 좀 늦으셨네.’ 니콜레타는 속으로 말했다. 슬라바와 마드무아젤 비신스카야는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말라니야는 하얗게 질려 진땀을 흘리며 니쿠샤 세르게예브나에게 쓰러질 듯 기대 있었다. 겐리하와 몇몇 주역은 이제 싸움을 완전히 포기한 두 마담을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니콜레타는 아무도 저를 눈치채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무대에서 미끄러져 내려 증거물을 집어 들고, 기계실 문으로 임프레사리오를 뒤쫓았다.
“그래서?” 미샤가 물었다.
“그래서 돌려드렸지.” 니콜레타가 대답했다. “그리고…… 뭐, 그러고 나서 다들 자러 갔어.” 미샤는 그 대답에 만족했고, 두 사람은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무대 밑에서 임프레사리오와 나눈 대화의 전부를, 니콜레타는 미샤에게 끝내 들려주지 않았다. 실은 누구에게도, 끝내, 전부는 들려주지 않았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요—” 니콜레타는 낮고 머뭇대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더랬다.
임프레사리오는 기계실의 거대한 도르래 밧줄 타래들 사이에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 몸짓에는 몽유병자 같은, 무엇에도 놀라지 않는 묘한 데가 있었다. 니콜레타를 볼 때도 눈길이 니콜레타를 꿰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가난한 사람이라네, 니콜레타.” 처음에 그분이 한 말은 그것뿐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실지도 모르지만, 선생님—”
“내가 가진 모든 걸 이 극장에 부었네.” 그분이 말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그걸 다 잃었어.” 일주일 전쯤 서재에서 니콜레타를 맞아 주던 따뜻하고 미더운 임프레사리오와도, 불과 몇 분 전의 위엄 있는 임프레사리오와도 닮은 데가 없었다. 아예 딴사람이라 해도 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선생님, 방금 모두가 선생님 편이라는 걸 보여 드렸잖아요!” 니콜레타는 조용히, 그러나 간절하게 말했다. “두 마담도 이제 선생님을 못 괴롭혀요. 이게 선생님 손에 있는 한은요!” 증거물을 쳐들며 니콜레타는 덧붙였다. “아까 잠깐 훑어봤을 뿐이지만, 이걸 돌려 보이시기만 하면—”
“이 일은 누구에게도 입 밖에 내면 안 되네.” 임프레사리오가 말했다.
“왜요? 제가 방금 안 것을 알고도 저쪽 편에 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요!”
임프레사리오는 쓸쓸히 고개를 저었다. “그 묶음을 조금만 더 읽었더라면,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걸 알았을 걸세. 자네가 처음 나를 찾아왔을 때 진상을 다 말해 주었어야 했어. 아니, 차라리 아무것도 말하지 말았어야 했지. 나는 가난한 사람이야.” 그분은 되풀이했다. “그리고 겐리하에 대해서는 자네가 옳았네, 정확히 옳았어. 다만 자네가 의심한 것보다 사정이 더 고약해. 그런데 나는 모르는 체했고, 자네 걱정이 기우라고 여기게 만들었지. 자네를 그 사람 대역으로 세운 것도, 혹시 그 사람이 무슨 사고라도 만나 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고 어리석은 바람에서였네. 그 열쇠를 준 것도, 자네가 혼자 힘으로 다 알아내서 내 일을 대신 해 주기를 바라서였어.”
니콜레타는 지금 그분이 자기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보여 드리고 싶었다. 이기적인 사람도 겁쟁이도 아니었다. 오랜 정에 눈이 흐려져, 주역들이 저를 짓밟게 내버려 둔 인자한 사람이었다. 코스트리코바를 잃고서야 그 홀림에서 깨어나, 더 이상의 화를 막고자 문단속 제도를 세우신 것이다. 그런데 두 마담이, 그리고 겐리하가, 그 제도를 가로채 고약하게 악용한 것이고.
“저들이 이 극장을 유곽으로 만들었네.” 임프레사리오가 말했다. 니콜레타와 똑같은 생각의 기차를 따라오고 있었던 것처럼.
“알아요.” 니콜레타가 나직이 말했다. 증거물의 발견과 함께, 어렴풋하던 불안들이 또렷한 관념으로 정렬해 있었다. 겐리하의 현장을 잡은 적은 없어도, 침대에 누워서 들은 것은 있었다. 계단의 발소리. 짤랑이며 오가는 동전 소리. 자물쇠마다 돌아가는 열쇠 소리. 삐걱대는 침대틀. 눌러 죽인 킥킥거림. 그리고 눌러 죽인 비명. 이제 니콜레타의 눈앞에는 주역들의 번득이는 이와 흰자위 구르는 눈이 떠올랐다. 수업에서 조롱하며 웃을 때처럼. 밤이면 치마를 걷어 올리며, 임프레사리오를 욕보이기 위해서라면 저 자신 욕보이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 꼴들이.
“코스트리코바에서 시작된 거죠?” 임프레사리오가 고개를 끄덕였으므로 니콜레타는 이었다. “무슈 브론시테인이 그 애를 원했고, 두 마담이 손에 넣게 다리를 놔 줬고요. 그러다 그걸로 재미를 볼 수 있겠다 싶어지니까—” 무용수들을 발레 애호가들에게 빌려주는 장사 말이다. 그 무용수 중 하나가 가엾은 마드무아젤 톰스카야였고, 극장이 임프레사리오 한 분 손에 들어가게 된 지금, 제 비밀이 드러날 위험을 무릅쓰느니 당장 그만둬 버린 것이다. “주역들을 더 끌어들여서 구전을 떼 주고, 겐리하 그리고리예브나를 그 자리에 앉혀 문을 따게 하고, 손님을 들이게 한 거예요. 따게, 라고요. 우리가 여태 생각한 것과 정반대 짓을 해 온 거라고요, 지금까지 내내!”
처음에는 멍하고 흐리던 임프레사리오의 눈길이, 니콜레타가 말하는 사이 점점 니콜레타에게로 좁혀 들었다. “장하네, 니콜레타.” 그분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수수께끼를 풀었어.”
“그래도 모르는 게 아직 산더미예요.” 니콜레타는 기세가 꺾일세라 수수께끼를 붙들고 늘어졌다.
“나도 모르네. 아, 나는 아는 게 얼마나 조금인지.” 임프레사리오가 말했다. “우선 몇이나 가담했는지 몰라. 이 편지들에 실마리가 좀 있지만 확실한 건 없네. 그러니 자네가 방금 추리해 낸 걸 내가 밝힌들, 몇이나 내 편에 서 줄지 알 수가 없어. 다들 줄을 서서 나를 미친놈이나 거짓말쟁이라 부르지 않을까 싶네. 어차피 이 일이 알려지면 극장은 끝이야.”
“저들이 노린 게 바로 그거네요.” 니콜레타는 다시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태 무사했던 거예요. 선생님이 신문에 다 털어놓지 못하실 걸 아니까. 그것도 선생님 코앞에서!”
“무슈 브론시테인의 벗들이 재미를 보는 게,” 임프레사리오가 이었다. “바로 내 코앞이라는 점일세. 내가 언제나 막겠다고 맹세한 바로 그런 짓이니까. 이 극장이 바로 그런 것에 맞서 세워졌으니까.”
“그리고 우린 그것에 발이 묶인 거고요.” 니콜레타가 숨을 삼켰다. “터질 추문에요.”
“완벽하게 묶였지. 겐리하 그리고리예브나가 못을 박아 알려 주더군. 그 사람이 나한테서 뜯어낸 훌륭한 것들은 자네도 봤을 걸세. 『소냐』의 배역이 우선 그렇고.”
“그러니까, 겐리하가 선생님을 협박해 왔다는 말씀이세요?”
임프레사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그 사람과 그 주인이—겐리하는 무슈 브론시테인에게 직접 보고한다네—소문까지 손써서 퍼뜨려 놨어. 내가…… 아니, 너무 끔찍한 얘길세.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무슈 브론시테인이 실제로 저지른 바로 그 짓을 내가 뒤집어쓰도록 말이야.”
“그래서 마드무아젤 라데카가—?”
“모르네.” 임프레사리오가 말했다. “몰라. 어느 쪽이든 저들은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걸세. 내가 신문에 알리면, 코스트리코바를 내가 욕보여 놓고 브론시테인에게 덮어씌우는 그림이 되도록. 그 목적으로 지어낸 고약한 노래 나부랭이도 혹 들었으려나?”
들은 적 있었다. 다만 지금 떠오르는 것은 끝 구절뿐이었다. “복도에서 그 애를 가졌다네.” 복도에서! 이 대목이 머리에 눌어붙은 것은, 함의하는 바가 너무 많아서였다. 상스러운 낱말 하나 없이 그렇게 상스러워서. 상상을 부추겨서. 그리고 그 그림이, 거기 담긴 정욕 따위엔 면역인 듯한 임프레사리오라는 사람과 너무나 기괴하게 어긋나서. 그런데도 그 절박한 밀회의 영상에는, 니콜레타를 자꾸만 그 노래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누구한테 들었는지 말씀드릴 수 있어요.” 니콜레타가 말하자 임프레사리오는 들으려고 몸을 기울였다. 니콜레타는 그 귀에 이름을 속삭이며, 낯익은 달아오름을 느꼈다. 연습 때 앞에 나와 시범을 보이라는 지목을 받을 때의 그 따뜻함. 음탕한 노래의 여운에다, 임프레사리오가 이렇게 가깝다는 사실까지 겹쳐 한층 짙어진 달아오름이었다. 그 취기가 얼마나 독했던지, 나중에 이 대화를 되살려 볼 때면 (그리고 니콜레타는 정말이지 자주 되살려 보았다) 이 대목부터는 오간 말은 기억나도, 그 말을 주고받을 때 두 사람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분장 대기실을 지나고 주역들의 개인 분장실을 지나, 그분이 공연 때마다 검소하고 휑한 칸막이 관람석에 앉아 계시는 베누아르로 오르는 좁은 복도와 나선계단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안뜰로 나갔는지도, 지붕에 올라갔는지도 모른다.
다만 언제까지고 기억할 것은 하나였다. “판은 끝났네, 니콜레타.”라고 말할 때, 임프레사리오의 목소리가 얼마나 철저히 희망 없이 들렸는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니콜레타가 물었다.
“아까 피아노 앞의 그 모든 연출로 내가 하려던 건, 마담 지노비예바와 카메네바가 극장과 갈라서는 그럴듯한 이유—발레의 저작권 문제—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네. 진상을 드러내 우리 모두를 파멸시키지 않으면서 두 사람을 내보낼 방도라곤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어.”
“단원들한테도 숨기고, 그리고 두 마담한테도 선생님이 알아채셨다는 걸 숨기고요.” 니콜레타는 그 수완에 새삼 감탄하며 말했다.
“바로 그렇지. 포주로는 못 내보내도, 표절꾼으로는 내보낼 수 있게 만들려 한 걸세.”
애초에 그 생각을 심어 준 것은 마담 지노비예바 쪽이었다고 그분은 말했다. 시즌 개막 파티에서 발레를 제 것이라 우기기로 작정하면서. 제 협박이면 임프레사리오가 이 새로운 횡포까지 견디리라 계산하고서. 그러나 그분은 버텼다. 그리고 그날 만인 앞에서 그만한 소동을 벌인 뒤라, 지노비예바의 자존심은 말을 물리고 봉급을 향해 기어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노비예바는 임프레사리오에게 편지했다. 당신이 이 공연을 올리게 두느니, 다른 데서 올려지는 꼴을 보겠노라고.
‘그리고 극장을 떠날 때 악보와 시나리오를 두고 가지만 않았어도, 값을 제일 높이 부르는 자한테 팔아넘겼겠지.’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저 자신이 부추긴 단원들의 비행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여태 실행하지 못한 것도 그래서였다. 마담 울리야노바의 유작을 먼저 되찾을 가망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밤을 틈타 그걸 가지러 돌아오리라 짐작했네. 그래서 악보를 밤낮 몸에 지녔고, 이렇게 숨어들었을 때 해 보일 공개 시연을 준비해 뒀지. 공개적이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으니까.”
‘그런데 저쪽은 왜 응했을까?’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시나리오도 악보도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다면, 질 것이 뻔한 대결에 무엇에 홀려 응했단 말인가?
“자존심이겠지.” 임프레사리오가 말했다. 꼭 니콜레타가 소리 내어 물었던 것처럼. “아니면 그루샤 할멈은 정말로 자기가 썼다고 믿게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고.”
“선생님이 쓰셨군요.” 니콜레타는 문득 깨달았다. “악보도 시나리오도 선생님이 쓰신 거예요. 서재에서 뵀을 때 악보를 손보고 계셨잖아요!”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겠나.” 임프레사리오가 말했다.
“쓰셨잖아요.” 니콜레타는 물러서지 않았다. “전부 선생님 창작이에요! 음악도 스텝도 대본도요! 그러니까 파티에서 마담 지노비예바가 우기게 둘 수 없으셨던 거죠!”
“나는 자네를 그 주역으로 세우려 했네.” 임프레사리오는 그렇게 말하고 휘청, 몸을 돌렸다. 니콜레타가 여태 들어 본 중 그분이 노여움에 가장 가까워진 순간이었다. 니콜레타를 향한 노여움은 아니었지만. “저들이 자네를 캐스팅하지 못하게 했어. 애초에 마담 울리야노바의 작품이라 해 둔 것도 무대에 오를 가망을 높이자는 것이었네만. 자네를 염두에 두고 썼는데, 정작 자네를 세울 수는 없었네.”
“선생님, 저는—뭐라고 드릴 말씀이!”
“나는 갈수록 이렇게 믿게 되네, 니콜레타. 무용수가 지닐 수 있는 단 하나 가장 중요한 자질은 기교도, 힘도, 나무랄 데 없는 폼도 아니야. 이야기에 깃드는 능력일세. 이야기의 세계에 저를 맞춰 넣고, 그 안에 사는 능력. 단원들한테도 그렇게 말해 왔네. 그러나 그 점에서 나의 으뜸가는 모범이 자네라는 말은 자네한테 한 적이 없지. 『소냐』라는 책은 내 어린 딸이 가져다주었네만, 그걸 각색할 영감을 준 건 자네였어. 자네의 재능에 값하는 것. 자네가 아니고는 아무도 해낼 수 없을 만큼 풍요롭고 기이한 것. 여러 해가 걸렸네. 나는 작곡에 타고난 재주가 없지만 공부했고, 자네가 나를 이끌고 통과해 주는 것 같았네. 모든 구절에서, 모든 마디에서 자네가 보였어. 스텝을 적어 내려갈 때는, 잉크로 찍은 발자국 한 쌍 한 쌍마다 자네가 서 있었네.”
이것을 제대로 새길 시간은 어림도 없이 모자랐다. 아니, 영영 모자라리라고 니콜레타는 짐작했다. 이 발레의 이야기가 저와 꼭 맞는다던 제 느낌이 옳았다는 것. 그 이상으로, 저를 위해 지어졌다는 것. 그것을 곱씹고 있을 수는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임프레사리오가 그 작은 서재에 틀어박혀 저에게 바친 생각의 양을 온전히 실감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저는 어차피 안 어울렸을 거예요.” 위로랍시고 지금 떠오르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저는 이가 아주 못났으니까요.”
임프레사리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당신의 비뚤비뚤하고 담배에 전 누런 이가 드러났다. “자네는 꼭 맞았을 걸세.” 그분은 장담해 주고 덧붙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공연은 없을 것 같네. 나는 그 마님들만 몰아내면, 아이들이 그 장사를 이어 갈 까닭이 없어지고 밤손님도 끊기리라 바랐네. 마담 지노비예바가 온 모스크바에 나를 뚜쟁이라 떠들고 다녀도—이런 상스러운 말을 용서하게, 니콜레타—무용수들이 아니라 할 테고, 후원자들이 아니라 할 테고, 그러면 지노비예바는 그저 제 본색대로 보일 뿐이지. 극장을 시기하는 원수로.”
“그런데 왜 공연이 없어요?” 니콜레타가 물었다.
“마드무아젤 톰스카야가 겐리하의 경계심을 깨워 놨으니 말일세. 겐리하는 브론시테인에게 계획이 들통날 위기라 이르겠지. 그러면 그자는 제 사람들을 시켜 나를 주모자로 입을 맞추게 할 걸세. 우리한텐 선수 칠 시간이 없네. 있다 한들 무슨 수로 치는지도 모르겠고. 내 꾀는 여기까지가 바닥이야.”
두 마담을 위한 연주회 겸 시험이라는 그 무대—대본가이자 무대효과의 명수다운 술책—의 속내를 그분이 밝혀 준 뒤로, 니콜레타는 한 죄를 다른 죄로 갈아 끼운다는 그 논리를 홀린 듯 굴려 보고 있었다. 이윽고 번쩍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가는 것을 어쩌지 못하며 니콜레타는 말을 꺼냈다. “선생님, 무슈 브론시테인의 심부름을 다니는 게 겐리하 그리고리예브나라면요…….”
“그것만은 확실하네.”
“그럼, 우리가—우리가 겐리하 그리고리예브나를 치워 버릴 수 있다면, 적어도…….”
“그러면 나머지가 다 경계 태세에 들어갈 걸세. 내가 어디까지 아는지 정확히 알게 될 테고, 브론시테인의 신호를 기다릴 것도 없이 신문 지상에 내 얘기를 지어 나르기 시작하겠지.”
니콜레타는 물러서지 않았다. “브론시테인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이유로 겐리하를 치울 수 있다면요?” 그 효과는, 니콜레타가 보기에, 괴물의 목을 베는 것과 같을 터였다. 그리고 목 없는 짐승이 설욕의 계획을 짜는 데 그리 능하지 못하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적어도 임프레사리오가 다음 수를 궁리할 시간은 벌 수 있으리라. “게다가 저는 그 사람 대역이니까, 연습에서 그 자리에 들어가 주역들 틈에서 배울 수 있어요. 이 일의 전모를, 누가 가담했는지를, 아, 훨씬 많이 알아낼 수 있다고요—”
“하지만 니콜레타 이바노브나, 무슨 명목을 댈 텐가?”
“그건 제게 맡기세요! 오늘 저녁밥 전에 치워 드릴게요. 그러니까, 지금이 벌써 오늘이라면요.” 지금 몇 시인지 확신이 없었으므로 니콜레타는 그렇게 덧붙였다.
그때까지 어디를 걷고 있었든, 이 언저리에서 두 사람은 임프레사리오의 서재 문 앞에 이르렀다. 그분은 대화를 조용히 마치자며 니콜레타를 안으로 들였다. “자네가 여태 나를 믿어 주었으니,” 그분이 말했다. “나도 자네를 믿는 것이 도리겠지. 다만 조언을 하나 해야겠네. 죄목은, 그게 무엇이 됐든, 오직 겐리하만 지은 죄여야 하네. 다른 아이들이 충격받고 질겁할 것. 겐리하를 저희와 확 갈라놓아서, 의절에 거리낌이 없어질 것.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여야 하네. 거짓말이어선 안 돼. 정말로 일어난 일이어야 하네.”
‘일어날 거예요!’ 니콜레타는 기쁘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새로운 난관이 떠올랐다. “방금 겐리하가 두 마담을 방으로 데려가는 걸 봤어요. 짐을 챙기시게요, 아마.” 니콜레타가 말을 꺼냈다.
“주무시게.” 임프레사리오가 바로잡았다.
“네?”
“묵고 가시게 하는 걸세. 이런 폭풍우 치는 밤에 내쫓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선생님, 그렇게 다들 가까운 사이면, 겐리하가 풀어 드릴 게 뻔하지 않아요? 게다가 겐리하는 열쇠가 있으니 극장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잖아요!”
“니콜레타…… 자네야 모르겠네만, 류보프와 그루샤의 방은 한 번도 바깥에서 잠근 적이 없네. 두 분이 참아 줄 리가 없지.”
“그럼 두 사람 중 하나가 복수하러 선생님을 덮치면요? 제가 방문 앞에 보초라도 설까요?”
그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아가. 복수라니?” 그분은 거의 재미있다는 듯 그 말을 되받았다. “저들이 다른 무엇이든 간에, 니콜레타, 오랜 벗들이야. 동료들이고. 게다가 이제 한 쌍의 늙은 미망인들 아닌가. 초대받는 첫 살롱에서부터 우리를 헐뜯고 다니실 테지만, 나는 최소한의 예는 갖춰 드려야 하네.”
여기서 니콜레타 쪽이 질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선생님,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그것도 큰일이지만, 저들은 코스트리코바를 브론시테인한테 그냥 넘긴 게 아닌 것 같아요. 제 생각엔—글쎄, 죽인 거예요!” 한순간에 니콜레타는 이것을 확신했다. 어떻게인지는 몰랐지만. “하다못해 그거라도 가져가서,” 증거물을 가리키며 니콜레타는 말했다. “꼼꼼히 들여다보면, 틀림없이 증명할—”
코스트리코바의 이름이 소리 내어 불리자 임프레사리오는 살짝 움츠러들었더랬다. 지금은 흔들려 보였다. “안 되네, 니콜레타. 무리하는 건 바라지 않아. 건강을 생각해야지. 자네한텐 무엇보다 춤이 있지 않은가. 무슈 브론시테인이 세상에서 제일 바라는 게 우리 연습이 멎는 걸세. 그것만은 내줄 수 없네. 자네는 곧장 침대로 가서 해 뜰 때까지 자게.”
니콜레타는 분해서 울음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큰 위험에 빠지신 것 같단 말이에요!”
“나는 아무렇지 않을 걸세.” 임프레사리오는 말했다. 다만 그리 미덥게 말하지는 못했다. “저들은 들짐승이 아니야, 니콜레타. 한때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네. 자네야 믿기 어렵겠지만. 자네는 너무 어려서 못 봤지. 이 싸움들이 있기 전에, 저들이 나에게 등 돌려지기 전에, 저들 모두 이렇게 저를 떨어뜨려야 할 지경이 되기 전에, 내가 보던 그대로 자네도 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내 말을 믿어 주는 수밖에 없겠군.”
그러나 이번 한 번만은 니콜레타도 임프레사리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니콜레타는 한숨도 못 잤다. 코스트리코바에게 결국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생각하느라.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임프레사리오에게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봐 애태우느라.
“또 내 앞에서만 태연한 얼굴을 지어 보이시는 거야!” 니콜레타는 혼잣말을 했다. “그렇지만 저쪽이 정정당당하지 않은데, 정정당당해서 무슨 소용이야?”
그러나 이튿날 아침 임프레사리오는 멀쩡했고 (연습 전 복도에서 니콜레타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잠깐 주셨다) 두 마담은 별 탈 없이 극장 밖으로 배웅된 모양이었다. 니콜레타는 걱정했다. 겐리하가 저를 붙들고, 기숙사 방 열쇠를 언제 어떻게 손에 넣었느냐고 따져 물으면 어쩌나. 그러나 그 주역은 연습 때 늘 그러듯 제 대역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어젯밤에 본 다른 것들에 정신이 팔려서, 아직 거기까지 생각이 못 미쳤나 보지.’ 그래도 니콜레타는 겐리하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가장 가까운 약국으로 다녀올 때까지는.
그러니까, 겐리하에게 씌울 죄목을 궁리하던 니콜레타는 『푸른 수염』 전의 그 독극물 소동을 떠올렸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이 무슈 브론시테인의 지령을 받은 그 간수의 짓이었다는 확신까지 섰다. 니콜레타는 또 하나를 떠올렸다. 몇 해 전 요양원 시절에 먹던, 칼로멜이라는 아주 고약한 물약. 처방전을 간직해 두었으므로, 날짜만 고쳐 약제사의 판매대에 내밀면 반짝이는 새 병 하나를 받아 올 수 있었다. 겐리하의 아버지는 다른 도시에서 장사하지만, 미샤가 나트륨 꾸러미의 상표를 보여 주었으므로 그 약국의 인장을 새 병에 베껴 그렸다. 그리고 저녁 식사 때 슬쩍 빠져나가 외투 보관실로 가서, 그 병을 겐리하의 모피 외투 주머니에 숨겼다. 제 찻잔에 칼로멜 가루를 큼직하게 한 덩이 타 넣은 다음에.
* * *
“그런데 대체 왜일까?” 병에 관한 소식을 들고 클레멘티나가 의무실로 껑충껑충 뛰어올라온 뒤에도, 말라니야는 자꾸만 혼잣말을 했다. “겐리하 그리고리예브나가 왜 자기 대역을 독살하려 들지?”
저녁 식탁에서 니콜레타는 기침 발작을 일으켰고, 서늘한 간이침대로 옮겨졌다. 의사가 불려왔고, 군무진 아이들이 몰려와 한바탕 어르고 달랬다(니콜레타는 이게 그리 싫지 않았다). 임프레사리오는 뒷날의 긴 대화를 기약하듯 손을 꼭 쥐어 주었다(이건 확실히 싫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모두들 독의 출처를 캐러 몰려 나갔고, 니콜레타만 말라니야와 젖은 수건과 이미 게워 놓은 세숫대야와 함께 남았다. 칼로멜은 기억보다도 고약했다. 아니면 마땅한 복용량을 초과했거나. 아니면 이제 건강이 워낙 좋아져서, 수은염의 그 이롭던 하제 효과가 되레 해롭게만 도는 것인지도 몰랐다. (뜨거운 차에 탄 것도 결코 도움은 안 되었다는 걸 나중에 배우게 된다. 수은은 김으로 들이마실 때 유난히 독하니까.) 연유야 무엇이든, 쉬 잊지 못할 것들이 남았다. 입안의 그 더러운 쇠맛. 근질대던 이. 그리고 목과 가슴을 타고 내장까지, 불이 곧장 꿰뚫고 지나가던 그 느낌.
“몸 쥐어뜯지 마.” 말라니야는 니콜레타의 두 팔을 이불 밑에 도로 밀어 넣어 주고는, 왜라는 물음을 다시 소리 내어 굴리기 시작했다. 말라니야는 그렇게 살뜰한 데다 이 일을 그렇게나 궁금해했다. 게다가 겐리하 패거리에 끼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니 (목소리가 돌아오자마자) 임프레사리오에게 들은 것을 다 들려주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증거물 이야기. 두 마담의 음모. 겐리하의 표리부동. 임프레사리오의 숨은 작곡 솜씨와, 그분을 구할 니콜레타의 계획까지. 말라니야는 홀린 듯이—그러나 딱히 마음이 놓이는 기색은 없이—끝까지 들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겐리하가 조금만 더 손이 빨랐다면 정말 나를 독살하고도 남았을 거란 얘기지. 차라리 그랬으면 저한테는 더 좋았을걸!” 니콜레타는 곰곰이 말했다. 임프레사리오가 저에게 쏟는 관심을 보다 못한 겐리하가 질투에 눈이 멀어 독을 썼다. 그랬을 공산이 크다고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걸 왜 진짜로 마셨어?” 말라니야가 물었다. 대화가 시작될 때보다 한층 심란해진 채로. “마신 척만 하면 됐잖아?”
“그건 거짓말이잖아.” 니콜레타는 조리 있게 대답하고, 다시 기침 발작에 붙들렸다. “세숫대야 이리 좀 다오, 멜라니, 부탁이야.”
“아유, 이 몸으로 무슨 수로 소냐를 해!” 말라니야가 절망하여 두 손을 쥐어짜며 외쳤다.
니콜레타는 이 순간까지, 자기가 소냐를 하게 된다는 데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생각이 미치자, 굵은 눈물 두 방울이 뺨을 타고 굴러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