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한가지
PeopleNikolai Yezhov, Joseph Stalin, Georgy Malenkov, Lavrentiy Beria, Genrikh Yagoda, Grigory Zinoviev, Lev Kamenev, Sergei Kirov, Leon Trotsky, Vladimir Lenin, Vyacheslav Molotov, Nikolai Bukharin, Lazar Kaganovich, Nikita Khrushchev, Anastas Mikoyan, Sergo Ordzhonikidze, Kliment Voroshilov, Mikhail Frinovsky, Karl Radek, Mikhail Tomsky, Andrey Vyshinsky, Yevgenia Yezhova TermsGreat Purge, Yezhovshchina EventsThe Great Purge
제7장
“그러니까 꿈이 아니었던 거야, 결국.” 앨리스는 혼잣말을 했다. “만약—만약 우리 모두가 같은 꿈의 일부인 게 아니라면 말이지. 다만 이게 붉은 왕의 꿈이 아니라 내 꿈이면 좋겠어! 남의 꿈에 속해 있는 건 싫단 말이야.” 앨리스는 자못 투덜대는 투로 말을 이었다. “가서 왕을 깨워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그럼 어떻게 되나 보게!”
니콜레타가 아직 부속학교의 일개 학생이고 그 반이 아직 기본 폼을 익히던 시절에는, 이런 일이 예사였다. 마스터가 불을 어둑하게 낮춘다. 그리고 여학생 하나하나의 두 다리와 등줄기를 따라, 어둠 속에서 빛나는 인광 반죽을 길게 발라 준다. 그렇게 하면 자세를 하나하나 잡아 가면서, 제 몸의 선을 거울 속에서 또렷이 관찰하고 다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나가던 상급생 눈에, 그 빛나는 조그만 것들은 춤추는 그림자 그림 한 무리처럼 우스꽝스러워 보였겠지만.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만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간지러운 감촉이 팔을 타고 올라오는 바람에 정신이 돌아온 니콜레타가 눈을 반쯤 떴을 때, 침대맡의 라브렌티는 니콜레타의 맨 손목에서 맨 어깨까지 먹물로 선을 긋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그리고 니콜레타가 맨 처음 떠올린 것이, 저 괴상한 학창 시절의 관습이었다.
이어서 니콜레타는 쇄골에서 사타구니까지 이미 그어져 있는 또 한 줄을 알아차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에 온통 소름이 돋아 있었다. 이번에 떠오른 것은 발레 학교 시절 여름 겨울 방학마다 일하던 양복점이었다. 재단 본 뜨는 일이 떠올랐다. 그러니 목을 빼어, 감각 없는 맨다리가 혁대로 의무실 간이침대에 묶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모든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그러니까 꿈이 아니었던 거네.” 니콜레타는 소리 내어 말했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미치광이인 거고.”
라브렌티는 그 목소리에 움찔했고, 긋던 재단선이 궤도를 벗어났다. “내가 미치광이라?” 그가 펜을 떼며 물었다. “그건 무슨 계산이지?”
“아저씨가 우리가 내보낸 애들을 하나씩 채 간 거잖아요. 그러니까, 두 마담이랑 애들을. 아저씨는 말하자면 기회주의자예요.” 언젠가 신문에서 어느 살인마를 두고 그런 설명을 읽은 기억이 났던 것이다.
“내가 재미로 사람을 죽인다?” 라브렌티가 재미있어하며 물었다. 곁의 작은 탁자에 놓인 등잔은 그의 의자와 니콜레타의 침대 너머는 아무것도 비추지 못했다. ‘벽이 안 보이는 걸 보면 꽤 큰 방인가 보다.’ 니콜레타는 추리했다. ‘의무실인가 싶기도 한데, 의무실은 창이 커서 밤에도 달빛 별빛이 조금은 들어오잖아.’ 그런데 지금 여기가 어디든,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공기에 밴 퀴퀴한 냄새도 의무실 것이 아니었다. 발과 손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네.” 니콜레타는 그에게 대답했다. 목이 어찌나 헐고 부었는지 쉰 속삭임 이상은 나오지 않았다. “아저씨는 그 재미로 하는 거예요. 평소 같으면 아저씨랑 놀아 주지도 않을 여자들을, 손에 넣는 재미로.”
라브렌티는 한 손을 가슴에 얹었다. “저런, 니콜레타, 네가 나를 그렇게까지 형편없이 보는 줄은 몰랐구나!”
“그러고는, 실컷 갖고 논 다음엔,” 니콜레타는 이었다. “아저씨는—물론 무슈 브론시테인 밑에서 일하는 게 분명하고—무대 위에 차려 놓은 그 입체 모형들을 그 사람 주려고 사진 찍는 거죠. 임프레사리오가 극장에서 굴러가던 그 사람 유곽을 막아 버렸으니, 하다못해 도색물이라도 만들어 바쳐야 할 거 아니에요!” 하기야 그러자면 아주 별나고 손님도 몇 안 될 도색물이 되겠지만. 어쩌면 공연은 갈수록 노골적으로 변해 가는데, 인형들이 서로 옷을 벗기는 막에 이르기 전에 자기가 기절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니콜레타는 그렇게 생각했다.
“꽤 복잡한 사업이로군!” 라브렌티는 니콜레타의 추리를 흥미롭게 따라오며 말했다.
“그러고는 임프레사리오한테 덮어씌우려 한 거예요! 브론시테인의 그 연대 병력을 몽땅 와이어에 매달아 전시하고, 죽은 애들은 배경막으로 만든 게—아저씨 입으로 말했죠, 돈 아끼려고, 캔버스 예산을 슬쩍하려고—그분이 아니라 아저씨면서, 나한테는 그분 짓이라고 믿게 하려던 거잖아요. 그 말이 헛나간 건 후회되시겠어요. 그래요, 그분이 관여하셨다는 얘긴 오로지 아저씨 입에서만 나왔어요. 내가 제 발로 경찰에 달려가서, 아저씨 대신 그분을 모함해 주길 바랐겠죠.”
“하나같이 나의 묘수로다.” 이 가설이 끝나자 라브렌티는 차분히 말했다. “한데 짚어 다오. 그 밤에 나는 왜 내 공연을 구경하고 있지 않았을까, 네가 나를 끌고 가 주기 전까지?”
“그야, 무슨 괴상한 사정이 있었겠죠. 나를 골탕 먹인 거예요. 내가 벌써 짐작을 굳혔다는 걸 아니까.”
“아, 그랬군, 그럼 그렇지. 한데 그 사람들을 나 혼자서 무슨 수로 매달았을까?”
“그야—” 니콜레타는 말문이 막혔다. “그야, 조수가 있었겠죠. 에테르로 숨을 막는 거예요, 나한테 그랬듯이. 그래서 축 늘어지면 그 브롬을 놓는 거고, 그러고 나면—그럼 아저씨 얘기대로라면 임프레사리오는 무슨 수로 매달았는데요?” 니콜레타는 도도하게 따졌다. “그분은 다리를 저는 데다 한 손은 못 쓰시는데—”
“그야, 그분한텐 네가 있잖니.” 라브렌티가 눈썹을 치키며 말했다. 여태 무언가를 참아 온 사람의 역력한 즐거움이 배어 있었다.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네 임프레사리오가 당신의 비밀 공연이야 너한테 숨기셨다만, 네 도움 없이 무슨 수로 그 공연의 에투알들을 잡아들이셨겠느냐 말이다.”
“내가? 내가?” 니콜레타는 목청을 높이다 목에 칼로 베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내가 무슨 수로 겐리하를 이겨요, 우선? 마담 카메네바는? 나 그 사람들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린 적 없어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쩐지 그 말이 딱 맞지는 않는 것 같았다.
요즈음 이 이야기가 이야기될 때는—그리고 니콜레타 이바노브나의 음산한 이야기는 나이 어린 기숙사생들 사이에, 적어도 그 애를 알던 적 없는 아이들 사이에서는 꽤 인기 있는 성탄절 괴담이 되어 있다—여기 적어 온 것과는 딴판으로 이야기된다. 1학년들 겁주는 용도로 꺼내질 때, 그것은 이런 이야기다. 매독으로 실성한, 독처럼 시기심 많은 꼽추 같은 조그만 것이, 제 말 못 한 연정의 순진무구한 대상을 두고 경쟁자란 경쟁자는 다 사냥해 죽인다. 그 연정의 대상도 극장의 연출가가 아닐 때가 많다. 적어도, 마스터들이 엿들을 만한 자리에서는.
그리고 이 일의 진상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데, 내가 여기 이야기해 온 것은 그것도 아니다. 나는 전에도 그 진상을 스스로에게 들려주려 해 보았다. 말라니야 막시밀리아노브나가 받아 적은 그 미비하고 뒤죽박죽인 진술에서, 내가 추릴 수 있는 한의 진상을. 그러니까 이 글은, 일이 일어났을 그대로를 적어 보려는 나의 열 몇 번째인지 모를 시도다. 나는 지금도 그 일들을 꿈에서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적어 내면 그 되풀이되는 꿈이 쫓겨 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번번이 수은 중독 전야에 이르면 걸려 넘어진다. 길을 잃고 공상으로 새고, 오늘 밤도, 또다시, 그 공상의 달콤함에 실려 여기까지 왔다. 나는 이야기하는 내내 그 애에게 무언가를 숨겨 주었고, 그럼으로써 그 애의 죄를 벗겨 주었다. 그 애의 본바탕만은 어떻게든 순진무구했다는 생각을 나는 놓지 못한다. 그것만이 앞뒤가 맞는 설명 같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일을 저지르면서도 그 애가 여느 때처럼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은, 제 손으로 한 일이 저에게 남의 일 같지 않고서야 설명이 안 되니까.
실은 더 그럴듯한 쪽이 따로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애의 모든 부분이 사이좋게 공존했고, 자기가 한 일을 자기도 다 알고 있었다는 쪽이. 내가 보아 온 그 애는 과연 모순의 생물이었다. 놀랄 만큼 순수한 믿음과 놀랄 만큼 순수한 냉소가. 구수한 익살과 철벽같은 유머 결핍이. 새침함과 방탕이. 캐묻는 호기심과, 사실 앞에서의 새된 옹졸한 잡아떼기가 한 몸에 살았다. 어쩌면 그 애한테는 그 무엇도 조금도 어렵지 않았는지 모른다. 괴담 속의 그 인물은 계산적이고 진정성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순전히 제 자리를 높이려고 나의 두려움을 먹이 삼는 것으로. 그렇게 의심할 뚜렷한 근거는 없었지만, 이따금 걱정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는 그 애가 야심 없는 아이였다고 가정해 두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이 가능성 쪽이다. 그 애가 저 자신에게 일을 숨기지 못했고, 그것이 그 애한테 몹시 어려웠다는 것. 무대 전환수 친구 중에 반야라는 자가 있는데, 나중에 주장하기를, 소냐 역의 막바지 무렵 그 애가 술에 취해 나를 두고 악담을 퍼붓곤 했다는 것이다. 이 반야 말로는, 니콜레타가 저를 그 배역에 밀어 넣었다고 나를 원망하게 되었다던가. 이 생각은 나는 지금도 아파서 마주 들지 못한다.
그러나 이 작고 병약한 아이를 어떤 의미로든 피해자로 보는 그림에, 어떤 끌림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애가 피해자가 아니었다는 것. 속아 넘어간 게 아니라 제 발로 끈질기게 그 길을 갔다는 것. 나는 그것을 자꾸 잊는다. 요리사 아벨을 내치자고 나를 설득한 것도 그 애였다, 실은. 그 애가 눈앞의 광경마다 놀라고 몸서리쳤다고 상상하는 편이 쉽다. 그래서 나는 그 애를 이 이야기의 순수하고 대체로 덕성스러운 여주인공으로, 사리 분별 있는 쪽으로 캐스팅해 온 것이다. 그것이, 그 애가 나를 지키겠다고 저지른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내가 그 애한테 품고 있는 사랑이겠지. 그러나 이번에는 기어이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가, 끝장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면 내가 몸소 걸어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 애가 정말 무엇이었는지 일러 주어, 결말을 맞을 채비를 시키는 수밖에.
나는 그것을 그 애의 귀에 속삭여 주었다.
* * *
내가 일러 준 것에서 그 애는 그리 놀랄 거리를 찾지 못했다. 내가 그것을 일러 줄 수 있다는 것도 그 애한테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자기와 제 임프레사리오 사이에는 늘 생각이 자유로이 오갔으니 말이다.
이제 그 애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억했다. 감각까지, 한꺼번에. 무슈 브론시테인의 유곽 이야기로 저와 나를 함께 겁준 그 밤, 잠이 모자라 반쯤 실성한 채, 나의 안위에 대한 두려움에 떠밀려 제 방을 빠져나오던 것을 그 애는 기억했다. 두 마담의 방문을 두드리고, 에테르 적신 헝겊을 들고 모퉁이에 숨어, 마담 카메네바가 나와 보기를 기다리던 것을. 임프레사리오를 대신해 타오르던 그 의로운 분노는, 헝겊을 마담 지노비예바에게 갖다 대는 순간 죄다 쏟아져 나왔다. 약이 단박에 듣지 않자, 그 애는 제 두 손을 썼다. 그 애한테는 타고난 재주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제물을 죽음의 문턱까지—영원의 그 깎아지른 벼랑 끝까지—몰고 갔다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야 손을 멈추는 재주가.
니콜레타는 그 사람을 머리채를 잡아 내게로 끌고 왔다. 도착했을 때 그 사람은 파랗게 식어, 아주 느리고 얕게만 숨 쉬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것이 무슨 끔찍한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나는 한참이 걸렸다. 브롬 주사는 어차피 사정상 불가피했다. 그루샤의 경우엔 자비이기도 했다. 주사가 아니었어도 그 사람은 온전히 깨어나지 못했을 테니까. 류바의 경우에도 자비이리라고 나는 판단했다. 한시도 떨어진 적 없는 벗이 없는 세상에서, 그 사람이 살고 일하고 싶어 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내가 잘 알았으니까. 브롬밖에 길이 없었다. 나에게는 더 나은 길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건 공정하지 않았어요.” 니콜레타가 속삭였다. 추리소설의 열렬한 독자이자, 규칙의—규칙대로 이야기하기의—열렬한 애호가로서.
“그래, 조금도 정정당당하지 못했지.” 라브렌티는 제 나름으로 알아듣고 맞장구를 쳤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그 애는 임프레사리오에게 이제 안전하시다고 말하던 것을 기억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리고 나는 정말 겁에 질려 있었고, 그 애는 정말 나를 달래 주었다. 겐리하의 잠자리에 같은 에테르를 더 적시던 것을 그 애는 기억했다. 라데카와 퍄타코바와 소콜니코바에게, 그 큰 공연이 끝난 뒤 솜씨 좋게 손댄 샴페인 한 병을 돌리던 것을. 그 애의 선물들은 옛날이야기 속처럼 하나씩 하나씩 내 문 앞에 나타났다. 그들을 살려서 풀어 둘 수 없다는 것을 니콜레타는 알았다. 아니, 정확히는 이랬다. 그들이 깨어나 붙들려 간 일을 기억해 낸다면 내가 그 애를 발레단에서 내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니콜레타는 알았던 것이다. 아침이면 그 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냈다. 어찌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지, 이따금은 내가 꿈을 꾸는 중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하기야, 고작 음악 한 곡을 두고 그들이 다 죽어야 할 게 뭐란 말인가? 이제 와서는 다 하찮게 보인다.
“그 사람들은 선생님을 죽이려 했어요.” 니콜레타가 나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그래, 맞다. 맞는 말이다.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어쨌든 그들은 나를 극장의 우두머리로 남겨 둘 생각이 없었고, 그것은 결국 매한가지 아닌가.
“대체 누구한테 말하고 있는 거냐?” 라브렌티가 제 포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니콜레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렸잖아요, 그렇죠?” 그 애가 나에게 물었다.
그래, 그랬다. 그 애는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정확히 알았고, 그것을 이루어 주었다. 약간의 평화를. 그들이 평화로운 모습을, 잠든 듯한 모습을 보는 것. 복도에서 내 눈을 피하지 않는 모습을. 억지웃음을 그려 붙이고, 우리가 다툰 적 없다는 시늉을 하지 않는 모습을. 그들이 더는 걸어 다니지 않기를 내가 바란다는 것을 그 애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또 아프게 할 수 있는 깨어 있는 세상에서, 그들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을. 그래, 차라리 잠들어 있는 편이 나았다. 그들이 저를 더럽힌 적 없는 척할 수 있게. 옛 시절인 척. 그들이 아직 나를 사랑하던 때인 척. 그들이 나의 약한 꼴을 보기 전인 척할 수 있게.
지노비예바를 내 발치에 눕혀 놓고 내 낯빛을 본 순간부터, 니콜레타는 알았다. 내가 정말 바란 것이 그들의 망신과 추방이 아니라는 것을. 내보내는 것은 마지못한 타협이라는 것을. 내가 그들을 간직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 애는 알았다. 내게 그들이 산 채로 필요하다는 것도. 데려다 놓기만 하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하리라는 것을, 그 애는 어떻게인지 알고 있었다. 세라피마 미로노브나의 일이며, 그 사람을 위해 내가 지어 둔 사사로운 발레의 일이야 몰랐지만.
“모자랐으면 모자랐지, 지나치진 않았어요.” 니콜레타는 선언했다. 그리고 이런 처지에는 그런 말이 마땅하고 용감한 말이겠거니 싶어 덧붙였다. “무슈 브론시테인이 라브렌티 파블로비치를 보낸 게 분명해요, 내가 일을 끝맺지 못하게 하려고!”
“너는 어쩌자고 그렇게 무슈 브론시테인과 나를 기어이 아는 사이로 만들려 드느냐?” 라브렌티가 물었다. “하기야 그 양반한테 어지간한 매력이 있긴 있는 모양이지. 너의 임프레사리오도 너를 두고 같은 소릴 하시니까.”
“그럴 리 없어!” 니콜레타는 외치며, 확인을 구하듯 나를 올려다보려 했다. 헛일이었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그 애로서는 알 수 없었으니까.
“그 양반 지금 야단이시다. ‘여태 내내, 니콜레타 이바노브나가? 어떻게 그럴 수가?’ 그리고 네가 안 맞장구쳐 드리면 더 야단이 나실걸. 그건 이 모든 게 그분 탓이라는 뜻이 되어 버리니까. 네 입으로 말해 드리면 그분 시름이 덜하겠지. 네가 어떻게 무슈 브론시테인의 벗이 되었는지. 그분을 망치려고 그분의 가장 좋은 무용수들을 어떻게 못 쓰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러는 내내 아무한테나 몸을 내주고 있었는지. 그래, 그분은 소상한 걸 바라실 게다.” 라브렌티는 그 낱말을 음미하며 말했다.
“소상한 걸 바라는 건 임프레사리오가 아니라 딴 사람 같은데요.” 니콜레타가 받아쳤다. “내 가죽이면 됐지, 뭘 더 바래요?” 재단 본으로 미루어, 인형 단계는 건너뛰고 곧장 배경막이 될 모양이라고 그 애는 추리해 냈다. 영리한 것! 그래, 그 무렵 나는 사사로운 공연을 계속하는 것이 슬기롭지 않다고 판단한 터였다. 남은 배우 수가 크게 준 사정이야 접어 두더라도. 돌이켜 보면, 그 무렵 나는 내 공연에 꽤 물려 있었다.
“생각을 해 봐라, 얘야, 나는 실속 챙기는 사람이야.” 라브렌티는 재단 본을 마저 그리려 펜을 도로 집으며 말했다. “자, 가만히 있고. 그분이 너를, 그분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내놓을 때까지 살려 두라고 하시지만 않았으면, 나는 벌써 가죽만 벗기고 끝냈어. 왜 꼭 네 입에서 나와야 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만. 이야기야 그분이 손수 지으셔도 그만인 것을. 지금쯤 조사관한테 네 이야기를 아주 그럴듯하게 지어 들려주고 계실걸. 그리고 인정해라, 니콜레타. 너만 한 범인감이 어디 있느냐.”
‘그래서 내가 죽어야 하는 거구나.’ 니콜레타는 속으로 말했다. 그 애는 언제나 새 사정을 받아들이는 데 아주 빨랐다. 이번 사정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고, 나는 상상하련다. ‘살려 뒀다간, 그렇지, 나를 감옥으로 끌고 갈 테니까! 그럼 내 가죽은 아무의 것도 못 되고. 임프레사리오는 그걸 당신 것으로 간직하고 싶으신 거야. 그런 거죠?’
그 애는 나에게 묻고 있었지만, 나는 대답을 삼갔다. 눈앞의 증거와 나에 대한 믿음으로, 그 애 스스로 결론에 이르게 두는 편이 나았다. 이 일들로 마음이 돌아갈 때면, 나는 붙잡히는 대로 아무 실밥이나 잡아당겨 본다. 그 애가 나를 사랑했고 나의 사랑을 믿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오지 않을까 하고.
“상품치고는 형편없지, 온통 딱지에 발진이니.” 라브렌티가 말했다. “그래도, 하긴, 그만하면 까닭이야 되겠어. 그분의 다른 배경막들은 죄다 검시관 차지가 됐으니.”
“죽였어요? 아직 살아 있던 사람들을?” 니콜레타는 물었다. 답을 알면서.
“아궁이에 밀어 넣고 다들 도망갔다고 잡아뗄 시간은 없고, 치정 살인으로 칼 맞은 것처럼 꾸밀 시간은 겨우 있었지. 하기야 그 조사관도 소피코의 시신부터 걸려들지 않았으면 지하실을 뒤질 생각이나 했겠느냐만. 마드무아젤 보로실로바가 삽질만 좀 더 야무지게 해 줬어도, 우리 임프레사리오가 가죽을 몇 장이나 모으셨을지, 원.”
“아, 맞다, 그렇지!” 니콜레타가 외쳤다. “깜박 잊고 못 물어볼 뻔했네. 그 일은 그럼 왜 그렇게 된 거예요? 내 짓이 아니었다면요? 하긴, 걘 그 밤에 저 혼자 치는 피아노 소리를 따라갔다가 그만 봐 버린 거겠죠, 그…….” 거기서 그 애는 말끝을 흐렸다. 제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하나같이 끔찍한 잠꼬대 같아, 스스로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개들은 왜 그 앨 문 거예요?”
“아! 그건 나도 알아내는 데 한참 걸렸다.” 라브렌티가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야.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며 내뺐지. 문밖까지 나가긴 했는데, 운 나쁘게도, 마드무아젤 오르조니키제가 자기 전에 고인이 된 마드무아젤 코스트리코바의 향수를 뿌리는 버릇을 들여 놨단 말이지. 그리움에서였겠지, 아마. 그런데 개들은 이미 마드무아젤 코스트리코바의 냄새와, 그 맛을 알고 있었거든. 내장을 줘 버렸을 때 말이다.”
“줘 버렸다니, 누가요?” 니콜레타는 본능적으로 다시 내 목소리의 출처를 두리번거렸다. 못 찾을 것을 알면서. 찾으면 무엇을 물을지도 모르면서. “코스트리코바를 극장에서 몰아낸 건 브론시테인이랑 두 마담이잖아요.” 그 애는 말했다. 다만 그 말에 이제 힘이 실리지 않았다.
라브렌티는 그 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알기로는, 1층 객석에서 오다가다 눈독 들인 미치광이 짓이었지. 멀리서 반해 놓고, 분장실 출입을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파티 가는 길목에서 채 간 거야. 흔해 빠진 이야기지. 그 애는 임프레사리오의 마차에 버려져 있었고, 그분이 발견했을 땐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었어. 그분은 그 앨 숨겼지. 추문을 피하려고. 그리고 당신의 프리마를 잃었다는 걸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처음엔 온갖 약을 다 써서 살려 내려 하셨다.”
‘그러다 겐리하랑 그렇게 잘 아는 사이가 되셨나 보다.’ 니콜레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영영 깨어나지 못하리라는 게 분명해지니까, 하다못해 고통이라도 덜어 주려고 브롬을 쓰셨지. 그리고 끝내는, 그 애가 다시 무대를 밟는 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신 거야. 어떤 거꾸로 가는 소생술 같은 게 아니었나 나는 생각해 본다. 그래서, 다음 시즌 공연으로 와이어 곡예가 잔뜩 필요한 작품을 고르신 거지.”
그 애를 위한 쓸모를 찾아 줘야 했다고, 나는 니콜레타에게 말했다. 그것이 도리였고, 유일한 길이었다. 그 비극에서 무엇이든 좋은 것이 나오게 해야 했다. 그 애도 그러길 바랐을 것이다.
“한데 산 인형 노릇도 오래는 못 가지.” 라브렌티가 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에 들어오는 게 여기다. 그때까지도 비밀로 하고 싶으셨던 그 양반이, 나한테 테레빈유를 찾고, 앞치마를 찾고, 송아지 가죽 다루는 제책공을 아느냐 물으시더란 말이지. 조각을 맞춰 봤지. 내가 대신 처리해 드리마 했고, 그 값으로 극장과의 독점 종신 계약을 받아냈다. 지난 시즌들보다 꽤 나은 봉급도.” 그는 자못 뿌듯한 낯으로 말했다.
“그래서 그분을 돕는 거예요? 고작 돈 때문에?” 니콜레타가 물었다.
그는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는 듯 눈썹을 치켰다. “나는 건축가가 되고 싶었는데, 아무도 나한테 삼차원을 안 맡겨 주더구나.” 그가 비꼬듯 말했다.
“길이 그 둘뿐이었어요? 집을 세우거나, 사람을 낱낱이 해체하거나?” 니콜레타가 물었다.
“뭐, 한동안은 군인이었는데, 지금 하는 일과 아주 비슷했지. 차가운 맨땅에서 잤다는 것만 빼면.”
그 뒤로 긴 침묵이 흘렀다. 라브렌티는 다리를 묶은 혁대를 풀고, 재단선을 마저 그리려고 니콜레타를 젖혀 눕혔다. 이번엔 혁대를 도로 채우지 않았다. 팔다리가 얼마나 감각 없이 늘어졌는지 알아본 것이다. 그 모든 일을 그는, 여태 니콜레타에게 보인 적 없는 묘한 부드러움으로 했다. 뺨을 베개에 뉘어 줄 때 목을 조심하는 것이며, 그런 것들 말이다.
“나 지금 푸줏간 벽에 걸린 부위 그림 같겠네요.” 니콜레타가 한마디 했다.
“나는 너를 이 꼴에서 구해 주려 했다.” 라브렌티가 곰곰이 말했다. “기억할지 모르겠다만, 그 밤에 네가 그 빌어먹을 길로 그분의 비밀 공연까지 기어드는 걸 막아 보려 했잖니. 너한테도 브롬을 놔 줄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그러면 한결 수월했을 텐데. 나 요즘 주사 솜씨가 아주 늘었거든. 여태 내내 저들의 마구간지기 노릇을 한 게 나다. 넘어가는 만큼이나마 먹이고, 공연 때마다 옷을 갈아입히고. 그분은 손 더럽히는 걸 싫어하시니까. 저들을 이 방에 뒀지. 그분이 이 일에서 찾으시는 재미를 나도 알 것 같아. 모든 게 아주 단순했거든, 깨어 있는 세상과는 다르게. 나는 자존심 세우느라 재치를 부릴 필요가 없고, 저들은 나를 상대로 도덕적 결기를 세울 의무가 없고. 나는 저들을 돌보러 있는 사람이고, 저들은 저들 나름의 방식으로, 되는 만큼, 공손하게 내 돌봄을 청했지. 죽 달라고 내 쪽으로 코를 킁킁댄다든가, 겨드랑이를 씻으라고 팔을 들어 준다든가.”
이 새로운 각도에서 보니, 등잔 불빛이 흔들리는 결에 따라, 빛의 동그라미 가장자리에 붉은 얼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부하리나가, 다른 간이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그 인형 공연이 그분한테 무슨 쓸모였을까요?” 니콜레타는 궁금해했다.
“아, 그건 죄다 창작 수련이지.” 라브렌티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처음엔 나도 애들을 더 늘리시려나 했는데, 과연 그러셨고. 당신 나름의 예술적 완성을 향해 밀고 나가신 게야. 봐라, 『소냐』는 그 이상에 한결 다가갔잖니. 진정제는 한결 약하게, 와이어는 온몸에 두르고. 관객을 당신의 창작 세계로 슬슬 끌어들일 수 있나 보신 거지. 운이 따르지 않았으니, 이젠 물러나시겠지. 이젠 놓아두시겠지.”
‘시작할 땐 그분도 헷갈리셨는지 몰라.’ 니콜레타는 소피코가 제 지어낸 이야기를 두고 한 말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선생님 마음대로 나한테 숨길 수 있고,” 그 애는 나를 향해 말했다. “선생님은 우릴 볼 수 있는데 우린 선생님을 못 본다면. 그럼, 결국, 선생님이 우릴 꿈꾸고 계신 것뿐이잖아요?” 이번에도 나는 끼어들기를 삼갔다. 그 애 스스로 풀어내게 두는 편이 좋았다.
“너 정말 미쳤구나.” 라브렌티가 감탄했다. “허공에 대고 꿈 타령이라니. 실성한 계집애 그림 그대로다.”
“솔직히 말해 봐요, 라브렌티. 아저씨도 그냥 그분 꿈속의 물건일 뿐이라는 기분, 든 적 없어요?” 니콜레타가 물었다.
라브렌티는 재미있어하며 곱씹었다. “그 비슷한 게 아닌가 의심해 본 적은 있지. 그 양반이 실은 신학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게 아닐까. 하기야 빠져나왔든 못 나왔든 결과는 매한가지다만. 이 세상을 꼭 그 속처럼—당신 머릿속처럼 만들어 놓으셨잖니. 순교 성인들과 이단자들, 통회와 간구, 그런 것들로.” 그는 제 착상에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하기야 제일 단순한 설명은 그거겠지. 어느 저녁 만과 시간에 잠들어, 그때 우리를 몽땅 꿈꾸셨다는 것. 우리는 그 머릿속 어둑한 복도의 그림자들일 뿐이고, 그 바깥세상엔 못 맞는 물건들이고.”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니지만요.” 니콜레타가 골똘히 말했다. “그냥 어쩌실 수가 없는 거예요.”
“어쩌실 수 있든 없든 결과는 매한가지야.” 라브렌티는 이마를 찌푸리며 되풀이했다. “하기야 그럼 그 양반을 가엾어해 드려야 마땅하겠구나. 그런데 어쩐지 그 마음이 안 나는군.”
“내가 그분을 깨워 드려야겠어요.” 니콜레타가 정했다.
“그건 안 되지, 알다시피. 네가 그분 꿈속의 물건일 뿐이라면 말이다. 왜, 다음 순서를 피해 보시게?”
큰 물음은 이것이다. 그 애는 과연 다음 순서를 피하고 싶었을까? 이 마당에 이르러 달아날 생각이나 했을까? 어딘가에 숨겨서라도 살려 둘 수는 없었느냐고, 나를 향해 묻고 있었을까? 고백하건대, 그 애가 나에게 어떤 물음을 남겼을지 헤아리는 일은 나에게 몹시 어렵다. 그 애가 내 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제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나를 원망했다는 생각은, 아파서 품고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 달리는 견딜 수 없으므로, 받아들였다고 해 두자.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내 삶의 이 장을 닫아야 한다는 것을 그 애가 이해했다고 해 두자.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뜻인지 알기에, 저에게 남은 단 한 가지 방법으로 기꺼이 나를 도왔다고 해 두자.
“대체 뭐가 좋다고 웃지?” 라브렌티가 언짢게 물었고, 니콜레타는 더 활짝 웃었다.
“이 사람은 영영 모르겠죠?” 그 애가 나에게 물었다. 그래, 영영 모를 것이다. 나는 그와는, 그 애와 이야기하듯 이야기하지 않는다.
제8장
지금도 그 애는 유령처럼 나를 찾아온다,
깨어 있는 눈으로는 본 적 없는
하늘 아래를 걸어 다니는 앨리스.
“콜로디오 알부민판에 박힌 사진이 된 기분이야, 정말이지!” 소금물 목욕에 몸을 담그며 니콜레타는 혼잣말을 했다. 꽤 쓰라렸지만, 뒤이어 시원한 물통이 나왔고, 그다음엔 부하리나와 나란히 석회유에 한동안 몸을 불렸다. 마지막 남은 머리카락까지 다 벗겨져 나간 뒤, 니콜레타는 새하얗게 바래져, 틀에 펴 메워지고, 칼로 가로세로 긁혔다. 그리고 마침내 이 언짢은 일이 다 끝나자, 니콜레타는 제 배경막에서 무대와 객석을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극장 여기저기, 제 모습이 박힌 곳에서라면 어디서든 내다볼 수 있었다. 프로그램에서. 포스터에서. 무대장치 공방에 굴러다니는 마담 리코바의 옛 의상 도안에서. 그리고 아직 새로 도배되지 않은 어느 낡은 배역표의, 제 이름 글자들 사이에서.
주워듣는 대화 토막들로, 니콜레타는 극장이 저 없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있었다. 『소냐』의 그 참담한 개막 통에 정기회원 몇을 잃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런 축은 어차피 어느 대극장에나 똑같이 드나드는 뜨내기들이었다. 골수 회원들은 남았고, 극장의 임프레사리오에게 위로의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니까 그분은, 당신 발레단을 불길처럼 휩쓸어 가장 뛰어난 무용수 몇을 죽이고 몇을 조기 은퇴로 몰아넣은 그 폐병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몸이었으니까. 이 설명이 대중과, 무엇보다 무용수 가족들의 마음을 제일 덜 다치게 하리라는 것이 마스터들의 중론이었다. 발레단 전체에는 은밀히 공지되었다. 무슈 브론시테인의 음모라는 것은 니콜레타 이바노브나가 지어낸 이야기였다고. 그리고 믿을 만한 몇몇—슬라바, 나스탸, 라자라, 그리고 말라니야—은 그 이상을 들었다. 그 악독한 매독쟁이 계집애가 두 마담을 제 손으로 죽이고, 소피코에게 개를 붙였다는 것까지. 이 새로운 폭로에 대단한 저항은 없었다. 그 무렵엔 발레단의 누구나, 니콜레타의 남다른 설득력을 제 몸으로 겪어 본 뒤였으니까. 니콜레타가 실은 서커스단에서 도망친 최면술사였다는 설이 아주 인기를 끌었다. 그 애의 이야기에 그토록 홀딱 넘어갔다는 데 대해 극장 사람들 저마다가 느끼던 쓰라린 무안함을, 무디게 해 준 덕이다. 이 무안함이면 벌은 충분하다고, 더 문책할 일은 없으리라고 마스터들은 입을 모았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이제 일하기가 수월해졌다는 것. 두 마담이며 부하리나며, 소동을 일으킬 만한 사람이 다 없어진 덕이다. 이 또한 모두의 중론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소냐』로 말하자면, 주역이 사라진 뒤 (극장 금고를 털어 외국으로 내뺐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며칠 막을 내렸다. 다른 연출가였다면 공연을 통째로 접었을 것이다. 임프레사리오는 그러지 않았다. 극장가는 대중이 놀라게도, 그분은 하필 라브렌티를—니콜레타의 의상을 요란하게 흉내 낸 차림으로—주역에 앉혀 공연을 살려 냈다. 이 간단한 손질 하나로, 소냐를 둘러싼 발레는 무언극 소극으로 탈바꿈했다. 하기야 애초에 이 책이 요구한 것이 그런 대접이었는지도 모른다. 관객은 이 바뀐 꼴을 반겼고, 『소냐』는 재개막과 함께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니콜레타는 게시판 위 제 자리에서 새 공연평들을 읽으며 이 모든 소식을 따라잡았다. 그러면서도 임프레사리오를 깨운다는 생각만은 접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분껜 돌아가셔야 할 데가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니콜레타는 혼잣말을 했다.
처음엔 그분 눈에 자기가 안 보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내 눈에 들어왔다. 『소냐』의 옛 시나리오 뭉치를 넘기다, 저를 마주 보는 니콜레타를 발견하고 그분이 움찔하는 것이. 낡은 신문 더미를 지나칠 때 일부러 반대편을 보는 것이. 니콜레타가 흥얼거리는 소리에 방을 나가 버리는 것이. 그래서 니콜레타는 그분의 눈길을 끌어 보기 시작했다. 그분이 낡은 신문들을 태우고, 부속학교 건물에 남은 게시물을 죄다 뜯어 내리고 하신 것이 그때부터다.
그분은 이제 니콜레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 놔두게. 나를 놔줘.” 할 때만 빼고.
그러나 그것만은 들어드릴 수 없었다. “일어나세요.” 니콜레타는 말했고, 그분이 고개만 저어도 말하고 또 말했다.
이윽고 니콜레타에게 남은 거처라곤 두 군데뿐이 되었다. 제 배경막—어쩌다 한 번씩만 천장에서 내려오는 데다, 임프레사리오가 도무지 잘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과, 1학년 기숙사 방의 벽화. “나도 저걸 올려다보면서 잠들었었는데.” 니콜레타는 떠올렸다. 라브렌티는 니콜레타를 마담 울리야노바와 고인이 된 펠리차 제르진스카야 사이, 제일 좋은 자리에 그려 넣어 주었다. 니콜레타는 거기서 몇 달을 손 타지 않은 채 지냈다. 조그만 이층 침대들이 놓인 막내들 방은 방학 동안 비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마침내 새 학기가 왔다. 어느 날 임프레사리오가 페인트 통과 사다리를 들고, 새 기숙사생 맞을 방을 채비하러 뻣뻣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라브렌티가 아니라 선생님이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니콜레타가 그분께 말했다. 그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붓에 페인트를 찍어, 맨 끝의 부하리나부터 벽화를 덮어 가기 시작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하기야 누구 하나만 벽에 홀로 남겨 두는 것도 말이 안 되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마드무아젤 코스트리코바 앞에서는, 붓을 든 손이 머뭇하는 것이 보였다. 반대로 마담 울리야노바를 민숭민숭한 회벽으로 돌려놓을 때는, 어딘가 고소해하는 기색마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분과 말이 통하려나.” 니콜레타는 궁금해했다. “나는 저들 소리를 못 듣지만. 하긴 마담 울리야노바의 훈수를 여태 내내 듣고 계셨는지도 모르지. 진작 덮어 버리지 않으신 게 용하네.”
마침내 그분은 벽화의 니콜레타 쪽 끝에 이르러, 타를라탄 치맛단부터 위로 칠해 올라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묘한 기분이긴 하네.”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이렇게 사라진다는 건. 화형이랑 비슷한데, 그 절반만큼도 고약하진 않달까.” 붓질이 찰싹찰싹 핥아 오는 그 느낌이 불길을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아니, 조금씩 잡아먹히는 쪽에 더 가까운지도 몰랐다. 백 번의 조그만 이빨질로. “다만, 아프지가 않네.” 그래도 임프레사리오의 붓이 보디스를, 이어 활짝 벌린 두 팔을 (라브렌티가 니콜레타를 레베랑스로 무릎 굽힌 모습으로 그려 두었던 것이다) 슥슥 지워 갈 때, 니콜레타는 붓털 밑에서 몸이 조금 뒤틀리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분을 뵙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겠지.” 니콜레타는 생각했다.
일하시는 임프레사리오의 이마에 땀이 방울지는 것이 보였다. 머리카락과 귀를 지우려 바짝 다가오셨을 때는 어쩐지 낯이 간지러웠다. 벽화 속 제 모습이 예쁘다는 것은 알았지만, 혀는 부어오른 듯했고 목은 죽음처럼 뻣뻣했다. 그래도, 내 붓이 그 입에 닿기 직전, 그 애는 가까스로 내뱉었다. “코바.” 어느 꿈속의 꿈에서 건져 올린 이름이었다. “일어나요, 코바.” 그 애가 말했다.
“예제비치카.” 나는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고 나니 그 애에게 남은 것은 두 눈뿐이었다. 그 눈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그 애는 제 임프레사리오의 콧수염을, 그 콧수염 밑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미소를, 미소 짓는 두 눈을 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작가 주
부록: 등장인물 대조표 (엮은이)
작가가 밝힌 대응
작가 주가 없어 엮은이가 추정한 인물
| 작중 이름 | 추정 실존 인물 | 추정 근거 |
|---|---|---|
| 무슈 투하쳅스키 /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지휘자) | 미하일 투하쳅스키 | 성이 그대로이고, 바이올린 취미가 실제와 같다 |
| 마드무아젤 루주타카 | 얀 루주타크 | 성의 여성형 |
| G. S. 류시코바 (극장을 탈주한 무용수) | 겐리흐 류시코프 | 성과 이니셜. 류시코프의 일본 망명을 본뜬 대목 |
| 마드무아젤 로코솝스카야 (바이올린 주자) |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성의 여성형 |
| 아벨 (그루지야인 요리사) | 아벨 예누키제 | 이름과 그루지야 출신이 같다 |
| 무슈 아그라노프·슬루츠키·세레브랸스키 (무대 일꾼들) | 야코프 아그라노프, 아브람 슬루츠키, 야코프 세레브랸스키 | 성이 그대로 (전원 NKVD 간부) |
| 마드무아젤 불가니나 | 니콜라이 불가닌 | 성의 여성형 |
| 마드무아젤 안드레예바 | 안드레이 안드레예프 | 성의 여성형 |
| 펠리차 제르진스카야 (벽화 속 고인) | 펠릭스 제르진스키 | 성의 여성형 |
| 임프레사리오의 죽은 아내 |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 젊은 나이의 급사 설정이 같다 |
| 예브게니 (평론가) | 예브게니야 예조바 | 예조프의 아내. 문예지 편집자였던 이력이 신문 칼럼을 가진 평론가 설정과 맞고, 성별 반전이 다른 인물들과 반대 방향이다 |
| 마드무아젤 페트로바 | 미상 | 작가도 밝히지 않았다 |
8장 끝에 나오는 「코바」는 스탈린이 혁명가 시절부터 쓴 실제 별명이고, 「예제비치카」(블랙베리라는 뜻)는 스탈린이 실제로 예조프를 부르던 애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