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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르 쿠즈미치 리가초프

Егор Кузьмич Лигачё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0–2021 ↓ 실각 1990

페레스트로이카 안의 보수적 제2서기

1990년 2월 6일 전원회의에서 사퇴 압박을 받은 리가초프는 '지독하게도 일하고 싶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가 며칠 후 정치국에서 밀려난 것은 아니다. 서기직과 정치국 자리를 잃은 것은 1990년 7월 제28차 당대회에서였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톰스크주 제1서기로 17년간 재임하며 석유·가스 채굴을 키우고 스트레제보이와 케드로비 신도시를 세웠다. 1979년 오비강이 콜파셰보 야르에서 대숙청 희생자 집단매장지를 드러내자 주 당국은 유골과 흔적을 없애려 했고, 그는 관여를 부인했다. 1983년 4월 안드로포프의 발탁으로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이 되었고, 그해 12월 서기, 1985년 4월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1985~1988년 사실상 제2인자로서 개혁 초기를 뒷받침하고 반알코올 캠페인을 이끌었으며, 훗날 그 전략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했다. 1990년 7월 중앙위 서기직과 정치국 자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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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1985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 1985–1990제2서기, 페레스트로이카 내부 보수파
  • 1990제28차 당대회에서 실각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 로마노프

Григорий Васильевич Роман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2008 ↓ 강제은퇴 1985

레닌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마지막 한 걸음에서 멈춘 후계자

«아무도 고르바초프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다음 날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모든 일을 끝내 놓았다. 정치국 규칙이 요구하는 대로 우리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토록 빨랐다! 이미 그들 모두와 비밀리에 거래를 마친 것이다.» — 1985년 3월 체르넨코 사후 승계 과정을 회고하며.

레닌그라드 조선기술자 출신으로, 1970년부터 13년간 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를 지내며 대규모 주택 건설, 지하철 확장, 레닌그라드 원전 및 방조제 착공 등 도시 기반을 재편했다. 군수공업을 관장하는 중앙위 서기와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고, 브레즈네프와 안드로포프 모두 그를 차기 서기장 후보로 주목했다. 1985년 체르넨코 사후 고르바초프와의 승계 경쟁에서 밀려난 것은 소련 말기 역사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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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통신병으로 레닌그라드·발트 전선 복무, 부상
  • 1946–1954조선소 설계기사 → 당위 비서·파르토르그
  • 1957–1961레닌그라드 키로프 구 당 제1서기
  • 1963–1970레닌그라드 주 당 제2서기
  • 1970–1983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
  • 1973–1976정치국 후보위원
  • 1976–1985정치국 정위원
  • 1983–1985중앙위 서기, 군수공업 담당

발렌틴 이바노비치 바렌니코프

Валентин Иванович Варен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1923–1991), 1991년 이후 러시아 러시아 1923–2009 ○ 모스크바에서 병사

승전기를 받아든 장군, 쿠데타 법정에 홀로 선 장군

1945년 6월, 근위대장이던 바렌니코프 대위는 모스크바 중앙비행장에 도착한 승전기를 직접 건네받았고, 몇 시간 뒤 그 깃발은 붉은광장 승전 퍼레이드의 선두에 섰다.

소련과 러시아의 육군 대장으로, 조국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참전자다. 1945년 근위대장으로서 승전기를 받았고, 1984년부터 1989년까지 국방부 관리단을 이끌며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했다.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는 철군이 아니라 1988년 작전 마기스트랄 지휘의 공로로 받은 것이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위원은 아니었으나 1991년 8월 쿠데타를 군부 대표로서 지지했고, 1994년 사면을 거부한 유일한 피고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는 이유로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과 1991년 1월 빌뉴스 사태에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다. 1995년부터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고 이후 국방부 감찰관이 되었다. 2009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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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아르마비르 군사위원회를 통해 붉은 군대에 징집, 체르카스크 보병학교 입교 (스베르들롭스크로 이전)
  • 1942–1945제138소총사단으로 스탈린그라드 전선 참전, 이후 제35근위소총사단; 드네프르 도하·바그라티온·베를린 작전, 3회 부상, 대위로 종전
  • 195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67참모본부 아카데미를 금메달로 졸업, 제26군단장 (1967–1969)
  • 1969–1971주독 소련군 제3충격군 사령관
  • 1971–1973주독 소련군 제1부총사령관
  • 1973–1979카르파티아 군관구 사령관
  • 1979–1984참모본부 작전총국장 겸 제1부참모총장, 이 직위에서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을 내렸다
  • 1984–1989국방부 관리단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되어 장관 개인 대표를 맡았으며, 유엔 선의사무소와 1988–1989년 철군을 협의했다
  • 1986체르노빌 사고 수습 군사작전 지휘
  • 1989–1991국방차관 겸 지상군 총사령관, 1991년 1월 빌뉴스 사태에 참여
  • 19918월 18일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군부 대표로서 GKChP를 지지, 8월 23일 체포
  • 1994GKChP 피고인 가운데 유일하게 사면을 거부, 8월 11일 러시아 대법원 군사합의부에서 무죄 선고, 1995년 2월 3일 대법원 상임위가 무죄를 확정
  • 1995–2003국가두마 의원 (KPRF, 1996–1999년 참전용사위원회 위원장, 2003년 로디나 블록 합류)
  • 2000년대참전용사 담당 국방부 감찰관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루키야노프

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Лукья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30–2019 ↓ 자연사

고르바초프의 동창에서 비판자로: 소련 의회의 마지막 의장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내가 제5차 인민대표대회를 주재하면, 의원들이 8월 민주주의 승리의 모든 성과를 무효화할까 봐 두려워했다.” — 체포 이유에 대한 루키야노프의 설명.

아나톨리 루키야노프는 소비에트 체제의 헌법적 틀을 설계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한 법률가이자 정치가였다. 고르바초프의 대학 동기로 1977년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당 중앙위 총무부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쳐 최고소비에트 의장(1990–1991)에 올랐다. 초기 개혁을 지지했으나 연방 해체를 우려하며 보수파로 돌아섰고, 1991년 8월 쿠데타 동조 혐의로 체포되어 15개월 수감되었다. 석방 후 주가노프와 함께 러시아연방 공산당을 창당했고 2003년까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다. 법학 박사이자 '아나톨리 오세네프'라는 필명으로 시를 쓴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소비에트 제도에 끝까지 충성한 마지막 지식인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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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1961소련 각료회의 법률위원회 수석 컨설턴트
  • 1961–1976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선임 레페렌트, 부서 부장
  • 1977–1983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사무국장
  • 1983–1985CPSU 중앙위 총무부 제1부부장
  • 1985–1987CPSU 중앙위 총무부장
  • 1987–1988CPSU 중앙위 서기 (법률·행정 담당)
  • 1988–1990CPSU 정치국 후보위원
  • 1990–1991소련 최고소비에트 의장
  • 1993–2003러시아연방 국가두마 의원 (CPRF)

리차르트 이바노비치 코솔라포프

Ричард Иванович Косолап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0–2020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발전된 사회주의' 교리의 주요 설계자

1986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당신이 시작한 뻬레스트로이까는 필연적 실패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며칠 후 그는 《꼼무니스트》 편집장에서 해임되었다.

소련의 사회철학자이자 이론가로, 1976년부터 1986년까지 CPSU의 핵심 이론지 《꼼무니스트》의 편집장을 지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공식 이념인 '발전된 사회주의' 개념을 체계화한 주역으로, 소련이 사회주의의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으며 공산주의로의 급속한 이행보다는 장기적 공고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정립했다. 그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은 아나톨리 부텐코, 알렉산드르 찌쁘꼬 등 개혁 성향 이론가들과 충돌했고, 고르바초프가 뻬레스트로이까를 개시하자 가장 먼저 숙청 대상이 되었다. 1986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개혁의 실패를 예측하는 편지를 보낸 직후 《꼼무니스트》 편집장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모스크바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이어가며 스탈린 전집의 속간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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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철학과 졸업
  • 1955–1958브랸스크주 콤소몰 위원회
  • 1958–1959아르마비르 사범대학 강사
  • 1961–1964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철학과 강사
  • 1966–1974CPSU 중앙위 선전선동부 컨설턴트 → 부장
  • 1974–1976《쁘라우다》 제1부편집장
  • 1976–1986《꼼무니스트》 편집장
  • 1976–1986CPSU 중앙위원회 정위원
  • 1979–1987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타지크 SSR)
  • 1986–201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교수 · 주임연구원

게르만 스테파노비치 티토프

Герман Степанович Тит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35–2000 ○ 심장마비

우주에 오른 두 번째 인간이자 군사우주체계 건설자

우주에서 첫 잠을 청하며 그는 교신했다. "팔과 다리만 잘 정리하면 우주 수면은 훌륭하다… 아기처럼 잤다."

소련의 우주비행사이자 군사우주 지휘관. 1961년 8월 6일 보스토크 2호를 타고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지구 궤도를 비행했으며, 17바퀴·25시간의 첫 장기 체류로 인간이 우주에서 먹고 자고 일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25세의 최연소 궤도비행사 기록은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았다. 우주에서 최초로 수동 조종과 영화 촬영을 수행했으며, 최초로 우주멀미를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비행 후 스피랄 우주왕복선 계획의 조종사 훈련을 이끌었고, 197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국방부 우주수단총국(ГУКОС/УНКС)의 제1부국장으로서 군사우주체계 시험·개발을 총괄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연방공산당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1993~2000)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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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스탈린그라드 군사항공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
  • 1960제1차 우주비행사대 선발
  • 1961.04보스토크 1호 백업 조종사 (유리 가가린)
  • 1961.08보스토크 2호 탑승 — 17회 지구 궤도, 25시간 18분
  • 1965–1968스피랄 우주왕복선 조종사 훈련대장
  • 1968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졸업
  • 1972참모본부 군사아카데미 졸업, 우주지휘통제 부대 부사령관
  • 1973–1979ГУКОС 연구·개발 담당 부국장
  • 1979–1991국방부 우주수단총국(УНКС) 제1부국장, 중장 → 상장
  • 1993–2000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공산당)

율리 알렉산드로비치 크비친스키

Ю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вицинский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6–2010 ○ 암

그로미코의 후계 외교관, '숲속 산책'으로 기억된 군축 협상가

1982년 7월 16일, 크비친스키는 제네바 외곽 숲에서 미국 협상가 폴 니츠와 단둘이 거닐며 중거리핵 감축 타협안을 모색했다. 양국 정부가 거부했지만, 이 대화는 리 블레싱의 브로드웨이 연극 『숲속 산책』으로 되살아났다.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키운 소련의 독일 전문 외교관으로, 30년 넘게 대서방 외교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1981년 제네바 중거리핵전력(INF) 협상 소련 수석대표로서, 1982년 7월 미국 측 폴 니츠와의 비공식 '숲속 산책' 회담은 냉전 군축사의 상징이자 후일 브로드웨이 연극의 소재가 되었다. 1986~1990년 주서독 대사로 독일 통일 '2+4 조약' 준비에 참여했고, 1991년 소련 외무부 제1차관으로 유럽 안보를 총괄했다. 소련 붕괴 후 1997년 주노르웨이 대사로 복귀, 2003년부터 사망 시까지 공산당 소속 국가두마 의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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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5주동독 소련대사관 통역·무관·3등서기관·2등서기관
  • 1965–1978소련 외무부 제3유럽국 2등서기관·1등서기관·전문고문·부국장
  • 1978–1981주서독 소련대사관 공사참사관
  • 1981–1986소련 외무부 특명전권대사·제네바 핵군축 협상 소련 대표단 단장
  • 1986–1990주서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CPSU 중앙위원회 위원후보(1986~89)·위원(1989~90)
  • 1990–1991소련 외무부 차관
  • 1991소련 외무부 제1차관 (5월–9월)
  • 1997–2003주노르웨이 러시아 특명전권대사
  • 2003–2010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제4·5대), 국제문제위원회 제1부위원장

발렌틴 알렉산드로비치 쿱초프

Валенти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упц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37–

러시아 공화당을 재건한 마지막 세대 서기

1991년 10월 25일, 당 활동 정지 일주일 후 쿱초프는 크렘린에서 옐친을 만나 러시아 공산당 금지령을 철회해 달라고 설득했다. 옐친은 듣지 않았고, 쿱초프는 이후 1년 반 동안 '지하 제1서기'로서 당을 복원대회까지 이끌었다.

볼로그다주 집단농장과 제철소를 거쳐 올라온 금속공학자 출신 당 간부로, 1985년부터 5년간 볼로그다주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90년 CPSU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어 사회정치조직 담당 부서를 이끌었고, 러시아 공화국 공산당(КП РСФСР) 창립 작업에 참여했다. 1991년 8월 이반 폴로스코프의 후임으로 КП РСФСР 제1서기에 선출되었으나, GKChP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음에도 사건 직후 '쿠데타 공모'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옐친의 당 활동 금지령 이후에도 지하에서 조직을 유지하며 1993년 КПРФ 복원대회를 주도했고, 이후 11년간 쥬가노프의 제1부의장으로서 신생 러시아 공산당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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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58볼로그다주 콜호스 노동자 · 독서실장 · 군 복무
  • 1958–1974체레포베츠 제철소 압연공 · 현장감독 · 당위원회 서기
  • 1974–1979체레포베츠 시당 제1서기
  • 1979–1984볼로그다 시당 제1서기
  • 1984–1985볼로그다 주당 제2서기
  • 1985–1990볼로그다 주당 제1서기
  • 1989–1991소련 인민대의원
  • 1990–1991CPSU 중앙위 서기 · 사회정치조직 담당
  • 1991.08–11КП РСФСР 중앙위 제1서기
  • 1993–2004КПРФ 중앙위 제1부의장
  • 1995–2011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II–V 소집)

올레크 세묘노비치 셰닌

Олег Семёнович Шени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09 ○ 자연사

소련을 지키려다 감옥으로 간 마지막 정치국원

패배 직후 셰닌에게 돌려진 말로, 언론 보도에 따르면 GKChP 위원들은 가장 큰 실수를 했다. 'A'라고 말하고서 'B'와 나머지 알파벳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1937년 스탈린그라드주에서 태어나 1958년 자기 공사현장에서 노동자 두 명이 숨진 안전규정 위반으로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9개월 반을 복역한 뒤 조기 석방되었다. 1962년 당에 입당해 아친스크 시당 제1서기(1974–1977), 아프가니스탄 당 고문(1977–1983),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 제1서기(1987–1990)를 지냈다. 1990년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으로 당 조직·인사 업무를 총괄해 고르바초프와 이바시코에 이은 당내 3인자로 불렸고, 1991년 8월 18일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 GKChP를 지지했다가 8월 23일 체포되었다. 1992년 10월 건강을 이유로 석방되고 1994년 2월 사면되었으며, 2009년 5월 28일 71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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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CPSU 입당
  • 1974–1977아친스크 시당 제1서기
  • 1977–1983하카스 주당 제2서기 → 아프가니스탄 당 고문
  • 1985–1987하카스 주당 제1서기
  • 1987–1990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 제1서기
  • 1990–1991CPSU 정치국원·중앙위 서기 (조직당사업)
  • 1993–2001СКП-КПСС 평의회 의장
  • 2004–2009재건 КПСС 의장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구벤코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Губенко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41–2020 ○ 자연사

소련의 마지막 문화장관

히틀러 역을 맡은 졸업 공연에서, 구벤코는 부모를 죽인 자를 향한 모든 증오를 배역에 쏟아부었다. 공연을 본 류비모프는 곧바로 그를 타간카 극장으로 영입했다.

전쟁 고아에서 인민예술가로 성장한 배우·영화감독. 루나차르스키 이래 처음으로 현역 예술인이 소련 문화장관(1989–1991)에 오른 인물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좌파 정치인으로 전향하여 국가두마 문화위원장과 모스크바 시의회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문화유산 수호에 앞장섰다. 타간카 극장 분열 후에는 「타간카 배우 동지회」를 창설해 2020년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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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1991문화장관

미하일 세묘노비치 수르코프

Михаил Семёнович Сур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45–

군 당조직에서 말기 정치국으로 이동한 간부

1991년 4월, 전군 당위원회 책임서기였던 그는 소련 말기 정치국의 일원이 되었다.

미하일 세묘노비치 수르코프는 소련군 정치기구에서 경력을 쌓은 당 조직가이자 정치가였다. 군 내부의 당 통제 업무를 맡던 그는 소련 해체 직전 정치국에 들어가 말기 체제의 긴장을 드러냈다. 이후 러시아 공산당과 국가두마, 회계원에서 활동하며 소비에트 당 간부의 경력을 러시아의 공산주의 정치와 국가감사 제도로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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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금속공 견습공으로 노동 시작
  • 1965–1977소련군 복무, 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졸업
  • 1988–1990제병연합군 정치부장
  • 1990–1991전군 당위원회 서기, 중앙정치총국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정치국원
  • 1995–1999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공산당 의원단 국방위 부위원장
  • 2000–2007러시아 회계원 감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