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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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국가기관 인물 8명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Vittorio Emanuele III

파시즘과 왕정의 책임 사이에 선 군주

1943년 7월 25일, 그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체포하게 한 뒤 바돌리오를 새 정부 수반으로 임명했다.

이탈리아 국왕으로서 자유주의 헌정의 쇠퇴, 파시스트 국가의 성립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그는 무솔리니의 권력 장악과 식민 전쟁, 인종법, 참전을 승인해 왕정의 책임을 키웠지만, 1943년 7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임명해 체제 전환의 헌정 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9월 휴전 뒤 로마를 떠난 그의 선택은 군과 국가를 혼란에 빠뜨렸고, 전후 왕정의 정당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1946년 퇴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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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이탈리아 육군 장교로 복무 시작
  • 1900이탈리아 국왕 즉위
  • 1915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국왕
  • 1922무솔리니에게 정부 구성을 위임
  • 1936에티오피아 황제 선포
  • 1940추축국 편으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 1943무솔리니 해임, 바돌리오 정부 임명
  • 1946퇴위하고 이집트로 망명

피에트로 바돌리오

Pietro Badoglio

파시즘에 봉사하다 전환을 이끈 원수

1943년 9월 8일 휴전이 발표됐을 때, 바돌리오 정부는 로마를 떠나 연합군의 보호를 찾아 남쪽으로 향했다.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이탈리아 왕국의 군인이자 식민지 전쟁의 지휘관으로,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에서 제국의 폭력을 집행했다. 그는 무솔리니 체제의 핵심 군사 관료였지만, 1940년 그리스 전역의 실패 뒤 사임하고 왕실의 정권 교체에 참여했다. 1943년 무솔리니 축출 뒤 총리가 되어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체결했으나, 발표와 군 지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독일군의 무장해제와 이탈리아 국가의 붕괴를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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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이탈리아 왕립군 포병 장교로 임관
  • 1916제1차 세계대전에서 몬테 사보티노 점령을 지휘
  • 1925–1940이탈리아군 참모총장
  • 1929–1933리비아 총독, 저항 진압과 강제수용 정책을 지휘
  • 1935–1936에티오피아 침공군 사령관, 아디스아바바 점령
  • 1943–1944무솔리니 축출 뒤 이탈리아 왕국 총리, 연합국과 휴전 체결
  • 1944총리직 사임 후 정계에서 물러남

이반오에 보노미

Ivanoe Bonomi

파시즘과 왕정 사이에서 타협을 조직한 개혁 정치가

1943년 6월 그는 국왕에게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바돌리오를 임명하며 독일과의 동맹을 끊으라고 비밀리에 요구했다.

이반오에 보노미는 사회주의 개혁파에서 출발해 이탈리아 자유주의 의회정치의 핵심 인물로 이동한 정치가였다. 파시즘의 부상기에 충분히 단호하게 저항하지 못했고 무솔리니 정부를 지지한 전력이 있었지만, 1942년부터 반파시스트 세력을 다시 연결하며 정권 교체를 모색했다. 그는 1943년 국왕에게 무솔리니 해임과 피에트로 바돌리오 기용을 비밀리에 요구했고, 9월에는 6개 정당으로 구성된 민족해방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이후 왕정과 저항운동, 연합국 사이의 타협을 이끌며 전후 이탈리아의 제도적 이행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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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이탈리아 사회주의 노동자당에 가입
  • 1909사회주의자로 하원의원에 당선
  • 1912이탈리아 개혁사회당 창당에 참여
  • 1916–1919보셀리·올란도 내각 공공사업장관
  • 1921–1922이탈리아 왕국 총리
  • 1942–1943지하 반파시스트 신문과 야권 연락망 조직
  • 1943–1944민족해방위원회 의장
  • 1944–1945해방기 이탈리아 정부 총리
  • 1948–1951공화국 초대 상원의장

비토리오 암브로시오

Vittorio Ambrosio

왕권 아래에서 추축동맹의 출구를 설계한 장군

“추축국은 포위된 고리 안에 있다. 빠져나와야 한다.”

비토리오 암브로시오는 이탈리아 왕국의 기병 장교 출신 장군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이탈리아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1943년 이탈리아군 최고사령관이 된 그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의 패배 뒤 독일과의 동맹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왕과 군부를 중심으로 무솔리니의 실각과 연합국과의 휴전을 추진했다. 그의 선택은 파시즘을 넘어선 민주적 단절이라기보다 왕정과 군 지휘부가 국가의 전쟁 이탈을 관리하려 한 것이었으며, 9월 휴전은 독일군의 이탈리아 점령과 이탈리아군의 혼란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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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기병 장교로 임관
  • 1911–1913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참전
  • 1915–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카포레토 후퇴 엄호
  • 1941제2군 사령관, 유고슬라비아 침공 지휘
  • 1942육군 참모총장
  • 1943-02–1943-11군 최고참모총장, 무솔리니 실각과 연합국 휴전 추진
  • 1943-11육군 감찰총감으로 좌천

주세페 카스텔라노

Giuseppe Castellano

불완전한 전환을 서명한 장군

1943년 9월 3일 카시빌레의 올리브나무 아래에서 그는 이탈리아를 대표해 휴전 문서에 서명했다.

주세페 카스텔라노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이탈리아 왕국군의 참모 장교로 활동한 장군이었다. 1943년 무솔리니 축출 과정에 관여한 그는 바돌리오 정부의 특사로 연합군과 휴전 조건을 협상했다. 카시빌레 휴전은 이탈리아의 대독 전쟁을 끝냈지만, 비밀 협상과 지휘부의 혼선 속에 체결되어 군대에 명확한 명령을 남기지 못했다. 전후 그는 시칠리아 군사 지휘관을 거쳐 회고록으로 자신의 역할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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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8제1차 세계대전, 포병 대위
  • 1941–1942유고슬라비아 전역, 준장 승진
  • 1942육군 참모총장실, 비토리오 암브로시오의 보좌 장군
  • 1943최고사령부, 작전·계획 부문 책임자
  • 1943.07무솔리니 체포 계획에 관여
  • 1943.08–09바돌리오 정부 특사, 연합군과 휴전 협상 및 서명
  • 1944.10–1946.06시칠리아 아오스타 국내치안사단 지휘관
  • 1947육군 퇴역

디노 그란디

Dino Grandi

무솔리니를 무너뜨린 파시스트 정권의 실력자

1943년 7월 25일 새벽, 그란디 결의안은 19 대 8로 통과되어 무솔리니의 권력 기반을 무너뜨렸다.

디노 그란디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운동의 지도자이자 외교관으로, 정권의 핵심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외무장관과 런던 대사를 지내며 전쟁 확대에 신중한 외교 노선을 추구했지만 파시스트 국가의 제도와 정책을 집행한 책임도 지녔다. 1943년 7월 시칠리아 침공 뒤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국왕에게 헌정상 군 통수권을 돌려주자는 결의안을 작성하고 표결을 조직해 베니토 무솔리니의 축출을 이끌었다. 이후 망명했고,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법정에서 궐석 사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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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제1차 세계대전 참전, 법학·경제학 공부와 변호사 개업
  • 1920–1922볼로냐 파시스트 전투단 지도자, 국가파시스트당 지도부
  • 1924–1929내무·외무 차관
  • 1929–1932이탈리아 외무장관
  • 1932–1939영국 주재 이탈리아 대사
  • 1939–1943법무장관, 파시스·코포라치오니 회의 의장
  • 1943파시스트 대평의회 결의안 작성과 표결 조직, 무솔리니 축출
  • 1944이탈리아 사회공화국 재판에서 궐석 사형 선고

갈레아초 치아노

Galeazzo Ciano

파시즘의 외교관이자 내부 붕괴의 증인

1943년 7월 25일, 치아노는 장인 무솔리니의 축출을 뜻하는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갈레아초 치아노는 무솔리니의 사위이자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핵심 외교관으로, 정권의 팽창과 독일 의존을 추진하면서도 전쟁의 파국이 다가오자 그 노선에서 이탈했다. 그는 에티오피아 전쟁과 알바니아 침공, 그리스 공격을 지지했으며 외무장관 재임 중 외교 기록과 일기를 남겼다. 1943년 7월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디노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해 무솔리니 축출에 가담했지만, 자신의 특권적 지위가 보존될 것이라는 계산은 빗나갔다. 독일로 달아났다가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에 넘겨진 그는 베로나 재판 뒤 처형되었고, 그의 일기는 파시즘 내부의 책임과 붕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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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법학 학위 취득 뒤 외교관으로 전환
  • 1935–1936언론·선전 장관, 에티오피아 전쟁에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
  • 1936–1943이탈리아 왕국 외무장관
  • 1939독일과의 강철 조약 체결에 참여
  • 1943.02–07바티칸 주재 대사
  • 1943.07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
  • 1944.01베로나 재판 뒤 총살

코민포름 창립 회의의 이탈리아 대표로, 스탈린의 전화선을 목격한 공산주의자에서 반공 비판자로 전향한 인물

“스탈린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회의의 절대적 지배자였다. 토론 중에 우리가 이 사실을 의식하게 된 것은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성과 크렘린 사이에 직통 전화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66년 회고록)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로, 전후 연립정부에서 외무차관을 지냈고 폴란드 대사를 역임했다. 1947년 코민포름을 창립한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석했으며, 1966년 회고록은 크렘린으로 직통된 스탈린의 전화선과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한 즈다노프의 사전 계획된 공격을 포함한 회의의 가장 상세한 목격 증언이 되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계기로 이탈리아 공산당과 결별했고, 이후 반공 비판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통신』을 창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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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이탈리아 공산당(PCI) 입당
  • 1932파시스트 특별재판소에서 10년형 선고
  • 1937–1939파리에서 『라 보체 델리 이탈리아니』 편집자
  • 1944–1947보노미, 파리, 데 가스페리 내각에서 외무차관
  • 1945–1947주폴란드 이탈리아 대사
  • 1947.09코민포름 창립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회의 이탈리아 대표
  • 1948–1953이탈리아 공화국 상원의원
  • 1957PCI에서 제명; 『사회주의 통신』 공동 창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