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9월 23일 총리 체렌도르지가 의장을 맡은 헌법 기초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같은 해 11월 26일 첫 대후랄이 6장 50조의 헌법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헌법은 몽골 최초로 공화정을 규정했다.
1868년 헤를렌 바얀울란에서 제브춘담바 후툭투의 대샤비 속민으로 태어났다. 몽골어·만주어·중국어·러시아어를 익혀 1885~1911년 허레 만주 행정청의 서기와 통역관으로 일했고, 1911년 독립 후 외무부에 들어가 1913~1915년 차관, 1915~1919년 수석장관을 지냈다. 1919년 중국 점령기에 자치 철회 문서에 서명했고, 1921년 혁명 후 인민정부의 외무차관이 되었다. 1923년 총리로 임명되어 1924년 헌법 기초위원회를 이끌고 인민공화국 초대 총리가 되었다. 1926년 이후 소련의 통제가 강화되자 사유재산 폐지와 불교 탄압에 저항했으며, 1928년 재임 중 병사했다. 사망일은 2월 13일설과 11월 13일설이 있다.
티베트 라싸 출신의 제8대 젭춘담바 쿠툭투로, 달라이 라마·판첸 라마 다음가는 몽골 불교의 최고 환생 성직자였다. 1911년 청이 무너지자 몽골 귀족들이 그를 '보그드 칸'으로 즉위시켜 신정 국가를 세웠다. 1919년 중국이 자치를 폐지하며 권력을 잃었다가 1921년 인민혁명 뒤 제한군주로 복위했고, 1924년 5월 후두암으로 죽어 몽골의 군주제를 끝냈다. 17세기 말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외몽골의 대칸으로, 격동 속에서 종교적 카리스마로 몽골인들을 묶었다.
1924년 8월 제3차 당대회에서 좌파 지도자로서 담바도르지가 이끄는 우파와 함께 단잔을 '부르주아 이익 대표·미국·중국 회사와의 거래'로 고발했고, 단잔과 바바산 등은 대회가 계속되는 동안 24시간 안에 재판·사형·총살됐다.
자바이칼 부랴트 출신으로 1917년 4월 부랴트-몽골 중앙민족위원회(부르나츠콤) 초대 의장이 되어 부랴트 자치의 기초를 놓았고, 1920년 코민테른 극동서기국 몽골-티베트 부서 서기로 몽골 혁명가들과 협력했다. 1921년 혁명 뒤 1925년까지 몽골 혁명군사평의회 의장과 정부 고문, 몽골인민당 중앙위 상무위원, 대·소후랄 의원을 지냈으며, 1924년 헌법 초안 작성자 중 한 명이고 제3차 당대회에서 비자본주의 발전 노선을 정당화했으나 같은 대회에서 단잔 고발에 가담했다. 1937년 6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체포돼(수감 기록에는 7월 19일로 기재) 1938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선고일과 처형 시점·장소는 사료마다 엇갈린다. 1955년 재심이 개시돼 1957년 복권됐다.
상세 이력 보기
1917부랴트-몽골 중앙민족위원회(부르나츠콤) 초대 의장 선출
1918시베리아 임시정부 교육장관에 서면 선출
1920코민테른 극동서기국 몽골-티베트 부서 서기
1921–1925몽골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정부 고문·몽골인민당 중앙위 상무위원·대후랄 및 소후랄 의원
1924헌법 초안 작성 참여, 제3차 당대회에서 단잔 고발
1926–1930적색교수연구소 수학
1927–1934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KUTV)에서 연구·교육 활동, 1934년 11월부터 정치경제학 교수
1921년 2월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3월 캬흐타를 점령하고 7월 6일 후레에 입성했으며, 7월 11일 새 정부에서 군사부 장관이 됐다. 이 임명을 1922년 7월로 적는 몽골어권 기록도 있다.
몽골의 혁명가이자 몽골인민당 창립 성원이며, 1921년 혁명에서 인민유격대를 이끌어 후레(오늘날 울란바타르)에 입성했다. 가난한 아랫(평민) 출신으로 활자공과 역참 마부로 일했고, 1919년 후레의 반중국 지하조직에 참여했다. 1920년 소련 방문에 나섰고 1921년 캬흐타에서 총사령관으로 확정됐으며, 같은 해 7월 군사부 장관이 됐고 11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다. 사인은 확정되지 않았고, 사후 신격화 경위도 주요 논쟁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