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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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파벨 세묘노비치 리발코

Павел Семёнович Рыбал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4–1948 ○ 신장병

스탈린그라드에서 프라하까지, 3근위전차군을 이끈 두 번의 영웅

쿠르스크 전투 중, 리발코의 차량에 독일 공군이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운전병과 부관이 쓰러졌고 차는 구덩이에 빠졌지만, 리발코는 상처 하나 없이 일어나 다른 차로 갈아타고 작전을 계속했다.

평기병에서 출발해 제3근위전차군을 이끌고 쿠르스크에서 프라하까지 진격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 영웅.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에서 다섯 번 부상당했고, 전후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으로 재직 중 53세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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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러시아 제국군 82보병사단, 프셰미실 공방전·브루실로프 공세 참전, 부상
  • 1917–1922적위대·적군에서 파르티잔 지휘관, 연대장, 여단 정치위원으로 내전 종군, 다섯 차례 부상
  • 1931–193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이후 중국 신장에서 군사고문(1934–1935)
  • 1937–1939, 1940소련 주폴란드·주중국 무관
  • 1942–1943제5전차군·제3전차군 사령관, 오스트로고시스크-로소시 작전 성공, 중장 진급
  • 1943–1945제3근위전차군 사령관 — 쿠르스크, 드네프르, 키예프, 르보프,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 1943, 1945두 차례 소비에트연방 영웅 칭호 수여
  • 1947–1948소련군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

표도르 이바노비치 톨부힌

Фёдор Иванович Толбух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4–1949 ○ 당뇨

발칸을 해방하고 병사들의 생명을 가장 아낀 원수

「톨부힌 원수는 전쟁을 장인이 아닌 정밀과학으로 여겼다. 서구적 합리성과 동방적 직관을 결합해, 수가 아닌 기술로 승리했다.」 — 보리스 슬루츠키

농민 출신 장교로 스탈린그라드에서 57군을 지휘했고, 제3·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으로 발칸 해방을 이끌었다. 신중한 작전 설계로 병사 희생을 최소화했으며, 사후 소련영웅을 받은 유일한 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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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러시아 제국군 자원입대, 참모대위까지 진급, 성 안나·스타니슬라프 훈장
  • 1918–1922적군 입대, 제56소총사단 참모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크론슈타트 진압·카렐리아 전역
  • 1938–1941자캅카스 군관구 참모장, 이란 진주 작전 기획
  • 1942–1943제57군 사령관 — 스탈린그라드 방어·반격; 제68군 사령관
  • 1943–1944남부전선·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돈바스·멜리토폴·크림 해방
  • 1944–1945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야시-키시뇨프·베오그라드·부다페스트·발라톤·빈 작전, 원수 진급
  • 1945–1947남부군집단 총사령관 (루마니아·불가리아), 연합통제위원회 불가리아 의장
  • 1947–1949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막심 알렉세예비치 푸르카예프

Максим Алексеевич Пурка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러시아 1894–1953 ○ 자연사

목수 아들에서 대장으로, 만주 작전을 지휘한 모르드바인

1941년 11월 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접근하는 가운데 푸르카예프는 쿠이비셰프에서 열린 혁명기념일 군사 퍼레이드의 사령관을 맡았다. 외교단 앞에서 펼쳐진 이 퍼레이드는 소련이 아직 건재함을 연합국과 잠재적 적국 모두에 과시하는 무력 시위였다.

모르드바인 출신으로, 차르군 소위에서 붉은 군대의 대장까지 오른 소련의 군사 지휘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칼리닌 전선군 사령관으로 르제프 공방전을 지휘했으며, 1943년 극동전선군 사령관으로 전임되어 1945년 8월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제2극동전선군을 이끌었다. 이 작전은 소련이 참가한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주요 전역이었다. 전후 극동군관구 사령관을 지냈으나, 칼리닌 전선군 시절 보급 실패로 병사들이 아사한 책임을 물어 해임된 이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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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러시아 제국군 자원입대, 사라토프 준사관학교 졸업
  • 1918붉은 군대 입대, 중대장 · 대대장
  • 1936제1차량화소총사단장
  • 1938–1939벨라루스 군관구 참모장
  • 1939–1940소련 주재 독일 무관
  • 1940–1941키예프 특별군관구 참모장 → 남서전선군 참모장
  • 1941–1942제60군 · 제3충격군 사령관
  • 1942–1943칼리닌 전선군 사령관
  • 1943–1945극동전선군 → 제2극동전선군 사령관, 만주 작전 지휘
  • 1945–1947극동군관구 사령관
  • 1947–1952극동군 총참모장 · 제1부사령관

샬바 오타로비치 체레텔리

Шалва Отарович Церетели

제정군 장교에서 베리야의 비공식 집행자가 된 국가보안 장교

1939년 7월 8일 모스크바에서 츠할투보로 가는 NKVD 특별열차 안에서 주중 전권대표 보프쿤-루가네츠 부부가 살해되고 교통사고로 위장되었으며, 1953년 심문에서 타격의 책임은 진술마다 엇갈렸다.

그루지야 사치헤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정군 장교와 포로 생활을 거쳐 1921년 그루지야 노동농민 민병대에 들어갔고, 1922년 베리야의 추천으로 GPU로 옮겼다. 베리야가 1938년 말 그를 중앙 NKVD 3국 특수부 부책임자로 모스크바에 데려가자, 그는 납치와 은밀한 암살을 전담하는 베리야의 개인 공작원이 되었다. 1937년 8월부터 1938년 7월까지 그루지야 NKVD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의 대량 처형 결정에 참여했고, 1941년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제1부위원, 이후 공화국 내무부 차관 겸 국경경비대 관리국장, 중장을 지냈다. 1953년 9월 트빌리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1월 15일 총살됐으며, 아직 명예회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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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제정 러시아군 소위, 포로
  • 1937–1938그루지야 민병대 책임자, NKVD 특별 트로이카 위원
  • 1939–1941자캅카스 국경경비대 관리국장
  • 1941–1946그루지야 제1부내무인민위원
  • 1946–1953그루지야 부국가보안장관, 국경경비대 지휘 겸임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세묜 일리치 보그다노프

Семён Ильич Богдан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1894–1960 ○ 뇌졸중

베를린에 가장 먼저 진입한 기갑군 사령관, 스탈린 사후 밀려나다

「소비에트 국가의 적들과 싸운 전선에서 내 아들과 세 형제, 누이가 죽었다」 — 1956년 강제 퇴역을 앞두고 올린 사직 청원에서

소련 기갑군 최고의 실전 지휘관 중 한 명.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을 거쳐 붉은 군대에 몸담았고, 1938년 체포·수감되었다가 1939년 복권되었다. 대조국전쟁에서 제2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코르순-셰우첸콥스키, 우만-보토샤니, 루블린-브레스트, 비스와-오데르, 동포메라니아, 베를린 공세 등 결정적 전역을 지휘했으며, 그의 부대는 1945년 4월 베를린 시내에 가장 먼저 돌입한 소련군이었다. 전후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1948~1953)으로 소련 전차 병과 전체를 이끌었으나,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에 의해 좌천되어 1956년 건강 악화로 퇴역했다.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와 기갑군 원수 계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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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8러시아 제국군에 자원입대, 소위까지 진급
  • 1918–1930붉은 군대 소대장·중대장·대대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및 탐보프 반란 진압 참전
  • 1930–1938연대장·기계화여단장, 1938년 체포·수감
  • 1940–1943복권 후 전차사단장·기계화군단장,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전투 참전
  • 1943–1947제2(근위)전차군 사령관, 베를린 최초 진입 부대 지휘
  • 1948–1953소비에트군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
  • 1953–1956제7기계화군 사령관 → 기갑군사관학교장, 흐루쇼프에 의해 좌천

야코프 일리치 골레프

Яков Ильич Голев

전후 재건기에 고스방크를 이끈 재정 기술관료

1933년, 소련 전역이 대기근에 시달리던 때 골레프는 하리코프에 파견되어 국가 수확고 위원회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고, 이후 그가 다룰 모든 재정 숫자들 뒤에는 이 장면이 놓여 있었다.

야코프 골레프는 소련의 재정·은행 기술관료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국가은행(고스방크) 총재를 지냈다.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제정군 포병으로 1차 대전을 겪고 내전기에 붉은 군대에 복무했으며, 이후 지역 재무 부서를 거쳐 중앙 재정 기구로 진입한 전형적인 소비에트 승진 경로를 밟았다. 고스방크 총재 임기 동안 그는 전시 경제에서 평시 재건으로 이행하는 과도기(1947년 화폐 개혁 직전까지의 신용·발권 체계)를 관리했으며, 이는 전후 소련 재정 안정화의 기술적 토대를 마련한 시기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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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러시아 제국군 포병 복무
  • 1918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19붉은 군대 복무
  • 1920–1924피야티고르스크 식량위원회 · 볼로콜람스크 현 재무과 근무
  • 1924–1930모스크바 주 재무국 근무
  • 1930–1933과학연구 콜호스 연구소 대학원생
  • 1933–1935국가 수확고 위원회 위원장 (하리코프) · 전권위원 (체르니고프, 스탈리노)
  • 1937–1939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부 계획부 부장 · 재정 담당
  • 1939–1940소련 농업은행 총재
  • 1940–1941소련 재무 부인민위원
  • 1941–1945소련 재무 제1부인민위원
  • 1945–1948소련 국가은행(고스방크) 총재
  • 1948–1952소련 재무부 차관 겸 농업은행 총재
  • 1953–1959소련 농업은행 총재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넴치노프

Василий Сергеевич Немчи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4–1964 ○ 자연사

수리경제학으로 계획의 과학화를 꿈꾼 학술 조직자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염색체 유전 이론은 인류 과학의 황금 기금에 들어갔다"고 말한 넴치노프에게 누군가 "사임하시오!"라고 외쳤다. 그가 답했다. "아마도 사임해야겠지요. 나는 내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다음날 그는 정말 해임되었다. 전체 회의장에서 리센코에 맞선 유일한 공개 연설이었다.

소련 수리경제학파의 창시자. 1917년 모스크바 상업대학 졸업 후 1920년대 농촌 계급구조 연구로 주목받았다. 1948년 VASKhNIL 8월 총회에서 리센코의 유전학 탄압에 맞서 유일하게 공개 반대 연설을 했고, 다음날 티미랴제프 농업대학 학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55년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다. 1958년 소련 최초의 경제-수학 연구실험실을 조직, 1963년 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로 발전시켰다. 스탈린상(1946)·레닌상(1965) 수상. 칸토로비치·리베르만과 함께 해빙기 경제개혁 논의의 지적 삼각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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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펜자현 그라보보 마을에서 출생
  • 1917모스크바 상업대학 경제학부 졸업
  • 1917–1922첼랴빈스크 현 젬스트보 통계국장
  • 1923–1926우랄주 통계청장 (스베르들롭스크)
  • 1926–1934소련 중앙통계국·고스플란 인민경제회계 이사국 위원
  • 1940–1948티미랴제프 모스크바 농업대학 학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경제·통계)
  • 1948VASKhNIL 총회 리센코 반대 연설 — 다음날 학장직 해임
  • 1949–1963소련 과학아카데미 생산력연구회의(SOPS) 의장
  • 1953–1962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경제·철학·법학부 학술서기
  • 1958소련 최초의 경제-수학 연구실험실 창설
  • 1962–1964모스크바대학 경제분석 수리방법 학과 창설·학과장
  • 1963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 창설, 학술지 창간
  • 1964모스크바에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토도르스키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Тодор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4–1965 ○ 자연사

레닌이 '놀라운 책'이라 칭송한 베세곤스크의 소비에트 연대기 작가

레닌은 1919년 『프라우다』에서 토도르스키의 지방 소비에트 경험담을 두고 "이 훌륭하고 절대적으로 옳은 말들을 돌에 새겨 모든 경제위원회와 공장에 걸어두어야 한다"고 썼다.

『소총과 쟁기와 함께한 1년』(1918)으로 레닌의 극찬을 받은 소비에트 군사교육 지도자.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장을 지냈고, 대숙청 때 15년간 수감된 후 복권되어 투하쳅스키 평전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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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7제국군 장교, 1차대전 참전, 대위까지 진급, 6개 전투훈장 수훈
  • 1918베세곤스크 현 신문 편집자 겸 당 선동부장, 『소총과 쟁기와 함께한 1년』 출간
  • 1919–21붉은 군대 사단장, 다게스탄 반란 진압 작전 지휘
  • 1923–24투르케스탄 전선 페르가나 지역군 사령관, 바스마치 진압 작전
  • 1927–33제5소총군단장, 독일 제국군 참관 훈련
  • 1933–36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장 겸 정치위원, 콤코르(1935) 진급
  • 1936–38적군 고등군사교육국장
  • 1955–65복권 후 중장 진급 및 은퇴, 회고록과 투하쳅스키 평전 집필

이반 스테파노비치 이사코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Исак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르메니아 1894–1967 ○ 자연사

한쪽 다리를 잃고도 두 전쟁을 치른 소련 해군의 학자 제독

스탈린이 이사코프를 평했다: "진짜 함대 제독, 이사코프 동지. 똑똑하군, 다리는 없지만 머리는 있지."

아르메니아계 소련 해군 지휘관으로, 1955년 소련 해군 최고 계급인 아드미랄 플로타 소비에츠코고 소유자에 오른 단 세 명 중 한 명이다. 해군 제1부인민위원과 주참모부장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작전 교리를 정립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발트·흑해함대와 육군 간 협동작전을 조정하고 레닌그라드 '생명의 길'을 구축했다. 1942년 투압세에서 독일 공습으로 중상을 입어 왼쪽 다리를 절단했으나 종전까지 복무했다. 전후 3권의 『해양 지도책』(스탈린상 1급)을 비롯해 해양학·해군사에 걸친 150여 편의 저작을 남겼고,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과 작가동맹 회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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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해군사관학교 졸업, 발트함대 구축함 이쟈슬라프에서 복무
  • 1918발트함대 빙상 항해 참가
  • 1922–1928흑해함대 작전부장 등 참모직 역임
  • 1937–1938발트함대 사령관
  • 1938–1939해군 부인민위원 겸 해군대학교장
  • 1939–1946해군 제1부인민위원
  • 1940–1942해군 주참모부장
  • 1942북캅카스 전선 부사령관, 투압세에서 중상으로 다리 절단
  • 1946–1947해군 주참모부장
  • 1947–1950해군 부총사령관
  • 1955아드미랄 플로타 소비에츠코고 소유자 진급
  • 1958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데먄 세르게예비치 코롯첸코

Демьян Сергеевич Коротченко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4–1969 ○ 자연사

흐루쇼프의 충복: 우크라이나 정부를 두 번 이끈 농민 출신 당 관료

'침묵이 그의 비장의 카드였다. 흐루쇼프가 무언가 제안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 네, 물론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 윌리엄 토브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부 수반을 두 차례(1938~1939, 1947~1954) 역임하고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1954~1969)으로 15년간 재임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적색 파르티잔을 조직했다. 1930년대 모스크바 바우만 구역에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인연을 맺어 측근으로 성장했고, 대숙청기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발탁되었다. 전시 파르티잔 투쟁을 조직하고 종전 후 공화국 재건을 주도했다. 흐루쇼프의 충실한 집행자로, '침묵이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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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적색 파르티잔 조직 · 붉은 군대 정치일꾼
  • 1921–1928쇼스트카·체르니고프·페르보마이스크 당위원회 서기
  • 1931–1937모스크바 바우만 구소비에트 의장 → 모스크바 주당 제2서기 → 서부 주당 제1서기
  • 1938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주당 제1서기 대행
  • 1938–1939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39–194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전시 파르티잔 조직)
  • 1947–1954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두 번째 임기)
  • 1954–1969우크라이나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관 뚜껑을 연 사람, 침대에서 죽은 첫 지도자

1956년 11월 18일, 모스크바 폴란드 대사관 리셉션에서 서방 대사들에게 말했다. 「역사는 우리 편이다. 우리가 당신들을 묻어버릴 것이다!」 열두 NATO 국가 대사와 이스라엘 대사가 자리를 떴다.

스탈린의 그늘에서 당 간부로 성장해 1953년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제1서기가 되었다. 1956년 2월 25일 제20차 당대회 비공개 회의에서 스탈린의 대숙청을 고발하는 비밀연설로 탈스탈린화를 열었다. 1956년 헝가리 봉기를 소련군으로 진압했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쳐 미사일 철수와 대가로 미국의 쿠바 불침공 약속을 받아냈다. 1964년 10월 14일 동료들의 표결로 해임되고 은퇴했으며, 회고록을 남기고 1971년 9월 1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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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38모스크바 당 제1서기, 지하철 건설
  • 1938–49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1942–43스탈린그라드 전선 군사위원
  • 1953–64당 제1서기
  • 1954–56처녀지 개간, 비밀연설
  • 1957「반당 그룹」 격퇴
  • 1961제22차 당대회, 스탈린 시신을 묘소에서 이장
  • 1964해임, 연금 생활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자루빈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Зарубин

게슈타포 첩자를 운용한 소련 원자력 스파이의 대미 레지던트

1941년 10월 12일,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에 도달한 날, 스탈린은 자루빈을 직접 불러 워싱턴에서의 유일한 임무를 하달했다: '미국이 독일과 단독 강화를 시도할지 여부를 알아내라.'

소련 국가보안 기관의 대표적 해외정보 장교로, 23년간 근무 중 13년을 불법 체류 요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베를린 비합법 레지던트로 근무하며 게슈타포 내부의 핵심 정보원인 빌리 레만(암호명 '브라이텐바흐')을 운용, RSHA와 게슈타포의 구조·작전·군사 계획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모스크바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워싱턴 주재 NKVD 수석 레지던트로서 미국 내 원자력 스파이 활동을 총괄 지휘했으며, 소련의 핵무기 개발에 결정적 정보 기반을 제공했다. 귀국 후 1948년까지 대외정보 부국장을 역임하며 불법 정보망을 감독했고, 퇴역 후에도 KGB 훈련기관에서 후배 정보원들을 교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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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러시아 제국군 복무,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 참전
  • 1918–1920붉은 군대 복무, 러시아 내전 남부전선 참전
  • 1920–1925체카·OGPU 내부보안·경제부서 근무 (블라디보스토크)
  • 1925–1927INO OGPU 합법 레지던트: 중국, 핀란드
  • 1927–1929비합법 레지던트: 덴마크, 독일 (체코인 신분)
  • 1929–1933비합법 레지던트: 프랑스 (암호명 '베티')
  • 1933–1937비합법 레지던트: 베를린, 게슈타포 요원 빌리 레만 운용
  • 1939–1940NKVD 장교, 코젤스크 수용소에서 폴란드 포로 심문
  • 1941NKGB 제1총국 부국장, 중국 특수임무 (발터 슈테네스 접촉)
  • 1941–1944NKVD/NKGB 대미 수석 레지던트 (신분: 부영사 바실리 주빌린)
  • 1945–1948NKGB/MGB 대외정보 부국장 겸 비합법정보 부국장
  • 1948건강 문제로 예편, 이후 KGB 훈련기관 강사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일류신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Ильюшин

일류신 설계국 창립자: Il-2 스투르모빅,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전투기

1941년 말, Il-2 생산이 늦어지자 스탈린이 공장에 전보를 쳤다: "Il-2는 붉은 군대에 공기처럼, 빵처럼 필요하다."

볼로그다 빈농의 막내아들로,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나 막노동으로 시작해 1910년 비행장 인부로 항공을 처음 접했다.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후 1933년 자신의 설계국을 세워 Il-2 스투르모빅(36,183대)을 내놓았고, 이 기체는 동부전선의 핵심 타격수단이 되었다. 전후에는 Il-12·Il-14·Il-18·Il-62 여객기로 소련 민간항공을 재건하고 제트 시대로 이끌었다. 7차례 스탈린상과 3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은 유일한 인물로, 37년간 설계국을 이끌며 소련 군용·민간 항공의 기초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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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8러시아군 항공부대 정비사, 조종사 자격 취득
  • 1919–21붉은군대 항공기 수리열차 정비사·정치위원
  • 1921–26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군 항공기사
  • 1926–31공군 과학기술위 항공부문 위원장
  • 1931–33ЦАГИ 설계국장
  • 1933–70일류신 설계국(ОКБ) 수석설계사·총설계사
  • 1967–77공병기술대장(상장),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오파린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Опар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1894–1980 ○ 자연사

원시 수프에서 생명의 기원을 탐구한 소비에트 생화학자

"살아 있는 유기체와 무생명 물질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없다." — 1922년, 훗날 『생명의 기원』으로 출판된 초기 논고에서.

소비에트 생화학의 제도적 기초를 닦은 생화학자이자 과학행정가이다. 1924년 지구상 생명이 무생물적 화학 진화를 통해 발생했다는 '원시 수프' 가설을 제창하여 생명기원 연구의 패러다임을 열었고, 이는 훗날 밀러-유리 실험으로 이어졌다. 1935년 알렉세이 바흐와 함께 소련 과학아카데미 생화학연구소를 창설하고 1946년부터 34년간 소장으로서 소비에트 생화학의 중심 축을 이끌었다. 1970년 국제생명기원연구학회(ISSOL) 초대 회장으로서 이 분야의 국제적 제도화에도 기여했으나, 한편으로 리센코와 레페신스카야의 유사과학을 지지하여 과학과 정치의 긴장을 자신의 경력 속에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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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모스크바국립대학교 물리수학부 자연과학과 졸업
  • 1925–1942모스크바국립대학교 생화학 강사·교수
  • 1935A. N. 바흐와 함께 소련 과학아카데미 생화학연구소 공동 창설
  • 1935–1946바흐 생화학연구소 부소장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42–1960모스크바국립대학교 식물생화학과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46–1980바흐 생화학연구소 소장
  • 1948–1955소련 과학아카데미 생물학부 아카데미크-서기
  • 1951–1958전연방 '즈나니예' 협회 회장
  • 1970–1977국제생명기원연구학회(ISSOL) 초대 회장

표트르 레오니도비치 카피차

Пётр Леонидович Капица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4–1984 ○ 자연사

베리야를 거부하고 초유동성을 발견한 노벨상 물리학자

지난 20년을 보면, 물리학의 새로운 발견에 기초한 세계 기술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향들은 모두 해외에서 발전했고, 우리는 그것들이 확실한 인정을 받은 후에야 받아들였다. —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1946년

소련의 실험물리학자. 케임브리지에서 러더퍼드 밑에서 연구했고 1934년 소련에 억류되었다. 1937년 액체 헬륨의 초유동성 발견, 베리야의 원자탄 프로젝트 지휘를 거부했다. 197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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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4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 연구원·자기연구 부소장·몬드 연구소장
  • 1934–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물리문제연구소(IFP) 소장
  • 1943–1946소련 인민위원회 산하 산소총국(글라프키슬로로드) 국장
  • 1945원자력 특별위원회 위원 — 베리야의 지휘 방식을 거부하고 사임
  • 1946–1955해임 및 사실상의 가택연금 — 자택 실험실 '물리문제의 오두막'에서 연구 지속
  • 1955–1984물리문제연구소(IFP) 소장 (복권)
  • 1957–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위원

이반 미하일로비치 그론스키

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Гронский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4–1985 ○ 자연사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말을 스탈린과 함께 만든 문학 정치위원

그론스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이렇게 정의했다: "렘브란트, 루벤스, 레핀을 노동계급에 봉사하게 하는 것."

차르 치하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해 소비에트 문학 통제의 설계자 중 한 사람이 된 저널리스트이자 당 관료였다. 1928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2대 신문 《이즈베스티야》의 편집장을 지냈고, 1932년 5월 스탈린과의 대화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내 문학예술의 공식 교의로 정착시켰다. 같은 해 소비에트 작가동맹 조직위원회 의장을 맡아 고리키와 함께 문학연구소를 설립했으며, 《노비 미르》 편집장으로서 스탈린과 문단을 직접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1938년 체포되어 16년간 수용소와 유형 생활을 견뎠고, 1954년 복권된 뒤에도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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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8사회혁명당 맥시멀리스트 당원
  • 1918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8–1934《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32'사회주의 리얼리즘' 용어 창안 (5월, 스탈린과의 대화)
  • 1932–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조직위원회 의장
  • 1932–1937《노비 미르》 편집장
  • 1933고리키와 함께 문학연구소 설립
  • 1938–1954체포 · 15년형 · 수용소 및 유형
  • 1954–1985복권 · 세계문학연구소 연구원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파파닌

Иван Дмитриевич Папан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4–1986 ○ 자연사

유빙 위에서 북극을 기록한 소련 극지 탐험의 얼굴

「우리는 균열과 거대한 수로에 둘러싸여 있다. 눈보라 속에서 유빙이 붕괴하면 탈출은 어려울 것이다…」 — 1938년 1월 29일, 파파닌의 일기.

세계 최초의 유빙 과학기지 '북극점-1'(1937–1938)을 이끈 소련의 극지 탐험가. 네 명의 연구원이 274일 동안 유빙 위에서 생활하며 북극 고위도 지역의 해양·기상 데이터를 수집한 이 원정은 유빙 표류 관측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개척했다. 오토 슈미트의 후임으로 북극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1939–1946)을 이끌며 소련의 전략적 북극 해운을 총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국방위원회 대표로서 북극 해상 수송을 지휘했다. 세바스토폴의 선원 가정에서 태어나 내전기 크림에서 붉은 파르티잔으로 활동했으며, 소련 영웅 칭호를 두 차례, 레닌 훈장을 아홉 차례 받았다. 전후에는 소련 과학아카데미 해양탐험부장을 35년간 맡으며 소련 해양학의 제도적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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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러시아 제국 해군 징집
  • 1918–1920크림에서 붉은 파르티잔 활동, 내전 참전
  • 1920–1922크림 체카 사령관, 하리코프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 군사령관
  • 1923–1932통신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32–1933프란츠요제프 제도 티하야만 극지기지장
  • 1934–1935첼류스킨곶 극지기지장
  • 1937–1938세계 최초 유빙기지 '북극점-1' 대장
  • 1939–1946북극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
  • 1941–1945국방위원회(GKO) 북부 해상수송 전권대표
  • 1948–1951소련 과학아카데미 해양학연구소 부소장
  • 1951–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해양탐험부장
  • 1952–1972소련 과학아카데미 내수생물학연구소장 (겸임)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쇼르스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Щорс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5–1919 ✕ 전사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의 차파예프'로 지목한 전설의 붉은 군대 사단장

부대는 강변을 따라 걸었네, 먼 데서 걸었네, 붉은 기치 아래 걸었네, 연대장이여. 머리는 붕대 감고, 소매엔 피 묻었네… — 미하일 골로드니, 〈쇼르스의 노래〉

볼셰비키 붉은 군대의 젊은 지휘관으로, 1918년 보훈 연대를 조직해 키예프 탈환을 이끌고 44소총병사단장으로 코로스텐 철도 방어전을 지휘했다. 1919년 8월 전선에서 24세로 전사한 후 10여 년간 잊혀졌으나, 1935년 스탈린이 도브젠코에게 '우크라이나의 차파예프'를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소비에트 최대의 문화적 영웅으로 부활했다. 블란테르의 〈쇼르스의 노래〉, 도브젠코의 영화 〈쇼르스〉(1939), 도시·거리·기념비로 그의 신화는 전 소련에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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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군 의무병 복무 후 빌나 군사학교 속성과정 수료, 소위로 남서전선 전투. 결핵으로 후송.
  • 1918.3–8고향 스놉스크에서 빨치산 부대 조직, 독일 점령군과 교전. 가을 볼셰비키 입당.
  • 1918.9–11보훈 연대 창설. 제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단 제2여단장으로 체르니히우·키예프·파스티우 탈환.
  • 1919.2키예프 사령관 임명 (2월 5일–13일). 명예 금무기 수여.
  • 1919.3–8제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단장. 지토미르·빈니차·즈메린카 탈환, 폴란드군 및 페틀류라군 방어전.
  • 1919.8제44소총병사단으로 통합, 사단장 임명. 코로스텐 철도 교차점 방어로 키예프 철수 엄호.
  • 1919.8.30빌로시치 인근 전투 중 후두부에 총상을 입고 전사, 향년 24세. 사마라에 안장.

게오르기 예브게니예비치 프로코피예프

Георгий Евгеньевич Прокофьев

경제 파괴 사건을 만들어 낸 부인민위원

1934년 미국 《타임》지는 프로코피예프를 "공장 고장이 나면 기술자를 '사보타주'로 총살하는 일을 관장하는" OGPU 산업 담당 인민위원으로 묘사했다.

OGPU 경제국장으로 소련 기술 전문가들을 겨냥한 '파괴 공작' 사건들을 조작한 체키스트. NKVD 제2부인민위원까지 올랐으나 야고다 실각 후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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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6OGPU 비밀국장, 이어 정보국장
  • 1926–1931OGPU 경제국장
  • 1932–1934OGPU 부의장
  • 1932–1934노농민병대 총국장 겸임
  • 1934–1936내무 제2부인민위원
  • 1936–1937체신 제1부인민위원
  • 1937체포와 처형

보리스 페트로비치 셰볼다예프

Борис Петрович Шеболдаев

대테러 전야에 무너진 아조프-흑해 변경주의 당 주인

1934년 제17차 당대회에서 그는 키로프를 찾아가 '노인들'이 레닌의 유언대로 스탈린을 다른 자리로 옮기고 그대를 서기장으로 세우자고 한다는 뜻을 전했다.

1914년 입당한 고참 볼셰비키로, 니즈니볼가와 북캅카스 변경주 당 제1서기로서 집단화와 곡물 징발을 지휘했고 1932년 쿠반의 '검은 명부' 탄압에 그 이름이 남았다. 1934년부터 아조프-흑해 변경주 제1서기를 지냈으나, 1936년 여름 예브도키모프가 '셰볼다예프파' 숙청을 위해 파견되고 류시코프가 지역 NKVD를 맡으면서 포위되었다. 1937년 2~3월 중앙위원회 총회 보고로 격하되어 쿠르스크주로 밀려났고, 그해 6월 체포되어 10월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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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볼셰비키 입당
  • 1918–1920국내전기 캅카스에서 정치 활동
  • 1928–1931니즈니볼가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1–1934북캅카스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4–1937아조프-흑해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7쿠르스크주로 격하, 6월 체포, 10월 총살

그리고리 나우모비치 카민스키

Григорий Наумович Каминский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5–1938 ✕ 처형

초대 소련 보건인민위원, 예방의학의 창시자

1937년 6월 전원회의에서 NKVD와 베리아를 비판했다고 여러 회고록이 전하는데, 해당 회의는 속기록이 남지 않아 발언 원문은 확인되지 않는다.

1895년 10월 20일(구력) 예카테리노슬라프의 유대인 대장장이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영어권 연구는 11월 1일생으로만 적는다.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툴라에서 「콤무나르」를 창간하고 시·주 소비에트와 군사혁명위원회를 이끌었으며, 1920년에는 아제르바이잔에 파견되었다. 농업협동조합과 콜호스첸트르를 이끌며 집단화를 추진했으나, 1925년에는 쿨라크의 협동조합 가입을 막는 데 반대하기도 했다. 1937년 6월 전원회의에서 NKVD를 비판하고 베리아 관련 자료를 제출한 뒤 6월 25일 체포되어 1938년 2월 10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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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볼셰비키 입당, 민스크에서 「프라우다」 배포, 1915년 모스크바대 의대 입학(2개 학년 수료), 툴라 볼셰비키 서기
  • 1917–1920툴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툴라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제2군 정치위원, 「콤무나르」 초대 편집장
  • 1920–192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바쿠 소비에트 의장
  • 1922–1929농업협동조합연합 부의장, 전러시아 토지·림업노동자조합 의장, 콜호스첸트르 의장으로 집단화를 추진
  • 1929–1930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선동·대중운동부장
  • 1930–1934모스크바 시당위 서기, 제2서기, 모스크바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34–1937RSFSR 보건인민위원(1934.2–1937.3), 소련 위생총감(1935년부터), 초대 소련 보건인민위원(1936.7–1937.6)

세묜 페트로비치 우리츠키

Семён Петрович Уриц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1895–1938 ✕ 처형

소련 군사정보를 확장하고 대숙청에 삼켜진 GRU 수장

실신과 피를 토하는 몸으로도 수사관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소비에트 권력의 자비를 받을 자격을 얻고 싶습니다."

세묜 페트로비치 우리츠키는 소련의 군사정보 지휘관으로, 1935년 4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노농적군 정보총국(GRU)을 이끌었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모이세이 우리츠키의 조카이자 외교관 바츨라프 보롭스키의 집에서 성장했으며, 1912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내전기 기병 여단장으로 활약했다. 1920년대 독일·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에서 비합법 정보활동을 수행했고, GRU 수장 재임 중에는 스페인 내전 초기 소련의 정보작전과 해외 첩보망 확장을 감독했다.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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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7–1920오데사 붉은위병 조직, 내전기 기병여단장·제2기병군 여단장
  • 1920공화국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부 정보국 작전과장
  • 1922–1924독일·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에서 비합법 정보활동
  • 1927–1930제20소총병사단장, 북카프카스 군관구 부참모장
  • 1931–1932레닌그라드 군관구 참모장
  • 1935. 4 – 1937. 6노농적군 정보총국(GRU) 국장
  • 1937. 6 – 1937. 11모스크바 군관구 부사령관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Ежов

‘피의 난쟁이’, 당 인사기구가 키운 대숙청의 집행자

“그보다 더 이상적인 집행자는 모른다. 그에게는 멈출 줄 모른다는 것 하나만이 흠이다.” 그의 후원자 이반 모스크빈이 사위 레프 라즈곤에게 한 말

예조프는 1895년 코브노 현에서 툴라 출신 농민 아버지와 리투아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2·1924년 서류에는 페테르부르크 출생의 러시아 노동자 가정, 입당 시기도 1917년 3월로 적혔지만 기록과 본인의 심문 진술은 어긋난다. 실제로는 1917년 8월 3일 비테프스크에서 입당해 당 인사기구에서 성장했다. NKVD 수장으로서 스탈린 지도부 아래 1937~38년 대량 체포·처형 작전을 조직했다. 1936~38년 국가 범죄로 최소 130만 명이 체포되고 68만 1692명이 처형되었으며 굴라크 수용자는 68만 5201명 늘었다. 경력 체키스트는 아니었으나 고문에 가담했고, 1939년 4월 10일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1998년 복권은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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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34당 기구에서 간부 인사 담당으로 성장
  • 1934–36키로프 사건 수사 감독
  • 1936.9내무인민위원
  • 1936–38대외 작전 지휘: 스페인 주재 NKVD를 관할하고 국외 「트로츠키주의자」 색출 작전을 확대
  • 1937–38대숙청 집행: 「예조프시나」
  • 1938.11수리교통인민위원으로 전보(사실상 실각)
  • 1939/1940체포, 처형

블라디미르 예피모비치 체사르스키

Владимир Ефимович Цесарский

대숙청의 회계장부를 쥐었던 예조프의 심복

1938년 여름, 심사를 기다리는 대량작전 「앨범」이 중앙에 10만 명분 넘게 쌓였다. 그 서류 더미에서 유죄와 형량을 확정하던 회계등록부장이 체사르스키였다.

오데사의 사무원 가정에서 태어나 1915년부터 사회혁명당과 보로트비스트를 거쳐 1919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30년대 당 중앙위 기구에서 일하다 1935년부터 중앙위 서기 예조프의 보고담당 보좌관이 되었고,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부를 맡자 그를 따라 들어가 그를 위해 신설된 인민위원 특임전권위원 자리를 거쳐 회계등록을 총괄하는 GUGB 제8부장이 되었다. 대량작전의 「앨범」 심사와 처형 명부 실무가 그의 손을 거쳤고, 1937년 국가보안 상급소좌로 승진했다. 1938년 비밀정치부(제4부)장과 모스크바주 NKVD 국장을 지낸 뒤 우흐토-이젬스키 수용소장으로 밀려났고,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2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 2002년 복권이 거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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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 활동가
  • 1930–1935당 중앙위 배치부·공업부 실무 간부
  • 1935–1937당 중앙위 서기 예조프의 보고담당 보좌관
  • 1936.10–11내무인민위원 직속 특임전권위원
  • 1936.11–1938.3GUGB 제8부(회계등록)부장 · 「앨범」 심사·명부 실무
  • 1938.3–5GUGB 제4부(비밀정치)부장
  • 1938.5–9모스크바주 NKVD 국장
  • 1938.9–12우흐토-이젬스키 수용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