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콤소몰 40주년 대회에서 파스테르나크를 두고 “돼지는 자신이 먹는 곳에 더럽히지 않는다. 파스테르나크는 돼지도 하지 않을 짓을 했다”라고 연설했다. 이 발언으로 파스테르나크는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다.
콤소몰에서 두각을 드러낸 셸레핀의 측근으로, 37세에 소련 사상 최연소 KGB 의장이 되었다. 1958년 파스테르나크를 '돼지'에 비유한 연설로 악명을 얻었고, 1964년 흐루쇼프 축출에서 보안·통신·경호를 장악해 쿠데타의 물리적 기반을 제공했다. 이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약화시키며 우크라이나 직책으로 밀려났고, 결국 변방의 대중교육 단체에서 경력을 마감했다.
1943년 7월 17일, 첫 전투에서 기관총 소대를 이끌고 적진에 뛰어들어 백병전 끝에 고지를 탈취한 뒤 7차례의 역습을 막아냈다.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자 가족에게는 전사 통지서가 발송되었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기관총 중대를 지휘하며 세 차례 부상을 입고도 카르파티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종전을 함께한 보병 장교로, 전후 두 개의 참모 아카데미를 금메달로 졸업하고 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제40군의 작전을 관할했다. 1985년부터 1992년까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재임하며 소련 핵전력 최전성기인 1,400기 이상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체제를 지휘했고, 소련 붕괴 후에도 전략억지군 사령관으로서 CIS 통합 지휘 체계의 이행을 맡았다. 말년까지 한 번도 당과 군을 떠나지 않고 국가 붕괴의 소용돌이 속에서 핵무기에 대한 민간 통제라는 헌법적 원칙을 지킨 군인이다.
1938년, 14세 소년 블라디미르 고보로프는 학교 친구와 함께 스페인 공화군에 입대하러 모스크바를 떠나 투압세 항구에서 스페인행 화물선에 몰래 올라탔다. 바다 한가운데서 발각되어 송환된 두 소년은 ‘국제여단’에 닿지도 못했다.
소련 원수 레오니트 고보로프의 아들로, 14세 때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러 가출했다가 배에서 발각된 이력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포병 장교로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싸웠고, 전후 프룬제 사관학교와 참모대학을 금메달로 졸업하며 승진을 거듭해 1972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고 1977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1986년 소련 민방위 사령관으로 부임한 직후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1988년 아르메니아 지진 대응을 지휘했으며, 민방위를 전시 중심 조직에서 평시 비상사태 대응 체제로 재편해 훗날 러시아 비상사태부의 토대를 닦았다.
1991년 6월 17일, 최고소비에트 비공개 회의에서 크류치코프는 개혁파 진영에 서방의 '영향력 공작'이 침투했다고 경고하며 내각에 비상대권을 부여하라는 요구에 동참했다. 두 달 뒤 그가 조직한 쿠데타는 사흘 만에 무너졌다.
1924년 2월 29일 차리친(훗날 스탈린그라드, 오늘날 볼고그라드)에서 태어났다. 1941~43년 스탈린그라드 포병 공장에서 일했고, 1949년 법학을 전공으로 졸업해 1946~51년 스탈린그라드 지역 검사로 일했다. 1955~59년 부다페스트 소련대사관 3등서기관으로 1956년 헝가리 사건을 겪었고, 1967년 안드로포프를 따라 KGB로 옮겨 1974~88년 제1총국장을 지냈다. 1988년 10월 1일 KGB 의장에 임명되어 1991년까지 재임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를 주도했으며, 8월 22일 체포되어 1994년 국가두마 사면으로 재판 없이 종결되었다. 2007년 11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옐친 회고록: KGB 국장이 '당과 우호 협력한다'고 하자 피로시코프가 '코르닐로프 장군, 일어서! 당 기관의 지도 아래 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1942년 18세에 자원입대하여 민스크·바르샤바 해방과 베를린 공방전을 거쳐 베를린 전승 퍼레이드에 참가한 전쟁 세대. 전후 알타이 지역에서 콤소몰과 당 간부로 올라 1968년 제2서기까지 지낸 뒤, 정치국의 결정으로 KGB에 배치되어 인사국장과 당위원회 서기를 거쳐 1971년부터 1991년까지 부의장직을 수행했다. 안드로포프·페도르추크·체브리코프·크류치코프 4대 의장 아래에서 거의 20년간 자리를 지킨 유례없는 장기 재임자로, KGB 인사정책과 구조 정비, 대테러 작전(알파 그룹 지휘·감독)을 총괄했으며 퇴역 후에는 FSB 재향군인회를 이끌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42–1945자원입대, 316근위박격포연대에서 민스크·바르샤바·베를린 전투, 베를린 전승 퍼레이드 참가
사면을 받아들인 이유: "아니면 모스크바 거리의 아스팔트를 탱크로 망가뜨린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테니까."
1941년 열일곱에 나이를 속이고 자원입대해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싸우고 두 차례 부상했으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쿠바에 비밀 배치된 연대를 지휘했다.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 사건 뒤 국방장관에 기용되었으나 핵 군축의 속도와 범위를 두고 고르바초프와 갈등했고, 1990년 4월 소련 최후의 원수로 진급했다. 아프가니스탄 철수와 일방 감군 50만을 집행했고,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합류해 모스크바에 전차를 투입했다. 옐친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군을 철수시켰으며, 체포되어 498일간 수감된 뒤 1994년 국가두마 사면으로 풀려났다. 2019년 리투아니아 법원이 1991년 1월 사건으로 궐석 중 10년형을 선고했고, 2020년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노릴스크 콤비나트 사장 시절, 국가 광물매장량 심의위원회의 결론을 기다리지 않고 탈나흐 광구 우안에 산업 건설을 강행했다. '노릴스크는 그 규모에 충격적이었습니다: 탄광, 지하 갱도, 거대한 노천광 두 개, 세 개의 공장 — 니켈, 코발트, 구리, 그리고 거대한 도시.' 광구 '마야크'는 1965년 첫 광석을 냈다.
야금기술자 출신으로 노릴스크 콤비나트 사장 시절 탈나흐 광상을 과감히 개발해 소련 니켈·백금 생산을 비약시켰고, 36세에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다. 1972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된 뒤 16년간 중공업·에너지 부문을 총괄하며 서시베리아 유전 개발과 소련 연료-에너지 복합체의 골격을 설계했다. 정치국 후보위원(1982–1988)으로서 브레즈네프 체제 후기 경제정책의 실무를 관장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개시 3년 뒤인 1988년 전원 퇴진 속에 은퇴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모스크바 시의원·연방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95세까지 공적 생애를 이어갔다.
1978년 5월 폐쇄 재판의 최후 진술에서 그는 말했다: "이런 재판으로는 헬싱키 그룹의 문서가 증언하는 사회의 병폐와 결함을 없앨 수 없습니다."
입자가속기 물리학자에서 소련 최초의 인권감시 조직을 세운 반체제 운동가로 선 인물. 1956년 당 회의에서 스탈린과 베리야를 '권력을 쥔 살인자'라 칭해 제명·해고당했고, 그로부터 20년 뒤인 1976년 5월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인권 조항 이행을 감시하는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을 창립했다. 이는 소련 스스로 서명한 제3바스켓의 약속을 내부에서 뒤집어 맞대결시키는 일이었다. 1977년 2월 체포되어 7년 수용소와 5년 유형을 선고받고, 1986년 국적을 박탈당한 채 미국으로 추방되어 코넬대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자동유도장치가 죽었다. 벨랴예프는 좌석에 비스듬히 누워 보조르 항법기를 들여다보며 캡슐의 자세를 손으로 바로잡았다. 레오노프가 그의 몸을 붙잡고 있었다. 인류 최초의 완전 수동 재진입이었다.
태평양함대 전투조종사 출신으로, 1960년 최초의 우주비행사단에 선발되었을 때 서른넷의 최고령이자 최고 계급(소령)으로 단장이 되었다. 1965년 3월 18일 보스호트 2호의 선장으로서 알렉세이 레오노프의 인류 최초 우주유영을 지휘했고, 귀환 시 자동유도장치가 고장나자 누운 자세로 수동 재진입을 수행해 사상 처음으로 우주선을 사람 손으로 착륙시켰다. 2,000km나 빗나간 착륙 지점은 페름 밀림이었고, 구조대가 도착하기까지 이틀을 영하의 숲속 캡슐에서 버텼다.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이후 소유스 계획 훈련을 지휘했으나, 위궤양 수술 후 복막염으로 1970년 마흔넷에 사망했다.
1990년 가을, 동유럽 주둔 정보망이 하나둘 접히던 때 한 장교가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겁니까?'라고 묻자 미하일로프가 답했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무너지고 있을 뿐이다.'
전쟁 말기 블라디보스토크 보병학교 교관으로 군 경력을 시작해, 프룬제 사관학교와 총참모부 사관학교를 거쳐 사단장·군단 참모장·참모총장 보좌관을 두루 역임한 정통 군인이다. 1979년부터 베트남 인민군 총참모부 선임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었고, 귀국 후 총참모부 주작전총국장으로서 소련군의 작전기획을 총괄했다. 1987년 7월 GRU 국장에 임명되어 아프가니스탄 철군,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소련 해체라는 격변 속에서 군사첩보를 지휘했으며, 1990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소련 GRU의 마지막 정규 국장으로서 1991년 10월까지 재임한 후 건강상의 이유로 퇴역했다.
1979년 가을, 코르니옌코는 부하들에게 아프가니스탄 파병 반대 의견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로미코는 서명을 거부하고 중앙위원회에 올리지 않았다.
게오르기 코르니옌코는 40년 넘게 소련의 대미 외교를 실무에서 이끈 외교관으로,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 아래에서 제1차관(1977–1986)을 지내며 1970~80년대 미소 군축 협상의 핵심 의제를 설계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워싱턴 대사관 참사관으로 냉전의 최전선에 섰으며, 이후 소련 외무부 미국국장으로서 닉슨·카터·레이건 행정부와의 모든 정상회담을 준비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결정에 내부 반대했고, 1983년 KAL 007기 격추 사건 때는 진실 공개가 국제적 고립보다 낫다고 주장했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냉전 후에는 회고록 『냉전: 한 참여자의 증언』을 남겨 소련 외교정책 결정 과정의 내막을 기록했다.
1989년 3월 정치국 회의에서 솔로비요프는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 7명 전원이 낙선했다고 보고하며, 유권자들이 후보 개인이 아니라 페레스트로이카 자체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그라드 지하철 건설 현장에서 20년 넘게 일하며 기술 관료로 성장한 후 당 기구로 옮겨갔다. 1985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와 정치국 후보위원에 오르며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소련 제2도시를 책임졌다. 1989년 3월 소련 인민대표대회 선거에서 단독 출마했으나 유권자 60%가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충격적 패배를 당했으며,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 7명 전원이 낙선한 이 사건은 당 권위 붕괴를 상징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과학은 단일한 살아 있는 유기체이지, 자율적 메커니즘들의 덩어리가 아니다. 불행히도 정치인도 과학계도 국내 과학을 구할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 소련 해체 직후, 1991년 12월 17일
시베리아에 계산수학의 중심지를 세우고 소련 과학행정의 정점에 오른 응용수학자다. 핵반응로 계산, 대기·해양 수치모델링, 면역반응의 수리모델을 개척했으며 분할법과 수반방정식 이론으로 계산수학의 기초를 다졌다. 1964년 노보시비르스크에 소련 최초의 대규모 수치모델링 센터인 계산센터를 설립했고, 1980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과학개혁을 주도했다. 소련 해체와 함께 마지막 총재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계산수학 연구를 이끌었다.
그의 지휘 아래 보로네시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집적회로가 탄생했고, 로켓·우주·전략핵전력 통제체계에 들어갈 전자장비들이 잇따라 개발되었다.
소련 전자공업의 핵심 인물로, 1960년대 보로네시 반도체소자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집적회로를 개발·양산했으며, 1971년부터 1985년까지 전자공업부 제1차관으로서 군수·우주·전략핵무기 체계에 필요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기반을 확충했다.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장관으로 승진하여 몰락 직전까지 소련의 컴퓨터·반도체 산업을 총괄했으나, 서방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소련 해체와 함께 부처도 사라졌다.
작전 직전 유리 안드로포프가 전화로 말했다. "우리도 원하지 않네. 하지만 해야만 하네." — 1979년 12월 27일, 아민 궁전 습격을 앞두고
소련의 대표적 정보장교로, 1956년 KGB에 입문한 후 동독·중국·미국에서 활동하며 냉전기 소련의 해외정보망을 구축했다. 1979년부터 1991년까지 KGB 제1총국 산하 불법정보국(S국)을 지휘하며 위장 신분으로 침투한 '불법 요원' 네트워크를 총괄했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아민 대통령궁을 43분 만에 제압한 특수작전 '폭풍-333'을 지휘해 소련-아프간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81년 KGB 정예 특수부대 '빔펠'을 창설했다. 1962년 글리니케 다리에서 루돌프 아벨과 프랜시스 게리 파워스의 포로 교환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벨의 '독일인 사촌'으로 위장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27년 장기 집권 장관의 뒤를 이어받았으나, 자기 임기 안에 부처 자체가 사라진 마지막 대외무역장관
1985년 10월, 27년간 소련의 대외무역을 관장해온 니콜라이 파톨리체프의 뒤를 이어 대외무역장관에 취임한 아리스토프는 불과 2년 3개월 만에 부처 자체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으로 폐지되는 순간을 맞았다.
소련의 당·국가 관료이자 외교관. 레닌그라드 공장 기술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에서 경력을 쌓은 후, 1971년부터 1978년까지 레닌그라드 시당 제1서기를 지냈다. 이후 외교 경력으로 전환하여 주폴란드 대사(1978–1983)와 외무차관(1983–1985)을 거쳐, 1985년 니콜라이 파톨리체프의 뒤를 이어 소련 대외무역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의 일환으로 1988년 1월 대외무역부가 폐지되고 대외경제관계부로 통합되면서, 그는 소련의 마지막 대외무역장관이 되었다. 이후 주핀란드 대사(1988–1992)로 전임되어 소련 붕괴기를 헬싱키에서 지켰으며,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연방 대사로 잠시 유임되었다.
「우리 KGB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것 없이는 소련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45년간 12명의 기관장 아래 근무한 봅코프는 KGB 제5총국장으로서 반체제 인사·종교·민족주의 운동을 감시·탄압하는 이념방첩 체계를 설계했다. 만년에는 사하로프 추방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으며, 소련 붕괴 후 올리가르흐 구신스키의 모스트 그룹 분석부를 이끌었다.
소련 해군 중장.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잠수함 B-59에서 핵어뢰 발사를 저지한 장교로, 두 명의 지휘관이 발사에 동의했으나 아르히포프만이 거부하여 핵전쟁을 막았다. 1961년 K-19 원자력 잠수함의 방사능 누출 사고에서도 승무원으로 복무하며 피폭을 입었다. 이후 69여단장, 37사단장을 거쳐 카스피 고등해군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81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1981년 직접위성방송 시스템 '에크란'이 가동되자, 시베리아와 극동의 오지에서도 안테나만 있으면 모스크바 TV를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공로로 샴신은 레닌상을 받았다.
통신 공학자 출신으로 세계 최초의 위성TV 배급망 '오르비타'와 직접위성방송 '에크란'의 개발을 이끌었고, 1980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 통신장관으로서 통합자동통신망(EASS)을 구축해 국민 대다수가 TV 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했다. 퇴임 후에도 로스텔레콤 이사회 의장을 지내며 러시아 통신 산업의 발전에 기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49통신부 산하 NII-100 연구소 기술자, 선임설계자, 선임연구원
1958원거리무선통신연구소(NIIDAR) 연구실장, 탄도미사일 초장거리탐지 레이더 시스템 개발 참여
1965국립무선연구소(NIIR) 과학담당 부소장 — 오르비타 및 에크란 위성 시스템 개발 주도
1989년 10월 당 중앙위원회 RSFSR 정치체제 회의에서: "러시아 공산당을 따로 만드는 것은 소련을 분할하는 길이다." 고르바초프의 구상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항공공장 기술자로 출발해 쿠이비셰프·보로네시 지역 당 제1서기를 거친 소비에트 제도인. 브레즈네프 말기 쿠바 대사로 좌천되었다가, 안드로포프가 부패 척결을 위해 크라스노다르 지역에 투입하면서 정치적으로 부활했다. 1983년 RSFSR 각료회의 의장(총리)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라 러시아 공화국 정부를 5년간 이끌었고, 체르노빌 사고 직후에는 정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현장 수습에 참여했다. 1988년 RSFSR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국가원수)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고르바초프가 러시아 분리 공산당 창설을 밀어붙이자 이에 공개 반대하며 소련이라는 틀 안에서의 RSFSR을 끝까지 고수했다.
1985년 10월 고르바초프는 6개 농업 부처를 하나로 통합한 국가농공위원회를 구상하며 "몇 년 동안 이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밝혔다. 한 달 뒤 무라홉스키가 초대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반년 만에 스스로 개편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15세에 붉은 군대에 합류해 노보로시스크 방어전과 만주 작전에서 싸운 전쟁 참전자였다. 스타브로폴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후임 변경주당 제1서기(1978~1985)로 지역 농업과 산업 발전을 이끌며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오른 직후 소련 부총리 겸 국가농공위원회 초대 의장으로 발탁되어 6개 농업 관련 부처를 하나로 통합하는 대대적 행정 개편을 단행했으나, 거대 관료 기구의 비효율이 드러나 1989년 기구 폐지와 함께 퇴임했다.
“1980년대 초 서독은 소련군 철수와 동독의 바르샤바조약 탈퇴만으로 1000억 마르크의 무상 차관을 제안했다. 고르바초프는 아르히즈에서 140억 마르크를 받아들였다.” — 독일 통일 협상의 대가에 대해
소련 최고의 독일 문제 전문가로, 흐루쇼프와 그로미코의 연설문 작성자로 외교 경력을 시작해 1971–1978년 서독 대사를 지냈다. 1988–1991년 CPSU 중앙위원회 국제부장으로서 외무부와 나란히 작동하는 평행 외교 기구를 이끌었고, 1990–1991년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독일 통일 협상에서 고르바초프의 성급한 양보에 가장 강력히 반대한 인물로, 1989년 율리 크비친스키와 함께 쇠퇴하는 소련의 군사적 영향력을 에너지 의존으로 대체하려는 팔린-크비친스키 독트린을 정식화했다. 고르바초프가 통일 독일의 NATO 가입을 사실상 무상으로 허용했다고 비판하며, 모스크바가 최대 1000억 마르크까지 요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농업 전문가 출신인 예프렘 소콜로프는 벨로루시아의 지역 행정과 당 조직을 거쳐 공화국의 당 지도자가 된 실무형 정치인이었다. 그는 대규모 축산 단지와 도로 건설을 추진해 브레스트 지역의 생산 기반을 확장했으며, 1986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공화국의 소유권과 경제 권한을 더 분명히 하자고 주장하고 체르노빌 방사능 오염 지도의 공개를 지시했지만, 스스로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며 급진적 혁신에는 신중했다. 1990년 벨로루시아 당 제1서기에서 물러났고 그해 잠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