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초기화

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야코프 페트로비치 포그레브냐크

Яков Петрович Погребняк

반알코올 캠페인을 이끌며 리가초프의 마산드라 비노테카 파괴 명령을 폭로한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

나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잔의 내용물을 테이블 밑에 쏟아버렸다. 옆에 있던 당 서기가 속삭였다. '이봐, 내 바지가 벌써 다 젖었어. 구두 속에도 보드카야!'

도네츠크 공업대학을 졸업한 금속공학자 출신으로, 1957년부터 당에 들어가 크라마토르스크, 이바노프란코프스크, 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를 거쳐 1971년부터 16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반알코올 캠페인이 시작되자 우크라이나 내 시행을 감독했으며, 후일 예고르 리가초프가 마산드라 와인 공장의 150년 역사 비노테카를 파괴하라고 요구했고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의 개입으로 이를 막았다고 증언했다. 1987년 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되던 리보프로 발령받아 1990년까지 제1서기를 지냈고, 소련 붕괴 후에는 '우크라이나-폴란드 협회' 회장을 맡으며 회고록을 펴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7–1960크라마토르스크 시당 제2서기
  • 1960–1962크라마토르스크 시당 제1서기
  • 1963–1964폴타바 공업주당 제1서기
  • 1966–1969이바노프란코프스크 주당 제1서기
  • 1969–1971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
  • 1971–198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통상·반알코올 캠페인)
  • 1987–1990리보프 주당 제1서기

야코프 페트로비치 랴보프

Яков Петрович Рябов

옐친의 정치적 후견인, 국방산업을 관장한 당 서기, 우스티노프를 꺾고 T-72를 관철시킨 실무형 관료

T-72 전차가 시속 70킬로미터로 질주하며 불꽃을 튀기자, 그레치코 원수가 말했다. "보고할 것도 없네. 생산에 들어가야 해." 곧바로 브레즈네프에게 전화를 걸어 덧붙였다. "우스티노프? 엿이나 먹으라지, 그 작자 헛소리랑 같이!"

야코프 랴보프는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1서기(1971–1976)와 CPSU 중앙위원회 서기(1976–1979)로서 소련 군수산업을 총괄한 당-국가 관료다. 우랄 기술자 출신으로 키릴렌코의 발탁을 받아 스베르들롭스크 당 조직을 장악했고, 보리스 옐친을 발굴해 후계자로 추천했다. 중앙당 서기로 옮겨 국방을 담당하자 우스티노프와 T-72 전차 채택을 두고 정면 충돌했으며, 그레치코 원수의 지지로 T-72를 소련 주력 전차로 관철시켰다. 이후 국가계획위 제1부의장, 대외경제관계위 의장, 각료회의 부의장, 주프랑스 대사를 역임하고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고르바초프 및 리즈코프와의 갈등으로 물러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43–1944제9공장 선반공
  • 1946–1960스베르들롭스크 터보모터 공장 기술자·설계국장·공장장·당위서기
  • 1960–1963CPSU 스베르들롭스크 오르조니키제 구당위 제1서기
  • 1963–1966CPSU 스베르들롭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66–1971CPSU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2서기
  • 1971–1976CPSU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71–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76–1979CPSU 중앙위원회 서기 (국방·군수산업 담당)
  • 1979–1983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제1부의장
  • 1983–1984소련 대외경제관계위원회(GKES) 의장
  • 1984–1986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화학공업 담당)
  • 1986–1990주프랑스 소련 특명전권대사

발렌틴 카르포비치 메시야츠

Валентин Карпович Месяц
농업·토지정책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8–2019 ↓ 퇴임 1985

정체 말기의 농업장관

1978년 소련은 사상 최대 2억 3,700만 톤의 곡물을 수확했다. 메시야츠는 회고했다: "우리는 헥타르당 1센트너의 비료를 썼고, 유럽은 10센트너였다."

쿠즈바스 광부의 아들로 1976~1985년 소련 농업장관을 지내며 침체기 식량난 속에서 농업을 책임졌다. 이후 고르바초프 체제 모스크바주당 제1서기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까지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3–1958MTS 농업주임·소장 (모스크바주)
  • 1958–1961체호프 지구 집행위원장·볼로콜람스크 지구당 제1서기
  • 1965–1971러시아공화국 농업부 제1차관
  • 1971–1976카자흐스탄 공산당 제2서기
  • 1976–1985소련 농업장관
  • 1985–1990모스크바주당 제1서기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탸젤니코프

Евгений Михайлович Тяжельников

브레즈네프 시대 청년 간부 파이프라인의 전형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자 탸젤니코프는 브레즈네프에게 통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젊은 안드로포프가 카렐리야에서 썼다는 시를 찾아 나선 것이다. 안드로포프는 그런 찬양이 필요 없었다. 탸젤니코프는 루마니아 대사로 떠났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1968–1977), CPSU 중앙위원회 선전부장(1977–1982), 주루마니아 소련 대사(1982–1990)를 지낸 소비에트 당-국가 엘리트의 전형이다. 콤소몰 지도자로서 바이칼-아무르 간선철도(BAM) 건설을 비롯한 대규모 청년 동원 사업을 총괄했으며, 1971년부터 19년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총장에서 지역 당 이념비서를 거쳐 전국 청년 조직의 수장으로 발탁된 그의 경로는 후기 소비에트 노멘클라투라의 표준 궤적을 보여준다. 브레즈네프에 대한 개인적 충성으로 승진했으나, 안드로포프 집권 후에는 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아 루마니아 대사로 전출되었고 차우셰스쿠 정권 말기까지 부쿠레슈티에 머물렀다.

상세 이력 보기
  • 1950첼랴빈스크 교육대학 물리·수학부 우등 졸업,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좌 조교
  • 1950–1952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콤소몰 위원회 비서
  • 1952–1954첼랴빈스크 주 콤소몰 위원회 선전선동부 부장
  • 1956–1961첼랴빈스크 교육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좌 선임교원, 당위원회 비서
  • 1961–1964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총장
  • 1964–1968첼랴빈스크 주 CPSU 위원회 이념담당 비서
  • 1968–1977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7–1982CPSU 중앙위원회 선전부장
  • 1982–1990주루마니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체르나빈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Чернав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8–2023 ○ 자연사

소련 해군의 마지막 총사령관, 최초로 북극 빙하 아래를 항해한 원자력잠수함 장교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 1988년 흑해에서 미군 순양함에 충각 작전을 지시하며 주저하던 흑해함대 사령관에게

소련 해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을 지낸 원자력잠수함 장교. 1962년 11월급 공격원잠 K-21 함장으로서 소련 원자력잠수함 최초의 북극 빙하횡단 자율항해를 성공시켜 북극 작전교범의 초안을 만들었다. 이후 델타급 전략원잠 사단장, 북방함대 사령관, 해군 총참모장을 거쳐 1985년 해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랐다. 재임 중 소련 해군은 전성기를 맞아 상시 200척 이상의 함정을 세계 해양에 배치했으며, 1988년 흑해에서 미군 순양함에 대한 충각 작전 '나발'을 승인하고 직접 책임을 졌다. 소련 해체 후 1992년 독립국가연합(CIS) 해군의 유일한 사령관을 지냈고, 퇴역 후 잠수함장 연합을 창설해 2014년까지 이끌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1M.V. 프룬제 고등해군학교 졸업, 북방함대 잠수함 부대 배치
  • 1956–1959S-347 함장 (위스키급), 북대서양 30일 자율항해 성공
  • 1959–1962K-21 함장 (11월급 공격원잠), 소련 최초 북극 빙하횡단 자율항해 수행 및 빙하작전교범 작성
  • 1969–1972제19잠수함사단장 (델타급 전략원잠), 북방함대
  • 1973–1974제3잠수함전단 사령관, 북방함대
  • 1977–1981북방함대 사령관, 전략원잠의 남대서양·인도양 상시 배치 주관
  • 1981–1985소련 해군 총참모장 겸 제1부총사령관, 1983년 해군원수 진급
  • 1985–1992소련 해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92년 2월–8월 독립국가연합(CIS) 해군 사령관
  • 1992–2014러시아 잠수함장 연합 창설 및 회장, 2014년부터 명예회장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탈리진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Талызин

세계 최초의 위성 TV 방송을 만든 페레스트로이카기의 고스플란 의장

1967년 오르비타가 가동되자 시베리아·극동 주민 수천만 명이 처음으로 모스크바 중앙TV를 시청했다. 탈리진은 "우리가 우주에서 신호를 보내는 첫 국가가 될 것"이라 했다.

통신 공학자 출신의 소비에트 테크노크라트로, 1967년 세계 최초의 위성 텔레비전 방송망인 오르비타 시스템의 과학적 개발을 이끌어 시베리아와 극동 주민 9천만 명에게 중앙 TV를 공급했다. 통신장관(1975~1980)을 거쳐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고스플란 의장으로 발탁되어 초기 페레스트로이카 경제 개혁의 계획을 주도했으나, 개혁 속도를 둘러싼 갈등 속에 1988년 경질되었고 1989년 보수파로 분류되어 퇴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5통신부 산하 무선연구소(NII Radio) 기술자, 수석 설계자, 선임연구원, 부소장
  • 1965소련 통신부 차관
  • 1970소련 통신부 제1차관
  • 1975–1980소련 통신장관
  • 1980–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85–1988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의장
  • 1988각료회의 사회발전국 국장
  • 1988–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빅토르 페트로비치 니코노프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Никонов
농업·토지정책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9–1993 ↓ 해임 1989

고르바초프의 농업 후임자이자 마지막 내부 비판자

1989년 1월 정치국 회의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반박했다: "농업의 이런 조직 개편들에 지쳤습니다. 농업이 우선순위를 얻지 못하면 프로그램은 실패할 것입니다. 정말 이게 각료회의와 정치국, 그리고 당신, 미하일 세르게예비치에게 이해되지 않습니까?"

마리 자치공화국 제1서기를 12년(1967~1979) 역임한 농학자 출신 당 간부로, 1985년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오르자 농업 담당 중앙위 서기를 이어받았다. 안드로포프 시절 구상된 농업 부흥 프로그램을 구체화하고 6개 농업 부처를 통합한 국가농공위원회 창설을 지지했으나, 관료적 통합이 생산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후 정치국에서 수차례 고르바초프와 충돌했다. 1989년 9월 만 60세로 정치국과 서기국에서 동시 해임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0–1958MTS 주임 농학자, 농업학교 교사, 크라스노야르스크 당 기관 근무
  • 1961–1967타타르 주당 제2서기
  • 1967–1979마리 주당 제1서기
  • 1979–1983소유즈셀호즈히미야 의장 · 소련 농업차관
  • 1983–1985러시아 공화국 농업장관
  • 1985–1989중앙위 서기 (농업 담당)
  • 1987–1989정치국 위원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파블로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Павлов

반反해빙 노선의 콤소몰 수장이자 모스크바 올림픽을 이끈 체육 장관

밤중에 브레즈네프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들어봐, 심판이 왜 '니스트루'를 편파 판정한 거야? 조치를 취해." 또 다른 고위 인사가 전화해 말했다: "프라하에 연결돼 있나? 당장 전화해서 하키 선수들에게 골대를 향해 슛을 날리라고 해."

셸레핀의 후원 아래 30세에 콤소몰 제1서기가 되어 9년간 청년동맹을 이끌었다.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맞서 ≪프라우다≫를 통해 솔제니친·에렌부르크를 공개 공격하고, 1930년대를 어두운 색으로만 그리는 풍조를 비판한 강경파였다. 1968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숙청할 때 체육위원회 의장으로 밀려났으나, 오히려 15년간 소련 스포츠의 황금기를 진두지휘하며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72년 슈퍼시리즈를 성사시켰다. 안드로포프 집권 후 몽골·버마 대사로 전출되어 사실상 은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2–1959콤소몰 전임 간부로 활동, 모스크바 시당 콤소몰 제2서기·제1서기
  • 1959–1968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셸레핀의 후계자로 청년동맹 지휘
  • 1961–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63≪프라우다≫ 기사로 ≪노비 미르≫·솔제니친·에렌부르크 공격
  • 1965≪프라우다≫ 기사에서 1930년대를 부정적 일변도로 보는 풍조 비판
  • 1968–1983소련 체육·스포츠 위원회 의장, 15년간 스포츠 행정 총괄
  • 1972소련-캐나다 아이스하키 슈퍼시리즈 성사 주도
  • 1977–1983소련 올림픽 위원회 초대 위원장
  • 1980모스크바 하계 올림픽 조직 총괄
  • 1983–1985주몽골 소련 대사
  • 1985–1989주버마 소련 대사, 이후 강제 은퇴

안드리얀 그리고리예비치 니콜라예프

Андриян Григорьевич Николае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추바시인) 1929–2004 ○ 심장마비

보스토크 3호로 인류 첫 다중일수 우주비행을 실현한 소련 우주비행사

보스토크 3호가 궤도에 오르자 니콜라예프는 의자에서 몸을 풀고 기내에 떠올랐다: 가가린티토프도 해내지 못한, 인간이 우주에서 처음으로 중력의 속박을 벗어난 순간이었다.

추바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소련 3호 우주비행사. 1962년 8월 보스토크 3호로 64회 지구궤도를 선회, 4일간의 인류 첫 다중일수 우주비행을 실현했다. 파벨 포포비치의 보스토크 4호와 첫 동시비행을 이루어 이후 여성 우주비행 임무의 이중발사 선례를 세웠고, 이 비행으로 3일 이상 체공이 가능함을 입증했다. 1970년 소유즈 9호로 18일간 우주에 머물며 장기체류의 생리적 한계('니콜라예프 효과')를 드러냈고, 발렌티나 테레슈코바와의 결혼(1963)은 흐루쇼프가 주례한 냉전기의 대표적 선전극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7–50산림기술자, 카렐리야
  • 1950–54징집, 전투기 비행훈련 (체르니고프·프룬제)
  • 1955–60모스크바 방공전투기 조종사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 1962.8보스토크 3호: 첫 다중일수 우주비행 (64회 선회, 4일)
  • 1963–68소련 우주비행사단 지휘관
  • 1970.6소유즈 9호: 18일 체공 신기록
  • 1974–82가가린 훈련센터 제1부소장, 퇴역

아폴론 세르게예비치 시스초프

Аполлон Сергеевич Сысцов

소련 항공공업의 마지막 장관: 부란에서 민영화까지

부란 우주왕복선 기체 개발 당시, 시스초프가 주재하던 작전회의는 '시솝니키(сысовник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설계국들은 그의 무뚝뚝한 현장 감각을 두려워하면서도 존중했다.

멜레케스의 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타슈켄트 항공공장 모터 조립공으로 시작해 수석 엔지니어까지 오른 현장형 관료였다. 1975년 울리야놉스크 항공산업단지 초대 총책임자로 거대 제조 기지를 건설했고, 1981년 항공공업 제1차관으로 부란 우주왕복선 기체 개발을 감독했다. 1985년 장관에 올라 MiG-29·Su-27·Tu-160·An-124 등 소련 항공기술의 최전선을 총괄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항공공업부의 시장 전환을 주도했다. 공산당 중앙위원(1986~1990)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항공산업 민영화를 이어갔다.

상세 이력 보기
  • 1948–1969타슈켄트 항공공장: 모터 조립공 → 기술자 → 조립공장장
  • 1969–1975타슈켄트 항공공장 수석 엔지니어
  • 1975–1981울리야놉스크 항공산업단지(УАПК) 초대 총책임자
  • 1981–1985소련 항공공업 제1차관
  • 1985–1991소련 항공공업 장관
  • 1991–1995ОАО «아비아프롬» 부사장

율리 미하일로비치 보론초프

Юлий Михайлович Воронцов

소련군 아프간 철수를 외교로 마무리한 군축 협상가

“2년 반 동안 우리는 입장을 좁혀, 당대 가장 현대적인 무기의 완전 폐기 조약에 서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께 감사하게도 그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고,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 1987년 INF 조약에 대해

소련과 러시아의 외교관으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 아래서 외무부 제1차관(1986–1990)을 지내며 냉전 말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이끌었다. 소련군 철수 시기인 1988–1989년 아프가니스탄 대사를 겸임하여 무자헤딘 지도자들로부터 철수 부대에 대한 사격 금지 보장을 받아냈다. 군축 수석협상가로서 1987년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체결을 이끌었으며, 아나톨리 도브리닌 아래 워싱턴 대사대리와 인도·프랑스 대사를 거쳐 소련의 마지막 유엔 상임대표와 러시아 초대 주미 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에도 유엔 사무차장으로서 쿠웨이트 실종자 및 재산 반환을 조정하는 임무를 죽을 때까지 수행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2–1963소련 외무부 유럽부·국제기구부, 유엔 대표부
  • 1966–1977주미 소련 대사관 참사관·공사참사관, 워싱턴 대사대리
  • 1978–1983주인도 소련 대사
  • 1983–1986주프랑스 소련 대사
  • 1986–1990소련 외무부 제1차관, INF 조약 수석협상가
  • 1988–1989주아프가니스탄 대사 겸임, 소련군 철수 외교
  • 1990–1994유엔 주재 소련·러시아 상임대표
  • 1994–1998주미 러시아 대사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비류코바

Александра Павловна Бирюкова
경제·재정·계획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9–2008 ↓ 실각 1990

고르바초프 시기 최고위 여성 정치인, 소비재 품귀를 해결하려 했던 '러시아의 마거릿 대처'

1989년 여름, 비류코바는 일주일 동안 서유럽 8개 도시를 돌며 타이츠 5,000만 켤레, 여성화 170만 켤레를 구매했다. 소비에트 부총리가 직접 생필품 쇼핑에 나선 광경이었다.

섬유공학 엔지니어 출신으로, 소련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를 거쳐 고르바초프 시기 CPSU 중앙위 서기(1986~1988)와 각료회의 부의장 겸 사회발전국 의장(1988~1990)을 지내며 경공업·소비재·주택·보건을 총괄한 소련 최고위 여성 정치인이었다. 1988년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라 옐레나 스타소바·예카테리나 푸르체바에 이어 소련 역사상 세 번째로 정치국에 진입한 여성이 되었으며, 소비재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서유럽에서 한 주 만에 1억 6,500만 달러어치의 생필품을 구매하는 파격적 쇼핑 외교를 벌이기도 했다. 페레스트로이카 후반 소비시장 붕괴와 당내 비판 속에 1990년 28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52–1959제1모스크바 날염직물 공장 기술자, 직장, 작업반장
  • 1959–1963모스크바 시 소브나르호스 섬유·니트 산업관리국
  • 1963–1968트료흐고르나야 마누팍투라 면직 콤비나트 수석기사
  • 1968–1985전소비에트 노동조합 중앙평의회(VTsSPS) 서기
  • 1985–1986VTsSPS 부의장
  • 1986–1988CPSU 중앙위원회 서기 (경공업·소비재 담당)
  • 1988–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각료회의 사회발전국 의장

예브게니 막시모비치 프리마코프

Евгений Максимович Примаков

대서양 상공에서 비행기를 돌린 아랍주의자 총리

「러시아가 힘의 논리로 대화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에 처음으로 보여준 순간」 — 프리마코프의 대서양 회항에 대한 러시아 정치학자들의 평가

소련 최고의 아랍 전문가이자 정보·외교·정치를 가로지른 실용주의자. 《프라우다》 중동 특파원을 거쳐 IMEMO와 동양학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1989년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 1991년 KGB 제1총국장으로 소련 해체 직후 러시아 대외정보국(SVR)을 창설했으며, 외무장관 시절 '프리마코프 독트린'으로 불리는 다극 외교를 주창했다. 1999년 총리 재임 중 NATO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이유로 대서양 상공에서 전용기를 돌려 귀국한 사건으로 널리 기억된다.

상세 이력 보기
  • 1953–62국영방송 아랍어 편집국, IMEMO 연구원
  • 1962–70《프라우다》 중동 특파원, 카이로 주재
  • 1970–77IMEMO 부소장, 비밀 중동 외교 임무
  • 1977–85소련과학원 동양학연구소 소장
  • 1985–89IMEMO 소장, 소련과학원 아카데미크
  • 1989–90정치국 후보위원, 소비에트연방회의 의장
  • 1991KGB 제1총국장 → 중앙정보국장 → SVR 국장
  • 1996–98러시아 외무장관, 다극체제 독트린
  • 1998–99러시아 총리, 대서양 반전 귀국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마요레츠

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Майорец

체르노빌 현장에 투입된 마지막 소련 에너지장관

1986년 4월 26일 새벽, 체르노빌 사고 첫 보고를 받은 마요레츠는 니콜라이 리즈코프 총리에게 이를 알린 직후 현장으로 날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정격 출력으로 가동 중인 두 원자로 블록을 즉각 정지·비상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자포리자 변압기 공장의 전기기사에서 소련 전기공업장관·에너지장관까지 오른 산업 관료로, 송배전망과 원자력 발전을 사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가장 먼저 보고받아 곧장 현장으로 가 가동 중인 두 원자로를 비상 정지시키고, 소련 원자력 안전 체계 재편을 촉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3–1962자포로지에 변압기 공장 전기기사 → 선임 작업반장 → 책임자
  • 1962–1965자포로지에 변압기 공장장
  • 1965–1974소련 전기공업부 차관
  • 1974–1980소련 전기공업부 제1차관
  • 1980–1985소련 전기공업장관
  • 1985–1989소련 에너지·전화장관
  • 1986체르노빌 사고 정부위원회 위원 (셰르비나 위원장)

유리 니콜라예비치 흐리스토라드노프

Юрий Николаевич Христораднов

고리키 지역을 14년간 이끈 당 간부, 소련 말기 종교정책의 마지막 책임자

1990년 6월, 흐리스토라드노프는 러시아 정교회 지방공의회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해 연단에 섰다. 그가 인사말을 전한 바로 그 공의회는 알렉시 2세를 새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유리 흐리스토라드노프는 브레즈네프 시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 주 당위원회 제1서기로 14년간 재임하며 도시의 대규모 주택 건설과 지하철 착공을 주도한 소련의 지역 당 간부였다. 고리키 자동차 공장의 주물 공장에서 노동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를 따라 승진했고, 1976년부터 1990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1988~1989)을 거쳐 소련 각료회의 산하 종무위원회의 마지막 의장(1989~1991)으로서 고르바초프 치하의 종교 자유화 국면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관장했다. 1990년 러시아 정교회 지방공의회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하여 인사말을 전했으며, 이 공의회는 알렉시 2세 총대주교를 선출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9고리키 자동차 공장 주물 공장 작업반장
  • 1952주물 공장 부책임자 보좌
  • 1958주물 공장 부책임자
  • 1960자동차 공장 주물 단지 당위원회 서기
  • 1962고리키 시 아브토자보츠크 구 당위원회 서기
  • 1963고리키 시 아브토자보츠크 구 당위원회 제1서기
  • 1966고리키 시 당위원회 제2서기
  • 1968고리키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74고리키 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76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8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
  • 1989소련 각료회의 종무위원회 의장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차조프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Чаз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9–2021 ○ 자연사

크렘린 의료를 20년간 총괄한 소련 심장학의 대부

“핵전쟁은 막지 않는 한 지구상 생명의 멸종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이런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가?” — 1985년 오슬로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

예브게니 차조프는 혈전용해요법을 개척해 심근경색 치료를 혁신한 소련의 심장학자로, 20년간 크렘린 의료를 총괄하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등 역대 지도자를 진료했다. 1980년 미국 심장학자 버나드 론과 함께 핵전쟁 방지 국제의사회(IPPNW)를 공동 창설해 198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이는 냉전기 동서 진영을 가로지른 보기 드문 협력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3키예프 의과대학 졸업, 모스크바에서 레지던트 수련
  • 1963의학박사 학위 취득
  • 1965–1976소련 의학아카데미 미야스니코프 심장학연구소 소장
  • 1967–1986소련 보건부 제4총국장 (크렘린 의료 총괄)
  • 1968–1986소련 보건부 차관
  • 1976–2014전연방 심장학 연구센터 소장
  • 1987–1990소련 보건부 장관

니콜라이 니키토비치 슬륀코프

Николай Никитович Слюньков

트랙터 공장장 출신 정치국원, '당 중앙위의 디렉터'

1983년 1월 안드로포프가 급서한 키셀료프의 후임으로 그를 긴급 소환했을 때, 슬륀코프는 당 경험 부족을 들어 사양했다. 안드로포프의 답은 짧았다: '오늘날 가장 큰 정치는 경제요. 가서 그 정치를 하시오.'

민스크 트랙터 공장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공장장·총감독을 거쳐 벨로루시 공산당 제1서기(1983~1987)와 고르바초프 치하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7~1990)를 지낸 소비에트 경제 관료 출신 정치인. 벨로루시 당 책임자 시절 농업 생산량을 30% 끌어올리고 적자 농장을 완전 해소해 '당 중앙위 디렉터'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실무형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1987년 중앙위 경제부장으로 발탁되어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계획경제에서 시장 지향 개혁으로의 이행을 주도했으나, 정부 수반 니콜라이 리시코프와의 마찰과 건강 악화로 1990년 정계를 떠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50–1960민스크 트랙터 공장 보조기사·기사·상급기사·부책임자·책임자·노조위원장
  • 1960–1965민스크 트랙터 예비부품공장 책임자
  • 1965–1972민스크 트랙터 공장장·민스크 트랙터제조 생산연합 총감독
  • 1972–1974민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74–1983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83–1987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7–1990CPSU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 1987~1988 경제부장, 1988~1990 사회경제정책위원회 위원장

스테판 알렉세예비치 샬라예프

Степан Алексеевич Шалаев

소비에트 노동조합 체제의 마지막 지도자

페레스트로이카가 한창이던 1988년, 그는 당대회 연단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동조합은 더 이상 국가 기구의 부속물이어서는 안 됩니다."

모르드바 출신의 임업 기술자로, 1951년 모스크바 임업기술대학을 졸업한 뒤 임업·제지·목재가공 산업 현장에서 경력을 쌓았다. 1963년 임업노조 중앙위원장으로 노동조합 활동에 들어서 1968년 전소비에트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가 되어 국가사회보험 예산을 관장했다. 1980년 임업·제지·목재가공공업 장관을 지냈고, 1982년부터 1990년까지 VTsSPS 의장으로서 1억 3천만 조합원을 거느린 소련 노동조합 체제를 이끌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당 중앙위원이자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으로서 노동조합의 행정명령 체계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으며, 1990년 자발적 사임으로 소비에트 노조 체제의 마지막 장을 닫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51–1963임업·목재가공 산업 현장에서 기술자로 성장, 여러 레스프롬호스의 주임기사·소장 역임
  • 1963–1968임업·제지·목재가공 노동자 노동조합 중앙위원회 의장
  • 1968–1980VTsSPS 서기, 국가사회보험 예산 관장
  • 1980–1982소련 임업·제지·목재가공공업 장관
  • 1982–1990VTsSPS 의장, 당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 1990자발적 사임, 연방급 개인연금자로 퇴임
  • 1991–2002노동조합 과학센터 소장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코즐롭스키

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озловский

소련 지질학 '황금기'를 이끈 최장수 지질장관

다른 사람들은 자식을 대사관에 두는데, 왜 아들을 알단으로 보냈냐는 질문에 — 「7년 후에 그 현장 학교를 거친, 진짜 지질학자가 되게 하려는 겁니다.」

예브게니 코즐롭스키는 소련 지질학의 '황금기'를 이끈 최장수 지질장관(1975–1989)으로, 재임 기간 소련의 광물자원 기반을 두 배로 확장하고 서시베리아·카스피·중앙아시아에서 대규모 유전과 가스전 개발을 주도했다. 달동 출신으로 부시추조수에서 출발해 극동 솔네치노예 주석광산의 조기 탐사를 성공시켜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과학기술 혁신을 중시하는 경영자로 성장했다. 그의 지휘 아래 추진된 콜라 초심층 시추는 12,620미터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올랐고, 소련은 400척 규모의 지질탐사선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광물자원 정책의 이론가로 활동하며, 지질학을 국가안보의 기초로 재정립하려는 작업을 마지막까지 이어갔다.

상세 이력 보기
  • 1953–1965극동지질관리국: 부시추조수 → 주임기사 → 콤소몰스크 탐사대장
  • 1965–1973러시아공화국 지질부 기술관리국장
  • 1973–1974전연방 광물자원경제·지질탐사연구소(VIEMS) 소장
  • 1974–1975소련 지질부 차관
  • 1975–1989소련 지질장관
  • 1990–2009모스크바 지질탐사대학(MGRI) 교수·학과장
  • 1992–2022국제지질주식회사(MAKGO) 사장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리시코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Рыжк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러시아 러시아 1929–2024 ↓ 퇴임 1991

페레스트로이카 경제개혁기의 총리

1990년 5월 24일, 전국에 생중계된 최고회의에서 빵과 식료품 가격이 인상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1989~1990년 수백 개 도시에 배급제가 도입된 물자 부족 상황에서, 이 발언은 리시코프 내각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1929년 9월 28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도네츠크주 딜레예프카 마을의 광부 집안에서 태어나 2024년 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94세로 사망했다. 우랄마시 총지배인과 고스플란 제1부의장을 거쳐 1985년 9월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고, 1990년 12월 26일 각료회의가 폐지될 때까지 재임했으나 파블로프가 취임한 1991년 1월 14일까지 형식상 정부 수반으로 남았다. 1990년 12월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뒤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약 1,336만 표를 얻어 옐친에 이어 2위를 했다. 1995년 국가두마 의원, 2003년부터 연방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85–1991.1각료회의 의장

바딤 안드레예비치 메드베데프

Вадим Андреевич Медведев

이념을 해체한 마지막 이념비서: 검열의 특별보관고를 열고 당의 정통 교리를 폐기하다

1988년 가을, KGB를 통해 솔제니친 전 작품을 입수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인정했지만 〈수용소 군도〉는 주관적 논쟁서라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특별보관고를 열어 솔제니친의 기출판 저작을 모두 일반 서가로 돌려보냈다.

야로슬라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가치법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당 엘리트. 중앙위 선전부와 과학·교육부를 거쳐 1986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 1988년 정치국원 겸 이념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즈다노프의 1946년 문예지 탄압 결의를 폐기하고, 정기간행물 구독 제한을 철폐했으며, 솔제니친과 트로츠키의 저작을 포함한 특별보관고 도서를 일반 서가로 되돌렸다. 대학에서 당사와 과학적 공산주의 강좌를 20세기 사회정치사로 대체했고, 스탈린 시대 탄압 재심의 위원회에도 참여했다. 고르바초프의 측근이었으나 소련 붕괴와 함께 모든 공직을 떠나 고르바초프 재단 연구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1–68레닌그라드 대학 경제학부 졸업, 교수, 경제학 박사
  • 1968–70레닌그라드 시당 서기
  • 1970–78중앙위 선전부 부장
  • 1978–83중앙위 사회과학아카데미 총장
  • 1983–86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
  • 1986–90중앙위 서기, 이후 이념위원회 의장·정치국원
  • 1990–91소련 대통령자문회의 위원
  • 1992–2025고르바초프 재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연구원

빅토르 표도로비치 그루슈코

Виктор Фёдорович Грушко

해외정보부터 방첩까지 아우른 KGB 작전부사령관

1991년 8월 18일 오후, 야조프 국방장관이 공수군 사령관 그라초프에게 크렘린의 쿠데타 계획을 실행하라 명령하면서 덧붙였다. "KGB 부의장 그루슈코·아게예프와 협조하라."

소련 KGB에서 해외정보(PGU)와 방첩(VGU) 양대 본부를 모두 지휘한 정보 장교. 타간로크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MGIMO를 졸업하고 노르웨이 주재 외교관으로 출발, 1960년 KGB로 전직한 후 오슬로 주재관을 거쳐 PGU 제3(영국·스칸디나비아)부장, PGU 제1부국장으로 승진했다. 1989년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체제에서 제2총국(방첩)을 맡으며 KGB 부의장이 되었고, 1991년 1월 KGB 제1부의장으로서 작전 부문 최고위직에 올랐다. 같은 해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었고, 구금 중 두 차례 심장마비를 겪은 뒤 건강 악화로 석방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4–1960소련 외무부, 노르웨이 대사관 근무
  • 1960–1961KGB 제101학교 수료, PGU KGB 제3부 배치
  • 1968–1971오슬로 KGB 부주재관 (정치첩보)
  • 1971–1972오슬로 KGB 주재관
  • 1975–1980PGU KGB 제3부장 (영국·스칸디나비아 담당)
  • 1983–1989PGU KGB 제1부국장
  • 1989–1991KGB 부의장 겸 제2총국장 (방첩)
  • 1991.1–1991.8KGB 제1부의장

유리 세르게예비치 플레하노프

Юрий Сергеевич Плеханов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0–2002 ○ 체포 1991, 사면 1994

KGB 도청 전문가에서 경호 총괄로, 8월 쿠데타의 방아쇠를 당기다

고르바초프의 회고: 「옐친은 누군가 옆에서 도청하는 듯 불편해했다.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9국장 플레하노프가 그 방을 준비한 것이다.」

안드로포프의 개인 비서로 출발해 KGB 12부서(도청·검열)를 13년간 지휘한 도청 전문가. 크류치코프의 지시에 따라 1991년 7월 29일 노보오가료보 회담실을 사전 도청 장비로 세팅했고,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의 강경파 교체 밀약이 녹음되어 쿠데타 세력에 전달되면서 8월 쿠데타의 뇌관이 되었다. 쿠데타 당일에는 포로스 별장으로 날아가 공모자들을 고르바초프 앞에 들여보냈고, 실패 후 체포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65–1967CPSU 중앙위 서기 안드로포프의 비서
  • 1970–1983KGB 12부서장: 도청·전화감청·우편검열 총괄
  • 1983–1990KGB 9국장: 당·국가 요인 경호
  • 1990–1991KGB 경호국장 (9국 후신), 콜레기움 위원
  • 1991.7.29노보오가료보 회담실 도청: 녹음이 쿠데타 세력에 유출
  • 1991.8–1994포로스에서 쿠데타 가담, 체포, '마트로스카야 티시나' 수감, 사면

스테판 아라마이소비치 시타랸

Степан Арамаисович Ситарян

협동조합법을 폴리트뷰로에서 밀어붙인 소련 최고위 아르메니아 경제학자

1988년 폴리트뷰로에서 보수파가 협동조합법에 격렬히 반대하자, 시타랸은 "이것은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구하는 법"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코시긴 개혁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소련 경제 개혁의 거의 모든 주요 장면에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참여한 교량형 인물이다. 1960년대 중반 코시긴 개혁 준비 위원회에서 상품-화폐 관계 도입을 설계했고, 1986~1989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경제 개혁의 핵심 규범들을 입안했다. 그가 주도한 1988년 협동조합법은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사적 기업 활동에 합법적 지위를 부여한 법률로, 보수파가 장악한 폴리트뷰로에서 직접 변론하여 관철시켰다.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대외경제 개방을 추진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를 창설하여 이끌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3소련 재무부 산하 재무연구소(NIFI) 선임경제학자, 선임연구원
  • 1966경제학 박사, 이후 교수 직함 획득 (1970)
  • 1970–1974소련 재무부 재무연구소(NIFI) 소장
  • 1974–1983소련 재무차관
  • 1983–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부의장
  • 1986–1989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제1부의장, 경제체제 개선 부처간위원회 제1부의장
  • 1989–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2–2009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후에 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