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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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몰도바 몰도바인 1935–2024 ○ 자연사

소련 말기 몰다비아 공산당의 마지막 수장

그는 공산당 금지를 “불법적인 행위”라고 규정하며 1991년의 단절을 비판했다.

그리고레 예레메이는 소련 말기 몰다비아의 당·국가 관료로, 소비에트 체제의 마지막 국면을 당 내부에서 관리한 인물이다. 그는 몰다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재임하며 연방 해체와 공화국 독립이 겹친 1991년의 전환을 통과했다. 당 해산 뒤에는 몰도바의 외교관과 국회의원으로 활동해 소비에트 정치 경력과 독립국가의 제도 정치 사이를 잇는 행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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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농촌 중등학교 도서관장으로 노동 시작
  • 1954–1956소련군 복무
  • 1966–1970코토프스크 지구당 제1서기
  • 1970–1980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제1부의장
  • 1980–1990몰다비아 공화국 노동조합평의회 의장
  • 1989–1991소련 인민대의원
  • 1991몰다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4–1998루마니아 주재 몰도바 대사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로보프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Лобов

알마아타에 군대 투입을 거부하고 소련 군사개혁을 설계한 마지막 총참모장

“이것은 광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던 젊은이들이었다. 내게 주어진 과제는 유혈 사태 없이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 1986년 알마아타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 투입을 요구한 카자흐 당 지도부의 명령을 거부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소련군 최고 직책인 총참모장까지 오른 직업군인. 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 시절인 1986년 12월, 알마아타 시위 진압을 위해 병력을 출동시키라는 카자흐 당 지도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유혈 사태 없이 사태를 해결했다. 고르바초프의 지시로 군사개혁 초안을 두 차례 작성했으며, 복무 기간 단축·여단제 전환·방어적 군사 태세를 주장했으나 야조프 국방장관 및 이후 러시아 군 수뇌부와 충돌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총참모장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4개월 뒤 소련 자체가 해체되면서 소련군 마지막 총참모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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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소련군 징집, 투르키스탄 군관구 포병연대 복무
  • 1967–1968주독 소련군 차량화소총대대장 — 프라하 인근 비행장 및 주요 거점 장악
  • 1979–1981제28연합군 사령관, 벨로루시 군관구
  • 1984–1987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 — 1986년 12월 알마아타 시위 진압 병력 투입 거부
  • 1987–1988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 — 군사개혁 초안 작성, 야조프와 충돌 후 해임
  • 1989–1991총참모부 제1부참모장 겸 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참모장
  • 1991.8소련군 총참모장 — 쿠데타 직후 임명, 소련 해체와 함께 해임
  • 1992–1994군 감찰관·러시아 대통령 군사고문, 이후 퇴역

알프레드스 페테리스의 아들 루빅스

Alfrēds Pētera dēls Rubiks

소련 말기 라트비아 공산당의 완고한 수호자

1991년 8월 쿠데타 시도 뒤 체포되어, 소련 연방 질서를 지키려던 정치가에서 수감된 피고인이 되었다.

알프레드스 루빅스는 리가의 도시 행정과 라트비아 공산당에서 성장한 라트비아 공산주의 정치가였다. 그는 소련 체제와 라트비아의 독립을 둘러싼 충돌에서 당의 연방적 질서를 지키려 했고, 1991년 8월 쿠데타를 지지한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과 수감으로 정치적 책임을 졌다. 출소 뒤에도 사회주의당을 이끌고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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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7소련군 복무
  • 1957–1961리가 전기기계공장 기술기사
  • 1982–1984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지방산업부 장관
  • 1984–1990리가 시 집행위원회 의장
  • 1990–1991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1–19971991년 쿠데타 시도 관련 수감, 1995년 8년형 선고
  • 1999–2015라트비아 사회주의당 의장
  • 2009–2014유럽의회 의원

예브게니 파블로비치 벨리호프

Евгений Павлович Велих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5–2024 ○ 자연사

핵융합과 핵군축을 과학으로 연결한 소련의 물리학자

체르노빌 피폭을 감수한 지 한 달도 안 돼, 벨리호프는 과학아카데미에서 핵실험 검증 국제회의를 주재하며 참사를 군축의 계기로 바꾸려 했다.

핵융합 플라스마 물리학과 MHD 발전을 개척한 소련의 물리학자이자 과학행정가. 1959년 자기회전불안정성을 발견해 현대 천체물리학의 기초를 닦았고, 1962년 전열불안정성도 규명했다. 쿠르차토프 연구소에서 경력을 시작해 1973년부터 소련 제어핵융합 프로그램을 이끌었고, 1978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에 올라 연구소와 아카데미를 잇는 핵심 고리가 되었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에서 고르바초프의 과학보좌역으로 방사능 차단 작업에 참여했고, 냉전 말기 핵군축 과학외교를 주도했다. 소련 해체 후 쿠르차토프 연구소를 존속시키고 ITER 국제핵융합실험로 창립의장으로서 미·소·유럽·일본 공동 핵융합 연구의 틀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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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모스크바대학 물리학부 졸업
  • 1961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입소
  • 1971–1978자기연구소장 · 트로이츠크 분소
  • 1973–1991소련 제어핵융합 프로그램 과학책임자
  • 1978–1991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86체르노빌 사고 고르바초프 과학보좌역
  • 1989–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9–2015쿠르차토프 연구소 소장 → 총재 → 명예총재

이반 쿠지미치 폴로스코프

Иван Кузьмич Полозков

러시아 공화당을 세운 보수파 당간부

고르바초프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폴로스코프를 아주 오래전부터 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내지만, 멍청하고 무식하다. 누군가 써주면 그대로 읊을 뿐이다."

러시아 SFSR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 수준 공산당인 КП РСФСР의 창립 제1서기(1990–1991)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맞서는 당내 보수 반대파의 얼굴이었다. 1990년 5월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과 맞붙어 초기 집계에서 앞섰으나 정치국의 명령으로 후보에서 물러났고, 한 달 뒤 창립대회에서 러시아 공산당을 이끌게 되었다. 크라스노다르 당 조직을 5년간 이끈 지방 당료 출신으로,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으나 당내 개혁파와 강경파 양쪽의 압박 속에 1991년 8월 심장마비로 사임했다. 쿠데타 실패와 당 해산 후에도 КПРФ 자문기구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공산당 운동의 상징적 원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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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2콤소몰 · 쿠르스크주 솔른체보 구 당 간부
  • 1969–1972쿠르스크주 당 부서 부장
  • 1972릴스크 구 집행위원회 의장
  • 1973–1978, 1980–1983CPSU 중앙위 기구 근무
  • 1983–1984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이념 담당 서기
  • 1984–1985CPSU 중앙위 조직당사업부 과장
  • 1985–1990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
  • 1990–1991КП РСФСР 중앙위 제1서기 · CPSU 정치국 위원

콘드라트 지그문도비치 테레흐

Кондрат Зигмундович Терех

소비자협동조합 출신의 마지막 소련 무역장관

1987년 설탕 비축량 감소를 정부에 보고하며 소비 위기의 수치를 제시했다.

콘드라트 테레흐는 벨라루스 소비자협동조합의 현장 회계원으로 출발해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소련의 마지막 무역장관(1986~91)까지 오른 경제 관료였다. 계획경제가 무너지는 순간까지 연방의 소비재 유통을 책임진 그는, 배급과 부족이 일상이 된 소비 위기의 최전선에 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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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4농촌 소비자협동조합 수석 회계원
  • 1954–1958소련 해군 복무
  • 1959–1963빌레이카 시 식품무역국장
  • 1967–1977민스크주 무역국장 및 벨코옵소유즈 제1부의장
  • 1977–1984벨코옵소유즈 의장
  • 1984–1986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91소련 무역장관
  • 1992–대외경제협회 회장

게오르기 페트로비치 라주몹스키

Георгий Петрович Разумовский

페레스트로이카 인사교체의 설계자, 마지막 생존 정치국원

1989년 1월, 빌뉴스 시당은 보고선거 비판에 대한 답변을 두 번째로 요구했으나 라주몹스키의 답변은 없었고, 그해 12월 리투아니아 공산당은 독자노선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1985~1988)과 당건설간부정책위원회 위원장(1988~1990)을 맡아 페레스트로이카 최대 규모의 간부 교체를 주도한 당 조직·인사 책임자였다. 농학자 출신으로 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1983~1985)를 거쳐 1986년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에 발탁되었다. 당내 민주화를 내세운 고르바초프 아래에서, 라주몹스키가 중앙에서 내려보낸 엄격한 대의원 할당은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반발과 분리 독립을 촉발한 연쇄 요인이 되었다. 상하이 총영사(1990~1992)를 지냈고, 2025년 현재 1986년 정치국원 중 유일한 생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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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쿠반농업대학 졸업, 콜호스 농학자
  • 1959–1961콤소몰 구역위 제1서기
  • 1964–1967코레놉스크 구역당 제1서기
  • 1967–1971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조직당사업부장
  • 1971–1973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문장
  • 1973–1981크라스노다르 지방집행위원회 의장
  • 1981–1983소련 각료회의 사무국 농업부장
  • 1983–1985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
  • 1985–1988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리가초프 후임)
  • 1986–1990중앙위 서기
  • 1988중앙위 당건설간부사업부장
  • 1988–1990당건설간부정책위원회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 1990–1992주상하이 소련 총영사

그리고리 페트로비치 하르첸코

Григорий Петрович Харченко

숨가이트의 참상을 목격한 조직당사업부 부장, "우리는 하루 늦었다"

고르바초프는 우리가 세 시간 늦었다고 말하지만, 전혀 아니다. 우리는 하루 늦었다! 하루 종일 군대 파견 결정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소련 철도 기술자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장(1987~1988)을 지냈다. 1988년 2월 28일 밤 KGB 부의장 필리프 봅코프와 함께 숨가이트에 도착, 사흘간의 포그롬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중앙의 대응이 '세 시간이 아니라 하루 늦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자포리자 주당 제1서기(1988~1990)와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정치국원(1990~1991)을 지냈으며, 소련 해체 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상품생산자연합 부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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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모스크바철도공학원 졸업, 자포리자 전기기관차수리공장 근무
  • 1960–1967콤소몰 서기 → 자포리자 주 콤소몰 제1서기
  • 1967–1974레닌 구 당 제1서기 → 자포리자 시집행위 의장
  • 1974–1986자포리자 주당 산업담당 서기 → 제2서기
  • 1987–1988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장
  • 1988.02볼스키 조에 합류, 숨가이트 파견
  • 1988–1990자포리자 주당 제1서기
  • 1990–199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정치국원

발레리 알렉세예비치 레가소프

Валерий Алексеевич Легас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36–1988 ✕ 자살

체르노빌 현장에서 60일을 보내고, 은폐된 진실을 테이프에 녹음한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과학자

“나는 빈에서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전한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소련의 무기화학자 발레리 레가소프는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제1부소장으로서 1986년 4월 26일 저녁 체르노빌 참사 현장에 처음 도착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정부위원회에서 과학적 수습을 이끌며 붕소·모래 투하를 제안했고, 빈 IAEA 회의에서 5시간에 걸친 보고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으나 원자로 설계 결함의 전모를 밝히지 못했다. 사고 2주기 다음날인 1988년 4월 27일 자택에서 목을 매 숨졌으며, 유서처럼 남긴 오디오 테이프에는 소련 원자력 체계의 은폐와 부실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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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1964엔지니어 → 교대조장, 시베리아 화학콤비나트 (톰스크-7)
  • 1964–1972연구원, 쿠르차토프 연구소; 1967년 화학 후보박사, 1972년 화학 박사
  • 1972–1983과학 담당 부소장, 쿠르차토프 연구소
  • 1981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3–1988제1부소장, 쿠르차토프 연구소; 방사화학·화학기술 학과장, 모스크바 국립대
  • 1986–1988정부위원회 위원, 체르노빌 사고 수습

율리 알렉산드로비치 크비친스키

Ю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вицинский

그로미코의 후계 외교관, '숲속 산책'으로 기억된 군축 협상가

1982년 7월 16일, 크비친스키는 제네바 외곽 숲에서 미국 협상가 폴 니츠와 단둘이 거닐며 중거리핵 감축 타협안을 모색했다. 양국 정부가 거부했지만, 이 대화는 리 블레싱의 브로드웨이 연극 『숲속 산책』으로 되살아났다.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키운 소련의 독일 전문 외교관으로, 30년 넘게 대서방 외교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1981년 제네바 중거리핵전력(INF) 협상 소련 수석대표로서, 1982년 7월 미국 측 폴 니츠와의 비공식 '숲속 산책' 회담은 냉전 군축사의 상징이자 후일 브로드웨이 연극의 소재가 되었다. 1986~1990년 주서독 대사로 독일 통일 '2+4 조약' 준비에 참여했고, 1991년 소련 외무부 제1차관으로 유럽 안보를 총괄했다. 소련 붕괴 후 1997년 주노르웨이 대사로 복귀, 2003년부터 사망 시까지 공산당 소속 국가두마 의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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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5주동독 소련대사관 통역·무관·3등서기관·2등서기관
  • 1965–1978소련 외무부 제3유럽국 2등서기관·1등서기관·전문고문·부국장
  • 1978–1981주서독 소련대사관 공사참사관
  • 1981–1986소련 외무부 특명전권대사·제네바 핵군축 협상 소련 대표단 단장
  • 1986–1990주서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CPSU 중앙위원회 위원후보(1986~89)·위원(1989~90)
  • 1990–1991소련 외무부 차관
  • 1991소련 외무부 제1차관 (5월–9월)
  • 1997–2003주노르웨이 러시아 특명전권대사
  • 2003–2010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제4·5대), 국제문제위원회 제1부위원장

스타니슬라프 이바노비치 구렌코

Станислав Иванович Гуренко

소련 해체 직전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마지막 제1서기

1990년 6월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된 직후 중앙위원회에서 한 연설: "우리는 당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절로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우크라이나를 정치적 실험의 장으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기계공학자 출신으로 도네츠크 기계제작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공장장까지 오른 테크노크라트였다. 1976년 당 관료로 전환하여 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 위원회 서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을 거쳤으며,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피해 수습에 참여했다. 1990년 6월 고르바초프의 신임 속에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에 올랐으나, 이듬해 8월 쿠데타 실패 직후 당 활동이 금지되면서 사임했다. 소련 해체 후에도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과 경제정책위원장을 지내며 구 공산당 계열 정치세력의 재편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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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76도네츠크 기계제작공장 기술자 → 공장장 (1970–1976)
  • 1976–1980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 위원회 서기
  • 1980–1987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 1986체르노빌 사고 국가위원회 부위원장
  • 1987–199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제2서기
  • 1990–199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
  • 1998–2006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의원 (제3·4대), 경제정책위원회 위원장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레벤코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Ревенко

키예프 주당위 지도자에서 고르바초프 마지막 비서실장까지

1990년 고르바초프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날, 레벤코를 불러 "소비에트 백만장자를 보고 싶나?"라고 한 뒤 상금 전액을 아동 종양센터와 체르노빌 지역에 배분했다. 다 쓴 뒤 고르바초프가 말했다: "이제 백만장자는 없네."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 당·국가 관료로, 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에서 소련 해체기 고르바초프 대통령 비서실장(대통령장)으로 옮겨가며 당권에서 대통령제로 넘어가는 행정 전환을 실무적으로 떠받쳤다. 콤소몰과 당 기구를 거쳐 1985년 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 1986년 CPSU 중앙위 위원이 되었다. 1990년 대통령자문위원회 위원을 거쳐 1991년 8월 대통령장으로서 고르바초프의 최측근 비서실장 역할을 했다. 소련 해체 후 고르바초프 재단 부총재로 일하다 키예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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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1오데사 냉동기계공장 기술자
  • 1961–1972오데사 콤소몰 지도부, 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 서기
  • 1972–198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감사원, 키예프 주당위 서기·제2서기
  • 1980–1984우크라이나 SSR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우크라이나 공산당 감사위원회 의장
  • 1984–1985CPSU 중앙위 감사원, 조직당사업부 부부장
  • 1985–1990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
  • 1990–1991소련 대통령자문위원회 위원
  • 1991–1992소련 대통령장

이고르 니콜라예비치 로디오노프

Игорь Николаевич Родион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6–2014 ○ 병사

트빌리시 유혈 진압의 작전 명령을 내린 장군

「단 한 명의 시위자도 삽날에 죽지 않았습니다. 소브차크 씨가 그루지야 파시스트들과 함께 지어낸 것입니다」

자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시절인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루스타벨리 대로에서 독립 요구 집회를 해산하라는 작전 명령을 내려 21명의 민간인 사망을 초래했다. 소브차크 위원회가 로디오노프를 지목했으나, 명령 계통의 위쪽은 야조프 국방장관과 공화국 당 지도부로 이어져 있었고 그는 그 구조 속에서 유일하게 공개 책임을 진 인물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제40군 사령관을 거쳐 1996년 러시아 국방장관에 임명됐으나 예산과 군 개혁 방향을 놓고 옐친 진영과 충돌해 10개월 만에 해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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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70오룔 기갑학교 졸업, 주독 소련군 복무, 말리놉스키 기갑아카데미 금메달 졸업
  • 1970–1980제24 '철의' 차량화소총사단 연대장·부사단장·사단장 역임. 참모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80–1986제28군단장(체코슬로바키아), 제5군 사령관(극동), 아프가니스탄 주둔 제40군 사령관
  • 1986–1989모스크바군관구 제1부사령관, 이후 자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집회 해산 지휘
  • 1989–1997참모아카데미 원장(1989~96). 러시아 국방장관(1996~97), 군 예산을 정부 개혁안에 종속시키길 거부해 해임

뱌체슬라프 프란체비치 케비치

Вячаслаў Францавіч Кебіч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벨라루스 벨라루스 1936–2020 ○ 코로나19

소련 종말 문서에 서명하고서 '러시아만 미리 알고 왔다'고 증언한 벨라루스 초대 총리

「나도, 슈시케비치도, 크랍추크도, 포킨도 그런 문서가 준비되어 서명될 줄은 몰랐다」: 러시아만 벨로베시 협정의 계획을 미리 알고 왔다고 주장한 케비치

벨라루스 폴리테크닉 대학 출신의 기계공학자로, 민스크 공장들에서 경력을 쌓아 벨라루스 공산당과 각료회의 의장(1990) 자리까지 올랐다. 1991년 12월 슈시케비치와 함께 벨로베시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 해체의 공동 서명자가 되었고, 훗날 '러시아 대표단만 사전 계획을 가지고 왔으며 우리는 그 문서가 준비될 줄 몰랐다'고 증언하여 회동의 즉흥성과 준비성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1994년 대선에서 루카셴코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고, 이후 루카셴코의 친러·개헌 노선을 지지하는 의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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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벨라루스 폴리테크닉 대학 기계공학부 졸업
  • 1958–1973민스크 자동라인 공장 기술자, 작업반장, 부수석기사
  • 1973–1980민스크 키로프 공작기계 공장 수석기사, 공장장, 생산연합 총책임자
  • 1980–1985벨라루스 공산당 민스크 시당 제2서기, 중앙위 부장, 민스크 주당 제2서기
  • 1985–1990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 1990–1994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의장 / 벨라루스 총리
  • 1996–2004벨라루스 하원 의원

니콜라이 막시모비치 포민

Николай Максимович Фомин

파괴된 원자로를 인정하지 않고 물을 주입시킨 최종 기술책임자

그는 재판을 앞두고 안경을 깨뜨려 그 파편으로 손목을 그었다. 법정은 한 번 연기되어야 했다.

니콜라이 포민은 1972년 체르노빌 원전에 입사하여 1981년 주임기사로 승진한 소련의 원자력 기술자였다. 1986년 4월 26일 폭발 직후 현장에 도착한 그는 원자로가 파괴되었다는 보고를 끝내 믿지 않고, 파손된 4호기에 수시간 동안 냉각수를 계속 주입하도록 강행했으며 부하 직원을 치사량의 방사선에 노출되는 정찰 임무에 보냈다. 사고 후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재판 전 자살 시도와 정신병원 수용 끝에 조기 석방되었고 이후 칼리닌 원전에서 근무하다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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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체르노빌 원전 입사
  • 1981–1986체르노빌 원전 주임기사
  • 198710년 노동교화형 선고, 수감
  • 1988정신병원 이송, 조기 석방
  • 1990s–2000s칼리닌 원전 근무
  • mid-2000s은퇴, 우도믈랴 거주

바딤 빅토로비치 바카틴

Вадим Викторович Бакатин

KGB를 해체하도록 임명된 마지막 의장

「체키즘의 전통은 근절되어야 하며, 이데올로기로서 존재를 멈춰야 한다」 — 1992년 회고록 『KGB로부터의 해방』에서, 루뱐카를 해체한 마지막 의장이 남긴 선언.

건설기사 출신으로 고르바초프의 신임을 받아 소련 내무장관(1988–1990)과 마지막 KGB 의장(1991년 8월–11월)을 지냈다. 8월 쿠데타 실패 후 크류치코프의 후임으로 KGB를 맡아 외부정보·통신·국경수비대를 분리하고 기관을 해체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남은 조직을 대통령 직속의 소규모 정보기관으로 재편했다. 1991년 12월 미국 측에 모스크바 대사관 도청 장치의 설계도를 넘겨 보수 진영으로부터 '매국'이라는 맹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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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73케메로보 건설현장 기술자·관리자
  • 1973–85케메로보 시·주 당 간부, CPSU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85–87키로프 주당위 제1서기
  • 1987–88케메로보 주당위 제1서기
  • 1988–90소련 내무장관
  • 1991.3–8소련 대통령 직속 안전보장회의 위원
  • 1991.8–11KGB 의장 (마지막)
  • 1991.11–92.1공화국간보안국(MSB) 국장
  • 1992–97레포르마 재단 부총재

발렌티나 블라디미로브나 테레슈코바

Валентина Владимировна Терешкова

직공 출신 첫 여성 우주인, '차이카'

발사대 앞에서: 「에이, 하늘! 모자 벗어!」 — 마야콥스키의 시구를 외치며, 1963년 6월 16일.

1963년 보스토크 6호로 세계 최초 여성 단독 우주비행. 직물 공장 여공 출신으로 71시간 49바퀴를 홀로 비행하며 프롤레타리아 여성 해방의 상징이 된 '차이카'. 후에 러시아군 최초 여성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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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60타이어 공장·직물 공장 노동자, 야간학교·통신기술학교 졸업
  • 1959–61야로슬라블 비행클럽 낙하산 훈련 (90회)
  • 1962.3여성 우주비행사단 선발 (5인)
  • 1963.6.16–19보스토크 6호: 첫 여성 우주비행, 71시간 단독비행
  • 1966–89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간부회의 위원 (1974–89)
  • 1968–87소비에트 여성위원회 위원장
  • 1969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기술과학 후보·교수
  • 1971–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7–92소비에트 해외우호문화교류협회연합 의장
  • 2011–현재통합러시아당 국가두마 의원
  • 1995/2025소장·중장 진급: 러시아군 최초 여성 장군

발렌틴 알렉산드로비치 쿱초프

Валенти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упцов

러시아 공화당을 재건한 마지막 세대 서기

1991년 10월 25일, 당 활동 정지 일주일 후 쿱초프는 크렘린에서 옐친을 만나 러시아 공산당 금지령을 철회해 달라고 설득했다. 옐친은 듣지 않았고, 쿱초프는 이후 1년 반 동안 '지하 제1서기'로서 당을 복원대회까지 이끌었다.

볼로그다주 집단농장과 제철소를 거쳐 올라온 금속공학자 출신 당 간부로, 1985년부터 5년간 볼로그다주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90년 CPSU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어 사회정치조직 담당 부서를 이끌었고, 러시아 공화국 공산당(КП РСФСР) 창립 작업에 참여했다. 1991년 8월 이반 폴로스코프의 후임으로 КП РСФСР 제1서기에 선출되었으나, GKChP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음에도 사건 직후 '쿠데타 공모'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옐친의 당 활동 금지령 이후에도 지하에서 조직을 유지하며 1993년 КПРФ 복원대회를 주도했고, 이후 11년간 쥬가노프의 제1부의장으로서 신생 러시아 공산당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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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58볼로그다주 콜호스 노동자 · 독서실장 · 군 복무
  • 1958–1974체레포베츠 제철소 압연공 · 현장감독 · 당위원회 서기
  • 1974–1979체레포베츠 시당 제1서기
  • 1979–1984볼로그다 시당 제1서기
  • 1984–1985볼로그다 주당 제2서기
  • 1985–1990볼로그다 주당 제1서기
  • 1989–1991소련 인민대의원
  • 1990–1991CPSU 중앙위 서기 · 사회정치조직 담당
  • 1991.8–11КП РСФСР 중앙위 제1서기
  • 1993–2004КПРФ 중앙위 제1부의장
  • 1995–2011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II–V 소집)

보리스 카를로비치 푸고

Борис Карлович Пуго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라트비아 1937–1991 ✕ 자살, 발사 순서는 논쟁 중

라트비아 KGB에서 소련 내무장관까지, 쿠데타가 무너뜨린 질서의 수호자

체포영장이 발부된 1991년 8월 22일 자택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서에 「나는 정직하게 살았다」고 썼다. 발사 순서는 사료가 엇갈리며, 검찰은 그가 먼저 쐈다고, 야블린스키의 목격 진술은 아내가 마지막에 쐈다고 본다.

라트비아인 공산주의자 가정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을 졸업한 뒤 콤소몰과 당 사업을 거쳐 1980~1984년 라트비아 KGB 의장, 1984~1989년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90년 12월 소련 내무장관이 되어 강경 법질서 노선을 폈고,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해 내무기관을 그 결정 실행에 동원했다. 쿠데타가 무너진 8월 22일 모스크바 자택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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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리가 전기기계공장 기술자
  • 1961–1969콤소몰 라트비아 프롤레타르스키 구위원회 서기, 제1서기; 라트비아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1970–1974전연방 콤소몰 중앙위 서기; CPSU 중앙위 감찰원
  • 1974–1976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리가 시당위 제1서기
  • 1976–1980소련 KGB 감찰국 부서장; 라트비아 KGB 제1부의장
  • 1980–1984라트비아 SSR KGB 의장 (소장)
  • 1984–1988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8–1990CPSU 당통제위원회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1989.9–1990.7)
  • 1990–1991소련 내무장관; 안전보장회의 위원 (1991.3–)
  • 1991.8GKChP 위원; 쿠데타 실패 후 자살

블라디미르 마카로비치 벨리치코

Владимир Макарович Величко

소련 후기 중공업을 책임진 기술관료

우스티노프가 박격포 생산을 지시하자 그의 장관 아파나시예프는 '하나라도 만들면 검찰에 넘기겠다'고 경고했다. 벨리치코는 '영웅적인 돌격 작업'으로 결국 납품하고 '신경질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조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레닌그라드 '볼셰비크' 공장 선반공에서 시작해 공장장까지 오른 기술관료로, 1975년부터 1991년까지 에너지·중공업·수송기계 부문 장관과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을 지냈다. 그가 이끈 부처들은 아톰마시 원자력 설비 단지, 12기 이상의 원전용 반응로·터빈 시스템, 대륙간탄도미사일 지상 장비, 우주왕복선 부란의 발사대 등 소련 후기 핵심 에너지·군수 인프라를 구축했다. 1980년대 후반 다른 공업 부처들이 흔들릴 때 그의 부처들은 안정적으로 계획을 완수해 정부가 두 차례나 문제 부처들을 그에게 통합시켰다. 소련 해체 후에도 '탸제네르고마시' 그룹을 이끌며 러시아 산업정책에 원로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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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5레닌그라드 '볼셰비크' 공장 선반공
  • 1955–1962레닌그라드 기계공학대학에서 기계공학 전공
  • 1962–1971'볼셰비크' 공장 기술자 → 부서장 → 생산담당 부공장장
  • 1971–1975레닌그라드 '볼셰비크' 공장장
  • 1975–1983소련 에너지기계공업부 제1차관
  • 1983–1987소련 에너지기계공업부 장관
  • 1987–1989소련 중공업·에너지·수송기계공업부 장관
  • 1989–1991소련 중공업부 장관
  • 1991.1–8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91–2016'탸제네르고마시' 회장 → AO '텐마' 회장 → FPG 회장

빅토르 페트로비치 폴랴니치코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Поляничко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7–1993 ✕ 암살, 미해결

해체기의 현장 집행자

흑색 1월 뒤 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조직위원회를 직접 이끌며 모스크바의 현장 대리인이 되었다.

빅토르 폴랴니치코는 소련 공산당의 조직가이자 국제 공산주의권의 정치 고문으로, 아프가니스탄과 남캅카스에서 모스크바의 정책을 현지 권력으로 옮긴 인물이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2서기로서 그는 흑색 1월 이후 바쿠의 통치력을 회복하려 했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조직위원회를 이끌며 군대와 당 기구를 결합한 강경한 질서를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분쟁을 억누른 중재자이자 강압을 동원한 중앙의 대리인으로 상반되게 기억된다. 소련 붕괴 뒤 러시아 부총리급 임시행정 책임자가 되었으나 1993년 북오세티야에서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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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4오르스크 시 콤소몰 제1서기
  • 1965–1971첼랴빈스크 주 콤소몰 제1서기
  • 1972–1978오렌부르크 주 공산당 서기
  • 1978–1985소련 공산당 중앙위 선전 부문 책임자
  • 1985–1988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련 공산당 정치고문
  • 1988–199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90–1991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 조직위원회 위원장
  • 1993러시아 임시행정 수반, 부총리급

발렌틴 세르게예비치 파블로프

Валентин Сергеевич Павл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7–2003 ↓ 체포 1991

소련의 마지막 총리, 8월 쿠데타 가담자

총리 취임 8일 뒤인 1991년 1월 22일 저녁, 파블로프는 50루블·100루블 지폐를 사흘 안에 새 지폐로 교환하라고 명령하고 1인당 1,000루블까지만 즉시 교환하게 했다. 그보다 앞서 화폐개혁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모스크바금융대학을 1958년에 졸업하고 러시아연방과 소련의 재무부에서 일했으며, 1962년 당에 입당해 1979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계획위원회의 재정·가격 부문을 이끌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 국가가격위원회 의장, 1989년부터 1991년 1월 14일까지 재무장관을 지냈고, 같은 날 각료회의가 내각으로 개편되며 고르바초프가 그를 총리로 임명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조직에 가담했고, 8월 22일 면직령과 8월 23일 체포로 수감되었으며, 8월 28일 최고회의가 사임을 확인했다. 1993년 1월 석방되고 1994년 2월 사면된 뒤 은행장과 자문으로 일했으며, 2003년 3월 30일 65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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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1–8총리

올레크 세묘노비치 셰닌

Олег Семёнович Шенин

소련을 지키려다 감옥으로 간 마지막 정치국원

패배 직후 셰닌에게 돌려진 말로, 언론 보도에 따르면 GKChP 위원들은 가장 큰 실수를 했다. 'A'라고 말하고서 'B'와 나머지 알파벳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1937년 스탈린그라드주에서 태어나 1958년 자기 공사현장에서 노동자 두 명이 숨진 안전규정 위반으로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9개월 반을 복역한 뒤 조기 석방되었다. 1962년 당에 입당해 아친스크 시당 제1서기(1974–1977), 아프가니스탄 당 고문(1977–1983),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 제1서기(1987–1990)를 지냈다. 1990년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으로 당 조직·인사 업무를 총괄해 고르바초프와 이바시코에 이은 당내 3인자로 불렸고, 1991년 8월 18일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 GKChP를 지지했다가 8월 23일 체포되었다. 1992년 10월 건강을 이유로 석방되고 1994년 2월 사면되었으며, 2009년 5월 28일 71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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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CPSU 입당
  • 1974–1977아친스크 시당 제1서기
  • 1977–1983하카스 주당 제2서기 → 아프가니스탄 당 고문
  • 1985–1987하카스 주당 제1서기
  • 1987–1990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 제1서기
  • 1990–1991CPSU 정치국원·중앙위 서기 (조직당사업)
  • 1993–2001СКП-КПСС 평의회 의장
  • 2004–2009재건 КПСС 의장

유리 드미트리예비치 마슬류코프

Юрий Дмитриевич Маслюков
경제·재정·계획 소련 국가기관 소련 타지키스탄 1937–2010 ↓ 해임 1991 · 병사

소련 말기의 마지막 고스플란 세대

1998년 금융위기 속에서 옐친이 그에게 총리직을 제안했지만, 마슬류코프는 거절했다. "나는 프리마코프의 제1부총리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소련 계획경제의 마지막 책임자였던 그는 권력 자체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택했다.

타지키스탄 레니나바드 출신의 엔지니어로, 이젭스크 방산 공장에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기술관료로 성장했다. 1988년 고스플란 의장과 정치국 위원(1989)을 지낸 마지막 계획경제 책임자였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프리마코프 내각 제1부총리(1998~1999)로 금융위기를 수습했다. 이후 공산당 두마 의원으로 2010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한, 소련 계획관료 세대와 탈소비에트 산업정치를 잇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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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s–1970s방위산업과 국가계획기관에서 기술관료로 성장
  • 1980s군수공업위원회와 계획기관에서 말기 소련 산업정책에 관여
  • 1988–1991국가계획위원회 의장, 계획경제 해체 국면을 관리
  • 1991 이후러시아 정치와 경제 관료제에서 계속 활동
  • 1998–1999러시아 정부에서 위기기 경제정책에 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