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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 인물 133명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젠지노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Зензинов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 1880–1953 ○ 자연사

망명과 기록으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킨 사회혁명가

유배지 루스코예 우스티예에 도착한 젠지노프는 일기에 썼다: '이곳은 물론 러시아지만, 17세기, 어쩌면 16세기의 러시아다.'

블라디미르 젠지노프는 러시아 사회혁명당의 중앙위원이자, 세 차례의 시베리아 유배를 북극 시베리아의 민족지·조류학 연구로 바꿔낸 언론인이었다. 1918년 사마라 제헌의회 위원회와 우파 디렉토리에서 볼셰비키와 콜차크 사이의 민주적 대안을 지지하다가 옴스크 쿠데타로 추방당했고,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혁명과 내전의 경험을 기록하는 망명 언론인으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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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사회혁명당 입당
  • 1905–1906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 활동, 모스크바 봉기 참여
  •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
  • 1917–1918제헌의회 의원, 사마라 제헌의회 의원위원회 위원
  • 1918우파 디렉토리 위원
  • 1918–1919옴스크 쿠데타 뒤 체포·중국 추방
  • 1919–1939유럽 사회주의 망명 언론 활동
  • 1940–1953뉴욕에서 망명 언론인·회고록 작가

뱌체슬라프 알렉세예비치 카르핀스키

Вячеслав Алексеевич Карпинский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80–1965 ○ 자연사

레닌의 신임을 받은 볼셰비키 언론인, 68년 당원

1917년 1월, 레닌이 올가 라비치에게 격앙된 편지를 쓰자 카르핀스키는 "이건 욕설입니다"라고 직언했다. 레닌은 후일 이네사 아르만트에게 "카르핀스키가 내 편지를 욕설이라고 하더군. 사과 편지를 써야겠어"라고 털어놓았다.

1898년 입당한 최고참 볼셰비키로, 제네바 망명 시절 레닌 직속에서 당 기관지를 편집했다. 혁명 후 《베드노타》 편집장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선전부장으로 농민·대중 선전의 제도적 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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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898펜자에서 중등학생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선전 활동
  • 1898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7세)
  • 1899–1902하리코프대학 의학부에서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조직, 체포·유형
  • 1904–1917제네바 망명, 레닌 지도 아래 《전진》·《프롤레타리》·《사회민주주의자》 편집
  • 1917–1918귀국, 《농촌의 진리》 편집,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선전교도부장
  • 1918–1922《베드노타》 편집장, 선전선 '붉은 별' 호에서 신문 발행
  • 1918–1927《프라우다》 편집위원,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1~7기 위원
  • 1936–193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기구에서 근무
  • 1937–1965학술·문필 활동 전념, 레닌·당사 연구, 경제학 박사, 사회주의노동영웅(1962)

루쉰

鲁迅
문학·예술 중국 중국 1881–1936 ○ 결핵

『아Q정전』의 작가, 신문화운동의 비판정신을 좌익작가연맹으로 이어 간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

1918년 「광인일기」로 백화문학을 열고, 의학을 버리고 문학으로 돌아선 저장 사오싱 출신의 작가. 신문화운동의 비판정신을 좌익 문예운동으로 이어 갔다.

저장 사오싱 출신으로 일본에서 의학을 배우다 「국민의 정신을 고치겠다」며 문학으로 돌아섰다. 1918년 『신청년』에 발표한 「광인일기」는 최초의 백화 단편으로, 이어 「아Q정전」에서 낡은 사회의 정신적 노예상태를 그렸다. 1927년 이후 상하이에서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번역하고 1930년 좌익작가연맹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으나 공산당원은 아니었다. 1936년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마오는 그를 「중국 문화혁명의 주장(主將)」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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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6베이징대학 강사
  • 1930–1936중국좌익작가연맹 지도자

올가 다비도브나 카메네바

Ольга Давыдовна Каменева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인 1883–1941 ✕ 처형

트로츠키의 동생이자 카메네프의 아내: 소비에트 문화외교의 첫 설계자

1927년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크렘린에서 그녀를 방문한 후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올가 다비도브나 자신은 활기차고 쾌활하며 다소 미국식의 숙녀처럼 보였다.'

러시아 혁명운동에 투신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문화 행정가로, 레프 트로츠키의 여동생이자 레프 카메네프의 첫 번째 아내였다. 1918년 교육인민위원부 연극부(TEO) 책임자로서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와 함께 러시아 연극의 볼셰비키화를 추진했으며, 1925년부터 1928년까지 대외문화교류협회(VOKS) 회장으로서 르 코르뷔지에와 시어도어 드라이저 등 서구 지식인들을 소련으로 초청하며 소비에트 문화외교의 틀을 구축했다. 1920년대 모스크바에서 주요 문학 살롱을 운영했고 당 여성부 이사로도 활동했으나, 1927년 남편과 오빠가 권력에서 밀려난 후 모든 직위를 상실했고 1941년 오룔 근교 메드베데프 숲에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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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8–1919교육인민위원부 연극부(TEO) 책임자
  • 1919–1920s당 여성부 이사
  • 1921–1923기근후유증대책중앙위원회 주요 위원
  • 1923–1925대외구호위원회(KZP) 위원장
  • 1925–1928대외문화교류협회(VOKS) 회장
  • 1927남편과 오빠의 몰락으로 모든 직위 상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문학·예술 러시아 러시아 1883–1945 ○ 폐암

망명에서 돌아와 스탈린 문학의 기둥이 된 붉은 백작

“소비에트 정부 외에 러시아의 진정한 친구는 세상에 없다.” — 전시 연설, 1941

톨스토이 가문의 백작으로 혁명 후 백군 편에 섰다가 1919년 망명했다. 파리와 베를린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923년 귀환, '붉은 백작'으로 불리며 체제의 총애를 받았다. 3부작 『고난의 길』과 미완의 『표트르 1세』로 스탈린상을 세 차례 수상했고, SF 고전 『아엘리타』『가린 씨의 쌍곡면』을 남겼다. 전시에는 60여 편의 애국 선전문을 썼으며 1941년 스탈린의 붉은광장 연설문을 기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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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시집 『서정』으로 데뷔, 『절름발이 지주』 등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문단 진입
  • 1918–1923오데사→콘스탄티노플→파리→베를린 망명; 『아엘리타』『니키타의 유년』 집필
  • 1923소련 영구 귀환 — '귀환 망명자'의 상징으로 체제의 환대를 받음
  • 1930–1941『표트르 1세』 집필, 3부작 『고난의 길』 완성; 1936–38년 고리키 사후 작가동맹 임시 수장
  • 1939소련 과학원 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41–1943스탈린상 2회 수상; 상금 10만 루블로 전차 건조 기부
  • 1941–1945종군기자로 60여 편의 전선 에세이, 「러시아인의 성격」 발표
  • 1945『이반 뇌제』 희곡으로 사후 스탈린상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알렉산드로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83–1946 ○ 급사

성가대 소년에서 소련 국가 작곡가로, 붉은 군대 합창단 창시자

1941년 6월 26일, 「신성한 전쟁」을 벨로루스키 역에서 처음 연주하자 병사들은 침묵했다가 다섯 번이나 앙코르를 요청했다.

랴잔 농민 가정 출신으로 카잔 대성당 소년 성가대에서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글라주노프와 바실렌코에게 배웠고, 혁명 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서 소비에트 합창 교육의 기초를 닦았다. 1928년 붉은 군대 노래와 춤 앙상블(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을 창설, 남성 합창과 민속·교향 혼성 오케스트라, 발레를 결합한 군사 문화 기관을 수립했다. 1941년 독소전 발발 사흘 만에 「신성한 전쟁」을 작곡, 붉은 군대의 비공식 진군가가 되었다. 1943년 「볼셰비키 당 찬가」 선율을 소련 국가로 발전시켰으며, 이 멜로디는 2000년 러시아 연방 국가로 재도입되었다. 교회 전례음악에서 소비에트 국가의 장엄한 음악적 표상으로 나아간 독특한 궤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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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 합창대 지휘자 과정 졸업, 지휘자(레겐트) 자격 취득
  • 1913모스크바 음악원 작곡과 졸업(대은메달)
  • 1918–1922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합창 지휘자
  • 1922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 1928–1946붉은 군대 노래와 춤 앙상블(알렉산드로프 앙상블) 창설·음악 감독·예술 총감독·수석 지휘자
  • 1940모스크바 음악원 지휘·합창 학부장, 예술학 박사
  • 1943소장(генерал-майор) 계급 수여
  • 1944소련 국가 음악 공식 채택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글라드코프

Фёдор Васильевич Гладков
문학·예술 소비에트 러시아인 1883–1958 ○ 식도암

시멘트 공장의 재건을 통해 소비에트 산업소설의 길을 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고전 작가

이것이 노동자의 러시아다. 이것이 우리다. 인류가 수 세기 동안 꿈꿔온 신세계다. — 『시멘트』에서

구교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와 지하 혁명가로 청년기를 보낸 글라드코프는, 내전기 노보로시스크 시멘트 공장 재건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25년 『시멘트』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파괴된 공장의 복구를 통해 혁명 이후 소비에트 사회의 계급·젠더·관료적 갈등을 형상화한 최초의 소비에트 산업소설로,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전이자 생산소설의 원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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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사회혁명당 선전활동 시작
  • 1906RSDLP 가입, 이르쿠츠크주 만주르카로 4년 유형
  • 1910쿠반주 파블롭스카야 초등학교장
  • 1918–1920붉은 군대 복무, 노보로시스크 교육 책임자
  • 1920–1921『크라스노예 체르노모리예』 편집자
  • 1921–1925『노비 미르』 서기, 문학그룹 '쿠즈니차' 활동
  • 1925『시멘트』 발표 —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념비적 작품
  • 1932–1938『에네르기야』 집필 —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건설 형상화
  • 1941–1943『프라우다』·『이즈베스티야』 특파원 (우랄)
  • 1945–1947고리키 문학대학 학장
  • 1949–1954자전적 3부작 발표, 스탈린상 2회 수상
  • 1958모스크바에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보론스키

Александ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Воронский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84–1937 ✕ 처형

《크라스나야 노비》 편집장, 바벨·파스테르나크를 발굴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1921년 크렘린의 레닌 자택. 《크라스나야 노비》 창간 회의에서 고리키가 인도 설화집을 보이자 레닌은 "이걸 황금 외화로 사고 있다. 올해는 기근이 든다"고 잘랐다. 보론스키는 이렇게 회고했다: "두 진리가 충돌했다 —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와 '그러나 빵이 없다면'."

《크라스나야 노비》를 창간해 바벨·파스테르나크를 발굴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예술을 삶의 인식으로 보는 미학으로 RAPP에 맞서 페레발을 이끌었다. 좌익반대파 가담 후 1937년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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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탐보프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06–1910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1년 독방, 야렌스크 2년 유형
  • 1912프라하 당대회 대의원; 서기로 회의록 작성, 대중노동자신문 창간 주장
  • 1917–1920오데사 소비에트 집행위원,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당위원장,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 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 1921–1927《크라스나야 노비》 창간·편집장; 《프로제크토르》 편집; 출판사 '크루크' 설립; 문학그룹 '페레발' 결성·주도
  • 1923'46인 성명' 서명, 좌익반대파에 가담
  • 1927–1930트로츠키주의 혐의로 출당, 리페츠크 유배; 1929년 반대파 활동 철회 선언, 1930년 복당
  • 1930–1935국립문학출판사 고전문학부 편집자; 자전적 소설 집필
  • 1937대숙청 중 체포(2월 1일), 스탈린 서명 사형명단 등재, 8월 13일 15분 재판 후 총살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틴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Замятин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84–1937 → 사망

금지된 미래의 설계자

1931년 6월, 자먀틴은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작가인 나에게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사형 선고와 같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그는 소련을 떠날 허가를 받아냈다.

볼셰비키였던 해군기술자·작가는 통제와 순응의 미래를 『우리들』에 그렸다. 이 소설은 소비에트 검열이 금지한 첫 작품이 되었고, 그는 작가로서의 삶이 불가능해진 뒤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 출국 허가를 받았다. 파리 망명 중에도 소련 여권을 지키며 1935년 반파시스트 작가대회에 소련 대표로 참석했으나, 결국 조국 밖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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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기술자 생활
  • 1921『우리들』 완성과 금지
  • 1920년대풍자소설·문학비평 활동
  • 1931출국 허가
  • 1932–1937파리 망명 생활

블라디미르 예브그라포비치 타틀린

Владимир Евграфович Татлин
문학·예술 소비에트 러시아 1885–1953 ○ 사망

건설되지 않았지만 혁명적 유토피아의 가장 지속적인 상징이 된 탑의 창조자

1920년 베를린 다다 전시회에서 게오르크 그로스와 욘 하트필드는 '예술은 죽었다 — 타틀린의 새 기계 예술 만세!'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섰다.

러시아 및 소비에트 화가, 건축가, 무대 디자이너로,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함께 1920년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양대 거장이었다. 1919-1920년에 설계한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타틀린의 탑)는 에펠탑보다 높은 400미터의 나선형 철골 구조물로, 코민테른의 본부로 구상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한 채 혁명적 건축의 상징으로 남았다. 1914년부터 선보인 '반(反)부조'는 목재와 금속 등 산업 재료로 제작된 3차원 구성물로, 구축주의의 선구적 작업이었다.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득세하며 공식 후원을 잃었으나, 1960년대에 재평가되어 그의 탑은 혁명적 예술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미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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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모스크바에서 성상 화가로 경력 시작
  • 1913파리에서 피카소의 작업실 방문, 구호부조 제작 시작
  • 1915마지막 미래파 전시 '0.10'에서 반(反)부조 전시
  •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기념비(타틀린의 탑) 설계 및 모형 전시
  • 1925–1927키예프 예술대학 교수
  • 1927–1930모스크바 브후테마스 교수
  • 1930–1932개인 비행 장치 '레타틀린' 제작
  • 1948반공산주의적이라는 비판으로 해고, 그러나 숙청되지 않음

애나 루이즈 스트롱

Anna Louise Strong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미국 미국 1885–1970 ○ 자연사

러시아·중국 혁명을 50년간 현장에서 기록한 미국인 저널리스트, 『모스크바 뉴스』 창간자

「우리는 이 나라 노동이 시도한 가장 거대한 행동에 착수하고 있다 — 그 끝은 아무도 모른다!」 1919년 시애틀 총파업 직전 사설

미국 네브래스카 출신 좌파 저널리스트이자 공산주의자. 시카고대 철학 박사 후 시애틀 총파업(1919)을 취재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소련으로 건너가 1930년 영자신문 『모스크바 뉴스』를 창간했다. 1946년 옌안에서 마오쩌둥을 인터뷰해 '모든 반동파는 종이호랑이'라는 유명한 발언을 기록했고, 1949년 소련에서 첩자 혐의로 추방되었다가 1955년 명예 회복 후 중국에 정착했다. 이후 '외국인 친구'로서 문화대혁명기까지 마오의 중국을 취재하며 30권 이상의 저작을 남겼다. 20세기 공산주의 혁명들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서방에 전한 독보적 증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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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네브래스카주 프렌드에서 진보적 목사 가정의 딸로 출생
  • 1908시카고대 철학 박사 — 「기도의 사회심리학」으로 학위 취득
  • 1916–1918시애틀 교육위원 선출 — IWW 지지·반전 활동으로 리콜
  • 1919『시애틀 유니언 레코드』 편집자 — 시애틀 총파업을 현장 취재
  • 1921AFSC 구호단원으로 소련행 — 볼가 기근 구호 참여 후 모스크바 특파원 정착
  • 1930소련 최초 영자신문 『모스크바 뉴스』 창간·편집장
  • 1931소련 농업경제학자 조엘 슈빈과 결혼 (1942년 사별)
  • 1937–1938스페인 내전·중국 항일 근거지 종군 취재
  • 1946옌안에서 마오쩌둥 인터뷰 — 「모든 반동파는 종이호랑이」 발언 기록
  • 1949소련 당국에 체포, 「미국 간첩」 혐의로 추방 — 1955년 명예 회복
  • 1958–1970중국 영구 정착 — 마오·저우언라이와 교류하며 '외국인 친구'로 활동
  • 19703월 29일 베이징에서 심장마비 사망 — 저우언라이·궈모뤄 문상

니콜라이 스테파노비치 구밀료프

Николай Степанович Гумилёв
문학·예술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86–1921 ✕ 처형

아크메이즘을 창시하고 체카의 총에 쓰러진 실버 에이지의 시인

어느 시 낭독회에서 청중이 정치적 신념을 묻자 답했다 — '나는 확고한 군주주의자입니다.'

러시아 실버 에이지의 중심 시인으로, 세르게이 고로데츠키와 함께 아크메이즘을 창시하여 상징주의의 모호한 신비주의를 거부하고 시의 구체성과 장인정신을 강조했다. 아프리카 탐험과 세계대전에 자원 입대한 모험적 삶은 그의 시에 이국적 정취와 영웅적 기풍을 불어넣었으며, 후기작 『불기둥』(1921)에서는 철학적 깊이를 더해 러시아 시의 정점에 이르렀다. 안나 아흐마토바의 첫 남편이자 역사학자 레프 구밀료프의 아버지였으며, 반볼셰비키 신념을 숨기지 않았다. 1921년 타간체프 사건에 연루되어 체카에 체포·처형되었고, 소련에서 1986년까지 금지되었다가 1991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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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첫 시집 『정복자들의 길』 출간
  • 1908『낭만의 꽃』 출간; 파리서 잡지 『시리우스』 발행
  • 1909–1910잡지 『아폴론』 공동 창간; 첫 아프리카 탐험
  • 1911–1912고로데츠키와 『시인들의 길드』 결성, 아크메이즘 선언; 『진주』와 『낯선 하늘』 출간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에 기병으로 자원 입대, 성 게오르기 훈장 2회 수훈
  • 1918–1920『모닥불』·『천막』 출간; 고리키의 『세계문학』 출판사 근무; 전러시아 시인연합 의장
  • 1921『불기둥』 출간; 8월 3일 체포, 8월 26일 처형

존 리드

John Reed
문학·예술 독립 활동 미국 미국 1887–1920 ○ 발진티푸스

볼셰비키 혁명의 목격자에서 미국 공산당 창립자로: 크렘린 성벽에 묻힌 미국인

붉은광장 혁명 희생자 합동 장례식. 리드는 깨달았다. 경건한 러시아 민중은 더 이상 사제가 필요 없었다. 그들은 지상에 어떤 천국보다 찬란한 왕국을 짓고 있었다.

미국 언론인이자 공산주의자. 1917년 10월 혁명을 목격하고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썼다. 미국 공산노동당을 공동 창립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이 되었다. 크렘린 벽에 안장된 극소수 미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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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하버드대 졸업, 뉴욕에서 저널리즘 경력 시작
  • 1913『더 매시스』 기자 합류, 패터슨 파업 취재 중 첫 체포
  • 1913–1914멕시코 혁명 종군기자 — 판초 비야 군대와 4개월 동행, 『반란의 멕시코』 출간
  • 1917페트로그라드에서 10월 혁명 직접 목격, 볼셰비키 정부 외무인민위원부에서 활동
  • 1919『세계를 뒤흔든 10일』 출간, 미국 공산노동당(CLP) 공동 창립
  • 1919–1920코민테른 집행위원, 제2차 코민테른 대회 미국 대표, 바쿠 동방민족대회 참석

시디르 아르테모비치 콥파크

Сидор Артемьевич Ковпак
문학·예술 소련 우크라이나 1887–1967 ○ 자연사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종단한 소비에트 최고의 파르티잔 사령관

「화염이 카르파티아 산비탈을 밝혔다… 밤인데도 대낮 같았고, 불타는 기름의 굉음은 우리를 괴롭히던 독일 비행기 엔진 소리조차 삼켜버렸다.」 — 1943년 비트쿠프 유전 습격을 회고하며.

우크라이나 출신의 소비에트 파르티잔 사령관. 1941년 푸티블에서 부대를 조직해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종단하며 독일군 후방을 교란했고, 두 번의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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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2러시아 제국군 제186아슬란두스 보병연대 복무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정찰병·부사관, 게오르기 십자훈장 3·4급
  • 1918–1919코텔바 적색 파르티잔 부대 지휘관
  • 1919–1926붉은 군대 보급·병사 업무, 현 군사위원 역임
  • 1926–1939군 협동조합 지도원, 푸티블 도로국장 등 지방 경제 관료
  • 1940–1941푸티블 시 집행위원회 의장
  • 1941–1943수미 파르티잔 연대 지휘관, 소장 진급 (1943)
  • 1944–1947우크라이나 SSR 최고재판소 판사
  • 1947–1967우크라이나 SSR 최고회의 부의장

안나 안드레예브나 아흐마토바

Анна Андреевна Ахматова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89–1966 ○ 병사

감옥 문 앞에서 기다린 시인

1946년 8월 14일 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이 아흐마토바의 시를 "우리 인민에게 이질적인" 것으로 규정했고, 즈다노프는 그를 "창녀면서 수녀"라고 비난했다. 그해 9월 4일 그를 작가동맹에서 제명했고, 이 결정은 1988년 취소되었다.

아크메이즘의 대표 시인으로, 1912년 『저녁』과 1914년 『묵주』로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시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21년 첫 남편 니콜라이 구밀료프가 체카에 의해 처형되고 아들 레프 구밀료프와 동거인 니콜라이 푸닌이 수용소를 거치는 동안, 1935~1940년 비밀리에 『레퀴엠』을 써서 대숙청의 경험을 기록했다. 1946년 즈다노프의 비난과 출판 금지에도 떠나지 않고 남았고, 말년에는 『영웅 없는 시』를 완성하고 1964년 에트나타오르미나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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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저녁』 발표
  • 1935–1940『레퀴엠』을 비밀리에 집필
  • 1946즈다노프의 비난과 출판 금지, 작가동맹 제명
  • 1951–1965작가동맹 복권과 시집 재출간, 후기 인정

알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아로세프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Аросев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90–1938 ✕ 처형

크렘린 포격명령을 내린 혁명가이자 30권을 쓴 프롤레타리아 작가

1924년 1월 24일, 아로세프는 레닌 연구소를 위해 「일리치의 뇌와 심장, 그리고 몸에서 적출된 총알이 담긴 유리병」을 수령했다는 영수증에 서명했다. 「완전한 보존을 내가 개인적으로 책임진다.」

카잔의 재단사 아들로 태어나 소꼽친구 몰로토프의 영향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크렘린 포격을 명령했고, 내전기에는 최고혁명재판소 의장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적색테러를 주도했다. 1934년 초대 VOKS 의장에 취임하여 소련 문화외교의 제도적 기틀을 닦았고, 리투아니아·체코슬로바키아·프랑스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이기도 했다. 30권 이상의 소설·희곡·회고록을 남긴 프롤레타리아 작가로서 당 내부의 심리를 파고드는 자전적 문체로 주목받았으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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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RSDLP(볼셰비키) 입당
  • 1917.10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크렘린 포격 명령
  • 1918주공군총국(Gлаввоздухфлот) 커미사르
  • 1920우크라이나 최고혁명재판소 의장
  • 1921–1927레닌 연구소 부소장; 체카·OGPU 근무; 프랑스·스웨덴 외교관
  • 1927–1928리투아니아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29–1933체코슬로바키아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34–1937VOKS(전연방 대외문화교류협회) 의장

엘 마르코비치 리시츠키

Эль Маркович Лисицкий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90–1941 ○ 결핵

절대주의를 건축으로 전환한 구성주의의 공동 창시자, 혁명 아방가르드의 국제적 연결고리

1920년, 붉은 쐐기가 백색 원을 찢고 들어가는 포스터 한 장. 리시츠키는 단 두 개의 도형과 세 가지 색만으로 내전의 모든 것을 말했다.

소비에트 화가·건축가·디자이너. 프로운(PROUN) 시리즈로 절대주의를 입체 공간으로 확장했고, 〈붉은 쐐기로 백군을 분쇄하라〉는 혁명 그래픽의 상징이 되었다. 아방가르드와 서유럽 모더니즘을 잇는 가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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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4다름슈타트 공과대학 건축학부 수학, 우등 졸업
  • 1915–1918리가 공과대학(모스크바 피난) 편입, 공학건축사 학위 취득
  • 1919–1920비텝스크 인민예술학교 교수, 말레비치의 UNOVIS 그룹 핵심 멤버
  • 1920〈붉은 쐐기로 백군을 분쇄하라〉 발표, PROUN 시리즈 시작
  • 1921–1925베를린·스위스 체류, 에렌부르크와 《베쉬》 발행, 데 스테일 가입
  • 1921, 1926–Vkhutemas 및 Vkhutein 교수
  • 1927–1928전연방 인쇄 전시회 및 쾰른 프레사 소비에트관 설계
  • 1930–1941〈건설중인 소련〉 레이아웃, 포토몽타주, 오고뇰크 인쇄소 설계

빅토르 리보비치 세르주

Виктор Львович Серж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90–1947 ○ 심장마비

혁명과 스탈린주의의 부상을 문학으로 증언한 코민테른의 작가-혁명가

1936년 소련을 떠나는 순간, 오렌부르크 유형지에서 써내려간 소설 두 편과 시집 한 권의 원고 전부가 압수당했다. 그는 시집만을 기억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내가 건네는 것은 진실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향한 증언이다"라고 그는 훗날 말했다.

브뤼셀에서 러시아 망명 나로드니키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활동하다가 5년간 수감되었다.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에 도착해 볼셰비키에 입당, 코민테른에서 언론인·편집자·번역가로 일했으며, 내전기 페트로그라드 방어전에 참가했다. 1923년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8년 제명·투옥 후 문학으로 전향해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 『러시아 혁명 1년』, 걸작 『툴라예프 사건』을 남겼다. 1936년 국제적 구명 운동으로 소련을 탈출, 프랑스와 멕시코 망명 중에도 저술을 이어가며 20세기 혁명문학의 거장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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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3파리에서 아나키스트 신문 《L'Anarchie》 필자 및 편집자, 보노 갱 사건 연루로 5년형
  • 1917바르셀로나에서 CNT 활동, 《Tierra y Libertad》 기고; 러시아行 시도 중 프랑스 수용소 억류
  • 1919–1923볼셰비키 입당, 코민테른에서 로망스어 출판 담당, 《인프레코르》 프랑스어판 편집
  • 1923–1927좌익 반대파 합류, 빈·베를린·레닌그라드에서 반스탈린 활동
  • 1928–1933당 제명·투옥 후 작가로 전향, 『감옥의 사람들』 『우리 힘의 탄생』 집필
  • 1933–1936오렌부르크 유형, 국제 구명운동으로 1936년 소련 탈출
  • 1936–1940파리 망명, 모스크바 재판 규탄 저술, 트로츠키와 논쟁적 서신 교환
  • 1941–1947멕시코 망명, 『툴라예프 사건』 『회고록』 완성, 1947년 심장마비로 사망

솔로몬 미하일로비치 미호엘스

Соломон Михайлович Михоэлс
문학·예술 소비에트 러시아 (유대계) 1890–1948 ✕ 암살

스탈린의 전쟁 선전을 위해 세계를 누비고, 스탈린의 명령으로 암살당한 이디시어 연극의 거장

고든 크레이그는 모스크바에서 미호엘스의 《리어왕》을 본 후 이렇게 썼다: '나는 미호엘스의 리어 연기처럼 그토록 깊이, 핵심까지 뒤흔든 연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소비에트 이디시어 연극의 최대 거장으로, 모스크바 국립 유대극장(GOSET)의 예술감독을 1929년부터 사망 시까지 맡아 이디시어 무대에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유대 민족 정체성을 융합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이디시어 공연(1935)으로 세계 연극계의 찬사를 받았으며, 인민예술가 칭호와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초대 의장으로서 미국·캐나다·멕시코·영국을 순회하며 소비에트 전쟁 수행을 위한 재정적·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1948년 스탈린의 직접 명령으로 MGB 요원들에게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전후 소비에트 국가 반유대주의로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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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페트로그라드 유대극장 스튜디오 입단
  • 1920–1928모스크바 국립 유대극장(GOSET) 주연 배우
  • 1929–1948GOSET 예술감독 겸 주연 배우
  • 1941–1945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의장
  • 1943미국·캐나다·멕시코·영국 순회 선전 여행
  • 1939소비에트 인민예술가 칭호 수여

레프 모이세예비치 크비트코

Лев Моисеевич Квитко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계 유대인 1890–1952 ✕ 처형

소비에트 유대 문화를 노래한 이디시 시인

그의 시 「에텔레」는 나치가 살해한 유대인 희생자를 이디시어와 유대적 기억으로 애도했다.

레프 크비트코는 이디시어로 시와 아동문학을 쓴 소비에트 유대계 시인으로, 혁명과 유대인의 삶을 함께 노래했다. 전시에는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와 기관지 《에이니카이트》에서 활동하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문학적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전후 국가의 반유대주의적 전환 속에서 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1952년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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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키예프에서 첫 시 발표, 첫 시집 《노래들》 출간
  • 1917–1921키예프 그룹의 이디시 시인
  • 1921–1925베를린·함부르크 체류, 독일공산당 가입 및 노동자 선전 활동
  • 1928–1941자전적 운문소설 《젊은 시절》 집필
  • 1941–1948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간부 및 《에이니카이트》 편집위원
  • 1947–1948문학예술 연감 《헤임란트》 편집
  • 1949–1952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사건으로 수감, 군사대법원에서 사형 선고
  • 19528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처형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

Борис Леонидович Пастернак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90–1960 ○ 자연사

《닥터 지바고》와 거부된 노벨상의 시인

《닥터 지바고》 사건은 출판·국제정치·작가의 생존이 한 작품을 둘러싸고 충돌한 장면이다.

러시아 시와 번역의 거장이자 소설 《닥터 지바고》의 작가다. 이탈리아에서 먼저 출간된 소설과 1958년 노벨문학상은 소련 당국의 격렬한 비난을 불렀고, 그는 압력 아래 수상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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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첫 시집 《구름 속의 쌍둥이》 발표
  • 1957《닥터 지바고》 이탈리아에서 첫 출간
  • 1958노벨문학상 수상 뒤 압력 아래 거부

드미트리 안드레예비치 푸르마노프

Дмитрий Андреевич Фурманов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91–1926 ○ 뇌막염

차파예프를 신화로 만든 정치위원 출신 작가

1920년 6월 베르니 수비대 봉기 때, 푸르마노프는 반란군과 직접 협상에 나서 시간을 벌었다. 반란군 지휘관이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고, 그동안 충성 부대가 도착해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

차파예프 사단 정치위원 출신 작가. 소설 《차파예프》(1923)는 혁명적 영웅 서사의 전범이 되었고, 1934년 바실리예프 형제의 영화로 각색되어 소비에트 대중문화의 기념비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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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5모스크바 대학교 문헌학부 수학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위생병 · 준위 복무
  • 1917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소비에트 부의장
  • 1919제25소총사단 정치위원 (차파예프 휘하)
  • 1919–1920투르케스탄 전선 정치부장 · 세미레치예 RVS 대표
  • 1920쿠반 상륙부대 정치위원, 울라가이 상륙 격퇴 — 적기훈장 수훈
  • 1923소설 《차파예프》 출간
  • 1924–1925MAPP(모스크바 프롤레타리아 작가 협회) 서기
  • 1925소설 《먀테시》(반란) 출간

오십 에밀리예비치 만델슈탐

Осип Эмильевич Мандельштам
문학·예술 소련 폴란드 1891–1938 ✕ 옥사

기억으로 살아남은 시인

「러시아에서만 시가 존중받는다—시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 시가 살인의 동기인 나라가 또 어디 있나?」 아내 나데즈다의 회고록 『희망, 희망을 거슬러』에 기록된, 스탈린 시대 시인의 운명을 응축한 말.

아크메이즘의 핵심 시인이자 산문가로, 스탈린 체제의 언어와 공포를 시에 새겼다. 체포와 유배 뒤 다시 체포되어 극동 수용소로 보내졌고, 아내와 친구들이 암기해 지킨 시편들보다 먼저 수용소 이송 중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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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시집 『돌』 발표
  • 1920년대시·산문·번역 활동
  • 1934–1937체포와 보로네시 유배
  • 1938재체포, 극동 수용소 이송 중 사망

미하일 아파나시예비치 불가코프

Михаил Афанасьевич Булгаков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91–1940 ○ 병사

출판되지 않은 악마의 작가

1930년, 출판이 모두 막히자 『거장과 마르가리타』 초고를 벽난로에 던졌다. 훗날 소설 속 악마는 불탄 원고를 꺼내며 말한다. '원고는 타지 않는다.' 불가코프는 죽을 때까지 다시 썼고, 결국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의사 출신의 소설가·극작가로, 소비에트 일상의 관료제와 공포를 환상과 풍자로 비틀었다. 희곡이 금지되고 출판 길이 막힌 채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죽을 때까지 고쳤으며, 이 소설은 사후 검열본으로 먼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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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9의사로 복무
  • 1921모스크바로 이주, 작가 활동
  • 1925–1929소설·희곡 발표과 검열
  • 1928–1940『거장과 마르가리타』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