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모스크바 협상에서 그는 당의 목표를 “민주적 사회주의, 자치, 의회 민주주의, 경제 민주주의”라고 제시했다.
니에르시 레죄는 헝가리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권 개혁 정치가로, 계획경제를 사회적 통제와 경제적 효율성의 결합으로 바꾸려 했다. 그는 1968년 신경제메커니즘을 이끈 뒤 정통파의 반발로 영향력을 잃었지만, 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안고 1989년 정치 전환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1989년 6월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의장으로 선출되어 집단 지도체제를 이끌었고, 10월 창당된 헝가리 사회당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 그의 경력은 사회주의를 민주화하고 시장기제를 도입하려 한 시도가 당의 해체와 다당제 전환으로 이어진 역사적 긴장을 보여 준다.
1980년 8월 22일, 그는 파업 요구안의 서면 접수를 인정하며 정부와 그단스크 사업장간 파업위원회의 공식 협상을 열었다.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산당 관료이자 경제 관료로, 농업 정책과 국가 계획을 담당했다. 1980년 노동자 파업이 확산되자 그는 정부의 협상 대표로 나서 루블린의 7월 파업을 정리하고, 그단스크에서는 독립 노조 인정으로 이어진 합의를 체결했다. 그의 경력은 사회적 요구를 제한된 양보로 관리하려 한 체제가 결국 공개적인 노동자 대표성과 마주한 과정을 보여 준다.
27년 장기 집권 장관의 뒤를 이어받았으나, 자기 임기 안에 부처 자체가 사라진 마지막 대외무역장관
1985년 10월, 27년간 소련의 대외무역을 관장해온 니콜라이 파톨리체프의 뒤를 이어 대외무역장관에 취임한 아리스토프는 불과 2년 3개월 만에 부처 자체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으로 폐지되는 순간을 맞았다.
소련의 당·국가 관료이자 외교관. 레닌그라드 공장 기술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에서 경력을 쌓은 후, 1971년부터 1978년까지 레닌그라드 시당 제1서기를 지냈다. 이후 외교 경력으로 전환하여 주폴란드 대사(1978–1983)와 외무차관(1983–1985)을 거쳐, 1985년 니콜라이 파톨리체프의 뒤를 이어 소련 대외무역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의 일환으로 1988년 1월 대외무역부가 폐지되고 대외경제관계부로 통합되면서, 그는 소련의 마지막 대외무역장관이 되었다. 이후 주핀란드 대사(1988–1992)로 전임되어 소련 붕괴기를 헬싱키에서 지켰으며,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연방 대사로 잠시 유임되었다.
1981년 직접위성방송 시스템 '에크란'이 가동되자, 시베리아와 극동의 오지에서도 안테나만 있으면 모스크바 TV를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공로로 샴신은 레닌상을 받았다.
통신 공학자 출신으로 세계 최초의 위성TV 배급망 '오르비타'와 직접위성방송 '에크란'의 개발을 이끌었고, 1980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 통신장관으로서 통합자동통신망(EASS)을 구축해 국민 대다수가 TV 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했다. 퇴임 후에도 로스텔레콤 이사회 의장을 지내며 러시아 통신 산업의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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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통신부 산하 NII-100 연구소 기술자, 선임설계자, 선임연구원
1958원거리무선통신연구소(NIIDAR) 연구실장, 탄도미사일 초장거리탐지 레이더 시스템 개발 참여
1965국립무선연구소(NIIR) 과학담당 부소장 — 오르비타 및 에크란 위성 시스템 개발 주도
1991년 2월, 고르바초프에게 사임서를 제출하며: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여러 측면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리코프 철도기술자대학을 졸업하고 유즈나야(남부) 철도에서 기술자로 시작해 1972년 철도국장까지 오른, 순수 철도인 출신 장관이었다. 1982년 안드로포프가 철도 부문의 위기를 비판한 직후 기존 장관이 경질되자 후임으로 발탁되어 1991년까지 소련 철도를 이끌었다. 재임 중 화물 적재량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 1988년에는 연간 41억 톤이라는 소련 철도 사상 최고 기록을 달성했으며, 이는 당시 미국 철도보다 2배 많은 수치였다. 1991년 2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대한 원칙적 반대를 이유로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났으며, 이후 민간 운송기업 인터트란스를 설립해 생애 마지막까지 이끌었다.
치에르나 회담에서 카투셰프가 소련 입장을 변호하는 모습을 지켜본 체코슬로바키아 국회의장 요세프 스므르콥스키는 그를 두고 "몰로토프 두 명을 합친 듯한 강경함"이라고 평했다.
고리키 자동차공장 엔지니어 출신으로 브레즈네프의 후원 아래 급성장하여, 1968년 40세의 나이로 최연소 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와의 협상에서 소련 측 실무를 맡았고, 이후 사회주의권 관계를 총괄했다. 1977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전보되는 좌천을 겪었고, 이후 쿠바 대사를 거쳐 페레스트로이카기 대외경제관계 장관으로 개방 정책의 실무를 맡았다. 소련 붕괴 후에는 상업은행 경영진으로 조용한 말년을 보냈다.
1986년 해임된 보리스 옐친이 좌천되어 온 자리는 바탈린 휘하의 국가건설위원회 제1부의장이었다.
우랄공과대학을 졸업한 토목기사로, 바시키르 탄광과 유전 건설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튜멘에서 소련 최대의 서시베리아 석유·가스 복합단지 건설을 주도하며 1980년 레닌상을 받았다. 1985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국가건설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건설정책을 총괄했으며, 체르노빌 원전 4호기 석관 공사와 1988년 아르메니아 지진 복구를 지휘했다. 1989년 퇴임 후 러시아 공학아카데미 부총재와 석유가스건설자연합 회장을 지냈다.
협동조합원이 월 천 루블을 버는 현실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나는 사회에 부자 계층이 생기면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서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모스크바 경공업기술대학을 졸업한 기술자 출신 경제 관료로, 신발 공장 기사에서 출발해 국가계획위원회와 당 중앙위원회 경제부서를 거쳐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신임으로 1985년 12월 소련 재무장관에 취임했다. 재임 4년간 반알코올 캠페인으로 인한 재정 악화, 급증하는 예산 적자, 협동조합 운동의 확산에 직면했으며, 시장개혁에는 일관되게 반대했다. 협동조합원의 고소득에 누진과세를 부과하며 '노동자가 거리로 나서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고 경고한 인물로, 사회주의적 평등을 훼손하는 부의 축적을 용납하지 않았다. 재임 중 오늘날의 예산·재무 아카데미인 재정실무자 연수원을 설립했고, 1989년 해임 후에는 그곳에서 교수로 13년간 후진을 양성했다.
1989년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소비에트 권력 사상 처음으로 각료 인준 투표가 실시되었을 때, 카멘체프는 거부된 극소수 부총리 중 한 명이었다.
모스크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14세에 강선박 화부로 노동을 시작했다. 모스크바 수산공업연구소를 졸업하고 무르만스크의 트롤어선 기지에서 엔지니어로 성장하여, 1979년 소련 수산장관에 올랐다. 재임 7년간 소련 원양어업은 세계 최대 어획량을 기록했고, 어획·가공·선단 건조를 아우르는 수직 통합 체계를 확립했다.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자 대외경제 담당 부총리로 승진했으나, 1989년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각료 인준이 거부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1990년 말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심장마비로 입원하자 보로닌이 각료회의 의장 대행을 맡았다. 발렌틴 파블로프가 새 총리로 선출된 1991년 1월 14일까지 소련 정부의 일상 운영을 책임졌다.
고르바초프 시기 국가물자공급위원회(Gossnab) 의장(1985~1989)으로서 후기 계획경제의 물자 공급 체계를 총괄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의 혼란 속에서도 국가 공급망을 지켜낸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니콜라이 리시코프 내각의 각료회의 제1부의장(1989~1991)으로 승진하여 경제 운영 전반을 조정했고, 1990년 말 리시코프의 심장마비 시 의장 대행을 맡았다.
1967년 오르비타가 가동되자 시베리아·극동 주민 수천만 명이 처음으로 모스크바 중앙TV를 시청했다. 탈리진은 "우리가 우주에서 신호를 보내는 첫 국가가 될 것"이라 했다.
통신 공학자 출신의 소비에트 테크노크라트로, 1967년 세계 최초의 위성 텔레비전 방송망인 오르비타 시스템의 과학적 개발을 이끌어 시베리아와 극동 주민 9천만 명에게 중앙 TV를 공급했다. 통신장관(1975~1980)을 거쳐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고스플란 의장으로 발탁되어 초기 페레스트로이카 경제 개혁의 계획을 주도했으나, 개혁 속도를 둘러싼 갈등 속에 1988년 경질되었고 1989년 보수파로 분류되어 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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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통신부 산하 무선연구소(NII Radio) 기술자, 수석 설계자, 선임연구원, 부소장
고르바초프 시기 최고위 여성 정치인, 소비재 품귀를 해결하려 했던 '러시아의 마거릿 대처'
1989년 여름, 비류코바는 일주일 동안 서유럽 8개 도시를 돌며 타이츠 5,000만 켤레, 여성화 170만 켤레를 구매했다. 소비에트 부총리가 직접 생필품 쇼핑에 나선 광경이었다.
섬유공학 엔지니어 출신으로, 소련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를 거쳐 고르바초프 시기 CPSU 중앙위 서기(1986~1988)와 각료회의 부의장 겸 사회발전국 의장(1988~1990)을 지내며 경공업·소비재·주택·보건을 총괄한 소련 최고위 여성 정치인이었다. 1988년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라 옐레나 스타소바·예카테리나 푸르체바에 이어 소련 역사상 세 번째로 정치국에 진입한 여성이 되었으며, 소비재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서유럽에서 한 주 만에 1억 6,500만 달러어치의 생필품을 구매하는 파격적 쇼핑 외교를 벌이기도 했다. 페레스트로이카 후반 소비시장 붕괴와 당내 비판 속에 1990년 28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페레스트로이카가 한창이던 1988년, 그는 당대회 연단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동조합은 더 이상 국가 기구의 부속물이어서는 안 됩니다."
모르드바 출신의 임업 기술자로, 1951년 모스크바 임업기술대학을 졸업한 뒤 임업·제지·목재가공 산업 현장에서 경력을 쌓았다. 1963년 임업노조 중앙위원장으로 노동조합 활동에 들어서 1968년 전소비에트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가 되어 국가사회보험 예산을 관장했다. 1980년 임업·제지·목재가공공업 장관을 지냈고, 1982년부터 1990년까지 VTsSPS 의장으로서 1억 3천만 조합원을 거느린 소련 노동조합 체제를 이끌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당 중앙위원이자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으로서 노동조합의 행정명령 체계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으며, 1990년 자발적 사임으로 소비에트 노조 체제의 마지막 장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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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1963임업·목재가공 산업 현장에서 기술자로 성장, 여러 레스프롬호스의 주임기사·소장 역임
1988년 폴리트뷰로에서 보수파가 협동조합법에 격렬히 반대하자, 시타랸은 "이것은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구하는 법"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코시긴 개혁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소련 경제 개혁의 거의 모든 주요 장면에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참여한 교량형 인물이다. 1960년대 중반 코시긴 개혁 준비 위원회에서 상품-화폐 관계 도입을 설계했고, 1986~1989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경제 개혁의 핵심 규범들을 입안했다. 그가 주도한 1988년 협동조합법은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사적 기업 활동에 합법적 지위를 부여한 법률로, 보수파가 장악한 폴리트뷰로에서 직접 변론하여 관철시켰다.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대외경제 개방을 추진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를 창설하여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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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소련 재무부 산하 재무연구소(NIFI) 선임경제학자, 선임연구원
1966경제학 박사, 이후 교수 직함 획득 (1970)
1970–1974소련 재무부 재무연구소(NIFI) 소장
1974–1983소련 재무차관
1983–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부의장
1986–1989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제1부의장, 경제체제 개선 부처간위원회 제1부의장
1989–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우리가 금융 전선에서 승리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승리할 것이다」 — 아발킨이 자주 인용한 레닌의 말
모스크바 출신 정치경제학자. 1986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이 되어 페레스트로이카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했고, 1989년 경제개혁 국가위원장 겸 부총리로 기용되었다. 핵심 구상인 '규제된 시장경제'는 국가 통제 아래 단계적 시장화를 주장했으며, 샤탈린의 500일 계획이 제안한 충격요법과 대비되었다. 이 구상은 1990년 5월 최고회의에서 반려되었고, 고르바초프가 샤탈린의 급진안을 택한 뒤 리시코프 내각이 무너지면서 1991년 초 부총리직을 떠났다. 해체 후 『경제의 제문제』 편집장으로 러시아 사회경제 사상을 정립하고 옐친식 급진 자유화에 맞서 중국식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아르놀트 보일루코프는 소련 국립은행의 고위 은행가로, 말년 소비에트 금융 운영의 내부를 경험했다. 그는 1991년 1월 화폐개혁을 집행한 기관의 책임자였을 뿐 아니라, 훗날 그 구상이 재무부나 발렌틴 파블로프가 아니라 국가보안위원회와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에게서 나왔다고 회고한 증언자로 중요하다. 그의 회고는 개혁을 둘러싼 제도 간 긴장과, 비밀리에 추진된 조치가 대중의 신뢰를 훼손한 과정을 보여 준다.
지금 문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어떤 -이즘을 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 나라와 국민을 구하는 것입니다 — 1990년 당 중앙위원회 플레넘에서
레닌그라드 근교 출생. 칸토로비치의 제자로 투입산출모형과 최적계획 이론을 발전시켰고, 1987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9년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합의로 작업반을 이끌어 500일 내 시장경제 전환을 구상한 '500일 계획'을 작성, 아발킨의 점진적 노선과 정면 대립했다. 연방 차원에서 채택되지 못했으나 러시아 공화국에서 부분 시행되었고, 제자 가이다르의 1992년 충격요법의 지적 토대가 되었다. 해체 후 '개혁' 재단을 이끌고 통합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명예회장을 지냈다.
콘드라트 테레흐는 벨라루스 소비자협동조합의 현장 회계원으로 출발해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소련의 마지막 무역장관(1986~91)까지 오른 경제 관료였다. 계획경제가 무너지는 순간까지 연방의 소비재 유통을 책임진 그는, 배급과 부족이 일상이 된 소비 위기의 최전선에 선 인물이다.
1998년 금융위기 속에서 옐친이 그에게 총리직을 제안했지만, 마슬류코프는 거절했다. "나는 프리마코프의 제1부총리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소련 계획경제의 마지막 책임자였던 그는 권력 자체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택했다.
타지키스탄 레니나바드 출신의 엔지니어로, 이젭스크 방산 공장에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기술관료로 성장했다. 1988년 고스플란 의장과 정치국 위원(1989)을 지낸 마지막 계획경제 책임자였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프리마코프 내각 제1부총리(1998~1999)로 금융위기를 수습했다. 이후 공산당 두마 의원으로 2010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한, 소련 계획관료 세대와 탈소비에트 산업정치를 잇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1994년 10월 11일 '검은 화요일', 루블화가 하루 만에 27% 폭락했다. 사흘 뒤 게라셴코의 중앙은행은 환율을 거의 원상 복구시키며 통화 투기세력을 응징했다. 동료 은행가는 "중앙은행도 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평했다.
소련 고스방크 총재와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를 각각 두 차례씩 지내며 네 번에 걸쳐 국가 주요 은행을 이끈 러시아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다. 1989년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해 소련 해체기의 통화 체계를 관리했고, 1992년 러시아 중앙은행 초대 총재로서 1993년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98년 금융위기 때 다시 중앙은행 수장으로 복귀해 IMF 협상과 루블 안정화를 추진했으며, 푸틴 집권 초기까지 중앙은행을 이끌었다. 은퇴 후에는 블록 '로디나'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과 대통령 후보로도 나섰다.
1975년 11월 경제장관으로 임명되고 1976년부터 계획부 장관 겸 제2부총리로서 앙골라 경제계획의 설계를 맡았다. 1977년 5월 27일 진압 이후 정부·당 요직에서 물러났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다 호샤 올리베이라 디롤루아(1939년 12월 2일 숨베 출생, 1996년 11월 16일 루안다 사망)는 앙골라의 경제학자이자 반식민주의 활동가, 대학 교수였다. 1950년대 루안다에서 민족주의 사상을 접하고 1961년 비리아투 다 크루스의 영향으로 MPLA에 들어가 디롤루아 전시명을 썼다. 돌리지에서 제1혁명훈련센터를 세우고 교수했으며 1963년 동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1974년 중앙위원회·정치국 위원이 되어 11월 8일 루안다에 들어간 26인 대표단에 참여했고, 1975년 11월 경제장관, 1976년부터 계획부 장관 겸 제2부총리를 지냈다. 1977년 5월 27일 진압 이후 정부·당 요직에서 물러났고 1996년 루안다에서 사망했다.
폴란드 충격요법의 설계자. 1989년 마조비에츠키 내각의 재무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되어 '발체로비치 계획'을 주도했고, 초인플레이션을 진압하고 가격 자유화와 통화 태환을 단행하며 동구권 최초의 급진적 시장 개혁을 실행했다. 개혁은 폴란드를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로 전환시켰으나 20%의 GDP 하락과 대량 실업을 동반했고, '발체로비치는 물러가라'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격렬한 사회적 반발을 낳으며 1989년 체제전환의 약속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당조직자가 돈다발을 두 팔로 끌어안고 떨리는 손으로 당원증에 적었다: '1989년 1월 급여, 300만 루블.' 평균 월급이 200루블이던 시절이었다.
소련 최초의 합법적 백만장자로, 협동조합 '테흐니카'의 창업자이다. 1989년 1월 자신에게 300만 루블의 월급을 지급하고 부하의 당비 9만 루블 납부가 「브즐랴트」에 방영되면서 전국적 스캔들을 일으켰고, 이는 협동조합법이 두 차례 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인민대표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으며, 러시아 초기 자본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