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2월 15일, 우정의 다리 위에서 소련 TV 기자에게 말했다. "내 뒤에는 단 한 명의 소련 군인도 남아 있지 않다."
소련군 장성으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세 차례 복무하며 마지막 제40군 사령관(1987–1989)으로 소련군 철수를 지휘했다. 1988년 포위된 호스트를 구출한 '마기스트랄 작전'의 성공으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9년 2월 15일 우정의 다리를 걸어 소련 영토로 들어온 마지막 소련 군인이 되어, 9년간 지속된 전쟁의 공식적 종결을 상징했다. 이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소련 내무부 제1차관, 러시아 국방차관을 거쳐 1991년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탈냉전기에는 모스크바주 지사로 12년간 재임하며 러시아 권력구조 안에서 군 엘리트의 정치적 전환을 보여주었다.
파벨 그라초프 국방장관이 직접 병원으로 찾아와 육군대장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두비닌은 이미 말기 암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소련과 러시아 연방의 군인. 1986~87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제40군 사령관으로서 대규모 헬리콥터 강습과 컴퓨터 지휘체계를 도입하는 전술 개혁으로 전년 대비 전사자를 절반으로 줄였고, 실전손실의 은폐 관행에 처음으로 맞섰다. 1989~92년 북부군집단 사령관으로 폴란드 주둔 소련군의 조직적 철수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1992년 6월 러시아 연방군 초대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옐친 대통령의 성급한 핵전력 개혁 구상을 저지하고 토폴-M, 보레이급 잠수함, 이스칸데르 등 장기무기 프로그램을 승인받아내 탈소비에트 러시아 방위의 기술적 토대를 남겼다. 임종 직전 병상에서 육군대장 계급장을 받았으며, 사후 러시아연방영웅 칭호가 추서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61–1964극동전차학교(블라고베셴스크) 졸업, 소련군 입대
1964–1978전차소대장·중대장·대대장, 연대 참모장 겸 부연대장, 전차연대장. 비스트렐 과정(1973), 기갑아카데미(1978) 졸업
1979–1984제8근위전차사단장(벨라루스). 참모아카데미 졸업(1984) 후 제32군 제1부사령관(중앙아시아)
1984–1986제40군(아프가니스탄) 제1부사령관
1986–1987제40군 사령관. 전술 개혁으로 전사자 절반 감소. 소련군 부분철수 개시
1987–1989제7전차군 사령관(벨라루스), 키예프군관구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1989–1992북부군집단(폴란드) 사령관. 소련군 철수 완수
1992러시아 연방군 초대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육군대장 진급(10.5), 11.22 병사
소련 방공군의 수호이 Su-15 요격 조종사로, 1983년 9월 1일 사할린 상공에서 대한항공 007편 보잉 747을 격추한 인물이다. 경고 사격은 했지만 기체에 예광탄이 아닌 철갑탄이 장전되어 기장이 이를 보지 못했고, 두 줄의 창문을 보고 민간기임을 알았으면서도 목표를 확인하지 못한 채 미사일을 발사해 탑승자 269명 전원의 죽음을 초래했다. 1991년 이즈베스티아 인터뷰에서 예광탄을 쐈다는 당국 주장이 거짓이었음을 인정했고, 이후 비행에서 물러나 마이코프에서 여생을 보냈다.
1977년 중앙위원회에서 그는 "나는 곧 혁명의 화신이다"라며 지도부의 즉각 사퇴를 요구했다.
앙골라 해방운동 MPLA의 초대 내무장관이자 급진 '니티스타' 파벌 지도자였다. 식민지 전쟁기 뎀보스 지역 게릴라 지휘관으로 떠올라, 독립 뒤 내무부를 장악해 추종자들을 국가 기구 곳곳에 심었다. 1976년 3월 소련공산당 제25차 대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가 스스로를 '순수 마르크스레닌주의파'로 내세워 소련의 지지를 구했으며, 이것이 네투 지도부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식 채택을 재촉했다. 1977년 5월 쿠데타 미수 끝에 체포돼 총살당했다.
미하일 세묘노비치 수르코프는 소련군 정치기구에서 경력을 쌓은 당 조직가이자 정치가였다. 군 내부의 당 통제 업무를 맡던 그는 소련 해체 직전 정치국에 들어가 말기 체제의 긴장을 드러냈다. 이후 러시아 공산당과 국가두마, 회계원에서 활동하며 소비에트 당 간부의 경력을 러시아의 공산주의 정치와 국가감사 제도로 이어 갔다.
1991년 8월 19일,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쿠데타 당시 아찰로프는 공수부대의 모스크바 진입을 조율하고 오스탄키노 TV 센터 봉쇄 임무를 맡았다.
1945년 11월 13일 타타르 자치공화국 아트닌스키 구의 아타마시 마을에서 태어나 2011년 6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66년 카잔 전차학교, 1973년 장갑병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제7근위공수사단장(1978), 제8근위군 사령관(1985~1987), 레닌그라드군관구 참모장(1987~1989)을 지냈으며 1980년 소장이 되었다. 1989년부터 1990년까지 소련 공수군을 지휘하고 1990년 12월부터 1991년 9월까지 소련 국방차관을 지냈으며, 1989년 상장으로 진급했다. 1991년 8월 17일 KGB 시설 회의에서 권력 장악에 합의한 국방차관 중 한 명으로 기소되었고, 1993년에는 루츠코이의 국방장관이 되었다가 체포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1993년 10월 4일 백악관 포격 중 라디오 생방송에서: "비행사들이여, 전투기를 띄워라! 이 갱단은 크렘린에 자리 잡고 있다.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구하라!"
소련의 마지막 영웅 중 한 명이자 러시아의 유일한 부통령. 아프가니스탄에서 Su-25 공격기로 485회 출격하고 두 차례 격추·포로가 된 전투 조종사였으며, 1988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옐친의 러닝메이트로 RSFSR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8월 쿠데타 당일 루키야노프에게 고르바초프 건강검진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으며, 총대주교 알렉시 2세를 설득해 교회의 옐친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반대하며 의회파에 섰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의회에 의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되었다가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공수부대 단 하나의 연대로 2시간이면 질서를 되찾을 수 있다'고 체첸 전쟁 직전 장담했으나, 그 말은 재앙의 서막이었다.
파벨 그라초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최소 희생'으로 헤로이 칭호를 받은 공수부대 장군으로, 1990년 12월 소련 공수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 야조프의 명령에 따라 106공수사단을 모스크바에 진주시켰으나, 이튿날 백악관 강습 계획을 반대하고 옐친 측에 합류해 수비 병력을 보냄으로써 쿠데타 실패의 결정적 고리가 되었다. 쿠데타 후 러시아 초대 국방장관이 되어 1993년 체제 위기에서 옐친을 지지했고, 제1차 체첸 전쟁을 지휘했으나 참담한 패배와 부패 스캔들로 '파샤-메르세데스'라는 조롱을 받으며 1996년 경질되었다.
1991년 8월 20일 밤, 그라초프의 동의를 얻은 레베디는 백악관 수비대를 찾아가 '새벽 2시에 공격이 시작된다'고 은밀히 알렸다.
노보체르카스크의 가난한 목수 가정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노보체르카스크 시위대 학살을 목격한 소련 공수군 장군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했고 1991년 2월 공수군 전투훈련 담당 부사령관이 되었다. 8월 쿠데타 당일 파벨 그라초프의 명령으로 툴라 공수대대를 이끌고 백악관을 포위했으나, 다음 날 옐친 진영으로 넘어가 수비대에 새벽 공격 계획을 은밀히 전달하며 쿠데타 붕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역 후 1996년 대선에서 3위에 오르고 안전보장회의 서기로서 제1차 체첸 전쟁 종식을 협상했으며,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사로 재직 중 헬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타만 근위차량화소총사단 전차대대 참모장이던 소련군 소령.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모스크바 백악관 앞에 배치된 10대의 전차를 이끌고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를 만난 뒤 전차 방향을 돌려 옐친 측을 방어했다. 그의 대대 소속 110호 전차 위에서 옐친이 역사적 연설을 했으며, 이 장면은 쿠데타 진압의 상징이 되었다. 쿠데타 후 사단 내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떠났고, 1990년대 내내 경비직과 장례업 등으로 생계를 이었다.
1991년 8월 모스크바 터널에서 그가 지휘한 장갑차 행렬과 시위대의 충돌로 세 명이 사망했다.
세르게이 수로비킨은 소련 말기 장교로 출발해 러시아군 최고위 지휘관으로 올라선 군인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때 타만 사단 BMP 대대를 이끌고 모스크바 터널에 진입했으며, 충돌로 시위대 세 명이 사망한 뒤 구금됐지만 상부 명령을 따랐다는 이유로 기소가 취하됐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체첸, 시리아에서 지휘했고, 시리아와 우크라이나에서는 군사적 성과와 민간인 피해를 함께 낳은 강경한 작전 방식으로 알려졌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국가의 명령 체계가 해체 뒤 러시아의 군사국가적 권력으로 이어지는 한 경로를 보여준다.
상세 이력 보기
1987옴스크 고등 제병지휘학교 졸업, 타만 근위 자동차화소총사단 소대·중대 지휘관
1989–1991아프가니스탄 복무, 타만 사단 제1자동차화소총대대장
19918월 쿠데타 때 모스크바 투입 BMP 대대 지휘, 터널 충돌 뒤 구금 및 기소 취하
BMP 장갑차의 관측창에 방수포를 씌우려고 뛰어올랐다. 사수가 포탑을 돌려 떨어뜨렸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 달려가 장갑차에 올라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 공수부대 하사로 제대 후 모스크바에서 지게차 기사로 일했다. 1991년 8월 21일 새벽, 루츠코이의 '아프간 동지들' 호소를 듣고 백악관 방어선에 합류했으며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BMP 장갑차의 관측창을 막으려다 깔려 사망, 쿠데타 유일의 세 희생자 중 한 명이 되었고 사후 소비에트연방영웅과 '자유 러시아 수호자' 메달 1호를 받았다.
1799년 제2차 대동맹전쟁의 이탈리아·스위스 원정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지휘해 프랑스군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고 대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스위스에서는 프랑스가 이겼고 원정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러시아 제국의 장군·군사이론가로 1794년 원수, 1799년 대원수에 올랐다. 푸가초프 반란과 코시치우슈코 봉기를 진압하고 크림·쿠반 병합에 관여했으며, 주요 교전에서 패하지 않았다. 1729년 또는 1730년 출생으로 확정되지 않았고, 1800년 5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병사했다.
1964년 10월 19일, 베오그라드 해방 20주년 기념식으로 향하던 비류조프 일행의 소련 공군 Il-18이 안개 속에서 착륙 코스를 이탈해 아발라 산에 충돌했고, 승무원 11명과 대표단 7명 등 18명이 숨졌다. 그의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스코핀(랴잔주)에서 태어났다. 공식 러시아 측 전기는 상인 집안 출신으로 적고, 다른 자료는 러시아계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서술한다. 1922년 9월 15일 적군에 입대해 1926년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통합군사학교를, 1937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제30소총사단 참모장, 1939년부터 제132소총사단장을 지냈다. 독소전쟁 첫해에 다섯 차례 부상을 당했고, 제48군과 제2근위군 참모장, 남부·제4우크라이나·제3우크라이나전선군 참모장을 거치며 돈바스·크림 해방과 야시-키시네프·베오그라드 공세를 기획했다. 전후 방공군과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을 지내고 1963년 총참모장에 올랐으며, 1964년 10월 19일 아발라 산 항공사고로 사망했다.
인터뷰에서: "우리는 CIA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을 지원했다."
아프가니스탄 판지시르 계곡 바자라크의 장갈라크 마을에서 타지크족 가정에 태어났다. 아버지 도스트 모함마드 칸은 왕립 아프가니스탄군 대령이었고, 카불 공과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한 뒤 부르하누딘 라바니의 이슬람회에 가담했다.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 소련군과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고, 1983년 소련군과의 휴전기에 12개 주 130명의 지휘관을 묶는 슈라에 나자르를 세웠다. 헤크마티아르와의 내전으로 카불이 파괴되었고, 아프가니스탄 정의 프로젝트와 휴먼라이츠워치는 1993년 아프샤르 작전 등 인권 침해의 책임을 그에게 물었다. 1996년 이후에는 북부동맹의 군사 지도자로 탈레반에 저항했고, 2001년 9월 9일 알카에다 요원들의 폭탄으로 암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