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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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인물 130명

뱌체슬라프 페트로비치 옐류틴

Вячеслав Петрович Елют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7–1993 ○ 자연사

31년간 소련 고등교육을 총괄한 최장수 각료

소련 각료 중 31년 이상 단일 장관직을 유지한 인물은 옐류틴이 유일하다. 고등교육부는 1954년부터 1985년까지 단 한 번도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

사라토프의 철도원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제강연구소를 졸업한 금속공학자로, 전기제강·페로합금 기술을 개척해 1952년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1945년 모교 소장이 되어 연구 중심 공과대학으로 탈바꿈시켰고, 1954년 고등교육부 장관에 임명된 후 31년간 소련의 대학·전문학교 체계를 총괄했다. 재임 기간 고등교육기관과 재학생 수는 두 배 이상 확대되었고, 공학·자연과학 분야의 대규모 인력 양성 체계는 우주 개발과 군수산업을 뒷받침했다. 과학아카데미 준회원(1962)이자 당 중앙위원(1961–1986)으로서 연구·행정·정치를 연결하는 소련 테크노크라트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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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모스크바 제강연구소 졸업, 동 대학원 진학
  • 1933–1941모스크바 제강연구소 도센트, 전연방 공업아카데미 부원장
  • 1941–1943레닌그라드 포병기술학교 수료 후 포병기술장교 복무
  • 1945–1951모스크바 제강연구소 소장(총장)
  • 1951–1954소련 고등교육부 제1차관
  • 1954–1959소련 고등교육부 장관
  • 1959–1985소련 고등·중등전문교육부 장관
  • 1961–1986CPSU 중앙위원회 위원

콘스탄틴 안토노비치 페트르자크

Константин Антонович Петржак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폴란드 1907–1998 ○ 자연사

우라늄 자발핵분열을 발견하고 소련 원자폭탄의 토대를 놓은 물리학자

중성자원을 제거한 뒤에도 이온화실은 계속 신호를 냈다. 우주선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모스크바 지하철 디나모 역 50m 지하로 실험을 옮긴 끝에, 페트르자크와 플료로프는 우라늄이 스스로 갈라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소련의 핵물리학자. 1940년 게오르기 플료로프와 함께 우라늄-235의 자발핵분열을 발견하여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과학적 토대를 놓았다. 전쟁 중 군복무를 거쳐 1942년 카잔으로 복귀, 쿠르차토프의 지휘 아래 중성자원 측정법(동반입자법)을 개발하고 플루토늄 신속검출 기술을 확립했다. 1947년 흘로핀 라듐연구소에 중성자물리·핵분열 연구실을 설립해 40년 가까이 이끌었으며, 1949년 렌소베트 기술원에 핵물리학과를 창설해 소련 핵산업 인력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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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8마로비셰르스키 유리공장 도자기·유리 화공
  • 1931–1936레닌그라드대학교 물리학부, 쿠르차토프 지도하 졸업
  • 1936–1941흘로핀 라듐연구소(RIAN) 대학원생, 쿠르차토프·흘로핀 지도
  • 1940플료로프와 우라늄 자발핵분열 공동 발견 (국가발견등록 제33호)
  • 1941–1942붉은 군대 복무, 중위; 카잔으로 소환되어 원자폭탄 계획 투입
  • 1947–1986RIAN 중성자물리·핵분열 연구실 창설 및 실장
  • 1949–1984렌소베트 기술원 핵물리학과 창설 및 학과장
  • 1948물리수학 박사학위 취득

레프 다비도비치 란다우

Лев Давидович Ландау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제르바이잔 1908–1968 ○ 자연사

'란다우 학교'를 세우고 양자유체 역학을 개척한 소련 이론물리학의 거장

그는 물리학자를 성취도에 따라 로그 등급으로 분류하곤 했다. 1급은 보어, 하이젠베르크, 디랙. 아인슈타인은 0.5급이었다. 자신은 한때 2.5급에 두었다가, 나중에 1.5급으로 올렸다.

소련 이론물리학자. 엄격한 이론최소과목으로 제자를 선발하는 '란다우 학교'를 세웠고, 초유동체·페르미 액체 이론으로 응집물질물리학을 개척했다. 리프시츠와의 《이론물리학 강좌》는 세계적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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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우크라이나 물리기술연구소(UFTI) 이론부장 · 하르코프 대학 교수
  • 1937–1968모스크바 물리문제연구소(IFPAN) 이론부장
  • 1943–1947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저온물리학 교수
  • 1945–1953소련 원자력 프로젝트 참여 · 스탈린상 3회 수상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академик) 선출
  • 1962노벨 물리학상 수상 '응집물질 이론, 특히 액체 헬륨의 선구적 연구'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이사예프

Алексей Михайлович Исае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8–1971 ○ 자연사

소련 우주선의 심장을 만든 엔진 설계자: 폐쇄식 사이클의 발명가

가가린 귀환 후 흐루쇼프 앞에서 코롤료프가 이사예프를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일을 죄다 제동 거는 사람입니다." 흐루쇼프는 농담을 알아듣고 웃으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 우주선을 지구로 되돌리는 제동엔진을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광산기술자로 출발해 로켓 비행기 BI-1의 엔진 개발을 계기로 액체추진 로켓에 뛰어든 설계자. 1949년 폐쇄식 사이클(단계식 연소)을 세계 최초로 제안하고, 얇은 구리 연소실과 평판 분사기를 도입해 독일 V-2 계열의 복잡한 배관 설계에서 소련 로켓공학을 독립시켰다. 그의 제동엔진 TDU는 가가린을 포함한 모든 보스토크·보스호트 우주비행사를 지구로 귀환시켰고, KTDU 기동엔진 계열은 소유스·살류트·미르와 루나·베네라·마르스 탐사선 전체를 움직였다. R-11(스커드) 미사일 엔진과 SLBM 추진체계 설계에서도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그가 세운 KB KhimMash는 오늘날까지 러시아 우주선 엔진의 핵심 설계국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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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모스크바 광산대학 졸업, 금속공장 기술자
  • 1934–44볼호비티노프 설계국: 항공기 착륙장치, BI-1 로켓전투기 엔진
  • 1944–47OKB-2 수석설계자, 독일 로켓기술 조사단 참가(1945)
  • 1948–52니리-88 제9부: 진동방지 격벽, 평판 분사기, 폐쇄식 사이클(1949) 발명
  • 1951–55R-11(스커드) 엔진 S2.253; 코롤료프와 협업 시작
  • 1958–61OKB-2 확대; 보스토크 TDU 제동엔진(104회 비행 성공)
  • 1962–71KTDU 계열: 소유스·살류트·미르·행성탐사선 엔진; N1-L3 달착륙선용 LOX/LH2 엔진
  • 1967–71KB KhimMash(舊 OKB-2) 수석설계자로 사망 시까지 재임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필류긴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Пилюг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8–1982 ○ 자연사

스푸트니크에서 부란까지: 소련 우주시대의 두뇌를 설계한 유도·항법 수석설계자

1946년 코롤료프가 젊은 필류긴을 찾아와 "로켓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류긴은 자이로스코프 하나로 시작해 35년간 소련의 모든 우주비행을 조종하는 두뇌를 설계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공대를 졸업하고 ЦАГИ에서 정밀기계공으로 일했다. 전후 독일에서 V-2 잔해를 연구하고 1946년 코롤료프의 추천으로 NII-885 자율제어계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그의 유도·항법·제어 시스템은 R-1과 R-7(스푸트니크·가가린), 프로톤, 행성간 탐사선, 부란 왕복선까지 소련 로켓의 거의 모든 계보를 관통했다. 코롤료프·글루시코·바르민과 함께 수석설계자회의에서 소련 우주개발 방향을 결정했으며, 1975년 사하로프의 노벨평화상을 비난한 아카데미 성명에 서명한 72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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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바우만 공대 졸업, 자이로 계측기 '지로그라프'로 졸업논문
  • 1935–43ЦАГИ·비행시험연구소에서 정밀기계공, 항공기 자이로 계측 설계
  • 1943기술과학 후보(박사) 학위 취득
  • 1944–46NII-1 로켓기술부; 독일에서 V-2 잔해 및 유도장치 연구
  • 1946–82NII-885 자율제어계 수석설계자; 수석설계자회의 정식 구성원
  • 1948–57R-1·R-2·R-5·R-7 유도제어계 — 스푸트니크1호·보스토크1호 발사
  • 1960s–70s프로톤, 달·금성·화성 탐사선, 부란 왕복선 유도제어계 총괄
  • 1954–82NII-885(후일 NPTs AP) 소장, 1966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9–82모스크바 무선기술·전자·자동화대학(MIREA) 학과장
  • 1975사하로프 노벨평화상 비난 아카데미 성명 서명 — 72인 중 1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카마닌

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Каман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08–1982 ○ 자연사

첼류스킨호 구조에서 가가린 선발까지, 우주비행사를 만든 공군장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가장 안전했던 것은 가가린의 비행이었다. 지금까지 가장 위험했던 것은 보스호트 2호였다.” — 1966년 일기

소련 최초의 우주비행사 훈련 책임자(1960–1971). 1934년 첼류스킨호 빙상 캠프에서 34명을 구조해 최초의 7인 소련영웅 중 하나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Il-2 공격기 군단을 이끌며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리비우, 부다페스트, 프라하 전역을 누볐다. 1960년 공군 원수 베르시닌으로부터 유인궤도비행 군사책임자로 지명되어 가가린, 티토프, 테레슈코바, 레오노프 등 1세대 우주비행사들을 모집·훈련시키고 보스토크 1호 탑승자로 가가린을 추천한 심사위원장이었다. 코롤료프 사후 후임 미신과 수동조종권을 둘러싸고 격렬히 대립했으며 소유즈 1호와 가가린 사망을 모두 현장에서 겪었다. 사후 출판된 비밀 일기 『숨겨진 우주』는 소련 우주개발사의 결정적 1차 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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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보리소글렙스크 군사 조종사 학교 졸업, 극동 레닌 항공연대 배속
  • 1934첼류스킨호 구조: 혼성 항공분견대 지휘, 34명 구조, 소련영웅 №2
  • 1939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제19경폭격여단장
  • 1942–1943제292돌격항공사단장 (칼리닌 전선: 벨리키예루키·데먄스크)
  • 1943–1945제8혼성·제5돌격항공군단장, 쿠르스크·키예프·리비우·부다페스트·비엔나
  • 1956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제73항공군 사령관 (중앙아시아)
  • 1960–1971공군 우주비행훈련 책임자, 유인궤도비행 군사총괄, 공군총사령관 우주보좌관

아르히프 미하일로비치 률카

Архип Михайлович Люлька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84 ○ 폐암

독일 엔진을 베끼지 않고 소련 제트추진 시대를 연 설계자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로 들어간 제트 기류가 '무언가'에서 나와 어떻게 비행기를 움직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1930년대 후반, 률카가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 구상을 처음 설명했을 때 마주한 반응.

우크라이나 태생의 소련 항공엔진 설계자. 1941년 세계 최초의 터보팬 엔진 설계 특허를 출원했고, 독일 포획 장비를 모방하기를 거부하며 독자적인 연구로 1947년 소련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 TR-1을 완성했다. OKB-165(후일 NPO 사투른)의 총설계자로서 AL-7, AL-21, AL-31F 등 AL 시리즈 엔진을 개발하여 수호이·미그·투폴레프 전투기 세대를 추진했으며, AL-31F는 오늘날까지 Su-27 계열의 심장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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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키예프 공과대학 졸업, 하리코프 터보발전기 공장
  • 1933–39하리코프 항공연구소 강사, 가스터빈 연구
  • 1939–41키로프 공장 SKB-1, RD-1 설계, 세계 최초 터보팬 특허
  • 1941–43첼랴빈스크 전차공장 디젤 엔지니어
  • 1946–57OKB-165 수석설계자; TR-1 소련 최초 터보제트 국가시험 통과 (1947)
  • 1957–81OKB-165 총설계자; AL-7, AL-21, AL-31F 엔진 시리즈
  • 1968–8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가스터빈 위원회 의장

이사크 콘스탄티노비치 키코인

Исаак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ико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리투아니아 1908–1984 ○ 자연사

소련 원자폭탄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의 과학 책임자

“과학자라는 것은 직함도 직장도 아닙니다. 연구실에 들어서면서 과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과학자라는 것은 끊임없는, 때로는 괴로운, 때로는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 1984년 사망 직전 콤소몰 상 시상식 연설.

소련의 실험물리학자. 1933년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에서 광자기 효과(키코인-노스코프 효과)를 발견했고, 액체 금속의 홀 효과와 초전도체의 자이로자기 비율을 선구적으로 측정했다. 1943년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제2연구소에 합류해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과학 책임자를 맡았으며, 특별위원회 기술평의회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2연구소에서 단 둘만 이름을 올렸다. 종전 후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1960–1984)을 지내며, 수학자 콜모고로프와 《크반트》를 창간했고 형 아브람과 집필한 물리 교과서는 소련 표준이 되었다. 연구실에 사해문서 영인본을 꽂아둘 만큼 유대 전통과 히브리어에 정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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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연구원
  • 1933M. M.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 광자기 효과(키코인-노스코프 효과) 발견
  • 1935우랄 물리기술연구소 전기현상부장, 스베르들롭스크 이주
  • 1936물리수학 박사 학위 취득
  • 1937–1944우랄 공업대학 일반물리학 주임교수
  • 1942대전류 측정 장치 발명으로 스탈린상 3급 수상
  • 1943제2연구소 합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과학 책임자, 특별위원회 기술평의회 위원
  • 1950원자력연구소(IAE) 부장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0–1984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
  • 1969물리·수학 대중과학잡지 《크반트》 공동 창간, 초대 편집장

발렌틴 페트로비치 글루시코

Валентин Петрович Глушко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89 ○ 자연사

R-7을 하늘로 올린 소련 액체로켓엔진의 창시자

1924년 3월, 열다섯 살 글루시코가 치올콥스키에게 보낸 첫 편지: "행성 간 통신은 제 이상이자 평생의 목표입니다. 이 위대한 일에 인생을 바치겠습니다."

오데사 출신으로 열여섯 살에 치올콥스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주비행 책을 썼다. 1929년 GDL에서 세계 최초의 전기열로켓을 시험한 후 소련 액체로켓엔진의 기초를 세웠다. 1938년 체포되어 8년형을 받고 샤라시카에서 설계를 이어갔으며, 1944년 석방·복권되었다. OKB-456(현 에네르고마시) 수석설계자로서 R-7의 RD-107/108 엔진을 개발해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우주로 보냈다. 코롤료프 사후 1974년 NPO 에네르기야의 총괄설계자가 되어 15년간 소련 유인우주계획을 이끌었고, 세계 최강 액체로켓 RD-170과 에네르기야-부란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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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가스역학연구소(GDL) 입소, 전기열로켓·액체로켓 개발 주도
  • 1933–38로켓연구소(RNII)에서 ORM 계열 엔진 개발
  • 1938–44체포·8년형, 카잔 샤라시카에서 항공기용 보조로켓 RD-1 설계
  • 1946–74OKB-456 수석설계자: R-7 계열 엔진(RD-107/108), 프로톤 엔진(RD-253) 개발
  • 1957/1961스푸트니크·보스토크(가가린) 발사 성공,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 1974–89NPO 에네르기야 총괄설계자, 소련 유인우주계획 총괄
  • 1988RD-170 엔진 탑재 에네르기야-부란 발사 성공

보리스 바실리예비치 페트롭스키

Борис Васильевич Петровский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1908–2004 ○ 자연사

브레즈네프 아래 15년간 소련 보건을 이끈 심장혈관외과의

브레즈네프가 보건장관직을 제안하자 페트롭스키는 수술을 계속하고 싶다며 망설였다.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이 이미 승인했다고 답했다. 페트롭스키는 회고했다: "잠시 생각한 뒤, 나는 당의 의지에 거스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소련 보건장관(1965–1980)으로 15년간 재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의료체계를 총괄한 외과의사이자 과학자였다. 1964년 소련 최초 승모판 기계 인공판막 치환술, 1965년 소련 최초 신장 이식 수술을 집도한 심장혈관외과의 선구자였다. 핀란드 전선과 대조국전쟁에서는 경동맥과 흉부대동맥에 직접 혈액을 주입하는 수혈법을 개발해 대량 출혈 환자를 구했다. 전연방외과학연구소를 설립·이끌며 미세수술과 마취과학을 독립 전문분야로 정착시켰고, 150명 이상의 의학박사를 배출했다. 1971년 소비에트 의사 선서와 인테르나투라(전문의 수련제도)를 도입했으며, 둘 다 체제 붕괴 후에도 러시아 의료교육의 근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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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2모스크바주 포돌스크 구역병원 외과의
  • 1932–1937모스크바 종양학연구소 연구원 (P.A. 게르첸 지도)
  • 1939–1945핀란드 전선 및 대조국전쟁 야전병원 선임 외과의
  • 1948–1956제2모스크바의대 일반외과학 교수; 크렘린병원 수석외과의 (1953–1965)
  • 1956–1965제1모스크바의대(세체노프) 병원외과학 주임
  • 1963–1988전연방외과학연구소 설립자 겸 소장
  • 1965–1980소련 보건장관
  • 1966–1981CPSU 중앙위원 후보위원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코텔니코프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отельник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8–2005 ○ 자연사

표본화 정리를 발견하고 금성 레이더 탐사를 이끈 과학자-국가원수

1999년 에두아르트 라인 재단이 66년 전 젊은 공학도의 논문에 기초연구상을 수여하자, 91세의 코텔니코프는 말했다: “나는 그저 내 앞에 놓인 문제를 풀었을 뿐입니다.”

정보이론과 레이더 천문학의 선구자. 1933년 표본화 정리(코텔니코프 정리)를 공식화했고, 1941년 일회용 암호 패드의 절대적 안전성을 독자 증명했으며, 최적 잡음 면역 이론을 창시했다. 1961년 금성, 1962년 수성 레이더 탐사를 지휘해 행성 레이더 천문학을 열었다. 2차대전 중 정부용 암호 음성 통신 장비를 개발했고, 종전 후 MPEI 무선공학부 학장으로 소련 전자공학 인재 세대를 키웠다. 1954년부터 IRE 소장, 1970년부터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1973년부터 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두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 레닌상, IEEE 벨 메달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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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1MPEI 졸업, 통신연구소 엔지니어, MPEI 강사·연구실장
  • 1933표본화 정리(코텔니코프 정리) 발표
  • 1939–1942정부용 암호 음성 통신 장비 '소볼-P' 개발 주도
  • 1941–1944통신산업 개발자로 대전 지원
  • 1944–1980MPEI 정교수, 무선공학부 학장(1947–1953), OKB MPEI 소장(1948–1953)
  • 1954–1988과학아카데미 무선공학·전자공학 연구소(IRE) 소장
  • 1970–1988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제1부총재)
  • 1973–1980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의장 (공화국 국가원수)
  • 1981–1992인테르코스모스 위원회 의장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랴잔스키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Рязанский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9–1987 ○ 자연사

소련 우주로켓의 '라디오맨': 모든 로켓과 위성의 무선 시스템을 책임진 수석설계자

1928년, 열아홉 살 랴잔스키는 자작 단파무전기 앞에 앉아 있었다. 북극에서 비행선 이탈리아 호가 추락하고 쇄빙선 크라신이 구조에 나섰다. 전파가 대기를 가르자 연결이 이루어졌다 — 소련 최초의 단파구조교신이었다. 그는 이 순간을 평생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위대한 조국전쟁 중 모스크바 방공의 핵심이 된 페그마티트 레이더를 개발했고, 1946년부터 NII-885 수석설계자로서 R-7 대륙간탄도미사일, 스푸트니크, 보스토크, 소유스, 달·금성·화성 탐사선의 무선유도·원격측정·추적 시스템을 설계했다. 코롤료프·글루시코·바르민·필류긴·쿠즈네초프와 함께 '6인 수석설계자회의'를 구성했으며, 동료들 사이에서는 갈등을 중재하는 '평화주의자'로 불렸다. 1987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 로켓에 그의 무선 장비가 실리지 않은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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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소련 최초 단파교신: 쇄빙선 크라신과 통신 성공
  • 1929–31니즈니노브고로드 무선연구소, 군용 무선국 개발
  • 1935–41오스테흐비우로: 무선조종 전차·항공기·어뢰정 개발
  • 1941–45페그마티트(P-2) 레이더 주임설계자 — 모스크바 방공, 스탈린상
  • 1946–54NII-885 수석설계자: R-1부터 R-7까지 탄도미사일 무선유도체계
  • 1957–65스푸트니크·보스토크·소유스·달·금성·화성 탐사선 무선시스템, 레닌상
  • 1965–86NIIP(후일 RNII KP) 수석설계자 겸 과학지도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보골류보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Боголюб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9–1992 ○ 자연사

동구권 최대 국제연구소를 이끈 이론물리학의 제도적 거인

노버트 위너는 이렇게 물었다. '보고류보프라는 사람이 여러 명 있는 겁니까? 수학, 역학, 물리학 모두에 일급 전문가인 사람이 한 명일 리 없잖아요.'

14세에 첫 논문, 21세에 박사학위를 받은 신동으로, 니콜라이 크릴로프와 비선형역학의 키예프 학파를 세웠다. BBGKY 위계, 초유동체 미시 이론, 보고류보프 변환, 재규격화군, 쿼크 색전하, 초전도 미시 이론을 연달아 제시하며 통계역학과 양자장론의 기초를 다시 썼다. 1956년 두브나 JINR 이론물리연구실을 설립하고 1966년부터 1988년까지 소장으로 동구권 최대 국제과학기관을 이끌었으며, 스테클로프 연구소 이론물리부장을 겸해 소련 이론물리학의 제도 전체를 조직했다. 비당원 정교회 신자로서, 노버트 위너가 '보고류보프가 여러 명인가'라고 물을 만큼 수학·역학·물리학을 아우른 다재다능한 이론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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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41키예프 대학 수리물리학 교수
  • 1947–1992스테클로프 수학연구소 이론물리부장
  • 1953–1992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56–1965JINR 이론물리연구실장
  • 1966–1973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이론물리연구소장
  • 1966–1988JINR 소장
  • 1983–1988스테클로프 수학연구소장
  • 1966–1992모스크바 대학 양자통계 및 장이론 학과장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바르민

Владимир Павлович Барм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9–1993 ○ 자연사

카튜샤에서 부란까지: 모든 소련 로켓의 발사대를 설계한 엔지니어

그는 로켓을 발사대에 '매달린 상태'로 고정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코롤료프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실험 결과 바르민의 안이 최적이었다. 훗날 그를 '바이코누르의 아버지'라 불렀다.

모스크바 출신, 바우만 공대에서 냉동·압축기 공학을 전공하고 1935~36년 미국을 방문해 기술을 시찰했다. 콤프레소르 공장 수석설계자로 독소전 발발 직후 카튜샤 다연장로켓 발사대를 개발했다. 1946년부터 GSKB 스페츠마시를 이끌며 R-1에서 R-7, 프로톤, 에네르기야-부란까지 소련의 거의 모든 로켓 발사대와 사일로를 설계했다. 코롤료프의 수석설계자회의 일원으로 달·금성 토양채취 장치도 개발했으며, 실현되지 못한 달 기지 '즈베즈다'를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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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바우만 모스크바공대 졸업, 냉동·압축기 전공
  • 1935–36미국 방문, 오르조니키제 후원으로 냉장 기술 시찰
  • 1940–45콤프레소르 공장 수석설계자, BM-13 카튜샤 발사대 개발
  • 1946–57GSKB 스페츠마시 수석설계자: R-1, R-2, R-5M, R-7 발사대
  • 1957/1961스푸트니크·보스토크 발사 — R-7 발사대가 우주개발의 관문이 되다
  • 1960s–1970sR-12·R-14·R-9A·UR-100 사일로, 프로톤 발사대, 달·금성 토양채취기
  • 1970s–1988에네르기야-부란 발사대 및 달 기지 즈베즈다(바르민그라드) 프로젝트
  • 1959–1993바우만 공대 '발사 로켓 복합체' 학과 창설·주임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쿠라쇼프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раш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0–1965 ○ 자연사

WHO 총회 의장을 지낸 흐루쇼프기 보건장관

1962년 5월 24일, 제네바 프레니 구릉. 쿠라쇼프는 WHO 신청사 기공식에서 흙손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 세워질 건물은 모든 인류가 언젠가 질병에서 해방되리라는 희망의 상징이자 초점이 될 것입니다」

철도 전철수의 아들로 태어나 카잔 의대를 졸업한 정신과 의사. 31세에 카잔 의학원 원장을 맡았고, 러시아공화국 보건차관을 거쳐 1959년 소련 보건장관에 올랐다. 흐루쇼프 집권기 소비에트 보건의료 체계를 확장하고 의학교육 개혁을 주도했으며, 인기 과학잡지 《즈도로비예》(건강)의 초대 편집장을 지냈다. 1962년 제네바에서 제15차 세계보건총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WHO 본부 신축 기공식에서 주춧돌을 놓았다. 그의 재임기 소련은 WHO 두창 박멸 계획을 적극 후원했으며, 1959–1960년 모스크바 두창 유입 사태 당시 KGB와 협력한 신속한 봉쇄·접종 작전으로 질병 확산을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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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카잔 의대 졸업, 정신과 전공
  • 1935–1941카잔 정신병원 주임의사, 타타르공화국 지역정신과장
  • 1941–1942카잔 의학원 원장
  • 1942–1953러시아공화국 보건차관
  • 1953–1955소련 보건차관
  • 1955–1959러시아공화국 보건장관
  • 1959–1965소련 보건장관
  • 1962제15차 세계보건총회 의장

바실리 스테파노비치 푸르소프

Василий Степанович Фурс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10–1998 ○ 자연사

원자로 이론과 교육을 잇댄 핵 프로젝트 물리학자

“빠르게, 빈틈없이, 서두르지 않으면서 서둘렀다.”

바실리 스테파노비치 푸르소프는 이론물리학과 원자로 연구를 오가며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의 계산과 조직을 맡은 물리학자였다. 그는 두보프스키, 포브즈네르와 함께 F-1에서 플루토늄이 축적되는 양을 계산했고, 흑연과 우라늄의 선별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후 A-1의 발진과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을 과학적으로 이끌었으며, 전후에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물리학부를 장기간 운영해 원자력 국가의 연구 인력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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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9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조교·부교수
  • 1938–1941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이론물리학과장 대행
  • 1941–1944붉은군대 정치장교·포병 배터리 commissar
  • 1944–1947제2연구소 이론 부문 선임연구원·부문장
  • 1947–1951콤비나트 817 A-1 원자로 과학 책임자
  • 1951–1954쿠르차토프의 우라늄·흑연 원자로 부책임자
  • 1954–1989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물리학부 학장

키릴 이바노비치 셸킨

Кирилл Иванович Щёлк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르메니아계 1911–1968 ○ 자연사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에 기폭장치를 손수 꽂은 핵물리학자, 제2핵무기연구소의 초대 과학책임자

1949년 8월 29일, 셸킨은 조립동에서 RDS-1을 수령하는 서류에 서명하고,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한 뒤 탑의 출입문을 봉인했다. 그가 '기폭' 버튼을 누른 마지막 사람이었다.

키릴 셸킨은 연소·폭발 물리학자로서 스핀 폭굉 이론을 정립했고,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서 결정적 실무를 맡은 인물이다.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에서 그가 직접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하고 탑의 출입문을 봉인한 뒤 기폭 버튼을 눌렀다. 이후 1955년 우랄 지역에 두 번째 핵무기 설계국인 첼랴빈스크-70(현 브니이테에프)의 초대 과학책임자 겸 수석설계자로 부임하여 소련 최초로 실전배치된 열핵무기를 개발했다. 쿠르차토프, 하리톤과 함께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1959년 연속된 심장발작으로 1960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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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41소련 과학아카데미 화학물리연구소 연구원(레닌그라드)
  • 1941–1942붉은 군대 자원입대, 모스크바 방어전 참전 (제7근위소총사단)
  • 1944–1947화학물리연구소 실험실장 (모스크바)
  • 1947–1952KB-11(아르자마스-16) 부수석설계자 겸 연구부문장
  • 1952–1955KB-11 수석설계자 제1대리 겸 과학지도자 제1대리
  • 1955–1960NII-1011(첼랴빈스크-70) 초대 과학지도자 겸 수석설계자
  • 1960–1968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IPT) 연소학과장·교수

미하일 쿠지미치 얀겔

Михаил Кузьмич Янгель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1–1971 ○ 자연사

저장성 추진제 로켓으로 전략로켓군의 척추를 만든 설계자

1960년 10월 24일, R-16 시험발사대에서 126명이 폭사한 네델린 참사 당시, 얀겔은 잠시 흡연실로 자리를 옮겨 목숨을 건졌다. 훗날 그는 '운명이 나를 살렸다'고 짧게 말했다.

이르쿠츠크 변경 유형수 가문 출신으로, 모스크바 항공대학 졸업 후 전투기 설계를 거쳐 1954년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OKB-586(유즈노예)의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저장성 고비등 추진제를 채택한 R-12·R-14·R-16·R-36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차례로 완성해 소련 전략로켓군의 핵심 전력을 구축했으며, 코스모스·치클론 발사체로 우주계획의 실용적 기반도 닦았다. 1960년 네델린 참사 당시 흡연실로 자리를 옮겨 생존했고, 1971년 60세 생일 축하연 무대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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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모스크바 항공대학(MAI) 졸업, 폴리카르포프 설계국 입사
  • 1937–44전투기 I-153, I-180, I-185 개발; 미코얀·먀시셰프 설계국 근무
  • 1946–48항공공업부에서 항공기 개발 조정
  • 1950–54NII-88에서 코롤료프 부하; R-5·R-7·R-11·R-12 초기 연구
  • 1954–71OKB-586(유즈노예) 수석설계자; 저장성 추진제 로켓 개발
  • 1959/61R-12·R-14·R-16 배치,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 1960네델린 참사(R-16 폭발)에서 흡연실로 피해 생존
  • 197160세 생일 축하연 무대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

므스티슬라프 브세볼로도비치 켈디시

Мстислав Всеволодович Келдыш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라트비아 1911–1978 ○ 자연사

우주과학을 조정한 과학아카데미 총재

길어진 회의에서 켈디시가 눈을 감고 잠든 듯 고개를 숙이면 모두 그가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던진 질문은 언제나 논의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었고, 그는 모든 정보를 놓치지 않고 있음이 드러났다.

응용수학자이자 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1961–1975). 1930년대 항공기 플러터와 시미 현상을 수학적으로 해결했고, 1946년 스테클로프 연구소에 특별계산국을 조직해 핵무기 개발의 수치해석을 총괄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수석 이론가'로서 인공위성·유인우주비행의 궤도 계산을 조정하며 코롤료프와 함께 소련 우주계획의 핵심 지도부를 이루었고, 소련 전자계산기 개발의 실질적 국가 발주자였다. 이론과 계산, 연구기관과 국가 결정을 하나의 체계로 묶은 과학 행정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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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1975과학아카데미 총재 · 우주과학 조정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쿠즈네초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Кузнец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1–1995 ○ 자연사

NK-12부터 NK-33까지: 소련 하늘과 우주를 움직인 엔진 총설계자

N-1 달로켓 계획이 취소된 뒤 쿠즈네초프는 NK-33 엔진 수십 기를 폐기 명령을 어기고 사마라 창고에 보관했다. 30년 후 미국 엔지니어들이 시험해 보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효율적인 로켓 엔진'이라 평했다.

소련의 항공기·로켓 엔진 총설계자로, OKB-276을 이끌며 세계 항공사에 남을 터보프롭·터보팬·액체로켓 엔진을 개발했다. 그의 NK-12는 오늘날까지 세계 최강 터보프롭으로 Tu-95 전략폭격기와 An-22 수송기에 동력을 공급하며, NK-32는 Tu-160 초음속 전략폭격기의 심장이 되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요청으로 소련 달로켓 N-1의 1단용 NK-33 엔진을 개발했으며, 폐쇄회로 방식을 채택한 이 고효율 엔진은 계획 취소 후 보존되었다가 1990년대 미국 안타레스 로켓에 사용되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에 올랐고, RSFSR 최고소비에트 의원(1963–1990)으로 과학·산업 정책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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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3모스크바 항공기술학교 야간부·제24공장 기계공
  • 1933–1938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38–1942주콥스키 아카데미 교편·연구; 1941년 후보학위 논문 방어
  • 1942제6공군 제239전투기사단 선임기사 (전선 근무)
  • 1943–1949우파 제26항공공장 → 부수석설계자 → 수석설계자
  • 1949–1994OKB-276 (후일 쿠즈네초프 명명 SNTK) 수석설계자·총설계자, 쿠이비셰프/사마라
  • 1963–1990RSFSR 최고소비에트 의원
  • 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레오니트 비탈리예비치 칸토로비치

Леонид Витальевич Канторович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2–1986 ○ 자연사

중앙계획을 수학으로 최적화하려 한 노벨상 수상자

1941년 12월, 레닌그라드 포위전 속에서 칸토로비치는 라도가 호수 얼음 위를 직접 걸으며 얼음 두께와 기온에 따른 차량 간 최적 거리를 계산했다. '생명의 길'이었다.

소련 유일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1975). 1939년 합판 공장의 배분 문제를 풀며 선형계획법의 기초를 정립했고, 최적해에서 도출되는 '해소 승수'가 계획경제 내 객관적 가격 신호로 기능할 수 있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22세에 레닌그라드 대학 교수, 1935년 무방어로 물리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그림자 가격 이론은 중앙계획 아래 분권화된 의사결정을 위한 이론적 토대였으나, 마르크스 노동가치론과 충돌하여 소련 경제관료에게 오래 배척당했다. 1960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수리경제연구소를 창설하며 계획경제의 수학적 합리화를 평생 과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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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레닌그라드 산업건설기술자 연구소 교수
  • 1934–1960레닌그라드 대학 교수 (22세에 임용)
  • 1939–1948군사공학기술대학 수학 주임
  • 1948–1960레닌그라드 대학 수학·역학 연구소 부서장
  • 1960–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 수리경제 부문 창설·지도
  • 1971–1976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산하 국민경제운영연구소
  • 1976–1986전연방 시스템연구소 (ВНИИСИ)

보리스 옙세예비치 체르토크

Борис Евсеевич Черток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폴란드 1912–2011 ○ 자연사

스푸트니크의 두뇌를 설계하고 소련 우주사를 기록한 코롤료프의 대리인

1945년 5월 2일, 붉은군대 소령 보리스 체르토크는 베를린 함락 직후 독일의회 의사당 벽에 자기 이름을 써넣었다. 평생 그 순간을 '가장 행복한 성취'라 불렀다. 석 달 뒤 그는 독일의 V-2 로켓 잔해 속에서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첫 페이지를 열고 있었다.

코롤료프의 최측근 대리인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 R-7부터 스푸트니크·보스토크·소유스·미르까지 소련 우주 로켓의 유도제어 시스템을 50년간 설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61)이자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은퇴 후 회고록 『로켓과 사람들』 4권을 펴내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속내를 생생히 기록했으며 99세까지 집필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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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38제22항공공장 전기기사, 항공기 특수장비·무장 설계
  • 1940–45볼호비티노프 설계국(OKB)에서 군용기 전기·무선 장비 담당
  • 1945–47독일 파견: V-2 유도제어 연구, 라베 연구소·노르트하우젠 연구소 근무
  • 1946–56NII-88 제어시스템 부서장 → 부수석 엔지니어, 코롤료프와 협업 시작
  • 1956–74OKB-1 부수석 설계자: R-7, 스푸트니크, 보스토크, 소유스 제어계 설계
  • 1974–92NPO 에네르기야 부총설계자: 미르 정거장, 에네르기야 로켓 제어계
  • 1994–994권의 회고록 『로켓과 사람들』 출간, NASA 영역본 발행
  • 2000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академик) 선출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플료로프

Георгий Николаевич Флёр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3–1990 ○ 자연사

스탈린을 깨운 편지 한 통, 주기율표에 이름을 새긴 핵물리학자

1949년 RDS-1 개발 당시, 플료로프는 플루토늄 임계질량을 직접 손으로 측정하는 실험을 자청했다. 동료들은 방사능 피폭을 우려했지만 그는 '데이터를 믿으려면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며 실험대에 올랐다.

소련 핵물리학자. 1940년 콘스탄틴 페트르자크와 함께 우라늄 자발 핵분열을 공동 발견했고, 1942년 전선에서 스탈린에게 서한을 보내 소련 원자폭탄 계획 재개를 촉구했다. RDS-1 개발 과정에서 직접 플루토늄 임계질량 실험을 수행했으며, 1957년 두브나에 핵반응연구소(FLNR)를 설립해 102번부터 106번까지 초중원소 합성을 주도했다. 그의 이름은 114번 원소 플레로븀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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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쿠르차토프 연구실
  • 1940콘스탄틴 페트르자크와 우라늄 자발 핵분열 공동 발견
  • 1942스탈린에게 서한 — 서방 핵과학 침묵 경고, 원자폭탄 계획 재개 촉구
  • 1943–1954소련 원자폭탄 프로젝트 참여, RDS-1 플루토늄 임계질량 실험 직접 수행
  • 1957–1990두브나 핵반응연구소(FLNR) 설립자 겸 과학지도자, 102~106번 원소 합성 주도
  • 1968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빅토르 이바노비치 쿠즈네초프

Виктор Иванович Кузнец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3–1991 ○ 자연사

'위대한 6인' 중 가장 키 크고 말 없는, 소련 로켓의 눈을 만든 자이로스코프의 아버지

동시대인의 회고: "좁은 자리에서 친구들은 그를 '비챠-크로슈카(꼬마 비챠)'라 불렀다 — 그는 여섯 명의 수석설계자 중 가장 키가 컸다. 그리고 아마 가장 말이 없었다." — 야로슬라프 골로바노프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출신의 자이로스코프 공학자. 2차대전 중 함포 사격통제용 자이로 안정화 장치로 스탈린상을 받았고, 1946년 코롤료프의 '위대한 6인'에 합류해 소련 로켓의 관성항법을 확립했다. R-7(스푸트니크·가가린), R-16, R-36, UR-100 등 모든 소련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살류트·미르 우주정거장, 에네르기야-부란까지, 그의 자이로스코프 없이 발사된 소련 우주로켓은 없다. 1956년부터 이끈 NII-944은 현재 그의 이름을 딴 응용역학연구소(НИИ ПМ)로 남아 러시아 우주항법의 핵심이다. 가장 키가 컸지만 가장 말이 없었던 그를 동료들은 '비챠-크로슈카(꼬마 비챠)'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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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40레닌그라드 제212공장(전기계기) 연구기사, 함선용 자이로컴퍼스 개발
  • 1940–43모스크바 NII-10 자이로스코프 부장, 함포 사격통제 안정화 장치로 스탈린상(1943)
  • 1943–46MNI-1 특별설계국 수석설계자, 전차 주포용 안정기 개발
  • 1946–56NII-10 수석설계자, '위대한 6인' 합류 — R-1·R-2·R-5 유도장치 개발
  • 1956NII-944(현 응용역학연구소) 주임기사 겸 수석설계자 — R-7 유도장치, 사회주의노동영웅(1차)
  • 1957/1961스푸트니크·보스토크(가가린) 발사 성공, 레닌상, 사회주의노동영웅(2차)
  • 1960s–80sR-16·R-36·UR-100 ICBM, 루나·베네라·마스 탐사선, 살류트·미르·에네르기야-부란 유도장치
  • 1968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58 준회원, 1949 포병과학아카데미 준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