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 정권에서 남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함께 권력을 행사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당과 국가의 핵심 직책에 오르며 여성 해방과 과학 발전의 상징으로 선전됐지만, 실제로는 가족 중심의 권력 집중과 개인숭배를 강화했다.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에서 봉기가 확산되던 시기 정권의 대응에 관여했고, 22일 남편과 함께 달아났다가 체포됐다. 두 사람은 25일 약식 재판 뒤 함께 처형됐다.
1986년 4월 27일 오전 10시, 프리피야티에서 정부위원회를 소집한 셰르비나는 단 한 마디로 회의를 열었다. '피난을 시작한다.' 사고 32시간 만에 5만 명의 도시 전체가 버스에 올랐다.
소련을 세계 1위 탄화수소 생산국으로 만든 서시베리아 석유·가스 단지의 설계자. 튜멘주 당서기와 석유가스건설장관으로서 타이가와 영구동토를 뚫고 송유관·도시·철도를 건설했으며, 부총리로서 체르노빌 사고(1986)와 아르메니아 지진(1988) 정부대책위원회를 직접 지휘했다. 방사능에 노출된 건강 악화 속에서도 현장을 떠나지 않은 기술관료였다.
1987년 5월 1일 브라티슬라바 노동절 퍼레이드에서 한 학생이 주석단에 서 있던 샬고비치에게 달걀 두 개를 던졌다. 그는 경호원에게 달걀이 묻은 재킷을 건네며 자리를 떠나야 했다.
슬로바키아 출신 체코슬로바키아 보안기관 장교이자 정치인. 전시에는 친나치 슬로바키아군에서 소련으로 탈주한 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서 복무했고, 전후 StB 장교로 정치탄압에 가담했다. 1968년 6월, 두브체크는 자신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샬고비치를 내무차관 겸 StB 책임자로 발탁했으나, 샬고비치는 KGB와 협력하여 개혁파 체포 계획을 세우고 8월 21일 두브체크 일행을 소련군에 넘겼다. '정상화' 체제에서는 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의장(1975~1989)이라는 의전직에 머물렀고, 벨벳 혁명 직후 자택 지하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아우슈비츠 해방 직후, 보론초프가 촬영한 생존자와 수용소의 영상은 현장을 국제적 증거로 바꾸었다.
알렉산드르 보론초프는 소련의 다큐멘터리 영화 촬영기사이자 감독으로, 전쟁의 현장을 기록 영상으로 남긴 인물이다. 1945년 1월 말 제1우크라이나 전선 촬영팀과 함께 해방 직후의 아우슈비츠를 촬영했고, 그 영상은 영화 《아우슈비츠》와 뉘른베르크 재판에 제출된 소련 측 증거에 포함되었다. 전쟁 뒤에는 중앙 다큐멘터리 영화 스튜디오에서 촬영과 연출을 이어 가며 전선 기록을 평시의 국가 영화 제작으로 연결했다.
모두 달아난 뒤, 무전기와 홀로 남았다. "50kg 중포탄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우리 쪽이 퍼붓기 시작했다!" 전차 넉 대는 불타고 두 대는 멈춰 섰다.
스몰렌스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포병 장교로 복무하며 자신의 위치로 포격을 유도해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되었다. 전후 대외무역 분야에서 성장해 1976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은행 총재를 지내며 브레즈네프 시기 계획경제의 통화·신용 시스템을 관리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금융개혁 요구와 가족의 망명 사건이 겹치며 퇴임했다.
레이 클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걱정해온 그것들, 정말 있는 것 같습니다.' 번디가 물었다. '확실한가?'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1961–1966)으로,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베트남전 확전의 핵심 설계자였다. 1962년 10월 15일 저녁 CIA로부터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 증거를 보고받았으나, 비밀 유지와 준비 부족을 이유로 다음 날 아침까지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1966년 퇴임 후 포드재단 회장을 지냈고, 말년에는 핵무기 선제사용 포기를 주창하며 핵군축 논의에 기여했다.
1973년 출간한 저서에서 "화학공업 없이는 단 하나의 국가적 과제도 최적의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전면적 화학화를 당 노선으로 정당화했다.
모스크바 화학기계공학 연구소를 졸업하고 고스플란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소련 화학공업의 중앙계획과 당적 지도를 아우른 관료이다. 1965년부터 1976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화학공업부장으로 재임하며 코시긴 개혁기 화학공업 현대화(합성고무·플라스틱·광물비료·석유화학의 대규모 확장)를 당 라인에서 주관했다.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중앙감사위원회 위원으로서 당내 재정·문서 감사 역할을 겸했으며, RSFSR 최고회의 대의원도 3선 지냈다. 그의 저서 『24차 당대회 결정에 비추어 본 화학공업』(1973)은 브레즈네프기 화학공업 정책의 대표적 당 문헌이다.
츠카노프가 말한 '세 개의 못' 원칙: "브레즈네프의 지시는 곧바로 실행하지 않고 상상의 첫 번째 못에 걸어둡니다. 재촉이 오면 두 번째 못으로. 세 번째 못까지 와야 비로소 전화를 들죠. 실제 실행되는 것은 10분의 1도 안 됩니다."
야금 기술자 출신으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수석 보좌관을 20년 가까이 지낸 당 기구의 핵심 인물이다.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업대학을 같은 해 졸업한 브레즈네프와 인연을 맺어, 1958년 중앙위원회 기구에 합류한 뒤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으로 있는 전 기간 동안 그의 비서실을 실질적으로 총괄했다. 정치국 자료와 지시 사항을 필터링하며 총서기가 접하는 정보의 흐름을 통제했고, 이른바 '세 개의 못' 원칙으로 대변되는 특유의 실용주의로 방대한 관료적 업무를 관리했다. 겉으로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았으나, 매일 브레즈네프를 대면하는 몇 안 되는 인물로서 정체기 소비에트 정치의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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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958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첼랴빈스크 지역 철강 기업에서 근무,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장 주임기사 역임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트로야놉스키가 무심히 던진 '죽는 것보다 붉은 게 낫군'이라는 한마디에, 안보리 회의장은 긴장이 풀려 웃음이 터졌다.
올레크 트로야놉스키는 스탈린의 통역에서 출발해 흐루쇼프의 외교 보좌관, 주일 대사, 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주중 대사를 역임한 소련의 외교관이다. 초대 주미 소련 대사의 아들로 워싱턴에서 성장한 독특한 배경을 지녔으며, 10년간의 유엔 대표 재임 중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KAL 007기 격추라는 냉전의 최대 위기에서 냉철하고 유머러스한 태도로 서방 외교가들의 존중을 얻었다. 유엔 대표직은 야코프 말리크의 후임이자 고르바초프 개혁 이전까지 소련의 대서방 외교 연속성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시크는 안토닌 노보트니의 사임을 최초로 공개 요구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혁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보다 20년 앞서서.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 경제 개혁의 설계자였다. 1964년 저서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시장 메커니즘을 접목하는 신경제모델을 제시했고,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에서 노보트니 체제를 공개 비판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68년 두브체크 내각에서 부총리로 개혁을 주도했으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스위스에서 '제3의 길'을 이론화하며 생을 마감했다.
1941년 7월, 22세의 피노게노프는 7일간 열차로 코브로프 공장에 도착해 곧장 작업장으로 향했다. 두 달 동안 공장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ShVAK 기관포의 가장 핵심 부품인 포미 장치에 나를 배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22세의 나이로 데그탸료프 공장에 배치되어 항공기관포 ShVAK와 대전차소총 PTRD 생산을 진두지휘했고, 전후에는 오토바이 민수 전환을 거쳐 공장장까지 오른 군수 생산 행정가다. 1954년부터 6년간 공장장을 맡으며 S-75 지대공 미사일 유도장치와 소련 최초의 대전차유도탄 '시멜'의 양산 체계를 구축했다. 1979년 세르게이 즈베료프의 후임으로 국방공업장관에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까지 10년간 소련의 포병·소화기·탄약·광학기기 생산 전체를 지휘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 기간 중 군수 조달의 안정성을 책임졌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76), 레닌상(1982), 국가상 2회(1979, 1989)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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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코브로프 제2공장(데그탸료프 공장) 교대 마스터로 배치 — ShVAK 항공기관포 생산
그의 회고록은 페트로프의 오경보 판단을 군 내부의 비밀에서 공개된 냉전사의 사건으로 바꾸었다.
유리 보틴체프는 소련 포병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지휘를 거쳐 방공과 미사일·우주방어 체계의 조직자로 성장했다. 그는 1967년 창설된 미사일·우주방어군의 초대 사령관으로 기술 체계와 군 지휘를 결합했다. 1983년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의 오경보 보고를 처음 받은 직속 상관이었고, 훗날 회고록에서 사건을 공개해 페트로프의 판단을 세계에 알렸다. 그의 기록은 페트로프를 치하하면서도 군사 일지 문제로 질책한 체제의 모순을 보여 준다.
쓰촨의 농업개혁에서 총서기까지, 1989년 계엄에 반대해 15년 연금으로 생을 마친 개혁가
1980~1987년 총리, 1987년 총서기로 정치체제 개혁을 맡았으나 1989년 톈안먼 시위 지지로 실각해 죽을 때까지 가택 연금에 있었다
허난 출신으로 광둥의 지방 간부였다가 문화대혁명에서 실각했고, 1975년 쓰촨 제1서기로 복귀해 농가생산책임제와 기업 자율화 실험으로 「먹으려면 자오쯔양을 찾으라」는 말을 낳았다. 1980년 총리, 1987년 총서기가 되어 가격개혁과 정치체제 개혁 구상을 추진했다. 1989년 5월 학생 시위에 대한 계엄에 반대해 광장에서 학생들에게 「우리는 너무 늦게 왔다」고 말한 뒤 실각했고, 이후 2005년 죽을 때까지 베이징 자택에 연금되었다. 몰래 녹음한 회고록이 사후 홍콩에서 출간되었다.
정치국에서 스탈린이 유리 즈다노프에게 던진 말: "뭐라고, 리센코가 우리 농업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는 걸 모르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아들이자 스탈린의 사위였던 유리 즈다노프는 1947년 28세의 나이로 중앙위원회 과학부장에 임명되어 스탈린 말기 과학 정책의 핵심 관료가 되었다. 1948년 4월, 리센코의 이론을 공개 비판하는 강연으로 스탈린의 분노를 샀고, 정치국에서 질책을 들은 뒤 《프라우다》에 굴복의 편지를 발표해야 했다. 1950년에는 유대인 과학자들을 겨냥한 반유대주의 캠페인에 가담했으나, 스탈린 사후 로스토프 국립대학 총장(1957–1988)으로 31년간 재임하며 이 지방대학을 소련 최상위권 연구중심대학으로 성장시켰다. 유기화학자로서 800여 편의 논문을 남겼고, 말년에는 북카프카스 과학센터를 이끌며 과학행정가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44년, 전선에서 세 번째 중상을 입고 제대한 두봅스키가 목발을 짚고 쿠르차토프를 찾아가자 쿠르차토프는 "그런 몸으로 어떻게 일하겠나?"라고 물었다. 한 달 뒤 그는 목발 없이 지팡이만 짚고 다시 나타나 제2연구소에 채용되었다.
하리코프 대학 출신의 소련 핵물리학자. 1944년 부상 제대 후 쿠르차토프의 제2연구소에 합류해 F-1 원자로 조립 중 방사선량 계측과 감마선 차폐 실험을 수행했으며, 중성자 계수기를 직접 제작하고 플루토늄 축적 계산을 맡았다. 1946년 12월 25일 임계 당시 통제실에 남은 소수 인원 중 하나였고, 이후 소련 원자로 방사선 안전 체계의 기초를 세웠으며 오브닌스크 원자력발전소(1954)와 마야크 플루토늄 생산로들의 물리 기동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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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하리코프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하리코프 물리기술연구소 근무
1941–1943전선 복무, 보병대대장, 3회 부상으로 전역
1944–1946제2연구소 F-1 원자로: 선량계측·감마선 차폐·중성자 계수기·플루토늄 축적 계산
1947–1952방사선안전 그룹 책임자, 마야크(콤비나트 817호) 플루토늄 생산로 물리 기동
아나디리 작전 초기 계획 단계에서 참모총국은 단 5명의 장교만 기밀로 삼았다. 서기 한 명에게도 노출되지 않도록 모든 계획 문서를 손으로 직접 작성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에서 냉전 시대를 관통한 군인이다. 1962년 작전명 '아나디리'의 초안을 작성한 참모 장교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의 물리적 토대를 설계했으며, 이후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76년부터 1989년까지 바르샤바조약기구 연합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퇴역 후에는 미·소 양측 장성이 함께 저술한 공동 회고록 『작전명 아나디리』(1994)를 통해 냉전 최대 위기의 내막을 공개하며 역사적 화해에 기여했다.
1944년 7월 비보르크 북방 전투에서 왼팔을 잃고 제대한 24세의 소위는, 13년 뒤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R-7의 주임 설계자가 되어 있었다.
코롤료프의 지명으로 R-7의 주임 설계자가 되어 '세묘르카'의 설계를 이끌었고, 쿠이비셰프(사마라)로 파견되어 항공공장에서 R-7 계열의 양산을 조직했다. 1974년 OKB-1에서 분리된 중앙특수설계국(TsSKB)을 창설해 초대 국장 겸 총설계자가 되었으며, 보스토크·몰니야·소유스 발사체와 정찰·과학 위성군을 개발했다. R-7의 설계·양산·계열화 모두에 걸친 그의 일생은 스푸트니크에서 오늘날의 소유스까지 이어지는 우주 수송의 척추를 세운 작업이었다.
죽기 6개월 전 총대주교에게 보낸 편지: "내 소총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면, …정교회 신자요 기독교인인 나에게 그 죽음들의 책임이 있는 것일까요?"
소련의 대표적 소형화기 설계자. 쿨라크로 몰려 추방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독학한 칼라시니코프는, 신뢰성 없는 소총에 좌절한 병사들의 불만을 AK-47로 응답했다. 1949년 채택된 AK는 AKM, RPK, PK, AK-74로 이어지며 단순성과 저비용으로 세계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보병 화기가 되었다. 이젭스크 기계공장에서 평생을 보내며 상사에서 중장까지 진급했고 여섯 차례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스탈린상·레닌상·국가상을 수상한 소련 군수 테크노크라트의 전형이었으나 발명으로 부를 얻지는 못했다. 만년에는 자신의 무기가 초래한 죽음에 대한 영적 고통을 총대주교에게 고백하면서도 AK는 방어의 무기라고 주장했다.
24년간 키르기스스탄을 농업 공화국에서 산업 공화국으로 전환시킨,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대의 건설자
말년의 회고록에서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유산이자 짐이었던 프로젝트에 이렇게 썼다. "토크토굴 수력발전소 — 나의 자랑이자 나의 아픔이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출발한 키르기스 정치인으로, 1945년부터 10년간 모스크바 CPSU 중앙위원회 교관으로 근무하며 중앙당 경험을 쌓았다. 1961년부터 1985년까지 키르기스스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내며, 150개의 대규모 산업 시설(나린 수력발전 캐스케이드, 토크토굴 수력발전소, 마나스 국제공항)을 건설하고 51만 호 이상의 주택을 공급했다. 총공업생산은 5배, 전력 생산은 12배 증가했다. CPSU 중앙위원회 위원(1961~1986)으로 전연방 무대에도 참여했으며, 은퇴 후 독립 키르기스스탄 의회 의원(1993~2005)을 지냈다.
발터 슈텔레는 냉전기 미국 외교관으로, 소련과 유럽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룬 직업 외교관이었다. 그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로서 데탕트 국면의 미소 협상을 현장에서 지켜봤고, 헬싱키 협정으로 이어진 외교 과정과도 맞닿아 있었다. 이후 서독 대사와 국무부 부장관을 지냈다.
64대를 격추한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최고의 전투기 에이스로, 330회 출격·120회 공중전을 치르며 단 한 번도 격추되지 않았다. 200~300미터까지 접근해 명중시키는 저격술이 트레이드마크였고, 1945년 2월에는 소련 조종사 최초로 Me-262 제트전투기를 격추했다. 한국전쟁에서는 제324전투항공사단장으로 직접 출격이 금지되었으나, 휘하 조종사들이 216대를 격추하고 27대를 손실하는 탁월한 교환비를 기록했다.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부사령관(1964~1971)을 거쳐 1985년 항공원수로 진급했으며, 1990년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군대 비방을 규탄하는 '영웅들의 호소문'을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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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붉은군대 입대, 추후예프 군사항공학교 졸업 후 교관
1943–1945제240전투항공연대 조종사 → 중대장 → 제176근위전투항공연대 부연대장. 64기 격추, 세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