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린, 「우리 혁명의 성격과 소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승리 가능성에 대하여」 (1926)

인물니콜라이 부하린, 이오시프 스탈린, 레프 트로츠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블라디미르 레닌 용어일국사회주의, 국가자본주의 사건레닌 사후 권력투쟁과 좌익 반대파

1. 문제의 발생. - 2. 세계 자본주의의 성숙 문제.

볼셰비즘에 대한 다양한 비판: 자본주의의 일반적 미성숙이라는 관점에서, 전쟁으로 인한 파괴라는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미성숙이라는 관점에서. - 3.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의 전제 조건들에 관한 문제: 국제 사회민주주의, 러시아 멘셰비즘, 보그다노프-바자로프, 트로츠키, 볼셰비키 우익의 10월 입장. - 4. 소련에서 사회주의 건설 문제, 곧 우리 혁명의 성격에 관한 문제. - 5. 외부 위험으로부터의 보장과 우리 발전의 내적 힘. - 6. 결산.

현재 우리 혁명의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일련의 문제들이 다시 전면적으로, 말하자면 정면으로 제기되었다. 그 원인들을 여기서 상세히 분석할 수는 없지만, 근본 원인은 현재 우리가 이른바 복구 과정에서 재건 과정으로 이행하는 시기를 겪고 있다는 데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우리 경제 발전의 이전 단계를 복구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말을 엄밀한 의미로 쓴다면, 우리 공업의 상승과 인민경제 전체의 상승이 혁명 이전 시기에 걸었던 바로 그 궤도를 따라 진행된다는 뜻을 전제한다. 바로 그런 조건에서만 이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복구 과정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10월 혁명 이후 우리 경제의 상승, 무엇보다도 국가 부문의 상승은 경제 복구와 함께 생산관계의 끊임없는 개조도 진행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우리의 발전은 노동계급의 10월 승리 이전에 나라 경제가 발전해 온 토대와는 다른 토대 위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구 과정에 관해 말할 때에는 이 표현이 조건적으로 쓰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생산량이 전쟁 전 수준에 도달했고, 생산의 물적 골격이 전쟁 전 시기의 규모로 복구되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오직 이 말의 그러한 의미에서만 복구 과정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직 그러한 이해에서만 복구 시기에서 재건 시기로의 이행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앞에 경제를 개조하고 그것을 새로운 기술적 토대 위로 옮기는 과제가 전면적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과제는 무엇보다도 자본 지출 자금을 찾아내고 투입하는 과제와 맞닿아 있다. 그 자금은 생산 토대의 확장, 새 기업의 건설 또는 착공에 쓰이며, 상당 부분 새로운 기술적 토대 위에서 쓰인다.

이것이 매우 어려운 과제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더욱이 그 어려움은 실천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니다, 이론적 측면에서만 보아도 그것은 독일인들이 말하듯 ein harter Nuss(단단한 호두)이다.

이 어려움이 바로 우리 대오 안에서 적지 않은 동요와 흔들림을 낳는다. 바로 그 어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혁명의 근본 문제들로 거슬러 올라가게 만든다.

고정 자본 문제는 비교적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다(레닌의 전기화 문제와 비교할 것). 이 문제는 우리의 반대자들 일부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P. P. 마슬로프(П. П. Маслов)의 한 저작, 즉 그가 1918년에 펴낸 책 「전쟁과 혁명의 결과」[1]를 언급할 수 있다. 당시 마슬로프는 전적으로 멘셰비키 입장에 서 있었고, 그 책에서 멘셰비키 관점을 견지했다. 물론 그는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부정했으며, 그 부정은 상당 부분, 우리나라 기술·경제적 토대가 전반적으로 후진적인 탓에 새로운 기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때 그가 쓴 내용은 다음과 같다.

농업에서, 그리고 공업에서 가장 많은 노동력을 차지하는 수공업 생산에서 지배적인 기업 유형을 조금만 살펴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이 사회주의 체제를 위한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혁명이 사회주의 체제를 도입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위대한 러시아 혁명은 초기 몇 년 동안은 공업을 농촌의 농업으로부터 분리시킬 뿐이며, 그것도 자본주의를 통해 분리시킬 뿐이다. 사회주의는 “비교적 먼 미래에” 가서야 그것들을 조화로운 전체로 다시 결합시킬 것이다. 소규모 경영에서 농업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서는 공업은 기술적으로 사회적 생산으로 형성될 수 없다. 수공업자의 원시적 기술은 보존될 수 없고, 기술의 변화는 반농업적 경영을 분열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에서, 새로운 기술적 원칙에 따라 새로운 기업들을 창조하는 일은 혁명이 아무리 막대한 창조적 힘을 지니고 있다 해도 혁명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2].

이 인용문에서 가장 특징적이고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문장이다. 저자는 그 문장에서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우리 자신의 경제에 새로운 기술적 토대를 깔아줄 힘과 수단을 어디에서도 끌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 연결한다.

이 새로운 기술적 토대를 어떤 자금으로 마련할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문제다.

바로 이,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고정 자본 문제”가 P. 마슬로프에 의해 전면에 제기되었다. 그런데 멘셰비키인 마슬로프의 견해로는 새로운 기술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므로, 바로 이 점이 그에게는 우리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일반적으로 부정하는 결정적 논거가 되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우리 경제를 새로운 기술 궤도로 옮기는 문제, 곧 고정 자본 문제는 우리 혁명의 성격 문제,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 문제, 한마디로 현재 우리 당에서 논쟁 대상이 되고 있는 일련의 문제들로 곧바로 이어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뒤를 돌아보고, 사회주의 혁명 일반에 관해 이전에 무엇이 말해졌는지,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 가능성에 관해 무엇이 말해졌는지 상기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참고는 현재의 논쟁들을 해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련의 논거들을 드러내어, 논쟁하는 각 입장의 사상적 기원을 추적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여기서는, 아주 짧게나마 “성숙” 문제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 자본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 자본주의의 문제를 볼셰비키가 제기한 그 방식으로 다룬다. 볼셰비키의 역사적 예측과 전술이 언제나 사물의 상태에 대한 완전히 객관적인 분석에 기초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진리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성숙 문제를 해결할 때 볼셰비키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를 조건 짓는 세 가지 유형의 현상들을 고려했다. 첫째는 세계 자본주의의 기술·경제적 기초와 그 조직 형태이다. 둘째는 계급들 간의 상관관계, 즉 노동계급·소부르주아지·자본주의적 대부르주아지 사이의 세력균형이다. 셋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문화·이데올로기적 성숙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문화·이데올로기적 성숙 문제를,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고 국가 관리에 필요한 행정 역량 간부들을 배출한 뒤에야 비로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제기하지 않았다. A. A. 보그다노프(А. А. Богданов)는 문제를 그렇게 제기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보편적 조직 과학”의 원리들을 습득하고 프롤레타리아 문화에 관한 포괄적 학설의 견해에 깊이 스며들기 전에는 권력을 획득할 수 없다. 보그다노프와 같은 접근 방식으로는 자본주의의 성숙 문제가 언제 긍정적인 해결을 얻기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접근 방식은 달랐고, 이 접근 방식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관계들이 사회주의적 관계들로 이행하기 위한 전반적 성숙은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볼셰비키는 여기서 자본주의의 최후의 제국주의적 단계, 자본의 중앙집중과 집적의 충분한 정도, 자본주의의 특수한 조직 형태(금융자본, 자본주의적 독점, 은행 컨소시엄 등)에 관한 명제를 내세웠고, 세계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사실 자체를 자본주의적 관계들의 성숙을 증명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전쟁 자체는 생산력의 성장과, 이후 이러한 생산력의 다소 정상적인 발전에 이미 비좁아진 자본주의적 외피 사이의 거대한 갈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 자본주의를 평가할 때 볼셰비키는,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전면적 성숙을 인정하는 데서 전혀 출발하지 않았고, 지구의 모든 지리적 지점에서 자본의 중앙집중과 집적의 정도, 노동계급의 집적 정도 등

등이 모든 곳에서 동일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충분하다고 전혀 전제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볼셰비키는 레닌(Ленин)을 내세워 이른바 “자본주의 불균등 발전 법칙”에 관한 명제를 제기했다. 이 법칙은 나라별 자본주의 구조들의 이질성을 기초로 한다. 이 법칙은 자본주의 경제의 중심지들과 바로 그 경제의 식민지 주변부 사이에 엄격한 차이가 있다는 점, 세계 자본주의로서의 자본주의 전체의 성숙이 상이한 나라들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완전히 동일한 높이, 동일한 발전 속도 등을 전혀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운다. 이 레닌의 자본주의 불균등 발전 법칙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성숙 문제, 그 경제가 사회주의 경제로 이행할 준비의 정도 문제, 그리고 한 나라에서도 시작될 수 있는 복잡하고 장기적인 과정으로서의 세계 혁명 문제에 대한 볼셰비키의 접근 방식의 이론적 근거였다.

볼셰비키는 문제를 이렇게 제기했다. 볼셰비즘의 반대자들은 그 문제에 다르게 접근했다.

이와 함께, 그들(반대자들)이 자본주의 관계의 “미성숙”을 “증명”하기 위해 내세운 논거에는 여러 가지 변형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 한다. 볼셰비키를 겨냥하고, 현대 세계경제에서 자본주의 관계가 성숙했다는 볼셰비키 테제를 반박하려는 일련의 비판적 입장들이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는 성숙했지만, 세계대전의 결과로 그리고 전쟁 기간에 닥친 빈곤화의 결과로, 사회주의 혁명 궤도로 이행하기 위한 충분한 토대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끝으로 또 다른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문화적 미성숙을 지적하면서 특히 “독창적인” 여러 견해를 내세우는데, 프롤레타리아트는 바로 그 때문에 세계혁명의 과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볼셰비즘에 대한 첫 번째 유형의 비판, 곧 자본주의 관계의 경제적 미성숙이라는 관점에서 가해지는 비판은 겐리흐 쿠노프(Генрих Кунов)의 저작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1914년 8월 4일 독일 제국의회에서의 표결을 정당화하기 위해 쓴 자신의 소책자들 중 하나에서 대략 다음과 같은 구상을 전개했다. 그는 지금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생각하는 것은 공허한 환상과 유토피아에 빠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어떤 경제 형태도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그리고 전면적으로 실현하기 전에는, 스스로를 끝까지 소진시키기 전에는 소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쿠노프는 말했다. 자본주의가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나라들을 보라. 자본주의적 상품 내용으로 아직 완전히 채워지지 않은 시장들을 보라. 자본주의가 아직 자기 발전의 초기에 있는 일부 나라들을 보라. 그러면 자본주의가 앞으로도 엄청난 시간 동안 더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아주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전쟁 후에는, 쿠노프가 그렇게 단언했듯이, 생산력의 부분적 파괴로 인해 자본주의 관계의 추가적 발전 가능성이 생긴다. 왜냐하면 전쟁 동안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일정한 파괴를 겪었기 때문에, 원래도 거대했던 그 시장망이 파괴된 생산력에 비해서는 더욱 거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까운 시기에 사회가 사회주의 궤도로 이행하리라는 생각은 어리석고 유토피아적이며 반마르크스주의적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 분명하고 뚜렷하기 때문에, 같은 노선을 따르는 다른 비판자들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이번에는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이거나 반(半)마르크스주의자인 문필가 A. A. 보그다노프를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저작들 가운데 하나, 곧 소책자 「사회주의의 문제들」에서 이렇게 썼다.

증거로 (사회주의로 이행할 필요성과 가능성. Н. Б.)

사람들은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바로 그 부문들의 거대한 성장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제 산업 전반에 걸쳐 쓰이는 바로 그 두 가지 기본 재료, 즉 선철과 석탄의 세계 생산량을 가지고, 그 재료들의 가격과 노동력에 대한 보수, 그리고 노동력 착취의 대략적 비율에 기초하여, 인류가 처분할 수 있는 전체 노동 에너지 가운데 어느 몫이 이 생산물들의 거대한 연간 물량 속으로 결정화되는지를 계산해 본다면, 그 값은 약 2-2/2%이며 결코 3%를 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 결과에는 압도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3].

A. A. 보그다노프는 선철과 석탄 생산에서 이 2-2/2%라는 자기 수치를 제시함으로써, 자본주의 관계 발전의 한 국면에 관한 명제를 증명된 것으로 여긴다. 그 국면에서는 사회주의 혁명 궤도로의 이행이나 직접적인 사회주의 건설 궤도로의 이행 같은 과제를 스스로 제기할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한 비판이 진지하게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으로 받아들여질 리는 거의 없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희화화에 지나지 않는다[4]. 왜냐하면 “비판자들”은 여기서 자본주의 붕괴의 전제들에 대한, 극도로 단순화되고 결코 변증법적이지 않은 관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는 다른 생산 형태들을 전적으로(또는 거의 전적으로) 밀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소멸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훨씬 더 일찍 붕괴한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내부 모순들을 훨씬 더 일찍 전개시키고, 그 모순들이 자본주의의 계속된 존속을 견딜 수 없고 객관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참조, 예컨대 세계대전들, “전쟁과 혁명의 시대”). 마찬가지로 “비판자들”은 자본주의의 물질적 성숙이란 권력 장악 이후에 사회 전체를 전면적으로 그리고 즉각 포괄하는 거의 기성품인 사회주의가 존재할 정도여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운동의 출발점들, 즉 추가 건설의 가능성일 뿐이다. “비판자들”에게서는 이행기가 거의 통째로 사라진다. 이행기란 비사회주의적 형태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적 경제 형태들이 발전하는 시기이다. 그들(“비판자들”)의 겉보기 급진주의는 그들의 가장 깊은 기회주의의 이면이다. 이 부류의 비판자들에 더 오래 머무를 필요는 거의 없다. 다른 반론 그룹으로 넘어가기에는 이미 제시된 것으로 충분하다.

이 후자는 일반적인 형태로 대략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사회주의는 물론 성숙했고, 자본주의는 이미 자기 내부에 사회주의적 전복 문제를 의제로 올릴 수 있는 생산력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전쟁이 모든 것을 파괴했기 때문에 이제는 다른 어조를 취해야 하며, 이제는 사회주의적 전복 과제를 스스로 제기할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카우츠키다. 카우츠키는 전쟁의 막대한 파괴에 관해, 그리고 전쟁으로 파괴된 자본주의의 기반 위에서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 관해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 중에도 문제를 꼭 그렇게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아주 유명한 러시아 멘셰비키 리베르가 그렇게 제기했다. 리베르는 1919년 하리코프에서 출판된 자신의 소책자 「사회 혁명 또는 사회적 붕괴」의 서문에서, “유감스럽게도” 자신이 “공산주의 경호원들”로부터 숨어야 했던 시기에 이전 원고들을 분실했다고 서슴없이 알린 다음, 다음과 같은 논지를 편다: “기본적, ‘비관적’

입장들은 본 강연에서 전개된 것으로, 아직 ‘밀월’이던 우리 혁명의 달들에 이미 내가 옹호했다. 러시아 혁명의 첫날부터 이미 나에게는 전쟁이 불러일으킨 혁명의 부패성 붕괴의 징후들이 분명했고, 이리저리 떠도는 늪의 도깨비불은 단 한 순간도 나에게 혁명의 등대처럼 보이지 않았다”[5]. 시적이어야 할 이 서술은 다음과 같은 정치적 사고를 담고 있다. 즉, 볼셰비키 여러분, 무슨 사회주의니, 국제 혁명이니 등등의

것들에 대해 말하는가?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이것을 의제로 올리는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회의 전진적 혁명 운동 과정이 아니라, 전쟁이 불러일으킨 부패성 붕괴 과정이다.

이 소책자의 제3장에서 저자는, 전쟁의 결과로 나타난 “무정부 상태”를 묘사하면서, 「다가올 전망과 과제」라는 제목이 붙은 그 장에서, 자신의 관점이 러시아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것을 “통째로” 전 세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직접 선언한다. “내가 말한 모든 것으로부터, 지금은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다”[6].

이 논증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고통 없는” 이행이라는 기회주의적 전제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기는 어렵지 않다. 생산력 파괴와 필연적으로 결부된 파국들 속에서 사회주의가 탄생하리라고 예견한 마르크스(Маркс)의 혁명 이론(“Zusammenbruchstheorie”, 붕괴 이론)과 정면으로 모순되면서, “비판가들”은 참으로 목가적인 사건 전개가 가능하다는 데서 출발한다. 다른 한편, 검토 중인 이 논증은 사회주의 건설의 전제들에 대한 산술적 관념과도 연결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생산의 물질적 토대 발전에서 일정한 경계로부터 후퇴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즉시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가정한다. 계급 세력들의 변화하는 상관관계, 투쟁들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교육과 자기 교육 등—이 모든 것은 고려되지 않는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이 주장에 대한 경험적 검증, 즉 이후의 사건 전개 전체는 기회주의자들의 논의를 완전히 논박했다. 그들은 혁명 일반에서 도망쳤듯이 과제의 해결에서도 그저 도망쳤을 뿐이다.

반대 논거의 세 번째 묶음은,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의 형태로, 어떤 이론으로 제시되었다. 그 이론이 증명해야 했던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인구의 산술적 소수이기 때문에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이 사회민주주의자 비판가들에 따르면, 권력 장악,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노동계급의 정치 정당에 의한 권력 탈취, 사회주의 건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에 속하는 다수를 전제한다. 이 문제는 볼셰비키 문헌에서 아주 상세히 논의되었으며, 여기서 그 문제에 더 머무를 필요는 거의 없다. 특히 이 문제에서 레닌 동지가 카우츠키(Каутский)를 상대로 제시한 논거들은 널리 알려져 있다.

“...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오해하는 주된 원인은

(읽자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 —레닌이 썼다— 그들이 다음과 같은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즉 한 계급,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있는 국가 권력은 비프롤레타리아트 노동 대중을 프롤레타리아트 편으로 끌어들이는 도구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며, 이 대중을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 정당들로부터 되찾아 오는 도구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7] 프롤레타리아트가 인구의 소수이면서도 소부르주아 대중을 지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회 세력 결합은 충분히 가능하다. 다른 한편, 국내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 층들이 귀족적으로 변질되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극도로 어려워지는 경우도 가능하다[8].

따라서 문제에 대한 틀에 박히고, 저속하고, 구체적이지 못하고, 비변증법적인 태도만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소수인 상황에서 전복이 불가능하다는 사회민주주의적 견해로 이어질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미성숙에 관한 이론의 독창적인 변형은 아. 보그다노프의 관점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보그다노프에게는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들이 성숙한다는 특별한 이론이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권력을 장악한다는 과제를 스스로 제기할 수 있으려면, 사회주의 건설의 가장 복잡한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준비된 인재 집단을 이미 자신이 보유하고 있을 때여야 한다. 보그다노프의 논증은 아주 단순하다. 그는, 예컨대 계획 문제 같은 것을 들어 이렇게 말한다:

사회주의 경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엄청나게 복잡한 과제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의 세계적 조직이라는 과제를 제기한다면, 그 어려움은 측량할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상응하는 문화적·조직적 전제 없이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들이 아직 현존하지 않으므로, 물론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과제 자체를 당면 과제로 제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A. A. 보그다노프의 입장이 특별히 독창적이므로, 가장 특징적인 대목들을 전문 그대로 인용한다. 저자는 자신의 소책자 「사회주의의 제문제」 38쪽에서 이렇게 쓴다.

“인류의 계획적 조직화는 조직 경험의 일반화와 사회화, 그리고 그 경험을 과학적 형태로 결정화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없다면 — 과제 해결을 위한 역사적 조건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기술 경험을 일반화하고 사회화하는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이 없다면 기계 생산 체계가 불가능했을 것처럼, 그 과제의 해결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어서 68쪽에서는 다음과 같다.

“현재 프롤레타리아트의 문화적 비자립성은 근본적이고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며, 이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가까운 미래의 강령에서 이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계급의 문화 — 그 계급의 조직 형태와 방법 전체의 총체이다. 그렇다면, 전 역사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유례없이 복잡하고 어려운, 세계적 규모의 조직적 재편이라는 과업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당장 떠맡기려는 구상은 얼마나 악랄한 아이러니인가, 아니면 얼마나 유치한 몰이해인가! 게다가 그러한 일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조직들이 우리 눈앞에서 그토록 자주 — 적지 않게 외부의 타격 때문이 아니라 — 무너지고 흩어지고 있는 바로 그때 벌어진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에 못지않게 흥미롭고 A. 보그다노프의 입장에 매우 가까운 관점을 그 시절에 V. 바자로프가 발전시켰다. 바자로프는 보그다노프와 대체로 동일한 전제들에서 출발하지만, 자신의 결론들을 더 구체적이고 뚜렷하게 정식화한다. 방금 그 일반적 성격을 지적한 논증은 건너뛰고, 바로 이 결론들에 주목해야 한다. 저자가 그 결론들을 정식화한 방식은 다음과 같다.

V. 바자로프는 서유럽 국가자본주의의 형태들을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노동자 정당이 조금이라도 가까운 장래에 부르주아 체제의 이 새로운 형태를 진정으로 사회주의적이고 자유롭게 계획적인 경제를 창출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믿기 어렵다고 본다. 이 조건에서 그 정당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과제는 독일 기회주의자들이 정식화한 과제, 즉 이윤 획득에 기초한 경제를 ‘소비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 경제 조직’으로, 그리고 ‘Bedarfsdeckungswirtschaft’로 전환하는 과제이다. 이 마지막 표현은 최신 발명품에 붙은 어설픈 용어가 말하는 바이다”[9]

저자는 이 조직, 곧 국가자본주의의 국제적 성격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기회주의자들에 맞서 수정을 가한 뒤, 다음과 같은 최종 결론에 도달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매우 광범위하고 복잡한 조직이다. 그러나 이 조직은 강제적이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국가성의 토대와 조금도 단절되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 이 조직의 대체적 윤곽은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의 자생적 과정들 속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현대 민주주의 앞에는 원칙적으로 그것이 감당하지 못할 문제라고는 할 수 없는 문제가 대두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적절한 주도성을 발휘하고, 해당 과제의 성공적 해결에 이해관계를 가진 그 밖의 민주주의적 요소들을 자기 주위로 결집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향후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동안의 세계사 행로가 달라진다[10].”

한마디로, 노동자의 무문화성에 관한 이 바자로프의 논거는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신이시여, 독일 기회주의자들의 뒤를 따라, 부르주아지가 좌지우지하는 국가자본주의 조직들을 우리가 지지하게 해주십시오. 사회주의 건설은 어림도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내내 아주 기발한 일에 만족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를 가장 집약된 형태로 지지하는 일[11].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적 관계의 품 안에서 문화·조직적으로 성숙한다는 보그다노프-바자로프의 “이론”은 철저히 틀렸고, 노동계급 발전의 기본 사실들과 모순되며, 철저히 관념론적이다. 이 이론이 틀린 이유는, 착취당하고 경제적·정치적·문화적으로 억압받는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틀 안에서, 곧바로 사회 전체를 관리할 준비가 되고 건설기의 가장 복잡한 과제들을 해결할 힘을 자기 대열 속에 가질 수 있을 만큼 “성숙”할 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보그다노프와 바자로프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부르주아 혁명 사이의 원칙적 차이, 그리고 봉건 체제 틀 안에서 자본주의가 성숙하는 것과 자본주의 체제 틀 안에서 사회주의가 성숙하는 것 사이의 원칙적 차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 점에 관해 우리는 당시에 이렇게 썼다:

“자본주의 체제의 틀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미래 문화의 가장 천재적인 암시들, 인류의 향후 문화 발전을 위한 놀라운 가능성들을 창조한다. 그러나 이 틀 안에서 문화적으로 억압받는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를 전체 사회를 조직하는 데 대비시킬 수 있을 만큼 그것들을 발전시킬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낡은 세계의 파괴”를 위해 자신을 준비시키는 데는 성공한다. “자신의 본성을 개조하고 사회의 조직자로서 성숙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독재 기간에만 이루어진다”[12]

따라서 보그다노프-바자로프 이론은 권력 장악을 위해 지나치게 큰 요구들을 내세운다는 점에서도, 이행기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문화적 성숙 기간이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틀렸다. 보그다노프 이론의 근거가 옳았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과제는 원적 문제나 영구기관(perpetuum mobile)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는 해결 불가능했을 것이다.

볼셰비즘에 대한 비판은 국제 자본주의의 성숙도 문제, 세계 경제의 성숙도 문제와 관련해 이러한 형태들로 표출되었다. 볼셰비즘 자체에 관해서라면, 이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단일체였다:

우리 “당” 안에서는 이 문제, 즉 세계 경제의 자본주의 관계 성숙 문제에 관해 어떤 의견 차이도 없었다. 우리 당 내부의 모든 색조, 모든 유파, 모든 경향은 이 문제에 대해 회의를 드러내지 않았고, 볼셰비키 진영에서 나온 어느 발언도 국제적 규모의, 무엇보다 이른바 유럽 선진국들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자본주의의 성숙이라는 명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문제, 즉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관계 성숙 문제를 살펴보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볼셰비키와 사회민주주의자, 사회혁명당원 및 그 밖의 타협주의 정당들 사이의 차이를 다룰 때만이 아니라 이미 엇갈리게 나온다. 이 문제는 바로 우리 당 내부에서도 서로 다르게 제기되었고 서로 다르게 해결되었다. 지금도 이 문제는 여전히 서로 다르게 제기된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 혁명의 성격 문제와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이러한 정식으로 이미 여러 번 제기되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사회민주주의 진영에 속한 반대자들의 의견을 먼저 들어 보는 것은 흥미롭지 않은 일도 아니고 전혀 쓸모없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 혁명의 성격 문제를 둘러싼 볼셰비키 반대 투쟁에서 선봉에 나선 사람은 사회민주주의의 유명한 교황 카를 카우츠키였다. 그는 처음에는 아주 온건하게, 다음에는 변절자답게, 마지막에는 완전한 반혁명가로서 행동했다. 초기 소책자들에서는 비교적 온건하게 나왔다. 예를 들어 레닌 동지가 반박했던 소책자에서조차 카우츠키는 아직 예의의 경계선에 있었지만, 그때도 객관적으로는 부르주아지의 하인 같은 이념적 앞잡이 역할을 했다[13]. 카우츠키는 자신의 저작들에서 우리 혁명의 성격 문제를 꽤 정확하고 명료하며 분명하게 제기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그 강령」이라는 제목의 방대한 책에서 그는 우리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의 전형적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고 단언한다. 사실상 이 혁명은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혁명은 어떤 나라에서 일어나는데, 그 나라의 자본주의적 미성숙은 — 일반적으로 인정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늙은 경전 암송가가 들려주듯, 마르크스는 이미 말했다. 어떤 새로운 사회도 낡은 사회가 자신의 모든 생산적 가능성을 발전시키기 전에는 태어날 수 없다고. 따라서 이전 사회 발전 단계가 끝나지 않았고, 낡은 사회가 아직 자신을 끝까지 소진하지 않았다면 사회주의도 불가능하다. 이렇게 무장한 채 그는 거침없이 볼셰비키에 대한 정면 공격에 나선다. 카우츠키의 관점에서 볼셰비키는 산파 역할에 지나치게 빠져 있지만, 그 역할을 극히 서투르게 수행한다. 자연 법칙상 산모가 해산해야 할 때보다 훨씬 일찍 해산하도록 재촉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볼셰비키는 결코 산파가 아니라 단지 돌팔이 약장수일 뿐이며, 자신들이 혁명적 산파술 학교, 곧 마르크스 학교에서 교육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이라고 선전할 뿐이다. 실제로 볼셰비키는 그 학교(마르크스 학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어머니 러시아에게 벌어지고 있는 것은 결코 사회주의의 출산이 아니다. 어머니 러시아는 단지 볼셰비키 사기꾼들의 실험 대상일 뿐이다.

한마디로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후진적이고 미성숙하며, 따라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할 곳도 여기가 아니다 — 사회타협주의 교황의 회칙 중 하나는 이렇게 훈계하듯 결론 내린다[14].

교황-카우츠키와 나란히, 이 문제에 관해 오토 바우어(Отто Бауэр)가 취하는 관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사회타협주의의 고위 성직자로 간주되어도 무방한 인물이다. 말해두거니와, 그 고위 성직자는 교황보다 훨씬 더 약삭빠르고 교묘하다. O. 바우어의 관점은 카우츠키의 입장보다 더 교활하고 더 재치 있다.

그의 문제 설정은 이렇다. 그는 러시아에 노동계급의 독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 당이 도시 노동계급의 당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을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물론 서유럽과는 다른 형태이기는 하지만, 필요하며 존재한다고 말한다. 서유럽에서는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형태를 띠었을 것이고, 러시아에서는 완전히 특수한 형태, 즉 “프롤레타리아 전제”라는 형태를 취했다.

우리에게는 “전제”가 있지만, 그래도 프롤레타리아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그것의 역사적 임무는 온갖 수단을 써서 우리나라 인구의 대다수를 문화적 삶으로 깨우는 데 있다. 그런데 인구의 대다수는 다름 아닌 농사꾼이다. “프롤레타리아 전제”(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농민 수백만을 문화적 삶으로 깨우면서, 자신을 밀어낼 정치 세력을 자기 손으로 키운다. 프롤레타리아 소수파의 독재가 이 농민을 충분히 키워내자마자, 그는 곧 이렇게 말할 것이다:

“꺼져라!”. 이로써 “프롤레타리아 전제”의 역사적 사명이 완수될 것이고, 그때 우리 인민은 진정한 민주주의로 성숙할 것이다.

다음의 두 인용문은 바우어의 입장을 충분히 특징짓는다. 그는 이렇게 쓴다. “러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의 미미한 소수에 불과하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지배를 일시적으로만 확립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불가피하게 (muss)

다시 그 지배를 상실해야 한다. 민족의 농민 대중이 스스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문화적으로 충분히 성숙해지자마자.”

[15]. “농업 러시아에서 산업 사회주의의 일시적 지배는 산업 서방의 프롤레타리아트를 투쟁으로 불러내는 불꽃일 뿐이다.

산업 서방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해야만 산업 사회주의의 장기적 지배를 보장할 수 있다”[16]

카우츠키와 바우어를 제외하면, 파르부스와 슈트레벨(Штребель)의 입장도 어느 정도 흥미를 끈다. 전자의 소책자(「노동자와 사회주의와 세계혁명 — 독일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우리 혁명에 대한 중상으로 가득 차 있어, 이보다 더 비열한 저작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카우츠키의 거짓말의 진주들은 약삭빠른 파르부스의 술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1905년의 자기 입장조차, 마치 자신이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고 단지 노동자 민주주의—그것도 오스트레일리아식... 민주주의 스타일의—만을 말했던 것처럼 서술한다.

물론 여기에는 먼 옛 젊은 시절의 허물에 대해 유럽의 부르주아 여론으로부터 용서를 구하려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이해한다. 바로 이를 위해 파르부스 씨에게는 오스트레일리아식 외투가 필요했다.

우리 혁명은, 이 가장 비열한 변절자의 관점에서 보면, 탈영한 병사 폭도에 의한 나라 점령에 다름 아니다.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면 일정한 정도의 공업 발전과 노동계급의 성숙이 필요하다”[17]. 그 어느 것도 러시아에는 전혀 없으며, 따라서 러시아에는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할 가능성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도 없다. 볼셰비키의 역사적 사명은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다리를 통해 어떤 카이사르, 보나파르트, 또는 그와 같은 부류의 다른 인물이 권력을 잡게 될 것이다. 우리 정치 시장에서 물에 젖은 상품 따위를 팔아보려고 여러 번 운을 시험했던 건방진 장사꾼 파르부스가 우리 혁명에 대해 내리는 중상적인 “결론”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저자 슈트레벨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는 우리 혁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전개하려고 시도했다.

「폭력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특징적인 제목이 붙은 소책자에서 슈트레벨은 “러시아 혁명의 본질”에 대해 논하면서, 공산주의적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말하는 것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선언한다. 우리 혁명의 기본 사실은 농민의 사적 소유가 강화된다는 것이고, 농민의 사적 소유가 강화된다는 것이 바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이 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자면 “공산민중주의자”이다, 등등. 결국 슈트레벨은 볼셰비즘을 바쿠닌주의로 환원한다.

“만일 볼셰비키가 러시아 농민들을 선전(Zureden)과 강제로써 진정한 공산주의 및 공산주의적 생산양식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상상했다면 — G. 슈트레벨은 쓴다 —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바쿠닌주의의 특수한 본질을 이루는 낡은 러시아 혁명주의의 전형적인 관념들에 사로잡혀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했을 뿐이다”[18].

“농민들은… 소비에트 러시아 전체 인구의 적어도 8분의 7을 차지한다. 그들의 수와 경제적 중요성의 비중이 결국 혁명의 운명 일반을 결정한다! 그런 조건에서 러시아 혁명을 그 내적 성격과 최종 결과에서 공산주의 혁명으로 간주하려면 얼마나 많은 공상과 기적에 대한 광신적 믿음이 필요한가!”[19].

러시아 볼셰비키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의 번영을 위해 토양에 거름을 주고 있다 — 이것이 국제 사회민주주의가 우리 혁명에 대해 내린 분석의 결론이다. 러시아에는 미성숙한 자본주의 관계가 있으며, 이는 반아시아적 국가다. 그에 상응하는 계급 관계는 농민의 막대한 수적 우위로 표현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의 우유 속에서 파리처럼 떠다니고, 농민이라는 코끼리 앞에 놓인 이 파리-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떤 공산주의 혁명도 수행할 수 없다. 농민이라는 추는 점점 더 강하게 끌어당기고, 바로 이 추가 러시아 혁명의 성격 문제를 결정한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활동가들이 어떤 가장 무도회 의상을 입든, 어떤 구호를 내걸든, 무엇을 궁리하든 — 어쨌든, 결국에는 이렇게든 저렇게든 농민이 문제를 결정할 것이다. 혁명 전체의 유일한 의미는 농민의 사적 소유를 강화하는 것이다. 농민 혁명의 객관적 의미는 다름 아닌 농민을 봉건적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규정한다. 이것이 바로 “평”이다.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이제 우리 동포인 러시아 멘셰비키들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들도 서유럽의 동료들이 논했던 것과 대체로 비슷하게 논했다.

러시아 멘셰비즘의 고전적 인물이자 이론적으로 가장 일관되었던 게오르기 발렌티노비치 플레하노프를 보자. 그는 특유의 문체로, “책에서 배운 단순함”으로 우리 혁명의 성격을 평가하면서 이렇게 썼다. “마르크스는, 해당 생산양식은 그것이 그 나라의 생산력 발전을 저해하지 않고 촉진하는 한, 그 나라의 역사적 무대에서 결코 물러설 수 없다고 직접 말한다. 이제 묻는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사정은 어떠한가? 우리에게는 자본주의의 노래가 우리나라에서 이미 끝났다고, 즉

그것이 그 나라의 생산력 발전을 이미 촉진하지 않고 오히려 저해하는 최고 단계에 도달했다고 단언할 근거가 있는가. 러시아는 자본주의가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만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도 고통받는다. 그리고 이 불가쟁의 진리를,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르는 러시아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의제기한 적이 없다”[20]. 1917년 10월 28일자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서 게. 베. 플레하노프는 또 다른 논거들도 제시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 국가의 인구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수가 아니라 소수를 이룬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수를 이룰 경우에만 독재를 성공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진지한 사회주의자도 이 점을 이의제기하지 않을 것이다”[21]

또는 같은 문제에 관해 이미 언급된, 당시 정통 멘셰비키였던 페. 페. 마슬로프의 의견은 이러하다.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생산 조직화를 스스로 떠맡을 수 없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그 나라 인구의 소수를 이루기 때문이다. 다른 계급들은 수적으로도 상당히 우세하다”[22].

또는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진행 중인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 즉

자본주의 체제의 모든 토대를 보존하는 혁명이지만, 동시에 사회 혁명일 수 있고—그리고 불가피하게 그렇게 될 것인데—이 사회 혁명은 생산 조직 영역이 아니라 여러 계급 사이의 국민소득 분배 영역에서 경제 관계의 상당한 변동을 초래할 것이다”[23] (즉, 노동자들은 조금 더 받게 되고, 농민들은 세금을 조금 덜 부담하게 될 것 등등).

멘셰비즘의 기둥들이자 가장 뛰어난 멘셰비키 이데올로그들은 혁명 초기에 이미 이렇게 썼으며, 이 혁명을 필연적이고 불가피하게 부르주아적인 혁명으로 규정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다. 사건들의 귀결이 점점 더 나아가고, 볼셰비키의 권력이 점점 더 견고해지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전위가 스스로를 점점 더 확고하게 느낄수록, 결국에는 볼셰비키 변질이 불가피하다는 음조가 울려야 했고—그리고 실제로도 점점 더 집요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볼셰비키의 불가피한 실패와 몰락에 관한 음조가 더 날카롭고 더 크게 울렸다면, 두 번째 시기에는 볼셰비키가 이미 권력을 공고히 장악했기 때문에, 다른 음조가 점점 더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는 버티고 있지만 볼셰비키는 이미 예전의 볼셰비키가 아니며; 볼셰비키는 강화되고 있지만 농민적 자발성의 영향으로 변질되고 있다. 달리 될 수 없었다. 우리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인정하는 사람은, 당연히, 소비에트들이 강화되기 전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불가피한 실패에 대해 절규할 수밖에 없었고, 강화된 이후에는 불가피하게 변질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음조를 달린(Далин)이 비상하게 잘 표현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저명한 멘셰비키 중 한 사람이고, 특히 사멸해가는 멘셰비즘의 이론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전쟁들과 혁명들 이후」에서 이렇게 쓴다. “사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고, 가장무도회 복장을 벗겨야 한다. 물감과 분을 씻어내야 한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의도가 아니라 결과로 판단해야 한다. 혁명의 객관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24]. 그런데 이 혁명의 “객관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러시아가 벌써 5년째 겪고 있는 그 혁명은(1922년에 쓰였다. — Н. Б.)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주아 혁명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25]. 질문이 제기된다. “왜 공산주의 혁명의 결과가 그러한가?” 그리고 답변이 주어진다. “농민의 이해관계가 전체 정치의 운명을 결정했기 때문이다”[26].

이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가 이미 인용한 리베르, 이 철저한 우파 멘셰비키의 입장도 흥미롭다. 리베르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자신의 생각을 요약하면서 같은 소책자에 이렇게 썼다. “…우리, ‘재학습하지 않은’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사회주의가 무엇보다도 경제 발전의 가장 높은 단계에 서 있는 나라들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독일, 영국, 미국 — 바로 그 나라들이며, 그곳에서 무엇보다도 매우 큰 승리적 사회주의 운동들을 위한 근거가 있다(이것이 미국에 ‘무엇보다도’ ‘매우 큰 승리적 사회주의 운동들을 위한 근거가 있다’라니! — Н. Б.). 그런데 얼마 전부터 우리에게는 정반대 성격의 이론이 발전했다. 이 이론은 우리, 러시아의 늙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이론은 러시아 나로드니키들이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27]. 따라서 볼셰비즘은 나로드니키 이론이며, 러시아 마르크스주의는 이에 맞서 투쟁하는 가운데 발전했다. (여기서 ‘최신의’ ‘공산주의적 나로드니키즘’이라는 비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사상가’에게는 이것으로도 부족하다. 볼셰비즘 대표자들에게는 더욱 타격을 주는 낙인이 필요하다. 리베르 씨에게는 나로드니키들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그는 문제 설정을 ‘심화’하며 이렇게 쓴다. “이 이론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그 뿌리는 슬라브주의에 있다”[28]

우리 혁명의 성격 문제는 독특하게, 그러나 같은 기본적인 방식으로 A. 보그다노프에 의해 해결되었다. 볼셰비키는 전쟁 후 파산한 부르주아지(부르주아지)의 약점을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군대를 이용하여 수행된 권력 장악은 결코 사회주의 혁명의 시작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아직 사회주의로 성숙하지 못했고, 농민이 다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볼셰비키가 만들어내는 국가는 결코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아니다. 이는 이제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된 기술-조직자 계층, 인텔리겐치아의 국가이다. 설령 볼셰비키의 주관적 의도에 그러한 권력의 창출이 포함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그들의 역할은 혁명의 불길 속에서 최종적으로 결집한 새로운 계급이 정점에 서 있는 독특한 국가를 건설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관료적, бю로크라트적 변질을 겪으면서 프롤레타리아 출신자들 자신도 이 새로운 계급의 구성 부분으로 변모한다. 사회주의의 객관적 불가능성은 혁명 과정의 행위자들 자신의 주관적 환상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도 결정적인 발언을 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바자로프 또한 여러 차례 보그다노프의 문학적 쌍둥이로 나선 사람인데, 우리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인정하는 데 동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 혁명은 볼셰비키 선언들에서만 사회주의적 혁명으로 나타나며, 실제로는 이 선언들과 현실 사이를 온전한 심연이 가르고 있고, 이 심연을 메우는 데 프롤레타리아트는 백 년이 아니라 수백 년을 허비할 것이다[29].

이것이 대체로 러시아 기회주의적 사회주의, 즉 무엇보다 멘셰비키가 내리는 우리 혁명에 대한 평가의 모습이다. 그 평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주의 관계가 성숙하지 않았고; 나라 안 세력균형(상관력)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최고도로 불리하며; 러시아 혁명의 성격은 농민에 의해 규정되며; 어떤 방식으로든—볼셰비키 당을 통해서든 이 당을 우회해서든, 이 당의 주도로든 그 의사에 반해서든, 이 당을 집권 상태로 유지하고 변질시키면서든 전복하면서든—우리 인구의 농민 다수에 의지하는 새로운 자본주의가 길을 뚫어 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혁명의 성격 문제,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 가능성 문제에 대한 사회민주주의 이론이다.

이것으로 비볼셰비키 진영에서 나온 이 문제에 대한 볼셰비즘 비판은 다루었다. 다음 차례는 우리 당 내부에 있는 집단들과 조류들에서 나오는 비판이다.

이 마지막 범주의 비판자들을 검토하는 일은 트로츠키 동지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더욱이 트로츠키에 대한 비판은 그토록 끈질기고 시끄러워서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의 이에 붙어 지겹다. 여기서는 문헌에서 여러 차례 인용된 두 구절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즉, 방금 검토한 비판들과 몇 가지 대조를 해보기 위해 그 구절들을 인용하는 것이다. 트로츠키의 저작들에서 나온 그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아방가르드는 자신의 지배 첫 단계에서부터 봉건적 소유뿐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에도 가장 깊은 침투를 감행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모든 집단들뿐 아니라... 자신이 권력을 잡는 데 도움을 준 광범한 농민 대중과도 적대적 충돌에 빠질 것이다. 압도적 다수의 농민 인구를 가진 후진국에서 노동자 정부의 처지에 있는 모순들은 오직 국제적 규모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세계혁명의 무대에서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필연성에 따라 러시아 혁명의 제한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틀을 폭파시킨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혁명의 민족 국가적 틀도 폭파시켜야 할 것이며, 즉 러시아 혁명이 세계 혁명의 프롤로그가 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30].”

이것은 트로츠키의 1922년 저작들에서 나온 첫 대목이다(!). 그런데 두 번째 대목은 이러하다.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직접적인 국가 지원(이탤릭체는 인용자. — Н. Б.) 없이는 러시아 노동계급은 권력을 유지하지도, 자신의 일시적 지배를 장기적인 사회주의 독재로 전환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는 한 순간도 의심할 수 없다”[31]. 여기에서 트로츠키 동지가 말하는 것과 사회민주주의자 O. 바우어가 말했던 것을 비교해 보는 수고를 한다면, 완전한 일치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더라도 이 관점들의 비상한 근접성이 저절로 드러난다. 트로츠키 동지가 1922년에 러시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존재함을 부정하지 않았다면, 교활한 바우어에게도 이 독재는 역시 사실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사회민주주의 교황청의 교활한 고위 성직자가 조심스럽게 작은 단서를 단다. 즉, 독재는 프롤레타리아적이기는 하지만 아주 아주 오래가지는 못하며, 그 공고함은 서방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적 지원에 직접적으로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의 호민관 트로츠키도 바우어에게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 역시 (분명히 민족적 편협성이라는 죄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직접적인 국가 지원 없이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일시적 지배를 장기적인 사회주의 독재로 전환하는 것을 보장한다는 생각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아무리 잔꾀를 부리고 아무리 발뺌을 해도, 삼가 말하자면 유사성은 코를 찌른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 문제에 대한(또는—같은 말이지만—우리 혁명의 성격 문제에 대한) 트로츠키의 입장은 다름 아닌, 바우어식 사회민주주의 변종의 러시아어 번역이다. 바로 그 때문에 레닌주의 러시아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트로츠키 동지가, 지금은 불명예스럽게 알려진 배반자 코르슈(Корш)와 그의 친구들과 한패가 되는 일이 가능했다. 이 훌륭한 신사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설교함으로써 자신의 공산주의적 타락이라는 죄를 속죄하고 있는데, 그 역시 카우츠키의 은총을 입고 우리 혁명의 부르주아-농민적 성격을 간파했으며, 이제는 러시아 볼셰비키가 새로운 미국식 자본주의의 싹을 키우고 있다고 설파한다. 여기에 무엇이 놀랄 일인가? 서방의 프롤레타리아 국가 지원이 없으니,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결코 프롤레타리아적이지 않은” 것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것도, 그 독재가 계급 궤도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는 바우어-트로츠키주의적 전제들에서 나오는 지극히 단순한 결론이다...

이로써 트로츠키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우리는 우리 혁명의 성격에 대한 레닌의 관점에 가해진 “우호적” 비판의 매우 독특한 변종을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10월 혁명 시기 지노비예프, 카메네바 동지 등이 레닌을 비판한 것을 가리킨다. 이 비판의 독특성은, 해당 동지들이 레닌에게 자신들의 이론적 “노선”만을 맞세운 것이 아니라 “우호적으로” 정치적 대항 강령까지 내세웠다는 데에서 드러났다. 그러나 그에 앞서 레닌의 관점에 대한 비판, 즉 (그 비판을)

1917년 4월 협의회에서 카메네바가 가한 비판이다. 이를 검토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전러시아 협의회에서 그가 행한 부보고에서 특히 뚜렷하게 드러난 카메네바의 4월 입장은, 앞서 언급한 동지들의 탈주적인 10월 노선 전체의 사상적 기원이자 이론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4월 협의회에서 레닌의 보고와 카메네바의 공동보고에서 시작된 혁명의 성격, 그 혁명의 추동력이 될 수 있고 또 실제로 추동력인 계급들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향후 기간 동안 당의 행동 노선을 설정한 협의회는—그 기간은 혁명이 전개되는 기간이었다—어떤 혁명이 전개되고 있는지, 단지 부르주아 혁명인지 아니면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해 가는 혁명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보고자(레닌)와 공동보고자(카메네프)는

이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답한다. 이때 레닌은 미래의, 그리고 가장 가까운 미래의, 향후 몇 달의 과제를 “이 이행(즉 사회주의 혁명 궤도로의 이행)을 향한 첫 구체적 조치들을 취하는 것”에서 본다. 반면 카메네프에게는 레닌처럼 “이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며, 사회주의 혁명에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최대의 오류”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끝났다면, 이 블록(노동자 계급과 소부르주아지 사이. — Н. Б.)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앞에는 어떤 확정된 과제도 없었을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소부르주아 블록에 맞서 혁명 투쟁을 벌였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의 공동 작업은 완전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 소비에트를 세력 조직의 중심으로 인정하며, 따라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에 의해 수행될 수 있는 과제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즉, 부르주아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직 그 힘을 다하지 않았으며, 나는 여러분 모두가 이 혁명이 완전히 종결될 때 권력이 실제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에 넘어갔을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때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부르주아지와의 블록이 깨지는 순간이 도래했을 것이고,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이 자기 프롤레타리아적 목표를 독자적으로 실현하는 순간이 도래했을 것이다. 나는 두 가지 전술 중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프롤레타리아트 앞에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고 어떤 사회 집단도 그를 도울 수 없는 과제들이 놓여 있는 경우—그러면 우리는 블록을 깨뜨리고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그 사상들의 실현으로 나아간다. 또는 우리가 현재 순간의 조건에 비추어 블록이 생명력 있고 미래를 가진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우—그러면 우리는 이 블록에 참여하고 이 블록을 깨뜨리지 않도록 우리의 전술을 구축한다. 따라서 나는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이 블록 안에서 두드러지게 구별되어야 하며 자신의 고유한, 순전히 사회주의적이고 국제적인 목표들을 명확하고 정확하게 설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블록과 함께 나아가며 아직 그와 함께 몇 걸음을 더 내디딜 수 있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기를 원한다”[32].

여기서는 그와 동시에 다른 문제(더 정확히는 같은 문제의 다른 측면),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농민의 역할에 관한 문제, 농민이 혁명을 도울 수 있는 힘으로 여전히 이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해결된다. 여기서 카메네프의 관점도 분명하다. 농민과 함께 나아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해서는 전혀 말할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을 지도하면서 농민과 함께 사회주의 건설에 착수하는 그런 노동자 계급 독재에 관해서도 전혀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카메네프에게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는 순간,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실제 사회주의 건설에 착수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 바로 농민과의 블록이 깨지는 순간으로 여겨진다. 농민과의 동맹이 아니라 오직 투쟁, 그리고 화해할 수 없는 투쟁—이것이 혁명 초기에 카메네프의 눈에 어른거렸던 것이다.

물론, 우리 혁명에 대한 이 이론적 분석, 혁명의 추동력과 노동계급·농민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이 평가,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노동자-농민 블록이 불가능하다는 이 주장 등등은 10월 시기 카메네바 동지와 그 동료들의 입장을 전적으로 규정했다. 카메네프는 10월 시기에 레닌과 중앙위원회(ЦК) 다수파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되자, 일관된 사람으로서, 4월 협의회에서 레닌의 이론에 맞서 자신이 전개했던 이론으로부터 실제적 결론들을 도출했다. 그와 함께한 다른 사람들도, 일관성이 있든 없든, 첫 번째 “우호적”

레닌주의에 대한 이론적 수정 시도에서 나온 귀결들을 이끌어낸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장악이 농민과의 불가피한 충돌을 의미한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부에 참여할 수도 없고, 프롤레타리아에게 봉기를 호소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의 분쇄는 천문학적 정확성으로 예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봉기에 반대하는 편지들이 나왔고, 여기서 중앙위원회와 인민위원회(СНК) 탈퇴들이 나왔다.

실제로, 이 추잡한 탈퇴와 사퇴, 이 당 규율의 파괴, 이 전장에서의 도주를 “근거지우고” “설명했던” 모든 온갖 문서들의 기본 동기를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보라. 그중에는 실랴프니코프 동지도 서명한 문서가 있다. “우리는 모든 소비에트 정당들로 사회주의 정부를 구성할 필요성이 있다는 관점에 서 있다”고 그 문서에는 적혀 있다. (당시 소비에트 정당들이란 “소비에트 강령” 위에 서 있는 정당들이 아니라, 그때 소비에트 구성에 들어가 있던 정당들, 즉

볼셰비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당원 — Н. Б.). “우리는 오직 그러한 정부의 구성만이 10월-11월 시기 노동계급과 혁명군의 영웅적 투쟁의 성과를 공고히 할 가능성을 주었으리라고 본다. 우리는 그 외에는 오직 하나의 길만 있다고 본다. 즉 정치적 테러 수단으로 순수 볼셰비키 정부를 유지하는 길이다. 인민위원회는 이 길로 들어섰다. 우리는 이 길로 들어갈 수 없고 들어가고 싶지도 않다. 우리는 이것이 대중적 프롤레타리아 조직들을 정치 생활의 지도에서 배제하고, 무책임한 체제를 수립하며, 혁명과 나라를 패망으로 이끈다고 본다. 우리는 이 정책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으므로 중앙집행위원회(ЦИК) 앞에서 인민위원 칭호를 내려놓는다”[33].

지노비예프, 카메네바 등이 쓴 긴 편지에서 나온 짧지만 웅변적인 인용문이다. “우리는 승리의 순간에, 우리 당이 지배하는 순간에 중앙위원회를 떠난다. 우리는 중앙위원회 지도 그룹의 정책이 노동자 정당으로 하여금 이 승리의 성과를 상실하게 하고 프롤레타리아를 분쇄로 이끄는 것을 차마 보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떠난다”라고 그들은 쓴다[34].

물론 이 정치적 결론들은 허공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아니다, 그 결론들은 우리 혁명을 특징짓는 일정한 관점의 귀결로서 아주 “올바르게” 도출되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아직 완결되지 않았고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하지도 않았다면(이는 우리 프롤레타리아트가 약하고, 나라 인구의 대다수인 농민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돕는 힘으로라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이 조건에서는—실현 불가능한 과제이고, 이루어질 수 없는 위험한 기도이다. 물론 당이 무모하게 이 모험에 뛰어들게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어느 모험에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서 좋은 결과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당을 기다리는 것은 즉각적인 궤멸이거나, 집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닥치는 불가피한 파멸이다. 그리고 달리 될 수도 없다. 설령 권력을 공고히 한다 해도, 그 지위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적나라한 폭력, 독재의 총검뿐이며, 총검 위의 자리는 불안정하고도 몹시 불편하다. 이런 상황에서 당은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자기 자신이 분리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 분리로 인해 당은 혁명 세력의 범위를 당 자신의 한계로 좁히고, 자신의 바람과는 반대로 자기 조치의 무분별함, 무의미함, 무효함을 드러내면서 혁명을 약탈과 유린에 내맡길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 두어야 할 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불신 이론, 우리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에 대한 불신과 농민에 대한 과소평가 이론에서 나온 이 첫 결론들 속에는, 훗날 반대파 정서가 폭발할 때마다 거듭거듭 되풀이될 음조가 이미 울리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약하고, 도움을 기대할 곳이 없다—설마 농촌 쪽이야 더욱 아니다!—그런데 사회주의 건설을 어떻게 꿈꿀 수 있겠는가?! 이 건설 시도는 실패할 운명이다—그 시도는 반드시 자기 반대물로 퇴화할 것이다. 그 시도를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면 새로운 체제는 무책임한 관료적·기구적 압박과 정치적 테러의 체제로 퇴화하고, 대중은 이탈하며, 마침내 당 자체도 퇴화할 뿐이다. 한마디로, 볼셰비키가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시도에서 좋은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그 반대는 얼마든지 나온다:

아마도, 앞서 언급한 독일의 부르주아 시만(Шиман)이 말했던 “아시아적 경직”에까지 사태가 이를 수도 있다!..

이제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선, 위에서 서술하고 분석한 유럽 사회민주주의, 보그다노프-바자로프(Базаров), 러시아 멘셰비키, 트로츠키와 카메네바-지노비예프의 모든 견해를 대조해 보면, 그 견해들은 기본적으로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이 확인된다: 러시아 혁명의 성격 문제에서, 러시아 혁명의 내부 세력들 간 관계 문제에서, 일정한 사회주의적 성취의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본 러시아 경제 구조의 성숙도 문제에서. 이 문제들에 한해서는 실제 유사성을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서도, 열거된 이 모든 입장이 기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할 나위도 없이, 출발점이 공통된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해서, 그 출발점에서 출발해 열거된 모든 분파들이 도달한 결론들까지 동일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니다, 결론들은 서로 다르게 내려졌다. 어떤 이들은 혁명의 영웅이 되었고, 어떤 이들은 혁명에 맞서 싸웠으며, 또 어떤 이들은 수치스럽게 발밑에서 얼쩡거렸다. 공정하게 지적해야 할 것은, 결론이 같은 분파 내에서조차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컨대 플레하노프는 자기 친구들로부터 멀어져 갔다. 지금은 이미 알려져 있듯이, 그는 비록 “시기상조”였지만 그럼에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던 그 혁명에 대한 보복 시도를 거부했다. 결론들은 또 다른 분파 내에서도 서로 달랐다:

트로츠키는 10월의 나날들에 전사들의 선두 대열에 서서 어떤 결론을 내렸고, 카메네프-지노비예프는 다른 결론을 내렸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타산했다: 내부 원인들로 인해 파멸이 불가피하기는 하지만, 서방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적 원조가 구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전진!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이렇게 따졌다:

바로 내부 세력 배합으로 보아 파멸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전진할 까닭이 없다. 물러서라.

거듭 말하건대, 결론들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이론적 밑바탕—혁명의 추동 세력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노동자-농민 블록 평가에 접근한다는 점에서; 세력들의 배합 문제와 수적으로 작은 노동계급이 거대한 농민 덩어리를 이끌 수 있는 가능성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이들 세력 사이의 갈등 불가피성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러시아 혁명의 성격, 즉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가능성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이 모든 것의 밑바탕은 그들에게 하나이며 동일하다. 그리고 이 “밑바탕”은 레닌의 문제 제기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혹시 그 문제 제기를 떠올리게 한다 해도 오직 정반대라는 점에서일 뿐, 결코 유사성이라는 점에서는 아니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성숙했는지에 대한 레닌의 문제 제기는 레닌을 비판한 많은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투박하지 않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물질적 전제 조건들이 서유럽이나 북아메리카보다 훨씬, 훨씬 더 적다는 주장을 결코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의 견해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한 뒤 사회주의가 곧바로 모든 면에서 완성된 채로 태어나는 그런 상황은 어느 나라에도 없다. 어느 나라에서든, 가장 발전한 나라에서조차, 심지어 북아메리카합중국에서도, 경제의 조직화가 국민경제 복합체 전체를 완전히 포괄할 때까지는 상당히 긴 역사적 단계가 지나가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레닌은 러시아의 낙후한 경제 속에도 사회주의 작전을 개시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작은 섬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더욱이 국내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농민 전쟁”이라는 특수한 결합이 존재하는데, 마르크스는 이 결합을 프롤레타리아 승리의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간주했다. 제국주의 전쟁에서 혁명이 태어나게 된 특수한 조건, 국내 세력들의 특수한 배합, 운동의 출발점으로서 일정한 물질적 기반이 존재한다는 점—이 모든 것이 합쳐져 사회주의 혁명의 궤도 위에서 체계적으로 전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다만 경제의 사회주의 부문을 철저히 강화하여 그것을 자기 작전의 기지로 만들고, 그런 다음 그것을 지휘 고지로 활용하면서, 지나친 조급함 없이 계획적으로 경제의 모든 자연발생적 영역을 사회주의적 영향 아래에 두도록 장악해 나가면 된다.

이상에서 서술한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조건에서 사회주의 건설 가능성에 대한 불신의 관점—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도, 보그다노프-바자로프에게도, 트로츠키(Троцкий)에게도, 카메네프(Каменев)-지노비예프(Зиновьев)에게도 공통된 관점—을 일관되게 적용할 경우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지를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나가는 말로 이미 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제는 이를 더욱 날카롭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드러나는 바, 이 불신의 관점은 일관되게 적용될 경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능한 입장 중 하나로 귀결된다:

승리하는 국제 노동자 혁명이 없다면, 볼셰비키는 타도당하여 멸망하거나 자기 자신의 변질로 멸망한다. 다른 어떤 결과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객관적 전제들이 없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서 장기간 존속할 수 없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자기 내용을 바꾸면서 자기 형식을 보존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결코 프롤레타리아적이지 않은 국가”가 되어야 한다. 사회계급적 영역에서 우리에게는 농민의 거대한 우세가 있고 농민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면, (우리가 “보존된다면”) 우리 국가의 변질이 불가피하게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 국가는 농민의 압력에 밀려, 부유한 계층의 뒤를 따르는 그 농민에게 점점 더 많은 양보를 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우리 국가 변질의 구체적 형태, 즉 국가의 “쿨라크화”가 진행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미 1917년 여름에 놓인 그 기회주의적 전제들 속에 현재 반대파의 이데올로기가 전적으로 담겨 있다. 이 반대파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우리 변질의 경향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반대파의 이론적 입장은 필연적으로 그러한 결론들을 낳는다. 사실, 이러한 결론들은 반대파 공산주의자들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먼저 내렸다. 그런 점에서 카우츠키의 저작들은 전연방 공산주의 반대파의 vademecum[35], 즉 반대파 공산주의자의 길동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정은 우리 반대파가 레닌주의에서 이념적으로 일탈했음을 더욱 강조할 뿐이다. 반대파가 “쿨라크화”를 말한다면, 바우어는 훨씬 더 일찍 같은 말을 했다. 그는 지금도 우리 경제에 사회주의적 요소들이 많이 있다고 말하며, 지금도 우리가 완전한 노동자 정당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만” 우리가 농민적 정신의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며, 그것이 아마도 우리의 불가피한 운명이라고 여길 뿐이다. 파울 레비(Пауль Леви)는 로자 룩셈부르크(Роза Люксембург) 동지의 한 반레닌주의 소책자의 서문에서 같은 내용을 쓴다. 그는 고인이 된 혁명가의 뜻을 거슬러 그 소책자를 출판했다. 달린은 우리가 이미 인용한 자신의 책에서 “주관적으로” 우리에게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그것은 다름 아닌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쓴다. 왜냐하면 이 혁명은 필연적으로 농민 혁명이기 때문이다, 등등. 또 다른 이론적 흐름—보그다노프와 바자로프—, 이것이 우리의 불가피한 관료적 변질에 대한 이론, 지금 통합 반대파가 그토록 떠받들고 다니는 그 이론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무엇보다 농민적 측면을 강조한다면, 보그다노프는 온갖 단호함으로 우리 “변질” 과정의 나머지 절반, 즉 우리의 관료적(기술적-인텔리겐차적 관료, “조직자” 카스트) 타락을 강조한다. 공산주의 아카데미에서 일부 반대파 인사들의 연설에는 “카베냐크”를 시사하는 어조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 어리석음도 독창적이지 않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에 파르부스와 카우츠키와 다른 신사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왜냐하면 이 패거리는 우리에게 승리하는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주받은 볼셰비키”가 무대에서 물러나지 않으므로, 남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 하나의 희망, 하나의 밝은 별뿐이다. 변질, 보나파르트주의, 카이사르주의, 그 밖의 “테르미도르”가 그것이다. 변질 이론은 전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 보그다노프적, 트로츠키주의적, 카메네프-지노비예프-10월적 전제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

이 역사적 서론 다음에는 같은 문제를 다루되, 반대파와의 문헌 논쟁에서 그 문제가 받은 특수한 제기 방식을 다룰 수 있다. 우리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문제로 넘어간다. 지노비예프 동지가 제시한 정식화를 취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이 정식화는 우리 반대파의 일종의 준공식적 견해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노비예프 동지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기한다. 그는 두 가지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I) 사회주의를 건설할 보장된 가능성 - 사회주의를 건설할 그러한 가능성은 물론(!) 일국의 범위 안에서도 상정될(!!) 수 있고 2) 사회주의의 최종적 건설과 공고화”[36]

문제 제기는 이와 같다. 지노비예프 동지는 우선 레닌의 인용문을 언급한다. 레닌은 제10차 대회에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최종적 성공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 조건이 있을 때뿐”이라고 말했다. 1)

선진국들에서의 혁명의 지지라는 조건이 있을 때, 그리고 2) 농민 다수와의 합의가 있을 때.

지노비예프 동지는 이어서 레닌의 인용문 여러 개를 제시하는데, 거기서 레닌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는 불가능하다”라고 단언한다.

레닌에게서 일국, 바로 우리나라에서의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명제로 일반화하여 정식화해야 할 인용문을 극히 많이 찾을 수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정식화는 우리가 지노비예프의 이해와 대립시키는 그 이해(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에서 절대적으로 옳다.

그러나 그 해석으로 넘어가기 전에, 지노비예프가 제시하는 인용문들에는 다른 여러 인용문을 대립시킬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중에는 지노비예프 동지의 책에도 똑같이 인용된 것들도 있다. 우리는 다음 세 인용문을 제시할 것인데, 이는 형식논리적으로 추론할 때 지노비예프 동지가 우선적으로 의거하는 그 테제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지노비예프 동지 자신의 책 269쪽에는, 자본주의 발전 불균등성 법칙에 관한 레닌의 인용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논증이 실려 있다.

“승리한 이 (혁명의 길에 들어선. - Н. Б.)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가들을 몰수하고 자기 나라에서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한 다음, 나머지 자본주의 세계에 맞서 일어서서, 다른 나라들의 피억압 계급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그들 안에서 자본가들에 대한 봉기를 일으키며, 필요할 경우에는 착취 계급들과 그 국가들에 맞서 군사력으로까지 행동할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할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에서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할 것이라는 레닌의 생각이다. 따라서 여기서 레닌 동지는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할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를 외국어에서 러시아어로 옮기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협동조합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다른 인용문을 제시해 보자. 여기서 레닌 동지는 우리에게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고 쓴다[37].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아직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은 아니지만, 이 건설[38]을 위해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것이다.” 따라서 레닌 동지가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무조건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그는 건설의 시도들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건설 자체도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고, 이를 끝까지 건설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이를 위한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인용문들에서 말하는 내용을 모두 맞대어 보자.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하나만으로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할 수 있고 완전히 새로운 사회주의적 사회 체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겉보기에 모순되는 이 주장들을 어떻게 양립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여기에 레닌 자신의 모순이 있는가? 그는 한 경우에는 하나의 관점에, 다른 경우에는 또 다른 관점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닌가? 아니면 여기에는 바로 우리 반대파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숨어 있는가? 반대파 동지들의 모든 발언을 살펴보면, 어디서나 첫 번째 계열의 인용문에 기대려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그 인용문들은 반대파의 “이론”을 뒷받침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반대파 인사들은 중앙위원회 지지자들이 자신들에게 대항하여 내세우는 또 다른 계열의 인용문을 분석하지 않은 채 숨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열쇠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이 열쇠는 레닌 자신에게서 찾아야 하며, 레닌의 발언들, 특히 레닌의 마지막 저작들에 담긴 발언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보기에, 이 과제를 풀기 위한 열쇠는 같은 글 「협동조합에 관하여」에서 뽑은 다음 인용문에서 찾을 수 있다.

레닌은 여기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국제 관계가 없고, 국제적 규모에서[39] 우리의 입장을 위해 투쟁해야 할 의무가 없다면, 우리에게 무게 중심이 문화사업으로 옮겨간다고 말할 용의가 있다.”

바로 이 인용문이야말로, 한 나라(우리나라에서. — Н. Б.)에서의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관련된 레닌의 일련의 명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말해 준다. 레닌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우리나라 내부의 세력 배합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나라의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이 후진성에서 비롯되는 막대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것도, 충분한 것도 모두 갖고 있으며,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고 건설해 낼 수 있다. 이 레닌적 입장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입장과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이고, 트로츠키 동지의 입장과는 완전히 다른 입장이며, 또한 (우리나라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농민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사회적 세력 배합 아래에서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멸망이나 퇴화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그러한 “색조”, “유파”, “그룹”의 입장과는 뿌리부터 다른 입장이다. 그것은 그러한 입장을 모든 전선에 걸쳐 부정하는 것이다.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한 블라디미르 일리치(Владимир Ильич)의 테제는 동시에 러시아 혁명의 성격에 관한 물음에 대한 답이다. 그것은 내부적 이유들로 볼 때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지 없는지, 사회주의를 건설해 낼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며, 이 답은 긍정적인 답이다. 그러나 이 답은 아직 답의 전부는 아니다. 이와 함께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이 세상에 홀로 살고 있지 않다. 우리나라 내부의 세력 배합 외에도 국제 정세가 있다. 이 정세는 여러 가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 정세는 전쟁, 간섭, 봉쇄 등 일련의 위험으로 위협하고 있다. 이 정세는 국제 혁명을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 우리의 국제적 의무와 결부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도움 없이 실제로 사회주의를 끝까지 건설해 낼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혁명을 끝까지 추진하여, 즉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주머니 속에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레닌이 한 나라에서는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이로써 말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에게는 아직 국제적 포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우리의 기술·경제적 후진성 때문에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고 투덜대지 말라.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세상에 홀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이 국제적 포위 속에 있다는 것을, 이 측면에서 여러분에게 맞서 국제 자본주의의 거대한 힘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바로 이 생각이야말로 우리가 인용한 그 인용문에 표현되어 있으며, 지노비예프 동지가 여러 변형으로 끝없이 반복해서 인용하는 생각이다.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에 반대하는 레닌의 모든 발췌문(그중에는 지노비예프 동지가 자신의 「레닌주의」에서 인용하는 것들도 포함된다)을 훑어보면, 문제가 바로 외부적 위험들에 관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지노비예프 동지는 내부적 위험과 외부적 위험을 한데 뒤섞어 문제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 점에서 다음이 매우 흥미롭다. 지노비예프 동지는 자신의 저작 278쪽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가 바라건대, 아무도 「공산주의의 ABC」와 같은 책을 비관주의라고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 혁명이 승리에서 승리로 의기양양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을 때 쓰였다. 그 책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는다:

“공산주의 혁명은 세계 혁명으로서만 승리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오직 한 나라에서만 승리한 그러한 상황에서는 경제(원본에서 곳곳에 밑줄이 쳐져 있음) 건설, 경제 조직이 매우 어렵다... 공산주의의 승리를 위해 세계 혁명의 승리와 노동자들의 상호 지원이 필요하다면, 이는 승리의 필수 조건이 노동계급의 인터내셔널(국제적) 연대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비관주의”가 아니라, 그저—공산주의의 ABC(따옴표 없음)이다.

따라서 지노비예프 동지는 순박하게도 자기가 공산주의의 ABC 뒤에 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아! 실제로는 이 공산주의의 ABC(그리고 「공산주의 ABC」도 마찬가지로)는 전적으로 그에게 불리하게 말한다.

우선 지노비예프 동지가 말줄임표를 어디에 찍었는지 살펴보자. 그는 그것을 두 번 찍었다. 「공산주의 ABC」에서 그 자리들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들여다보자. 바로 다음과 같다. 공산주의 혁명은 세계 혁명으로서만 승리할 수 있다는 명제에 이어, 지노비예프 동지가 생략한 다음 대목이 나온다.

만약 어느 한 나라에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았는데, 다른 나라들에서는 노동계급이 겁이 나서가 아니라 양심적으로 자본에 충성했다면, 결국 거대한 강도 국가들이 그 나라를 질식시켜 버렸을 것이다. 1917, 1918, 1919년에는 모든 열강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질식시키고 있었고, 1919년에 그들은 소비에트 헝가리를 질식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질식시킬 수 없었다. 대국들 자신의 국내 정세가, 러시아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자기 나라 노동자들의 압력에 밀려 스스로 실각하지나 않을까 걱정해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째, 다른 나라 노동자들의 지원이 없으면 한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존재 자체가 위협을 받는다. 둘째(이어서 지노비예프가 인용한, 경제 건설의—불가능성이 아니라, 지노비예프 동지!—어려움에 관한 대목이 나온다).

이어서 지노비예프의 두 번째 생략이 있다. 이 대목도 복원한다. 그것은 어려움의 원인을 설명한다. “그러한 나라는—우리는 「공산주의 ABC」에서 읽는다—외국으로부터 아무것도, 또는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사방에서 봉쇄되기 때문이다.”

지노비예프 동지의 인용 솜씨는 나쁘지 않다! 말줄임표를 아주 요령 좋게, 정확히 자기에게 필요한 곳, 반대파의 필요에 부응하는 곳에 찍는다! 「공산주의 ABC」 인용문들에 하나를 더 보태자. 「공산주의 ABC」 45항에서는 이 나라의 소부르주아적 성격, 농민의 소유 본능, 그리고 일부 노동자들에게까지 남아 있는 이 본능의 잔재에 대해 말한다. 「공산주의 ABC」는 어떤 결론을 내리는가? 1) 러시아에서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일은 “가장 큰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다; 2) 내적 성격의 여러 장애는 “우리 과업들의 수행을 어렵게 하지만, 그러한 수행을 결코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것은 정말, 정말 지노비예프의 주장이 아니다. 이것은 레닌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지노비예프 동지는 레닌을 왜곡하여 해석하고, 공산주의의 ABC에 의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헛된 일이다. 지노비예프 동지가 문제를 뒤엉키게 하는 것은 부질없다. 가능한 어떤 국제 정세에서도, 예컨대 자본주의 국가들의 간섭이 있는 경우에도, 우리에게 사회주의 건설의 보장이 있는가를 놓고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외부의 위험에 대항하는 유일한 보장은 국제 혁명임이 분명하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 사이에 아무런 논쟁도 없다.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이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며, 우리 중앙위원회의 견해 체계와 반대파가 옹호하는 견해 체계를 가르는 경계선이 여기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다. 논쟁은 우리가 국제 문제에서 벗어난다면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또 건설해낼 수 있는가 하는 점, 다시 말해 우리 혁명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국제적 의무 등이 없다면 무게 중심이 문화주의로 옮겨간다고 레닌과 함께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후진성이 반드시 우리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려야 하는가? 문제는 이렇게 서 있다. 현재의 반대파와 벌여 온 이견의 역사는 사정이 바로 그러함을 증명한다. 이 문제에서 우리 사이에 처음으로 의견 차이가 드러난 것은 정치국의 한 회의에서였다. 그 자리에서 카메네프 동지,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지노비예프 동지가 우리는 사회주의 건설 과제를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기술·경제적 토대가 뒤떨어진[40] 점이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제14차 대회에서도 말했다. 따라서 문제는 언뜻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 문제의 올바른 제기를 그릇된 제기와 구별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왜 이런 섬세한 구분이 필요한가, 한편으로는 우리가 자본주의 세계, 자본주의의 간섭, 전쟁 등과 싸울 가능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문제에서 우리 힘의 내적 결합에 관한 문제를 분리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현실 생활에서는 이 둘이 함께 행진하고 실제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이에 대한 답으로 매우 유력하고 매우 설득력 있는 일련의 논거를 제시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일정한 평화적 발전 국면을, 예컨대 몇 년간, 겪어야 할 일이 앞에 놓여 있는데, 우리의 기술·경제적 후진성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농민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고 말하는 식으로 문제를 제기한다면, 우리는 이 평화적 시기 전체를 변질의 축 위에서 움직여야만 한다. 레닌이 우리 발전의 내적 힘들을 분석할 때 긍정적으로 해결했던 문제에 부정적으로 답한다면, 그야말로 모든 것을 예외 없이 의심해야 한다. 우리 국영 기업들의 사회주의적 성격, 우리 독재의 사회주의적 성격, 우리 경제 발전 동학의 사회주의적 성격, 우리 국가 동학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내부의 계급 세력 배합을 이유로 사회주의 건설 가능성 문제에 부정적으로 답한다면, 우리나라 생산력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크든 작든 자본주의적 요소들에게 우위를 주는 그러한 발전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는 발전의 성격을 “보장”할 것이며, 그 성격은 틀림없이 무게 중심을 노동계급에 맞서 농민 쪽으로 이동시킬 것이다. 이는 반드시 우리 국가기구 체계에서 사람들의 그러한 재배치를 수반할 것이며, 그 재배치 아래에서는 단상에 올라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즉 위에서는 우리가 노동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관료집단으로 변해 가고, 우리 국가기구의 아래층들은 쿨라크 분자들에 의해 물에 잠기고 있다고. 즉, 지금 구상되고 있는 모든 “반대파의 입장”, 곧 우리의 변질을 입증하는 선에서 당을 공격하는 입장은, 동지들이 레닌의 글에서 우리에게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하고도 충분한 모든 것이 있다고 그가 직접 말한 대목들을 의심하는 데서 나온다.

바로 이러한 문제 분해에서 진정으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적이며 진정으로 국제주의적인 문제 제기가 나온다.

사람들이 국제 혁명에 대해 경우에 맞든 맞지 않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최대한의 혁명성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혁명의 국제성에 관한 문제 제기는 혁명적 관점에 직접 모순되는 것일 수도 있다. 예컨대 바로 그 리베르의 글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는 아주 짓궂은 대목이 하나 있다. 리베르 씨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특수한 특징들을 열거하면서 이렇게 쓴다.

“마지막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또 하나의 특징적 징표는 그 국제적 성격이다(생각해 보라, ‘국제적 성격’이라니! Н. Б.).

사회주의 체제는 자본주의를 대체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구별되는 특징은 그것이 세계경제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따라서 세계경제 전체에 영향이 미치지 않은 채, 이 경제의 어느 한 부분에서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사회주의 혁명은 오직 국제적 혁명으로서만 생각할 수 있고, 따라서 그것은 한, 두, 세, 네, 다섯 나라들에서뿐만 아니라 산업적으로 발전한 대다수 나라들에서 일정한 상태를 전제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주의에 준비되지 않은 나라들과 이미 이를 위해 성숙한 나라들 사이에 불가피한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국제성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혁명을 하지 말라, 사회주의를 건설하지 말라. 다른 나라들과 충돌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제 혁명은 일종의 일회적 행위로, 마치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한꺼번에 역사 무대에 나와 “혁명 만세!”를 외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사회주의가 쟁반에 담겨 주어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려진다. 실천적으로—이러한 세계 혁명 주문의 정치적 의미는 “앞으로 나아가지 말라, 한 나라에서 혁명을 완수하지 말라, 어차피 승리하지 못할 테니”라는 교훈에 있다. 또는 더 현대적인 언어로 옮기면:

“네가 글루포프 시에서, 그것도 한 거리에서 홀로 감히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

왜 그런 민족적으로 제한된 관점에 서 있는가?” “한 나라에서 혁명을 시작하면 진정한 국제주의자가 아니게 된다” — 리베르가 우리를 이렇게 훈계한다.

그러한 “국제주의”는 사회 배신의 뒷면이다.

다시 한 번 되풀이한다. 논쟁은 해외와 관련된 위험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국내의 힘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논쟁은 우리 혁명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말할 때, 우리가 이 “한 나라”로 염두에 두는 것은 바로 우리 나라다. 어느 나라에서나 사회주의가 건설될 수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다. 가령 우리 앞에 완전히 후진적인 어떤 나라가 있고, 우리에게 있는 사회주의 건설의 최소한의 물질적 전제들조차 없는 나라라면, 우리는 우리의 결론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우리 나라에 관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모든 고유한 특징, 기술, 경제, 사회·계급 관계, 프롤레타리아트, 농민, 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일정한 관계를 갖춘 우리 나라에 관한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제기되어야 하며, 그렇게 제기할 때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것이 곧 우리 혁명의 성격에 관한 문제다. 우리 혁명이 그럼에도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한 그런 관계를 전제하는 이상, 우리가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이상, 따라서 이 사회주의 건설 과정 자체에는 이 건설이 불가능해지기 시작하는 그런 시점이 어디에도 없다. 우리 나라 내부에 그러한 힘의 배합이 있어서, 지나간 각 해에 비해 우리 경제의 사회주의 부문이 우세한 채로 나아가고, 우리 경제의 사회화된 부문들이 사적 자본주의적 부문들보다 더 빨리 성장한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각 해에 힘의 우세를 지니고 나선다.

서로 상쇄되는 여러 가지 가능한 우여곡절과 온갖 우연들을 제쳐 두고 “평균적으로” 계산한다면, 대체로 우리는 상승하는 발전선을 갖게 된다. 나라 내부에서, 더 이상의 사회주의 건설을 불가능하게 만들 그런 힘이 도대체 어디서 나올 수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하나의 영토에서만 진행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어떤 고립된 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6분의 1을 차지하면서 자본주의적인 6분의 5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국제적 성격의 온갖 위험들이 생겨난다. 가능한 간섭들에 대항할 절대적 보장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면, 우리에게는 그런 보장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의 삶에서는 모든 것이 상호 연관 속에 있고 하나가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치므로, 자본주의 포위 조건에서 우리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레닌이 말할 때, 물론 레닌이 옳다. 그러나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밀가 등 동지들이 이 사상을 우리의 기술적 후진성 때문에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 “환원”할 때, 그것은 옳지 않으며 이에 맞서 온 힘을 다해 싸워야 한다. 바로 그런 해석에 맞서 싸워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레닌 동지가 제시한 노선을 방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거리에서의’ 사회주의, ‘포셰혼예에서의’ 사회주의, ‘글루포프에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온갖 비웃음은 진정한 혁명가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사람들은 이 썩은 농담이 매우 재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농담은 카우츠키의 ‘투르키스탄에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재담, 힐퍼딩의 ‘부하라 물라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재담 등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그저 한심할 따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 사회민주주의적 농담 밑에 혁명적 인터내셔널리즘이 숨어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여기에는 어려운 순간에 자기 자리를 버리는 단순한 탈영이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난관들이 밀려들었다. 이 난관들은 우리의 기술·경제적 후진성과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자본적 지출을 위한 자금을 찾아내야 한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승리했다면 가능했을 속도보다 더딘 발전 속도와도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 승리한 혁명은 사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우리나라 공업화 속도는 극도로 빨라졌을 것이고, 우리는 생산력을 다른 방식으로 재편해야 했을 것이며, 도시와 농촌의 비율도 달라졌을 것이고, 우리의 후진적인 농업을 공업의 영향권 안으로 훨씬 더 빠르게 끌어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총체적으로 그 속도는 훨씬 더 빨라졌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훨씬 더 느린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통합된 사회주의 유럽 경제의 속도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느린 이 속도는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속도는 우리 건설 사업이 지닌 상대적으로 막대한 어려움을 나타낼 뿐이다.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에 관한 문제는 이렇게 풀어야 한다. 이 문제를 몇 가지 더 일반적인 문제들과 연결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이미 1923년의 논쟁에서.

우리는 말했다. 동지 트로츠키가 옳고, 우리나라가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적 원조 없이는 농민과의 충돌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면, 이는 매우 중대한 결론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전 세계로 확대하면, 우리는 소비에트 연방에서와 거의 같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간의 관계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영국에서 권력을 잡으면 인도와 그 밖의 옛 영국 식민지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권력을 잡으면 아프리카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전 세계에서 권력을 잡으면 다른 모든 농민 국가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 농민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소비에트 연방에서와 거의 같은 관계가 존재한다면, 외부 원조 없이는 필연적으로 멸망한다는 이론에서 상응하는 결론을 도출할 경우, volens-nolens[41] 세계는 사회주의 혁명에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는 쿠노의 문제 제기에 이르게 된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와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될 농민이 막대하게 존재한다. 중국만 해도 그 수가 4억에 달하므로, 혁명은 “필연적으로” 멸망할 운명에 처한다. 외부로부터 “국가적 원조”를 받을 곳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반대파 이론이 이르는 곳이 바로 여기다. 만일 그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를 끝까지 생각하지 않고 중도에서 멈추기 때문일 뿐이다. 영국을 말할 때는 런던과 맨체스터만 보고, 현재 영국에 묶여 있는 세계의 다른 지역들은 잊는다. 막대한 수의 식민지·반식민지 인민들을 반쯤 경멸하며 외면하고, 그로써 자신들의 세련된 “유럽적” “마르크스주의”를 드러낸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 혁명의 성격, 그 추동력 등의 문제가 실천적으로 지극히 중대한 세계적 의의를 지닌다는 점이 밝혀진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다.

반대파의 사상적 기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회민주주의적 경향들이다. 물론 이를 조잡하고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반대파 지도자들은 물론 멘셰비키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멘셰비즘 쪽으로 자라나는 경향들이 있다. 그들은 멘셰비키 악마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이는 도무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의 사상적 입장에서는 우리의 멸망을 예언하려는 일종의 고질적인 욕구가 나온다. 주지하다시피 10월의 시기에 카메네바-지노비예프-실랴프니코프 집단, 즉 반대파 블록의 구성 부분이 이 멸망을 예언했다. 이 때문에 레닌은 그들의 입장을 “요란한 비관주의”라고 불렀다. 이 멸망을 1921년 봄에 예언했다(특히 동지

트로츠키). 이 멸망을 1923년 가을에 예언했다(그 유명한 “46인” 선언).

지금은 당에 맞서 빈틈없는 대열로 나서면서 이 멸망을 예언한다. 연이어 파산을 거듭하는 이 모든 “예언”들은, 본질상 우리 혁명의 객관적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정하는 이론, 즉 그릇된 이론으로 귀결된다.

주석

  1. 문제의 발생. - 2. 세계 자본주의의 성숙 문제.
  2. 볼셰비즘에 대한 다양한 비판: 자본주의의 일반적 미성숙이라는 관점에서, 전쟁으로 인한 파괴라는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미성숙이라는 관점에서. - 3.
  3.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의 전제 조건들에 관한 문제: 국제 사회민주주의, 러시아 멘셰비즘, 보그다노프-바자로프, 트로츠키, 볼셰비키 우익의 10월 입장. - 4. 소련에서 사회주의 건설 문제, 곧 우리 혁명의 성격에 관한 문제. - 5. 외부 위험으로부터의 보장과 우리 발전의 내적 힘. - 6. 결산.
  4. 현재 우리 혁명의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일련의 문제들이 다시 전면적으로, 말하자면 정면으로 제기되었다. 그 원인들을 여기서 상세히 분석할 수는 없지만, 근본 원인은 현재 우리가 이른바 복구 과정에서 재건 과정으로 이행하는 시기를 겪고 있다는 데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5. 사실 우리 경제 발전의 이전 단계를 복구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말을 엄밀한 의미로 쓴다면, 우리 공업의 상승과 인민경제 전체의 상승이 혁명 이전 시기에 걸었던 바로 그 궤도를 따라 진행된다는 뜻을 전제한다. 바로 그런 조건에서만 이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복구 과정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10월 혁명 이후 우리 경제의 상승, 무엇보다도 국가 부문의 상승은 경제 복구와 함께 생산관계의 끊임없는 개조도 진행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우리의 발전은 노동계급의 10월 승리 이전에 나라 경제가 발전해 온 토대와는 다른 토대 위에서 진행되었다.
  6. 그러므로 우리가 복구 과정에 관해 말할 때에는 이 표현이 조건적으로 쓰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생산량이 전쟁 전 수준에 도달했고, 생산의 물적 골격이 전쟁 전 시기의 규모로 복구되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오직 이 말의 그러한 의미에서만 복구 과정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직 그러한 이해에서만 복구 시기에서 재건 시기로의 이행을 말할 수 있다.
  7. 그러므로 지금 우리 앞에 경제를 개조하고 그것을 새로운 기술적 토대 위로 옮기는 과제가 전면적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8. 이 과제는 무엇보다도 자본 지출 자금을 찾아내고 투입하는 과제와 맞닿아 있다. 그 자금은 생산 토대의 확장, 새 기업의 건설 또는 착공에 쓰이며, 상당 부분 새로운 기술적 토대 위에서 쓰인다.
  9. 이것이 매우 어려운 과제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더욱이 그 어려움은 실천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니다, 이론적 측면에서만 보아도 그것은 독일인들이 말하듯 ein harter Nuss(단단한 호두)이다.
  10. 이 어려움이 바로 우리 대오 안에서 적지 않은 동요와 흔들림을 낳는다. 바로 그 어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혁명의 근본 문제들로 거슬러 올라가게 만든다.
  11. 고정 자본 문제는 비교적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다(레닌의 전기화 문제와 비교할 것). 이 문제는 우리의 반대자들 일부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P. P. 마슬로프의 한 저작, 즉 그가 1918년에 펴낸 책 「전쟁과 혁명의 결과」[1]를 언급할 수 있다. 당시 마슬로프는 전적으로 멘셰비키 입장에 서 있었고, 그 책에서 멘셰비키 관점을 견지했다. 물론 그는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부정했으며, 그 부정은 상당 부분, 우리나라 기술·경제적 토대가 전반적으로 후진적인 탓에 새로운 기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때 그가 쓴 내용은 다음과 같다.
  12. 농업에서, 그리고 공업에서 가장 많은 노동력을 차지하는 수공업 생산에서 지배적인 기업 유형을 조금만 살펴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이 사회주의 체제를 위한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혁명이 사회주의 체제를 도입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위대한 러시아 혁명은 초기 몇 년 동안은 공업을 농촌의 농업으로부터 분리시킬 뿐이며, 그것도 자본주의를 통해 분리시킬 뿐이다. 사회주의는 “비교적 먼 미래에” 가서야 그것들을 조화로운 전체로 다시 결합시킬 것이다. 소규모 경영에서 농업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서는 공업은 기술적으로 사회적 생산으로 형성될 수 없다. 수공업자의 원시적 기술은 보존될 수 없고, 기술의 변화는 반농업적 경영을 분열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에서, 새로운 기술적 원칙에 따라 새로운 기업들을 창조하는 일은 혁명이 아무리 막대한 창조적 힘을 지니고 있다 해도 혁명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2].
  13. 이 인용문에서 가장 특징적이고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문장이다. 저자는 그 문장에서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우리 자신의 경제에 새로운 기술적 토대를 깔아줄 힘과 수단을 어디에서도 끌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 연결한다.
  14. 이 새로운 기술적 토대를 어떤 자금으로 마련할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문제다.
  15. 바로 이,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고정 자본 문제”가 P. 마슬로프에 의해 전면에 제기되었다. 그런데 멘셰비키인 마슬로프의 견해로는 새로운 기술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므로, 바로 이 점이 그에게는 우리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일반적으로 부정하는 결정적 논거가 되었다.
  16.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우리 경제를 새로운 기술 궤도로 옮기는 문제, 곧 고정 자본 문제는 우리 혁명의 성격 문제,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 문제, 한마디로 현재 우리 당에서 논쟁 대상이 되고 있는 일련의 문제들로 곧바로 이어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뒤를 돌아보고, 사회주의 혁명 일반에 관해 이전에 무엇이 말해졌는지,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 가능성에 관해 무엇이 말해졌는지 상기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참고는 현재의 논쟁들을 해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련의 논거들을 드러내어, 논쟁하는 각 입장의 사상적 기원을 추적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17. 여기서는, 아주 짧게나마 “성숙” 문제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 현대 자본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 자본주의의 문제를 볼셰비키가 제기한 그 방식으로 다룬다. 볼셰비키의 역사적 예측과 전술이 언제나 사물의 상태에 대한 완전히 객관적인 분석에 기초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진리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성숙 문제를 해결할 때 볼셰비키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를 조건 짓는 세 가지 유형의 현상들을 고려했다. 첫째는 세계 자본주의의 기술·경제적 기초와 그 조직 형태이다. 둘째는 계급들 간의 상관관계, 즉 노동계급·소부르주아지·자본주의적 대부르주아지 사이의 세력균형이다. 셋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문화·이데올로기적 성숙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문화·이데올로기적 성숙 문제를,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고 국가 관리에 필요한 행정 역량 간부들을 배출한 뒤에야 비로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제기하지 않았다. A. A. 보그다노프는 문제를 그렇게 제기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보편적 조직 과학”의 원리들을 습득하고 프롤레타리아 문화에 관한 포괄적 학설의 견해에 깊이 스며들기 전에는 권력을 획득할 수 없다. 보그다노프와 같은 접근 방식으로는 자본주의의 성숙 문제가 언제 긍정적인 해결을 얻기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접근 방식은 달랐고, 이 접근 방식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관계들이 사회주의적 관계들로 이행하기 위한 전반적 성숙은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볼셰비키는 여기서 자본주의의 최후의 제국주의적 단계, 자본의 중앙집중과 집적의 충분한 정도, 자본주의의 특수한 조직 형태(금융자본, 자본주의적 독점, 은행 컨소시엄 등)에 관한 명제를 내세웠고, 세계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사실 자체를 자본주의적 관계들의 성숙을 증명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전쟁 자체는 생산력의 성장과, 이후 이러한 생산력의 다소 정상적인 발전에 이미 비좁아진 자본주의적 외피 사이의 거대한 갈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19. 물론 세계 자본주의를 평가할 때 볼셰비키는,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전면적 성숙을 인정하는 데서 전혀 출발하지 않았고, 지구의 모든 지리적 지점에서 자본의 중앙집중과 집적의 정도, 노동계급의 집적 정도 등
  20. 등이 모든 곳에서 동일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충분하다고 전혀 전제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볼셰비키는 레닌을 내세워 이른바 “자본주의 불균등 발전 법칙”에 관한 명제를 제기했다. 이 법칙은 나라별 자본주의 구조들의 이질성을 기초로 한다. 이 법칙은 자본주의 경제의 중심지들과 바로 그 경제의 식민지 주변부 사이에 엄격한 차이가 있다는 점, 세계 자본주의로서의 자본주의 전체의 성숙이 상이한 나라들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완전히 동일한 높이, 동일한 발전 속도 등을 전혀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운다. 이 레닌의 자본주의 불균등 발전 법칙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성숙 문제, 그 경제가 사회주의 경제로 이행할 준비의 정도 문제, 그리고 한 나라에서도 시작될 수 있는 복잡하고 장기적인 과정으로서의 세계 혁명 문제에 대한 볼셰비키의 접근 방식의 이론적 근거였다.
  21. 볼셰비키는 문제를 이렇게 제기했다. 볼셰비즘의 반대자들은 그 문제에 다르게 접근했다.
  22. 이와 함께, 그들(반대자들)이 자본주의 관계의 “미성숙”을 “증명”하기 위해 내세운 논거에는 여러 가지 변형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 한다. 볼셰비키를 겨냥하고, 현대 세계경제에서 자본주의 관계가 성숙했다는 볼셰비키 테제를 반박하려는 일련의 비판적 입장들이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는 성숙했지만, 세계대전의 결과로 그리고 전쟁 기간에 닥친 빈곤화의 결과로, 사회주의 혁명 궤도로 이행하기 위한 충분한 토대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끝으로 또 다른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문화적 미성숙을 지적하면서 특히 “독창적인” 여러 견해를 내세우는데, 프롤레타리아트는 바로 그 때문에 세계혁명의 과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23. 볼셰비즘에 대한 첫 번째 유형의 비판, 곧 자본주의 관계의 경제적 미성숙이라는 관점에서 가해지는 비판은 겐리흐 쿠노프의 저작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24. 그는 1914년 8월 4일 독일 제국의회에서의 표결을 정당화하기 위해 쓴 자신의 소책자들 중 하나에서 대략 다음과 같은 구상을 전개했다. 그는 지금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생각하는 것은 공허한 환상과 유토피아에 빠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어떤 경제 형태도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그리고 전면적으로 실현하기 전에는, 스스로를 끝까지 소진시키기 전에는 소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쿠노프는 말했다. 자본주의가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나라들을 보라. 자본주의적 상품 내용으로 아직 완전히 채워지지 않은 시장들을 보라. 자본주의가 아직 자기 발전의 초기에 있는 일부 나라들을 보라. 그러면 자본주의가 앞으로도 엄청난 시간 동안 더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아주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전쟁 후에는, 쿠노프가 그렇게 단언했듯이, 생산력의 부분적 파괴로 인해 자본주의 관계의 추가적 발전 가능성이 생긴다. 왜냐하면 전쟁 동안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일정한 파괴를 겪었기 때문에, 원래도 거대했던 그 시장망이 파괴된 생산력에 비해서는 더욱 거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까운 시기에 사회가 사회주의 궤도로 이행하리라는 생각은 어리석고 유토피아적이며 반마르크스주의적이다.
  25. 여기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 분명하고 뚜렷하기 때문에, 같은 노선을 따르는 다른 비판자들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이번에는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이거나 반(半)마르크스주의자인 문필가 A. A. 보그다노프를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저작들 가운데 하나, 곧 소책자 「사회주의의 문제들」에서 이렇게 썼다.
  26. 증거로 (사회주의로 이행할 필요성과 가능성. Н. Б.)
  27. 사람들은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바로 그 부문들의 거대한 성장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제 산업 전반에 걸쳐 쓰이는 바로 그 두 가지 기본 재료, 즉 선철과 석탄의 세계 생산량을 가지고, 그 재료들의 가격과 노동력에 대한 보수, 그리고 노동력 착취의 대략적 비율에 기초하여, 인류가 처분할 수 있는 전체 노동 에너지 가운데 어느 몫이 이 생산물들의 거대한 연간 물량 속으로 결정화되는지를 계산해 본다면, 그 값은 약 2-2/2%이며 결코 3%를 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 결과에는 압도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3].
  28. A. A. 보그다노프는 선철과 석탄 생산에서 이 2-2/2%라는 자기 수치를 제시함으로써, 자본주의 관계 발전의 한 국면에 관한 명제를 증명된 것으로 여긴다. 그 국면에서는 사회주의 혁명 궤도로의 이행이나 직접적인 사회주의 건설 궤도로의 이행 같은 과제를 스스로 제기할 생각조차 할 수 없다.
  29. 그러한 비판이 진지하게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으로 받아들여질 리는 거의 없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희화화에 지나지 않는다[4]. 왜냐하면 “비판자들”은 여기서 자본주의 붕괴의 전제들에 대한, 극도로 단순화되고 결코 변증법적이지 않은 관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는 다른 생산 형태들을 전적으로(또는 거의 전적으로) 밀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소멸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훨씬 더 일찍 붕괴한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내부 모순들을 훨씬 더 일찍 전개시키고, 그 모순들이 자본주의의 계속된 존속을 견딜 수 없고 객관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참조, 예컨대 세계대전들, “전쟁과 혁명의 시대”). 마찬가지로 “비판자들”은 자본주의의 물질적 성숙이란 권력 장악 이후에 사회 전체를 전면적으로 그리고 즉각 포괄하는 거의 기성품인 사회주의가 존재할 정도여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운동의 출발점들, 즉 추가 건설의 가능성일 뿐이다. “비판자들”에게서는 이행기가 거의 통째로 사라진다. 이행기란 비사회주의적 형태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적 경제 형태들이 발전하는 시기이다. 그들(“비판자들”)의 겉보기 급진주의는 그들의 가장 깊은 기회주의의 이면이다. 이 부류의 비판자들에 더 오래 머무를 필요는 거의 없다. 다른 반론 그룹으로 넘어가기에는 이미 제시된 것으로 충분하다.
  30. 이 후자는 일반적인 형태로 대략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31. 사회주의는 물론 성숙했고, 자본주의는 이미 자기 내부에 사회주의적 전복 문제를 의제로 올릴 수 있는 생산력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전쟁이 모든 것을 파괴했기 때문에 이제는 다른 어조를 취해야 하며, 이제는 사회주의적 전복 과제를 스스로 제기할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카우츠키다. 카우츠키는 전쟁의 막대한 파괴에 관해, 그리고 전쟁으로 파괴된 자본주의의 기반 위에서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 관해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 중에도 문제를 꼭 그렇게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아주 유명한 러시아 멘셰비키 리베르가 그렇게 제기했다. 리베르는 1919년 하리코프에서 출판된 자신의 소책자 「사회 혁명 또는 사회적 붕괴」의 서문에서, “유감스럽게도” 자신이 “공산주의 경호원들”로부터 숨어야 했던 시기에 이전 원고들을 분실했다고 서슴없이 알린 다음, 다음과 같은 논지를 편다: “기본적, ‘비관적’
  32. 입장들은 본 강연에서 전개된 것으로, 아직 ‘밀월’이던 우리 혁명의 달들에 이미 내가 옹호했다. 러시아 혁명의 첫날부터 이미 나에게는 전쟁이 불러일으킨 혁명의 부패성 붕괴의 징후들이 분명했고, 이리저리 떠도는 늪의 도깨비불은 단 한 순간도 나에게 혁명의 등대처럼 보이지 않았다”[5]. 시적이어야 할 이 서술은 다음과 같은 정치적 사고를 담고 있다. 즉, 볼셰비키 여러분, 무슨 사회주의니, 국제 혁명이니 등등의
  33. 것들에 대해 말하는가?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이것을 의제로 올리는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회의 전진적 혁명 운동 과정이 아니라, 전쟁이 불러일으킨 부패성 붕괴 과정이다.
  34. 이 소책자의 제3장에서 저자는, 전쟁의 결과로 나타난 “무정부 상태”를 묘사하면서, 「다가올 전망과 과제」라는 제목이 붙은 그 장에서, 자신의 관점이 러시아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것을 “통째로” 전 세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직접 선언한다. “내가 말한 모든 것으로부터, 지금은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다”[6].
  35. 이 논증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고통 없는” 이행이라는 기회주의적 전제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기는 어렵지 않다. 생산력 파괴와 필연적으로 결부된 파국들 속에서 사회주의가 탄생하리라고 예견한 마르크스의 혁명 이론과 정면으로 모순되면서, “비판가들”은 참으로 목가적인 사건 전개가 가능하다는 데서 출발한다. 다른 한편, 검토 중인 이 논증은 사회주의 건설의 전제들에 대한 산술적 관념과도 연결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생산의 물질적 토대 발전에서 일정한 경계로부터 후퇴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즉시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가정한다. 계급 세력들의 변화하는 상관관계, 투쟁들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교육과 자기 교육 등—이 모든 것은 고려되지 않는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이 주장에 대한 경험적 검증, 즉 이후의 사건 전개 전체는 기회주의자들의 논의를 완전히 논박했다. 그들은 혁명 일반에서 도망쳤듯이 과제의 해결에서도 그저 도망쳤을 뿐이다.
  36. 반대 논거의 세 번째 묶음은,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의 형태로, 어떤 이론으로 제시되었다. 그 이론이 증명해야 했던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인구의 산술적 소수이기 때문에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이 사회민주주의자 비판가들에 따르면, 권력 장악,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노동계급의 정치 정당에 의한 권력 탈취, 사회주의 건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에 속하는 다수를 전제한다. 이 문제는 볼셰비키 문헌에서 아주 상세히 논의되었으며, 여기서 그 문제에 더 머무를 필요는 거의 없다. 특히 이 문제에서 레닌 동지가 카우츠키를 상대로 제시한 논거들은 널리 알려져 있다.
  37. “...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오해하는 주된 원인은
  38. (읽자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 —레닌이 썼다— 그들이 다음과 같은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즉 한 계급,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있는 국가 권력은 비프롤레타리아트 노동 대중을 프롤레타리아트 편으로 끌어들이는 도구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며, 이 대중을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 정당들로부터 되찾아 오는 도구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7] 프롤레타리아트가 인구의 소수이면서도 소부르주아 대중을 지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회 세력 결합은 충분히 가능하다. 다른 한편, 국내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 층들이 귀족적으로 변질되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극도로 어려워지는 경우도 가능하다[8].
  39. 따라서 문제에 대한 틀에 박히고, 저속하고, 구체적이지 못하고, 비변증법적인 태도만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소수인 상황에서 전복이 불가능하다는 사회민주주의적 견해로 이어질 수 있다.
  40.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미성숙에 관한 이론의 독창적인 변형은 아. 보그다노프의 관점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보그다노프에게는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들이 성숙한다는 특별한 이론이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권력을 장악한다는 과제를 스스로 제기할 수 있으려면, 사회주의 건설의 가장 복잡한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준비된 인재 집단을 이미 자신이 보유하고 있을 때여야 한다. 보그다노프의 논증은 아주 단순하다. 그는, 예컨대 계획 문제 같은 것을 들어 이렇게 말한다:
  41. 사회주의 경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엄청나게 복잡한 과제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의 세계적 조직이라는 과제를 제기한다면, 그 어려움은 측량할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상응하는 문화적·조직적 전제 없이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들이 아직 현존하지 않으므로, 물론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과제 자체를 당면 과제로 제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