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변증법의 문제에 대하여」

인물블라디미르 레닌,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마르크스, 페르디난트 라살레,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이마누엘 칸트, 요제프 디츠겐, 조지 버클리, 데이비드 흄 용어변증법, 변증법적 유물론, 자본 (마르크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반뒤링론

단일한 것의 분열과 그 모순된 부분들의 인식(라살레의 『헤라클레이토스』 제3부 「인식에 관하여」 첫머리에 있는 필론의 헤라클레이토스 인용을 보라)[1]은 변증법의 핵심(변증법의 “본질들” 가운데 하나, 그 기본적 특징 또는 특색 가운데 하나, 아니 가장 기본적인 특징 또는 특색)이다. 헤겔도 바로 그렇게 문제를 세운다(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줄곧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며 헤라클레이토스, respective[또는] 헤라클레이토스적 사상과 싸운다).

변증법의 내용 가운데 이 측면이 옳은지는 과학의 역사로 검증되어야 한다. 변증법의 이 측면에는 보통(이를테면 플레하노프에게서)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대립물의 동일성은 예들의 합계로 다루어지고[“이를테면 낟알”, “이를테면 원시 공산주의”[2]. 엥겔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성을 위해서”다…], 인식의 법칙(그리고 객관 세계의 법칙)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 수학에서는 +와 −. 미분과 적분.
  • 역학에서는 작용과 반작용.
  • 물리학에서는 양전기와 음전기.
  • 화학에서는 원자의 결합과 해리.
  • 사회과학에서는 계급투쟁.

대립물의 동일성(대립물의 “통일”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까? 동일성과 통일이라는 용어의 차이는 여기서 그다지 본질적이지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둘 다 옳다)이란 자연의(정신과 사회를 포함한) 모든 현상과 과정 속에 모순되고, 서로 배척하며, 대립하는 경향들이 있음을 인정(발견)하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과정을 그 “자기 운동” 속에서, 그 자발적 발전 속에서, 그 살아 있는 삶 속에서 인식하는 조건은 그것들을 대립물의 통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발전은 대립물의 “투쟁”이다. 발전(진화)에 관한 두 가지 기본적인(또는 두 가지 가능한? 또는 역사에서 관찰되는 두 가지?) 관념은 이렇다. 감소와 증가로서의, 반복으로서의 발전, 그리고 대립물의 통일로서의 발전(단일한 것이 서로 배척하는 대립물로 분열하는 것, 그리고 그 대립물들 사이의 상호 관계).

운동에 관한 첫째 관념에서는 자기 운동, 그 추진력, 그 원천, 그 동기가 그늘에 가려진다(또는 그 원천이 바깥으로, 곧 신, 주체 etc.[따위]로 옮겨진다). 둘째 관념에서는 바로 “자기” 운동의 원천을 인식하는 데 주의가 쏠린다.

첫째 관념은 죽어 있고, 창백하고, 메마르다. 둘째 관념은 살아 있다. 오직 둘째 관념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자기 운동”을 여는 열쇠를 준다. 오직 그것만이 “비약”, “점진성의 중단”, “대립물로의 전화”, 낡은 것의 소멸과 새것의 출현을 여는 열쇠를 준다. 대립물의 통일(일치, 동일성, 균형)은 조건적이고, 일시적이고, 덧없고, 상대적이다. 서로 배척하는 대립물의 투쟁은 발전과 운동이 절대적이듯이 절대적이다.

[NB: 주관주의(회의론과 궤변 etc.)와 변증법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객관적) 변증법에서는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의 차이 또한 상대적이라는 데 있다. 객관적 변증법에게는 상대적인 것 속에 절대적인 것이 있다. 주관주의와 궤변에게 상대적인 것은 상대적일 뿐이며 절대적인 것을 배제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먼저 부르주아(상품) 사회의 가장 단순하고, 흔하며, 기본적이고, 가장 대량적이며, 가장 일상적인, 수십억 번 마주치는 관계, 곧 상품 교환을 분석한다. 분석은 이 가장 단순한 현상 속에서(부르주아 사회의 이 “세포” 속에서) 현대 사회의 모든 모순(respective[또는] 모든 모순의 맹아)을 드러낸다. 이어지는 서술은 이 모순들과 이 사회의 발전(성장이기도 하고 운동이기도 한)을, 그 개별 부분들의 Σ[합]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 준다.

변증법 일반의 서술(respective[또는] 연구) 방법도 이와 같아야 한다(마르크스에게서 부르주아 사회의 변증법은 변증법의 한 특수한 경우일 뿐이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하고, 흔하며, 대량적인 것 etc.에서, 아무 명제에서나 시작할 것. 나뭇잎은 푸르다. 이반은 사람이다. 주치카는 개다[3] 따위. 이미 여기에(헤겔이 천재적으로 지적했듯이) 변증법이 있다. 개별적인 것은 일반적인 것이다(참조: Aristoteles, Metaphysik, 슈베글러 역, 제2권 40쪽, 제3책 제4장 8~9절: “denn natürlich kann man nicht der Meinung sein, daß es ein Haus — 집 일반 — gebe außer den sichtbaren Häusern”, „οὐ γὰρ ἂν θείημεν εἶναί τινα οἰκίαν παρὰ τὰς τινὰς οἰκίας“[“우리는 개별적인 집들과 나란히 어떤 집(일반)이 있다고 받아들일 수는 없으니까”]). 따라서 대립물(개별적인 것은 일반적인 것과 대립한다)은 동일하다. 개별적인 것은 일반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연관 속에서가 아니고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것은 오직 개별적인 것 속에서, 개별적인 것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모든 개별적인 것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일반적인 것이다. 모든 일반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의 (한 조각이거나 한 측면이거나 본질)이다. 모든 일반적인 것은 모든 개별 대상을 근사적으로만 포괄한다. 모든 개별적인 것은 일반적인 것에 불완전하게 들어간다 따위 따위. 모든 개별적인 것은 수천 가지 이행을 거쳐 다른 종류의 개별적인 것들(사물, 현상,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 따위. 이미 여기에 필연성의 개념, 자연의 객관적 연관 etc.의 요소, 맹아가 있다. 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 현상과 본질이 이미 여기에 있다. 이반은 사람이다, 주치카는 개다, 이것은 나뭇잎이다 따위로 말할 때, 우리는 여러 표지를 우연적인 것으로 버리고, 본질적인 것을 현상하는 것에서 떼어 내어 서로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명제에서든 “세포” 안에서처럼 변증법의 모든 요소의 맹아를 드러낼 수 있고(또 드러내야 하며), 그럼으로써 인간의 인식 일반에 변증법이 고유하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다. 그리고 자연과학은 우리에게 (이것도 다시 아무 가장 단순한 예로 보여 주어야 한다) 객관적 자연이 같은 성질들, 곧 개별적인 것의 일반적인 것으로의 전화, 우연적인 것의 필연적인 것으로의 전화, 이행, 넘나듦, 대립물의 상호 연관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변증법이야말로 (헤겔과)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이다. 바로 이 문제의 “측면”(이것은 문제의 “측면”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이다)에 플레하노프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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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을 일련의 원으로 그리는 것은 헤겔도(『논리학』을 보라) 그렇고, 헤겔주의의 적(그는 헤겔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이자 절충주의자인 오늘날 자연과학의 “인식론자” 파울 폴크만[4]도(그의 『Erkenntnistheoretische Grundzüge』[인식론의 기본 특징] 166쪽을 보라) 그렇다.

철학의 “원들”: [사람들에 관해 연대순이 반드시 필요한가? 아니다!]

  • 고대: 데모크리토스에서 플라톤과 헤라클레이토스의 변증법까지.
  • 르네상스: 데카르트 versus[대] 가상디(스피노자?).
  • 근대: 돌바크 — 헤겔(버클리, 흄, 칸트를 거쳐). 헤겔 — 포이어바흐 — 마르크스.

살아 있고 다면적인(그 측면의 수가 끝없이 늘어나는) 인식으로서의 변증법, 현실에 다가가고 접근하는 모든 방식의 무수한 색조를 지닌(그 색조 하나하나에서 하나의 철학 체계가 전체로 자라나는) 변증법. 바로 이것이 “형이상학적” 유물론에 비해 헤아릴 수 없이 풍부한 내용이다. 형이상학적 유물론의 근본적인 불행은 변증법을 Bildertheorie[반영론]에, 인식의 과정과 발전에 적용할 줄 모른다는 데 있다.

철학적 관념론은 조야하고 단순하며 형이상학적인 유물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저 헛소리일 뿐이다. 반대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보면, 철학적 관념론은 인식의 특징, 측면, 단면 가운데 하나를 물질과 자연에서 떼어 내어 신격화한 절대자로 일면적이고 과장되게, überschwenglich[도를 넘게](디츠겐)[5] 발전(부풀림, 팽창)시킨 것이다. 관념론은 성직자주의[6]다. [여백: NB 이 경구] 맞다. 그러나 철학적 관념론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고 “그에 더해”) 인간의 무한히 복잡한 (변증법적) 인식의 색조 가운데 하나를 거쳐 성직자주의로 가는 길이다.

인간의 인식은 직선이 아니며(respective[또는] 직선을 따라 나아가지 않으며), 일련의 원, 나선에 끝없이 가까워지는 곡선이다. 이 곡선의 어떤 조각, 파편, 토막이든 독립된, 온전한, 곧은 직선으로 바뀔 수 있으며(일면적으로 바뀔 수 있으며), 그러면 그 직선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면) 늪으로, 성직자주의로 이끈다(그리고 거기서 지배 계급의 계급적 이해관계가 그것을 굳힌다). 직선성과 일면성, 목석같음과 경직성, 주관주의와 주관적 맹목, voilà[바로 이것이] 관념론의 인식론적 뿌리다. 그리고 성직자주의(= 철학적 관념론)에는 물론 인식론적 뿌리가 있다. 그것은 근거가 없지 않다. 그것은 틀림없이 열매 맺지 못하는 꽃이지만, 살아 있고, 풍요롭고, 참되고, 힘차고, 전능하며,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인간 인식이라는 살아 있는 나무에서 자라나는 열매 맺지 못하는 꽃이다.

주석

  1. 페르디난트 라살레의 『에페소스의 어두운 사람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Die Philosophie Herakleitos des Dunklen von Ephesos)』(1858). 레닌은 같은 시기에 이 책의 요약을 남겼고, 거기서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 전하는, 하나가 서로 대립하는 둘로 나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을 옮겨 적었다. ↩
  2.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부정의 부정」을 설명하며 보리 낟알이 싹터 줄기가 되고 다시 많은 낟알을 맺는 예와, 원시 공동체의 공동 소유가 사적 소유를 거쳐 더 높은 공동 소유로 돌아가는 예를 들었다. 레닌은 플레하노프가 변증법을 이런 예들의 나열로 설명하는 방식을 겨냥하고 있다. ↩
  3. 주치카(Жучка)는 러시아에서 흔한 개 이름이다. 이반과 함께 「아무개」 정도의 뜻으로 고른 예다. ↩
  4. 파울 폴크만(Paul Volkmann, 1856~1938).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이론물리학자. 『자연과학의 인식론적 기본 특징(Erkenntnistheoretische Grundzüge der Naturwissenschaften)』(제2판 1910)을 썼다. ↩
  5. 독일의 노동자 철학자 요제프 디츠겐(Joseph Dietzgen, 1828~1888)이 즐겨 쓴 말. 엥겔스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에서 그가 자신들과도 헤겔과도 무관하게 유물론적 변증법을 발견했다고 썼다. ↩
  6. 포포프시나(поповщина). 러시아 정교회 사제를 낮춰 부르는 「포프(поп)」에서 나온 말로, 성직자의 지배와 종교적 몽매를 함께 가리킨다.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이래 관념론 철학이 결국 신앙에 길을 연다는 뜻으로 이 말을 썼다. 이 문서에서는 「성직자주의」로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