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의 치헤이제 앞 편지(1913)와 올민스키 앞 편지(1921)
인물레프 트로츠키, 니콜라이 치헤이제, 미하일 올민스키,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 카를 카우츠키, 클라라 체트킨, 로자 룩셈부르크 용어청산주의, 8월 블록, 연속혁명, 프라우다, 멘셰비키, 볼셰비키 사건레닌 사후 권력투쟁과 좌익 반대파
『반대파 회보』 편집부 머리말 (1932)
1921년에 트로츠키가 1913년 4월 치헤이제에게 써 보낸 편지 두 통이 발견되었다. 경찰국이 가로챈 것으로, 레닌을 극도로 날카롭게 공격하는 내용이었다. 옛 망명자들은 분파 싸움의 역사와 거기서 자라난 자잘한 일화들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런 일은 모두 오래전에 지나간 시절의 것이었다. 스탈린이 이 편지를 레닌에게 슬쩍 들이밀었을 때(아마 들이밀었을 것이다) 레닌은 그저 쓴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편지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관계에 털끝만 한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았고, 드리울 수도 없었다. 분파 투쟁이 첨예해진 한순간에 쓰인 이 일화적인 편지와, 필자 자신도 잊고 있던 편지가 수면 위로 떠오른 1921년 사이에는, 10월 봉기가 있었던 1917년과, 적들의 세계를 상대로 한 그 뒤 3년의 내전과, 함께 경제 건설에 나선 첫해가 놓여 있었다. 당사 연구소에서 일하던 올민스키가 트로츠키에게 치헤이제 앞 편지를 출판해도 되겠느냐고 물어 왔다. 이 질문 뒤에는 음모의 시도가 숨어 있었을 것이며, 거기서 올민스키는 발의자라기보다는 도구였을 것이다. 그 뒤 스탈린이 트로츠키의 편지를 날짜도 없이, 마치 1923년에 쓰인 것처럼 퍼뜨리며 아주 폭넓게 써먹었으므로, 올민스키의 문의 뒤에도 스탈린이 있었다고 짐작할 만한 근거는 충분하다. 이런 일이라면 그는 언제나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우리는 트로츠키가 올민스키에게 보낸 답장을 여기 다시 싣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치헤이제에게 보낸 편지 (1913년 4월 1일)
빈, 1913년 4월 1일
상트페테르부르크, 타브리다 궁전,
국가두마 의원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치헤이제 귀하
친애하는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먼저, 당신의 연설들, 특히 최근의 무뢰배 행위에 관한 연설에서 얻는 — 정치적일 뿐 아니라 미적이기도 한 — 즐거움에 감사를 드리게 해 주십시오. 하기야 대체로 말하자면, 우리 의원들의 발언이나 『루치』[1] 편집부에 오는 노동자들의 편지를 읽을 때, 또는 노동운동의 사실들을 기록할 때면 마음이 기쁩니다. 그럴수록 이런 일에 이골이 난 레닌, 러시아 노동운동의 온갖 후진성을 직업적으로 착취하는 이 사람이 체계적으로 부채질하는 너절한 싸움질은 무슨 무의미한 악몽처럼 보입니다. 정신이 성한 유럽 사회주의자라면 레닌이 크라쿠프에서 지어내는 저 마가린 같은 의견 차이 때문에 분열이 일어날 수 있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레닌의 「성공」은 그것이 아무리 걸림돌이 된다 해도, 그 자체로는 더 이상 나를 걱정시키지 않습니다. 지금은 1903년도 1908년도 아닙니다. 카우츠키와 체트킨에게서 가로챈 「검은돈」[2]으로 레닌은 기관지를 세우고, 그것에 인기 있는 신문의 간판[3]을 빼앗아 달았으며, 「통일」과 「비공식성」을 깃발에 내걸어 노동자 독자들을 끌어모았습니다. 노동자들은 일간 노동자 신문이 나왔다는 것 자체를 자기들의 커다란 성취로 여겼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다가 신문이 자리를 잡자 레닌은 그것을 서클식 음모와 원칙 없는 분열 공작의 지렛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통일을 향한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 열망은 너무나 억누를 수 없는 것이어서, 레닌은 독자들과 줄곧 숨바꼭질을 해야 합니다. 아래로부터의 통일을 말하면서 위에서는 분열을 밀어붙이고,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을 서클적·분파적 규정으로 바꿔치기해야 합니다[4]. 한마디로, 레닌주의라는 건물 전체가 지금 거짓과 날조 위에 서 있으며, 그 안에 자기 해체의 독소를 품고 있습니다. 상대편이 분별 있게 처신하기만 한다면 머지않아 레닌파 안에서 혹독한 해체가 시작되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 바로 통일이냐 분열이냐 하는 문제의 선을 따라서 말입니다.
그러나 되풀이하건대, 이는 상대편이 분별 있게 처신한다는 조건에서입니다. 레닌주의가 그 자체로는 걱정거리가 아니라 해도, 고백하건대 나는 우리 친구들인 청산파가 레닌을 다시 일으켜 세워 안장에 단단히 앉혀 주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가능한 정책은 둘입니다. 하나는 수명을 다한 분파 칸막이를 사상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허무는 것, 따라서 레닌주의의 토대 자체를 허무는 것입니다. 레닌주의는 노동자들의 당적·정치적 조직과 양립할 수 없지만, 분파 간 경계 긋기의 거름 더미 위에서는 화려하게 꽃핍니다. 다른 하나는 거꾸로, 전술적 의견 차이를 정성껏 가꾸어 반레닌파(멘셰비키든 청산파든)를 분파적으로 추려 모으는 것입니다. 멘셰비키의 일부 — 가장 보수적인 부분 — 는 바로 이 두 번째 전술로 기울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가장 걱정스러운 것이 이 점입니다.
내가 두마 의원단 다수파의 분위기를 아는 한, 그것은 지금 당의 발전에 구원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 다수파는 당의 위기에 관한 자기 견해를 당에 알리는 일을 너무 적게 해 온 것 같습니다. 의원단이 취한 그에 걸맞은 행동(두 기관지 모두에 협력한다는 결정 등)은 매우 중요했지만, 그래도 일회적이었습니다. 『프라우다』가 의원단을 둘러싸고 일으키는 혼란 속에서 넓은 층에게는 (의원단의) 얼굴이 사라져 버립니다… 의원단은 단호하고 권위 있는 형식으로, 자신이 예전과 다름없이 일정한 내부 과제(즉 무엇보다도 통일)를 지키고 있으며 서클식 실험의 수동적 재료가 될 생각이 결코 없다고 밝혀야 합니다. 의원단이 그런 선언을 내놓는다면 넓은 노동자층에게서 아주 생생한 반향을 얻을 것이고, 의원단은 단번에 사회민주주의의 모든 진보적이고 생명력 있는 요소의 구심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또 하나의 상시적 과제, 곧 『루치』에 대한 빈틈없는 감독입니다. 지난 두세 달 동안 『루치』가 해 온 일 — 옹졸하고 트집 잡는 논쟁벽[5], 강령을 정치적으로 적용하기보다 형식적으로 변호하는 데 쏟은 열성, 8월 협의회[6]의 권위로 지난날의 청산주의 전체를 감싸고 심지어 『루치』와 두마 의원단 다수파를 청산주의와 동일시하기까지 한 것 — 이 일은 당을 타락시키고 의원단을 해체하려는 레닌의 작업을 엄청나게 쉽게 해 주었습니다(아주 최근에는 『루치』가 많이 바로잡혔습니다). 그리하여 의원단 다수파와 『루치』를 깃발로 삼게 된 노동자들의 의식 속에 많은 혼란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혼란은 신문만이 아니라 의원단에도 드리워졌습니다. 노동자들은 편집부는 모르지만, 『루치』의 강령에 연대를 선언한 의원 여덟 명이 신문에 책임이 있다는 것은 알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을 모두 헤아려 보면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민주주의 건설 사업에서 어떤 성공이든 거두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지금 두마 의원단 다수파가 더 적극적인 「대내」 정책을 펴는 것입니다. 자잘한 싸움질에 끼어든다는 뜻에서 적극적이라는 것이 아니라(맙소사), 1) 자신의 「바데메쿰」[7]을 단호하게 내놓는다는 뜻 — 예컨대 『루치』 지면에 선언을 싣는 형식으로 —, 2) 의원단의 기관지여야 할 그 신문에서 「격세유전적」 정책 방식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루치』를 빈틈없이 감독한다는 뜻에서입니다. 내일모레 또다시 「옆길로 뛰어드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내게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뛰어듦은 레닌에게는 구원이 되고 우리 모두에게는 치명적일 것입니다.
특히 의원단은 사회민주주의 통합을 위한 독일 쪽 발의를 선전 목적에 이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부활절에 직접 베를린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면 모든 면에서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특히 캅카스 사회민주주의를 위해서도). 당신의 모든 성공을 빌며 진심으로 악수를 청합니다.
N. 트로츠키
주소: 빈 19구 로들러가세 25-II, L. 브론시테인 앞.
올민스키에게 보낸 편지 (1921년 12월 6일)
친애하는 미하일 스테파노비치.
답장이 늦어 미안합니다. 이번 주는 무척 바빴습니다. 당신은 내가 치헤이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출판하는 일에 관해 묻습니다. 나는 그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를 위한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편지들은 한순간의 인상과 그 순간의 필요 아래에서 쓰였고, 편지의 어조도 그에 맞았습니다. 오늘의 독자는 그 어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필요한 역사적 보정을 하지 못한 채 혼란에 빠질 뿐입니다. 외국에서 당의 문서고와 망명지의 마르크스주의 간행물들이 들어와야 합니다. 거기에는 「싸움」에 참가한 모든 사람이 쓴 편지가 많이 있습니다. 설마 그것들을 지금 출판할 생각입니까? 그렇게 하면 전혀 쓸데없는 정치적 곤란이 생길 것입니다. 사상 투쟁이나 순간적인 짜증 따위에 휩쓸려 편지에서 서로를 호되게 욕하지 않은 옛 망명자가 당 안에 두 사람이나 있을지 의심스럽기 때문입니다. 내 편지들에 해설을 붙이라고요? 그러자면 그때 내가 무엇을 두고 볼셰비키와 갈라섰는지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내 소책자 『평가와 전망』의 서문에서 간단히 말했습니다. 경찰국 문서철에서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우연한 계기로 그것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은, 분파 투쟁을 돌이켜 보는 일이 지금도 논쟁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 이것은 솔직하게 고백하는데 — 나는 볼셰비키와의 의견 차이에서 내가 모든 점에서 틀렸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틀린 것은 — 그것도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 멘셰비키 분파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나는 그들의 혁명적 가능성을 과대평가했고, 그 안에서 우익을 고립시켜 무력화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근본적인 오류는, 내가 두 분파 —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 를 모두 연속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사상이라는 관점에서 대한 데서 나왔습니다. 반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그 시기에 부르주아 혁명과 민주공화국의 관점에 서 있었습니다. 나는 두 분파 사이의 의견 차이가 원칙적으로는 그리 깊지 않다고 보았고, 혁명의 진행 자체와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이 싸우는 두 분파를 가깝게 하리라고 기대했습니다(이 기대를 나는 편지와 보고에서 여러 번 밝혔습니다). 그리고 1905년에 실제로 부분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러시아 혁명의 동력에 관한 카우츠키의 논문에 레닌 동지가 쓴 서문과 『나찰로』 신문의 노선 전체)[8].
혁명의 동력에 대한 내 평가는 확실히 옳았고, 그 평가에서 내가 두 분파에 관해 끌어낸 결론은 확실히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볼셰비즘만이 그 비타협적 노선 덕분에 옛 인텔리겐치아와 노동계급 선진층 양쪽의 참으로 혁명적인 요소를 자기 대열에 모았습니다. 볼셰비즘이 이 혁명적으로 단결된 조직을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에, 혁명적 민주주의 입장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입장으로 그토록 빠르게 전환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지금도 나는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에 반대해 쓴 내 논쟁적 논문들을 어렵지 않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혁명의 내적 동력과 그 전망을 분석한 것들이고(로자 룩셈부르크의 폴란드어 이론지[9], 『노이에 차이트』), 다른 하나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분파, 그들의 투쟁 따위를 평가한 것들입니다. 첫 번째 범주의 논문은 지금도 고치지 않고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17년 이래 우리 당의 입장과 온전히 완전하게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범주의 논문은 분명히 잘못되었으며 다시 펴낼 가치가 없습니다. 보내 주신 편지 두 통은 두 번째 범주에 속합니다. 그것들을 공개하는 것은 때에 맞지 않습니다. 한 십 년 뒤에, 그때 사람들이 이 일에 관심을 가진다면 누군가에게 그 일을 맡깁시다.
공산주의자의 인사를 보내며
L. 트로츠키
1921년 12월 6일
주석
- 『루치』(Луч, 「빛살」): 1912년 9월부터 페테르부르크에서 나온 멘셰비키 청산파의 일간지. ↩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남겨진 슈미트 유산 등의 기금을 가리킨다. 1910년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뒤 이 돈은 카우츠키, 메링, 체트킨을 수탁인으로 하여 맡겨졌고, 볼셰비키와 다른 분파들이 그 처분을 두고 다투었다. ↩
- 트로츠키가 1908~1912년 빈에서 펴낸 비분파적 신문 『프라우다』의 이름을 말한다. 볼셰비키는 1912년 4월(구력) 페테르부르크에서 같은 이름의 일간지를 창간했다. ↩
- 전사본은 «представлять под кружковые и фракционные определения понятие классовой борьбы»로 읽는다. «подставлять»(바꿔 넣다)의 오기로 보고 옮겼다. ↩
- 전사본은 «полонизм»으로 읽는다. 문맥상 «полемизм»(논쟁벽)으로 보고 옮겼다. ↩
- 1912년 8월 빈에서 트로츠키가 소집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협의회. 멘셰비키 청산파, 분트, 트로츠키파 등이 참가해 이른바 「8월 블록」을 이루었다. ↩
- 바데메쿰(vade mecum): 늘 지니고 다니는 안내서. 여기서는 의원단의 원칙적 입장을 밝힌 강령적 문서를 뜻한다. ↩
- 레닌은 1906년 카우츠키의 「러시아 혁명의 동력과 전망」 러시아어판에 서문을 썼다. 『나찰로』(Начало)는 1905년 11~12월 페테르부르크에서 트로츠키와 파르부스가 깊이 관여한 멘셰비키 일간지다. ↩
-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사회민주당의 이론지 『사회민주주의 평론』(Przegląd Socjaldemokratyczny)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