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1991

정부 수반

인민위원회의와 각료회의를 이끈 총리 계보.

지도부 타임라인

  1. 1923–1924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인민위원회의 의장
  2. 1924–1930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리코프 인민위원회의 의장
  3. 1930–1941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 인민위원회의 의장
  4. 1941–1953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인민위원회의 · 각료회의 의장
  5. 1953–1955 게오르기 막시밀리아노비치 말렌코프 각료회의 의장
  6. 1955–1958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불가닌 각료회의 의장
  7. 1958–1964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각료회의 의장
  8. 1964–1980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코시긴 각료회의 의장
  9. 1980–1985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티호노프 각료회의 의장
  10. 1985–1991.1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리시코프 각료회의 의장
  11. 1991.1–8 발렌틴 세르게예비치 파블로프 총리

소속 인물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비치 본치-브루예비치

Владимир Дмитриевич Бонч-Бруевич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873–1955 ○ 자연사

소비에트 정부 기구를 설계하고 종교적 반대자들을 연구한 혁명가

1917년 10월, 스몰니에서 물러난 레닌을 자기 아파트에 재웠다. 현관문에 사슬과 자물쇠를 모두 채우고 장전한 리볼버 두 정을 곁에 둔 채, 그는 레닌이 잠들었는지 확인하려고 밤새 소파에서 졸았다. 그러나 레닌은 자는 척하던 그를 피해 살며시 일어나 책상에 앉았고, 날이 샐 무렵 유명한 토지에 관한 포고령 초고를 주머니에서 꺼내 낭독했다. 본치-브루예비치는 "사회주의 혁명의 첫날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로 아침을 열었다.

레닌의 사실상 개인비서이자 초대 인민위원회 사무국장(1917~20)으로서 소비에트 행정기구의 기초를 닦았다. 러시아 종파운동의 민족지학자로서 1919년 양심적 병역거부를 합법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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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1892콘스탄티노프 측량학교 입학, 학생운동으로 제적 후 쿠르스크 측량학교 졸업
  • 1895–1903RSDLP 입당, 모스크바 노동자동맹 활동, 1896년 스위스 망명, 「이스크라」 협력, 두호보르 교도 캐나다 이주 조직
  • 1903–1905RSDLP 중앙위원회 원정대 책임자(제네바), 당 중앙기록보관소 설립 참여
  • 1905–1912러시아 귀환, 「노바야 지즌」·「나샤 미슬」 편집, 1908년부터 출판사 「지즌 이 즈나니예」 경영, 1912년 「프라우다」 편집위원
  • 1917.3–10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스몰니-타브리다 구역 사령관
  • 1917–1920인민위원회의 사무국장(우프라블랴유쉬치 델라미) — 소비에트 행정기구 구축, 수도를 모스크바로 이전 집행
  • 1919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 면제에 관한 법령 초안 주도
  • 1920–1929과학·저술 활동 전념, 모스크바 근교 실험 국영농장 「레스니예 폴랴니」 운영
  • 1933–1945국립문학박물관 창설·초대 관장
  • 1945–1955소련 과학아카데미 종교·무신론사 박물관 관장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세마슈코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емашко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874–1949 ○ 자연사

무료 보편 의료를 설계한 소비에트 보건의 창건자

«예방의학(프로필락티카)이 우리가 가는 길이며, 건강검진(디스판세리자치야)은 그 예방 과제를 푸는 방법이다.» — 1925년, 소비에트 보건의료의 핵심 원칙을 한 문장으로 정식화하다.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볼셰비키로 활동한 의사이자 혁명가였다. 1918년 초대 보건인민위원이 되어 전 국민 무료 진료, 중앙집중식 국영 의료기관 체계, 예방의학과 모자보건을 축으로 하는 '세마슈코 모델'을 구축했다. 모스크바 의과대학 사회위생학 교수로 학문적 기초를 다졌고 대의학백과사전 편집장을 맡았다. 그의 국가 주도 보편의료 모델은 쿠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동유럽 여러 나라가 채택하여 공중보건사의 획기적 전환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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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901모스크바대 의대 입학, 맑스주의 서클 참여, 체포·유배 후 카잔대학 의학 졸업
  • 1904–1906니즈니노브고로드 RSDLP 위원회 활동, 1905년 소르모보 공장 파업 조직, 체포 후 스위스 망명
  • 1907–1912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 대표, 파리 자граничное бю로 ЦК 서기, 롱쥐모 당학교, 프라하 전러시아당대회 보고
  • 1917–1918모스크바 10월 봉기 의료 지원, 모스크바소비에트 의료위생부장
  • 1918–1930초대 RSFSR 보건인민위원, 전 국민 무료의료·중앙집중식 국영 병원·예방의학 체계 구축
  • 1921–1949모스크바대학(후 제1의학원) 사회위생학 교수, 대의학백과사전 편집장(1927–1936)
  • 1930–1936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 아동위원회 의장으로 아동보건·부랑아 대책 주도
  • 1944–1949소비에트 의학아카데미·교육아카데미 회원, 학교위생연구소·보건조직의학사연구소 소장

블라디미르 넵스키 (페오도시 이바노비치 크리보보코프)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Невский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876–1937 ✕ 처형

10월에 철도를 장악하고 당 역사를 쓴 혁명가-사학자

1935년 체포된 뒤 수감자들에게 당 역사와 10월 혁명에 관한 강의를 이어갔고, 끝내 자신의 볼셰비키 신념을 철회하지 않았다고 동료 수감자들이 증언했다.

1897년에 혁명 운동에 뛰어든 올드 볼셰비키.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철도역을 장악했고, 초대 철도인민위원(1918–1919)으로 내전기 수송을 책임졌다. 이후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초대 총장을 거쳐 당 역사 연구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레닌 도서관장을 지냈다. 500편이 넘는 혁명운동사 저술을 남겼으며, 1935년 체포되어 1937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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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3모스크바 대학에서 사민주의 서클 조직, 체포와 유형 반복
  • 1904–1905제네바에서 레닌을 만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복귀, 1905년 혁명기 볼셰비키 조직 건설
  • 1906–1913상트페테르부르크 당 집행위원, 체포·유형 반복, 중앙위원 후보에서 정위원으로
  • 1917.3–10군사기구 창설, 「솔다츠카야 프라우다」 편집, 7월 봉기와 10월 혁명 준비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철도역 점거 지휘
  • 1918–1919철도인민위원,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19–1921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초대 총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부의장
  • 1922–1935이스트파르트 부의장, 당사 집필, 레닌 도서관장
  • 1935–1937체포되어 5년형, 대숙청 중 재판받고 총살

로잘리야 사모일로브나 제믈랴치카

Розалия Самойловна Землячка
정부 수반 소련 벨라루스 1876–1947 ○ 자연사

지하 암호명 '데몬', 유일한 여성 소브나르콤 부의장

지하 활동 시절 스스로 택한 암호명 '데몬(Демон)'은 레르몬토프의 시를 암호표로 삼았다는 설과 함께 평생 그녀의 혁명적 인격을 상징하는 별칭으로 남았다.

이스크라 대리인 출신의 볼셰비키 핵심 조직가로, 1903년 중앙위원회에 협력되고 1905년·1917년 모스크바 봉기를 지도했다. 내전기 제8군·제13군 정치부장으로 복무하며 여성 최초로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0-21년 크림 지방 당 서기 시절 조직한 적색 테러는 오늘날까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다. 1939년 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라 이 직위의 유일한 여성이 되었고, 스탈린 시기 숙청을 피한 극소수 구볼셰비키 여성 가운데 하나로 194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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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RSDRP 가입, 키예프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 시작
  • 1901이스크라 대리인 — 오데사·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활동
  • 1903–04중앙위원회 협력, '다수파 위원회 국' 구성원
  • 1905모스크바 위원회 서기, 12월 봉기 지도
  • 1917모스크바 합법 위원회 서기, 10월 로고슈스코-시모놉스키 봉기 지휘
  • 1918–20제8군·제13군 정치부장, 루간스크 방어전 참가, 최초의 여성 적기훈장 수훈
  • 1920–21크림 당 책임서기, 혁명위원회 위원 — 적색 테러 조직
  • 1924–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교통인민위원부 간부, 페름·모스크바 지구당 서기
  • 1939–40소비에트 통제 위원회 의장
  • 1939–43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이 직위의 유일한 여성
  • 1943–47당 통제 위원회 부의장

빅토르 파블로비치 노긴

Виктор Павлович Ногин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878–1924 ○ 병사

연립내각을 요구하며 사퇴한 첫 인민위원, 붉은광장에 잠들다

「사회주의 정부는 모든 소비에트 정당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 외의 길은 순수 볼셰비키 정부를 정치적 테러로 유지하는 것뿐이다」 — 1917년 11월 4일, 인민위원직 사퇴 성명

〈이스크라〉 대리인 출신 볼셰비키. 1917년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으로 10월 봉기를 이끌고 초대 통상산업 인민위원이 되었으나, 다당제 연정을 요구하며 사퇴했다. 이후 경제 행정에 복귀, 붉은광장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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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상트페테르부르크 사회민주주의 그룹 '노동자의 깃발' 가입
  • 1900–1901〈이스크라〉 대리인 — 런던·뮌헨에서 활동,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체포
  • 1907RSDLP 제5차(런던) 대회에서 중앙위원 선출; 바쿠·모스크바에서 노동조합 조직
  • 1912–1914베르호얀스크 유형; 저서 『추위의 극점에서』 집필
  • 1917.9–11최초의 볼셰비키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지휘
  • 1917.11초대 통상산업 인민위원; 다당제 연립정부를 요구하며 사퇴
  • 1918–1924RSFSR 노동 부인민위원; 섬유산업 행정 담당
  • 1921–1924RCP(b)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리코프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Рык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881–1938 ✕ 처형

레닌 뒤의 총리, 우파 반대파로 몰리다

'우리는 승리의 순간에, 당이 지배적인 바로 그 순간에 중앙위원회를 떠난다.' 1917년 11월, 리코프는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요구하며 카메네프·지노비예프 등과 함께 사퇴했다. 9일 후 철회.

레닌 사후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6년간 정부를 이끌며 네프 체제의 행정적 연속성을 대표한 볼셰비키 지도자이다. 내전기에는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으로 전시 경제를 총괄하고 붉은 군대의 병참을 지휘했으며, 총리로서는 부하린·톰스키와 함께 당내 '우파'의 핵심으로서 농민과의 동맹, 시장을 통한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 균형 잡힌 공업화를 주장했다. 1928-29년 곡물 조달 위기 속에서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와 급속 공업화 노선에 맞섰으나 결국 '우파 반대파'로 낙인찍혀 1930년 실각했고,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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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0인민위원회의 의장

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 표도로비치 (먀스니캰)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Мясников
정부 수반 소련 아르메니아 1886–1925 ✕ 추락사

벨라루스와 아르메니아에 소비에트 권력을 세운 레닌의 변방 건설자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봉기 소식이 민스크에 닿자, 먀스니코프는 즉시 군사혁명위원회를 소집하고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민스크에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다.

돈 강변 나히체반 출신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906년 RSDLP에 입당, 바쿠에서 샤우먄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민스크에서 서부전선 볼셰비키를 이끌어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했다. 1919년 벨라루스 SSR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1921년부터 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제도적 토대를 닦았다. 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과 당 제1서기를 지내며 민족 공화국과 모스크바를 잇는 핵심 고리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아르메니아 문학에 관한 저작을 남겼다. 1925년 트빌리시 근처 항공기 화재로 사망, 트로츠키가 추도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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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RSDLP 가입,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로 유배 — 샤우먄과 교류
  • 1911–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졸업(1911), 군 복무 후 변호사 조수로 볼셰비키 언론에 기고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복무, 병사들 사이에서 혁명 선전
  • 1917.9–1918.5서북지역 당위원회 의장, 민스크 군사혁명위 의장, 서부전선 총사령관
  • 1919.1–2벨라루스 SSR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겸 군사인민위원
  • 1919–1920모스크바 당위원회 군사조직자·서기; 폴란드 전쟁 시 서부전선 정치국장
  • 1921–1922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군사인민위원, 자카프카스 SFSR 부의장
  • 1922–1925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 자캅카스 당 제1서기 — 소련 중앙집행위 상임위원,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당 중앙위 후보위원
  • 1925.3.22트빌리시 근처 항공기 화재로 사망 — 아타르베코프, 모길렙스키와 함께 순직

게오르기 로모프 이폴리토비치 (오포코프)

Георгий Ипполитович Оппок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초대 법무인민위원, 고스플란 부의장, 그리고 대숙청의 희생자

1917년 10월 24~25일, 스몰니 연구소에서 무장봉기 지도부의 일원으로 혁명을 지휘했으며, 열흘도 안 되어 29세의 나이로 소비에트 정부 초대 법무인민위원이 되었다.

사라토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905년 혁명에 참가했다. 1917년 10월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 초대 법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최고경제회의(VSNKh) 간부, 시베리아·우랄 경제 책임자, 네프테신디카트 의장, 돈우골 이사장을 거쳐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냈다. 당내에서는 제6차 대회(1917년) 이후 중앙위원으로 활동했고,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을 반대한 '좌익 공산주의자'였다가 이후 스탈린을 지지했다. 1937년 체포되어 허위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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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LP 입당, 볼셰비키 파벌
  • 1907–1910모스크바 시·지구 당위원회, 페테르부르크 당비서
  • 1910–1913체포·아르한겔스크 유형
  • 1917.10–11초대 법무인민위원 (RSFSR)
  • 1918–1921최고경제회의(VSNKh) 간부·부의장, 연료 공급 책임
  • 1921–1923시브뷰로·우랄뷰로 위원, 시브프롬뷰로·우랄경제회의 의장
  • 1923–1926네프테신디카트(석유 신디케이트) 의장
  • 1926–1929돈우골(도네츠 석탄) 이사장
  • 1931–1933고스플란 부의장
  • 1933–1937소비에트통제위원회 위원

다닐 예고로비치 술리모프

Даниил Егорович Сулим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자신이 산업화를 이끈 국가에 파괴된 노동자 출신 러시아 공화국 총리

1937년 6월 27일, 자신을 축출한 바로 그 중앙위원회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직무 수행 중 체포되었다.

14세에 공장 노동자로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인 술리모프는 우랄 당 기구에서 성장하여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1930~1937)으로서 첫 두 차례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화국의 산업화를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위원(1923~1937)이자 조직국 위원(1927~1930)으로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중 가장 높은 정부 자리까지 오른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정치적 불충성 비판 직후 체포되었고, 파괴활동·간첩·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1월 27일 처형되었다. 1956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1934~1937년에는 체르케스크 시가 그의 이름을 따 술리모프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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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공장 노동 시작
  • 1918–1919페름 시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 최고경제회의 광산·야금부 간부
  • 1919–1920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첼랴빈스크 현 위원회 의장
  • 1923–1926우랄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26–192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우랄 주 위원회 제1서기
  • 1927–1930소련 교통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
  • 1930–1937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예브게니 브로니슬라보비치 파슈카니스

Евгений Брониславович Пашуканис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891–1937 ✕ 처형

법의 상품형태론을 주창한 마르크스주의 법철학자, 소련 국가의 법적 형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자

1936년 11월 소련 법무부인민위원에 임명된 지 두 달 만인 1937년 1월 20일, 자신이 이론화한 소비에트 법 체계의 정점에서 NKVD에 체포되었다. 법의 소멸을 주장한 마르크스주의 법철학자가 국가 권력의 가장 직접적 형태 앞에 선 순간이었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가장 중요한 인물. 1924년 저작 『법의 일반이론과 마르크스주의』에서 법 형식이 상품 교환 관계에서 비롯되며, 공산주의 아래서 국가와 함께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2년 스투치카와 함께 공산아카데미 법학부를 창설했고, 이후 공산아카데미 부원장과 소비에트건설·법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1936년 소련 법무부인민위원이 되었으나, '프롤레타리아 법' 개념을 옹호한 비신스키와 충돌했다. 1937년 1월 체포되어 9월 처형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그의 상품형태론은 오늘날까지 비판법학과 법사회학에서 폭넓게 연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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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모스크바 법관,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0–1923외무인민위원부 근무, 베를린 소비에트 대사관 고문 — 라팔로 조약 기초 참여
  • 1922스투치카와 공산아카데미 법학부 공동 창설
  • 1924『법의 일반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출간 — 법의 상품형태론 정립
  • 1927–1930공산아카데미 정회원 → 부원장
  • 1931–1936소비에트건설·법연구소 소장
  • 1936–1937소련 법무부인민위원

블라스 야콥레비치 추바리

Влас Яковлевич Чубарь
정부 수반 소련 우크라이나 1891–1939 ✕ 처형

11년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끈 경제행정가, 스탈린과 기근 사이에서 균열을 드러내다

1932년 6월, 15일간 키예프·빈니차의 굶주린 마을들을 직접 돌아본 추바리는 스탈린에게 100만 푸드의 긴급 구호 곡물을 요청했다. 두 달 뒤 스탈린은 카가노비치에게 썼다: '추바리는 지도자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경제행정가로, 1923년부터 11년간 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공업화와 집단화를 진두지휘했다. 1932~33년 기근 당시 스탈린에게 곡물 긴급 지원을 공식 요청한 몇 안 되는 고위 지도자였으며, 이로 인해 스탈린과 반복적으로 충돌했다. 1935년 정치국 정위원에 올랐으나 대숙청 와중인 1938년 '독일 첩자'라는 날조된 혐의로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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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제정 노동자구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16세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1–1917크라마토르스크·마리우폴·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 공장 노동자, 지하운동
  • 1917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위원, 10월 혁명기 포병총국 정치위원
  • 1918–1923국가기계제작공장연합(ГОМЗа) 이사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우크라이나 산업복구 조직국 의장
  • 1921–1923우크라이나 SSR 최고경제회의 의장 겸 중앙석탄공업관리국 의장
  • 1923–1934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11년간), 공업화·집단화 주도
  • 1923–1925, 1934–1938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1926–1935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 1935–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7–1938소련 재무인민위원
  • 1938.7.4'독일 첩보기관 요원' 혐의로 체포, 정치국 축출
  • 1939.2.26군사재판 사형 판결, 당일 총살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고르부노프

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Горбун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인 1892–1938 ✕ 처형 · 복권 1954

레닌의 개인비서에서 과학아카데미 상임서기까지 소비에트 과학행정의 설계자

국유은행 총재 시포프가 스몰니에 체포되어 있던 밤, 고르부노프는 "특별한 예의로서, 대단히 성가셨지만" 자신의 침대를 시포프에게 양보하고 의자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니콜라이 고르부노프는 1917년 11월부터 인민위원회의 서기 겸 레닌의 개인비서로 소비에트 정부의 초기 행정 기반을 구축한 볼셰비키 기술관료였다. 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총장(1923-1929)과 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서기(1935-1937)를 지내며 과학기술 행정의 핵심 연결고리로 활동했고,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식물탐사와 전연방 농업과학아카데미(바스흐닐) 설립을 적극 뒷받침했다. 타지키스탄 파미르 원정대(1932-1935)를 이끌어 1933년 소련 최고봉 스탈린봉(현 이스모일 소모니봉) 첫 등정을 조직했으며, 등반가 예브게니 아발라코프와 함께 정상 공격에 직접 참여했다. 대숙청기인 1938년 체포되어 '등반가 사건'으로 처형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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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인민위원회의 서기, 레닌의 개인비서
  • 1918–1919최고경제회의 과학기술부장
  • 1919–1920제14군·제13군 정치위원 (남부전선)
  • 1920–1930소련 인민위원회의 사무국장
  • 1923–1929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총장
  • 1932–1935타지크-파미르 원정대장
  • 1935–1937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서기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시르초프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Сырц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893–1937 ✕ 처형

시베리아에서 스탈린에게 반기를 든 러시아 총리

1930년 11월,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소 생산성 문제입니다, 스탈린 동지"라고 답한 시르초프는 곧바로 정치국에서 강제 집단화를 공개 비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대에서 볼셰비키가 되어 내전기 돈 지역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다. 1926–1929년 시베리아 당 제1서기로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을 추진했고, 1929년 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의 참상을 목격하고 1930년 로미나제와 함께 반대파를 조직,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비판했다가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1937년 대숙청 중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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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입당, 지하 선전 활동
  • 1917.10–1918로스토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돈 소비에트공화국 부의장
  • 1918–1919제12군 정치위원, 돈 지역 탈코사크화 참여
  • 1921–1923중앙위원회 등록배치부장 — 노멘클라투라 제도 구축
  • 1924–1926중앙위원회 선동선전부장, 《공산주의 혁명》 편집자
  • 1926–1929시베리아 당 제1서기 —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 곡물 위기 때 스탈린과 갈등
  • 1929–1930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 1930로미나제와 반대파 조직 — 「무언가 해야 한다」, 스탈린 비판으로 전직 해임

니콜라이 마트베예비치 골로데트

Николай Матвеевич Голодед
정부 수반 소련 벨라루스 1894–1937 ✕ NKVD 심문 중 투신

10년간 벨라루스 공업화를 진두지휘한 정부수반, 아카데미 숙청에 서명하고 같은 심판대에 서다

1937년 6월 21일 민스크 NKVD 5층 심문실에서 '폴란드 간첩' 혐의를 받던 골로데트는 심문 도중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 공식 발표는 자살, 비공식 증언은 구타 살해 후 위장.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일곱 살부터 목동과 광부로 일했고,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적위대를 조직했다. 1927년부터 10년간 벨라루스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공업화와 집단화를 주도하며 공화국을 농업 중심에서 공업 중심으로 재편했고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30년 과학아카데미에서 주요 학자들을 '혁명의 적'으로 추방하는 결의에 직접 서명했다. 1937년 6월 체포되어 민스크 NKVD 5층 심문실에서 투신 사망했으며, 비공식 자료들은 구타 살해 후 자살로 위장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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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5크리보이로크 광산에서 선로 수리공, 자물쇠공, 전기기사로 노동
  • 1917남서부전선 병사위원회에서 볼셰비키 혁명 선전 활동
  • 1918–1921RCP(b) 입당, 적위대 조직 및 독일군·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과 교전; 노보집코프현 소비에트 활동
  • 1921–1924고르키현 집행위원회 의장, 도적 진압 트로이카 의장
  • 1925–192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27–1937벨라루스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공업화·집단화 주도
  • 1930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학자 6인 추방 결의 서명
  • 1937.6.14모스크바에서 체포, 민스크 이송; 6월 21일 NKVD 심문 중 사망
  • 1956사후 복권 및 당적 회복

오토 그로테볼

Otto Grotewohl
정부 수반 동독 독일 1894–1964 ○ 자연사

분단 국가의 통합을 이끈 사회민주주의자

1946년 4월, 그는 빌헬름 피크와 함께 새로 창립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그로테볼은 바이마르기의 사회민주주의 정치가로, 나치 독재에 맞서 의회에서 반대표를 던지고 전후 소련 점령지의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끌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중했지만 소련 점령 당국의 압력 속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1946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이 되었다. 이 통합은 동독 국가의 정치적 토대를 놓았지만, 사회민주당 내부의 자유로운 선택이 억압된 강제 통합이기도 했다. 1949년부터 동독 최초의 정부 수반을 맡은 그는 국가 건설과 소련의 영향력 사이에서 제한된 자율성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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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독일 사회민주당 입당
  • 1920–1926브라운슈바이크 주의회 의원
  • 1922–1924브라운슈바이크 법무·국민교육 장관
  • 1925–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 1945–1946소련 점령지 독일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 1946–1950독일 사회주의통일당 공동 의장
  • 1949–1964독일민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60–1964중병으로 사실상 정치 활동 중단
  • 1964동베를린에서 사망

데먄 세르게예비치 코롯첸코

Демьян Сергеевич Коротченко
정부 수반 소련 우크라이나 1894–1969 ○ 자연사

흐루쇼프의 충복: 우크라이나 정부를 두 번 이끈 농민 출신 당 관료

'침묵이 그의 비장의 카드였다. 흐루쇼프가 무언가 제안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 네, 물론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 윌리엄 토브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부 수반을 두 차례(1938~1939, 1947~1954) 역임하고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1954~1969)으로 15년간 재임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적색 파르티잔을 조직했다. 1930년대 모스크바 바우만 구역에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인연을 맺어 측근으로 성장했고, 대숙청기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발탁되었다. 전시 파르티잔 투쟁을 조직하고 종전 후 공화국 재건을 주도했다. 흐루쇼프의 충실한 집행자로, '침묵이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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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적색 파르티잔 조직 · 붉은 군대 정치일꾼
  • 1921–1928쇼스트카·체르니고프·페르보마이스크 당위원회 서기
  • 1931–1937모스크바 바우만 구소비에트 의장 → 모스크바 주당 제2서기 → 서부 주당 제1서기
  • 1938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주당 제1서기 대행
  • 1938–1939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39–194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전시 파르티잔 조직)
  • 1947–1954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두 번째 임기)
  • 1954–1969우크라이나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

그리고리 나우모비치 카민스키

Григорий Наумович Каминский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895–1938 ✕ 처형 · 복권 1955

소련 보건의료 체계를 세운 초대 연방 보건인민위원

«NKVD는 여전히 정직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있습니다.» —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스탈린에게 항의하다. 스탈린의 답변: «그들은 인민의 적이며, 당신도 같은 무리다.»

유대인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혁명가였다. 내전기 툴라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조직하고 25세에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으며, 이후 농업협동조합과 콜호스첸트르를 이끌며 집단화의 열성적 추진자로 활동했다. 1936년 초대 소련 보건인민위원에 임명되어 말라리아 퇴치, 의약품 생산 기반 확충, 예방의학 체계 구축 등 연방 차원의 공중보건 제도를 설계했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NKVD의 대량 체포를 공개 규탄하고 스탈린에게 '정직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있다'고 항의했다가 당일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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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RSDLP(볼셰비키) 입당, 민스크에서 프라우다 배포, 모스크바대 의대 중퇴 후 툴라 볼셰비키 서기
  • 1917–1920툴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툴라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제2군 정치위원, 「콤무나르」 초대 편집장
  • 1920–192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바쿠 소비에트 의장
  • 1922–1929농업협동조합연합 부의장, 전러시아 토지·임업노동자조합 의장, 콜호스첸트르 의장으로 집단화 추진
  • 1929–1930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선동·대중운동부장
  • 1930–1934모스크바 시당위 서기, 제2서기, 모스크바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34–1937RSFSR 보건인민위원, 소련 위생총감, 초대 소련 보건인민위원(1936.7–1937.6)

미르 자파르 아바소비치 바기로프

Мир Аббасович Джафар Багиров
정부 수반 소련 아제르바이잔 1895–1956 ✕ 처형

아제르바이잔의 20년 통치자, 스탈린의 캅카스 대리인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한 말: "내가 국민 앞에 지은 죄는 너무 커서, 총살도 교수형도 부족하다. 나는 사지를 찢겨 조각조각 갈기갈기 찢겨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1933~1953)로 20년간 스탈린 시대 공화국을 통치했다. 대숙청을 지휘하는 한편 공업화와 바쿠 개발을 주도했으며, 베리야 실각 직후 몰락해 1956년 총살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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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볼셰비키당 입당 (1917년 3월 또는 1918년 — 기록 충돌), 쿠바 혁명위원회 부의장
  • 1918–1920러시아 내전: 연대장, 아제르바이잔 사단 군사위원, 혁명군사재판소장
  • 1921–1927아제르바이잔 SSR 체카·GPU·OGPU 의장, 내무인민위원
  • 1929–1930아제르바이잔 SSR GPU·OGPU 의장 (재임)
  • 1932–1933아제르바이잔 SSR 인민위원회 의장
  • 1933–195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20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겸임 (1950년까지)
  • 1953CPSU 중앙위 상임위원 후보 (3~7월), 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의장
  • 1954–19561954년 3월 체포, 1956년 4월 사형 선고, 5월 26일 바쿠에서 총살 집행

이반 세르게예비치 호흘로프

Иван Сергеевич Хохл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인 1895–1973 ○ 자연사

전시 러시아 공화국을 이끈 직조공 출신 총리

1941년 10월 10일, 스탈린은 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호흘로프를 지명했다. 「툴라와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가능한 한 오래 막아야 한다」 — 주코프, 불가닌, 호흘로프 세 사람의 이름이 모스크바 방어전의 모든 명령에 함께 새겨졌다.

모스크바 근교 구비노 마을에서 농민 아들로 태어나 열 살부터 직조공으로 일했고, 1918년 동네 청년 125명을 모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에서 싸우다 중상을 입었다. 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를 마친 뒤 모스크바 주 소비에트와 중앙소비자조합(첸트로소유스)을 거쳐 1940년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에 올랐다. 대조국전쟁이 터지자 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모스크바 방어전의 병력·군수 수송을 총괄했고, 스몰렌스크 해방과 동프로이센 공세까지 종군해 중장 계급을 받은 유일한 러시아 공화국 총리였다. 전후 다시 첸트로소유스를 이끌며 전쟁으로 파괴된 농촌 소비자 협동조합망을 복구했고, 1955년부터는 국가무역감독국장으로 물자 유통을 감독하다 1965년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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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38–1940중앙소비자조합(첸트로소유스) 상임간부회 의장
  • 1940–1943러시아 공화국(RSF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41–1944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모스크바 방어·스몰렌스크 해방)
  • 1944–1945제3벨로루시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동프로이센 공세)
  • 1945–1954첸트로소유스 이사회 의장
  • 1955–1965국가무역감독국장 (소련·RSFSR 무역부)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불가닌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улганин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895–1975 ↓ 실각 1958

군복을 입은 총리, 흐루쇼프에게 밀려나다

1941년 서부전선, 독일 폭격기들이 머리 위로 모스크바를 향해 날아가자 불가닌은 안절부절못하며 외쳤다. "왜 저것들을 격추하지 않는 거요?" 지도를 보던 주코프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여기서 격추하면 아군 진지를 폭격할 테니, 후방의 담당 부대가 처리하게 두는 게 낫습니다."

체카 출신 행정가로 모스크바 시장과 공화국 총리를 거쳐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전쟁 중 주코프와 함께 복무했고, 종전 후 민간인 최초의 국방장관으로 1,100만 대군의 평시 전환을 주관했다. 군사 전략가가 아니라 충실한 집행자로서 원수 계급을 받은 인물이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와 'B&K' 2인 체제를 이루어 해빙기 외교의 얼굴이 되었고, 1955년 총리로서 유고·인도·영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흐루쇼프에게 등을 돌렸다가 패배한 뒤 총리직과 원수 계급을 모두 빼앗겼다. 독자적 권력 기반 없이 충성만으로 버틴 실무형 인물의 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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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모스크바 시 행정과 국가은행에서 성장한 행정 관료
  • 1944–1947국가방위위원회와 군 행정에서 전시 관리자로 활동
  • 1947–1949국방부 장관, 전후 군 조직 재편에 관여
  • 1953–1955국방장관, 스탈린 사후 집단지도부의 군사 담당 축
  • 1955–1958각료회의 의장, 흐루쇼프와 함께 말렌코프 이후 정부 운영
  • 1957–1958반당그룹 패배 뒤 흐루쇼프에게 밀려 총리직 상실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로샬

Семён Григорьевич Рошаль
정부 수반 러시아 러시아 1896–1917 ✕ 살해

크론시타트 수병을 혁명으로 이끈 21세의 인민위원

10월혁명 당일 크레스티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케렌스키-크라스노프 군대를 저지하는 수병·병사 혼성부대 정치위원으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크론시타트 볼셰비키를 이끈 젊은 혁명가로, 발트함대 수병을 혁명 편으로 돌려세웠다. 10월혁명 당일 감옥에서 풀려나 케렌스키 반격 저지에 투입되었고, 연말 루마니아 전선에서 백색장교단에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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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410번 김나지움 혁명 서클 활동, 전교생 조직 회의 참가로 퇴학
  • 1914볼셰비키 입당, 나르바 구역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조직
  • 1915북부전선 징집, 전선 선전 활동으로 체포되어 크레스티 수감
  • 1917.3–1917.7크론시타트 볼셰비키 시당위원장 겸 소비에트 집행위원 — 발트함대 수병 조직
  • 1917.7–1917.107월 사건 후 체포, 트로츠키·라스콜니코프 등과 함께 크레스티 재수감
  • 1917.1010월혁명 당일 석방,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격 저지 혼성부대 정치위원, 스타프카 점령 참여
  • 1917.12레닌 파견으로 루마니아 전선 인민위원회 대표 — 체포, 비밀장교단에 의해 살해

파이줄라 구바이둘라예비치 호자예프

Файзулла Губайдуллаевич Ходжаев
정부 수반 소련 우즈베키스탄 1896–1938 ✕ 처형

부하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디드 개혁운동에서 소비에트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총리가 된 중앙아시아 혁명가

러시아 외교관 알렉산드르 바르민의 회고: 「'우즈베크의 레닌'이라 불린 호자예프는 왜소하고 마른 체구였으나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했다. 말라리아로 얼굴이 푸르스름해질 때도 있었지만, 엄청난 업무 속에서도 즐겁게 웃을 줄 알았다. 그는 자기 민족을 알았고 뛰어난 연설가였으며 깊이 사랑받았다.」

부하라의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으로, 11세에 모스크바로 유학하여 전통사회와 근대 유럽의 간극을 체험했다. 1916년 범튀르크주의 자디드 운동에 합류, 청년 부하라당을 창당했고 1918년 토후 전복 시도 실패 후 사형 선고를 받고 타슈켄트로 도피했다. 1920년 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이 되었고, 1924년 우즈베크 SSR 수립과 함께 초대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중앙아시아의 국가 획정과 소비에트 연방 편입을 이끌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목화 단작 정책에 반대하다 몰락, 1937년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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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자디드 운동 참여, 청년 부하라당 창당, 비밀 중앙위원
  • 1918부하라 토후 전복 시도 실패, 타슈켄트 도피, 궐석 사형
  • 1919–1920타슈켄트에서 혁명적 청년 부하라인 사무국 조직, 『우치쿤』 편집
  • 1920–1924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
  • 1924–1937우즈베크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초대)
  • 1925–1937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우즈베크 SSR 대표 의장
  • 1937–1938전직 해임·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사형, 3월 15일 총살

콘스탄틴 드미트리예비치 팜필로프

Константин Дмитриевич Памфил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인 1901–1943 ○ 재임 중 사망

전시 러시아 공화국을 이끈 행정가, 모스크바 대피 실패의 책임자

1942년 5월, 독일군이 소련 깊숙이 진격한 전시의 절정에서 팜필로프는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이 되었다. 1년도 채 안 되어 심부전으로 숨질 때까지, 그는 전선 너머의 민간 행정 전체를 홀로 떠맡았다.

회계사 아들로 태어나 10대에 당에 입당한 콘스탄틴 팜필로프는 남북전쟁과 크론시타트 진압을 거쳐 소비에트 행정가로 성장했다. 모스크바 주택 관리와 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을 거쳐, 독소전 발발 직후에는 소련 대피위원회 부의장으로서 민간인 소개를 지휘했으나 당·정부 간부 가족 우선 대피로 모스크바 대혼란(1941)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 1942년 5월부터 이반 호흘로프의 후임으로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을 맡아 전시 행정을 총괄했으며, 재임 중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고, 모스크바 공공주택 아카데미는 그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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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볼로스트 혁명위원회 의장, 두홉시나 현 소비에트 집행위 서기, 볼로스트 당위 서기, 현 법원 서기
  • 1921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지원자)
  • 1923스몰렌스크 노동자학교 졸업
  • 1924–1927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소비에트 법학부 야간과정 수학
  • 1927–1937모스크바 소비에트 근무, 모스크바 주택신탁 관리자
  • 1937–1938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부 주택총국장
  • 1938–1940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
  • 1940–1942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1941.9–12소련 인민위원회의 대피위원회 부의장
  • 1942–1943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코시긴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осыгин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04–1980 ○ 자연사

계획에 이윤을 심으려 한 총리

1969년 9월 11일, 국경 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질 위기. 코시긴은 베이징 공항에 내렸다. 저우언라이와 3시간 반 동안 마주 앉아 긴장을 풀고 국경 협상 재개에 합의했다 — 냉전기 가장 위험했던 중소 대치를 중재한 단 한 번의 공항 회담.

레닌그라드 봉쇄의 「생명의 길」 수송을 지휘하고 소련 역사상 가장 오래(16년) 총리직을 지킨 테크노크라트. 1965년 이윤·자율 지표의 경제개혁을 발의해 제8차 5개년 계획(1966–1970)에서 전후 최고 성장을 이끌었으나, 프라하의 봄 이후 브레즈네프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며 개혁은 무력화되었다. 타슈켄트에서 인도-파키스탄 중재, 다만스키 사태 후 저우언라이와 베이징 회담 등 외교 무대에서도 독자적 역할을 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반대한 유일한 정치국원(「파병만은 안 된다」) 실각 두 달 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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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40섬유공업인민위원
  • 1941–42레닌그라드 소개위원회: 「생명의 길」 보급선 운영
  • 1943–46러시아공화국 총리
  • 1949「레닌그라드 사건」 숙청에서 살아남다
  • 1964–80각료회의 의장(총리)
  • 1965이윤·자율 지표의 경제개혁 발의
  • 1966–70제8차 5개년 계획: 전후 최고 성장

표트르 게오르기예비치 라주틴

Пётр Георгиевич Лазутин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05–1950 ✕ 처형, 1954년 복권

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처형된 6인 중 하나

1949년 8월 13일, 라주틴은 동료 레닌그라드 지도부와 함께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되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오늘날 카자흐스탄 페트로파블롭스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을 시작했다. 콤소몰 간부를 거쳐 1937년 레닌그라드로 옮겼고, 포위전 당시 무역·공업 담당 시당 서기로 도시 보급을 책임졌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으로 재임하며 전후 도시 재건 계획, 텔레비전 방송 재개, 아브로라 순양함 기념화를 진두지휘했다. 1949년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동료 지도부와 함께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인 6인 중 하나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10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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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5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
  • 1925–1931콤소몰 서기·노동부장 등 카자흐 자치공화국 콤소몰·교육인민위원부 간부
  • 1931–1937레닌그라드 냉동공업대학 수학; 프룬제 구당 위원회 지도원
  • 1937–1941레닌그라드 시당 무역부장, 식품·무역부 부장
  • 1941–1944레닌그라드 시당 무역·공업 담당 서기, 포위전 중 도시 보급 책임
  • 1944–1946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제1부의장
  • 1946–1949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위원장 (사실상 시장)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8월 13일 체포, 1950년 9월 30일 사형 선고, 10월 1일 처형; 1954년 복권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티호노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ихон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05–1997 ↓ 퇴임 1985

브레즈네프 말기의 보수적 총리

사망 직전 옐친에게 '저축이 없으니 국비로 장례를 치러 달라'고 썼다. 5년간 소련 경제를 이끈 총리는 평생 방 세 칸 아파트에서 살며 월급으로 버스를 사서 학교에 기증했다.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출신의 실무형 경제 관료로, 75세에 코시긴의 뒤를 이어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다. 정치적 야심과는 거리가 먼 정직한 기술자였으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3대에 걸쳐 총리로 재임했다. 정체기 말기의 관료적 연속성을 상징했지만, 1984년에는 기업 자율과 '사회주의 시장'을 검토한 개혁위원회를 주재해 페레스트로이카 구상의 단초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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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1985각료회의 의장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푸자노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Пузан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06–1998 ○ 자연사

크림 이관을 반대했고 조용히 김일성의 1인 독주를 방치한 러시아 수상

김일성이 수상직을 유지하겠다고 하자 푸자노프는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김일성 본인도 수상직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

농민의 아들로 국가통제 기관에서 관료 경력을 쌓은 후 스탈린의 전후 세대교체 구상 속에서 1952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겸 CPSU 중앙위 간부회 후보위원으로 발탁되었다. 스탈린 사후 간부회에서 배제되고 흐루쇼프의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이관에 반대해 1956년 강등된 후 외교관으로 전환, 조선·유고·불가리아·아프가니스탄 대사를 역임했다. 평양에서는 집단지도체제 권고를 밀어붙이지 않아 김일성의 1인 독주를 방치했고, 카불에서는 아민을 폭군으로 묘사한 보고로 소련의 군사개입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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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칸다우로보 촌소비에트 의장, 푸체시 군집행위 부의장
  • 1930플료스 농업전문학교 졸업, 세레다군 농경지과 농업기사
  • 1931–1933이바노보 주 교외농장 트러스트 부소장
  • 1934–1940소련 인민위원회의 산하 소비에트통제위원회 근무
  • 1940–1943소련 국가통제 인민위원부 주임통제관
  • 1943–1944소련 국가통제 부인민위원
  • 1944–1946쿠이비셰프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46–1952쿠이비셰프 주당위·시당위 제1서기
  • 1952–1956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의장 (수상)
  • 1952–1953CPSU 중앙위 간부회(정치국) 후보위원
  • 1956–1957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7–1962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2–1967주유고슬라비아 소련 대사
  • 1967–1972주불가리아 소련 대사
  • 1972–1979주아프가니스탄 소련 대사
  • 1979–1980소련 외무부 중앙기구 근무
  • 1980연금 퇴직

미하일 이바노비치 로디오노프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Родион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인 1907–1950 ✕ 처형 · 레닌그라드 사건

전시 고리키를 무기고로 만든 러시아 공화국 수반

1949년 8월 13일, 로디오노프는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사무실을 나서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다시 자유를 보는 일은 없었다.

고리키(現 니즈니노브고로드) 지역에서 교사와 콤소몰 활동가로 출발해 당 기구에서 성장한 실무형 당료였다. 1940년 고리키 주당위 제1서기가 되어 대조국전쟁 기간 주방위위원장과 국방위원회 전권위원으로서 이 지역의 군수 생산을 총괄했으며, 고리키를 소련의 주요 병기창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46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되어 전후 재건을 이끌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의 표적이 되어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사무실에서 체포되었고, 이듬해 '러시아 분리주의 음모'라는 조작된 혐의로 총살되었다.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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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9러시아 공화국(RSFSR) 각료회의 의장
  • 1946–1949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조직국 위원
  • 1941–1949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위원 후보
  • 1941–1943고리키 시방위위원회 의장 · 국방위원회 전권위원 (군수 생산)
  • 1940–1946고리키 주당위 및 시당위 제1서기
  • 1939–1940고리키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38–1939고리키 주당위 제3서기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체르노우소프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Черноус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인 1908–1978 ○ 자연사

레닌그라드 사건 후폭풍 속에 등장했다 사라진 러시아 공화국 수반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 직후 체르노우소프는 중앙위 조직국원과 러시아 공화국 총리직에서 동시에 해임되었다. 그의 다음 직장은 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이었다.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볼가 강변의 시즈란에서 태어나, 콤소몰 활동가로 출발해 모스크바 동력공학원을 졸업한 기술관료형 당료였다. 1939년부터 1948년까지 모스크바 주당위 제2서기로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를 보좌했고, 1949년 미하일 로디오노프가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숙청된 직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되어 스탈린 말년의 러시아 정부를 이끌었다. 1952년 19차 당대회 직후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어 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장으로 좌천되었고, 스탈린 사후에야 자동차공업부 차관으로 복귀해 고스플란과 코메콘에서 조용히 경력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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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2러시아 공화국(RSFSR) 각료회의 의장
  • 1949–1952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조직국 위원
  • 1948–1949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당·노조·콤소몰 기관부장
  • 1939–1948모스크바 주당위 제2서기
  • 1939–1952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위원 후보
  • 1938–1939모스크바 시 스탈린 구당위 제1서기
  • 1955–1957소련 자동차공업부 차관
  • 1952–1955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장

미하일 압크센티예비치 레세치코

Михаил Авксентьевич Лесечко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09–1984 ○ 자연사

소련의 대외경제 통합을 주도한 18년차 부총리

그의 18년 부총리 재임 기간 동안 소련의 코메콘 블록 내 무역 비중은 절반을 넘어섰다.

모스크바 항공대학 출신으로 항공기 공장 작업장장을 거쳐 소련 최초 전자식 고속 계산기계 개발을 지휘, 1954년 스탈린상 1등급을 받았다. 1956년 계기제조·자동화부 초대 장관, 이후 우크라이나와 연방 고스플란에서 계획경제 실무를 쌓았고, 1962년부터 1980년까지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상주대표(1962~1977)를 지냈다. 흐루쇼프·코시긴·티호노프 3대 정부에 걸쳐 소련 블록 대외경제의 제도적 틀을 설계한 핵심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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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2헤르손 제2인터내셔널 공장 선반공
  • 1934–1942항공기 공장 작업장장·주임기사
  • 1942–1946항공공업인민위원부 총국 부국장
  • 1948–1954모스크바 계산분석기계 공장장 겸 SKB-245 소장
  • 1954–1956기계제조·계기제조부 제1차관
  • 1956–1957계기제조·자동화부 장관
  • 1957–1958우크라이나 국가계획위 부의장 겸 장관
  • 1958–1962소련 국가계획위 제1부의장 겸 장관 · 대외경제위원장
  • 1962–198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62–1977소련 코메콘 상주대표

피오트르 야로셰비치

Piotr Jaroszewicz
정부 수반 폴란드 폴란드계 1909–1992 ✕ 자택 피살, 미해결

차관료적 성장 노선의 총리

1976년 가격 인상안은 노동자들의 봉기 뒤 하루 만에 철회되었다.

피오트르 야로셰비치는 전후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 출신 공산주의 정치가로, 국가 경제 운영과 당·정부 기구를 연결한 인물이었다. 에드바르트 기에레크의 차관과 서방 차관에 의존한 성장 정책을 집행했지만, 소비 확대와 부채 증가는 식량 가격과 공급의 위기를 키웠다. 1976년 급격한 식료품 가격 인상을 발표한 뒤 라돔과 우르수스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고, 정부는 가격안을 철회했으며 탄압은 노동자와 지식인 반대파의 결합과 KOR 결성으로 이어졌다. 1980년 총리직에서 밀려났고, 1992년 아내와 함께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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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9초등학교 교사·학교장
  • 1943–1945소련 내 폴란드군 정치교육 장교
  • 1945–1952폴란드군 고급 지휘·정치교육 보직
  • 1952–1970폴란드 정부 부총리
  • 1954–1956광업부·석탄광업부 장관
  • 1956–1970상호경제원조회의 폴란드 대표·경제위원회 부위원장
  • 1970–1980폴란드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81–1992정계 은퇴, 1981년 계엄 뒤 internment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스미르튜코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Смиртюк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09–2004 ○ 자연사

25년간 소비에트 정부의 제도적 기억이 된, 폴리트뷰로 밖의 실세

1979년, 70세의 그에게 관례대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가 올라갔지만 브레즈네프는 '정부와 당 중앙위 대립의 주요 인물'이라며 질질 끌었다. 코시긴이 폴리트뷰로에 직접 상정했고 티호노프셰르비츠키의 지지로 통과되었다.

1930년 스물한 살로 인민위원회의 기구에 들어가 1990년까지 60년간 크렘린에 몸담은, 소비에트 정부기구의 살아 있는 화신이었다. 미코얀의 보좌관으로서 전시 국가방위위원회(GKO)의 적군 보급을 담당했고, 1964년부터 25년간 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으로 코시긴·티호노프·리시코프를 보좌했다. 폴리트뷰로 위원이 아니면서도 유일하게 가장 비밀스러운 당 지도부 결정문을 받아보았고, 중앙위 부서장들도 주요 안건을 그와 조율하라는 지시를 받을 정도로 막후 실세였다. 그의 경험과 기억은 지도자가 바뀌어도 국가가 작동하게 만든 제도적 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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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27농촌소비에트 서기 · 협동조합 서기 · 클럽장
  • 1927–31모스크바국립대 소비에트법학부
  • 1930–41인민위원회의 기구: 선임보좌관·컨설턴트·부문장
  • 1941–46인민위원회의 사무국 부국장 · 미코얀의 GKO 보급 보좌관
  • 1946–53각료회의 사무국 부국장
  • 1953–64각료회의 부업무관리국장
  • 1964–89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 1989–90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고문

겐나디 이바노비치 보로노프

Геннадий Иванович Ворон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10–1994 ↓ 정치국 퇴진 1973

브레즈네프에게 직언을 멈추지 않았던 러시아 공화국 수상

«보로노프는 무뚝뚝한 사내였고, 브레즈네프의 면전에서도 생각하는 바를 모두 말했다.» — 미하일 스미르튜코프, 소련 각료회의 사무국장

전기기사 출신으로 러시아 공화국 수상과 정치국원까지 오른 실무형 당료. 코시긴 개혁을 지지하고 농업 자율작업조 '즈베노'를 주창했으나 브레즈네프에게 막혀 1973년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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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37전기기사·작업반장으로 노동, 톰스크 공업대학 졸업
  • 1937–48프로코피옙스크·치타에서 당 선전·조직 책임자
  • 1948–55치타 주당위 제1서기
  • 1955–57소련 농업부 차관
  • 1957–61오렌부르크(치칼로프) 주당위 제1서기
  • 1961–73정치국(간사국) 위원: 1961년 후보, 1961–73년 정위원
  • 1962–71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수상)
  • 1971–73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 1973농업 개혁안('즈베노')이 브레즈네프에게 거부되어 정치국에서 퇴진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Józef Cyrankiewicz
정부 수반 폴란드 폴란드인 1911–1989 ○ 자연사

저항의 생존자이자 체제의 수호자

1956년 6월 29일 포즈난 라디오에서 그는 인민정부에 손을 드는 자의 손을 잘라버리겠다고 경고했다.

유제프 치란키에비치는 전쟁 전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 저항조직의 지도자였지만, 전후에는 소련과 결합한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핵심 정치가가 되었다. 그는 장기간 총리를 지내며 공산당의 통치와 국가 재건을 조율했고, 독립 사회주의의 소멸과 당의 국가화를 뒷받침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와 1970년 해안 노동자 시위에서 정부의 강경 진압을 지지한 일은 저항의 경험과 권력의 책임이 충돌한 그의 정치적 유산을 드러낸다. 1970년 실각 뒤에도 평화운동과 공식 기구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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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폴란드 사회당과 사회주의 청년운동에 참여
  • 1935–1939크라쿠프 지역 폴란드 사회당 노동자위원회 서기
  • 1942–1945아우슈비츠와 마우트하우젠 수감, 수용소 저항조직 활동
  • 1945–1948폴란드 사회당 중앙집행위원회 총서기
  • 1947–1952폴란드 각료회의 의장
  • 1954–1970폴란드 각료회의 의장
  • 1970–1972국가평의회 의장
  • 1973–1986전국 평화위원회 의장, 세계평화평의회 위원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솔로멘체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Соломенце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13–2008 ○ 자연사

러시아 공화국을 12년간 이끈 브레즈네프 시대의 산업 테크노크라트

브레즈네프가 솔로멘체프를 러시아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하며: "러시아에는 별도 공산당이 없으니, 내가 러시아 당 조직을 직접 이끌고 자네는 러시아 연방 담당 내 대리 역할을 해주게."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출신 기계기사로 방위공업 현장에서 시작해 1971년부터 12년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을 지내며 소련 최대 공화국의 경제를 관장했고, 브레즈네프로부터 '러시아 연방 담당 부사령탑'이라는 비공식 위임을 받은 인물이다. 1983년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이 되어 1930~50년대 탄압 희생자 재활 위원회를 이끌었으나, 1988년 9월 고르바초프의 정치국 숙청으로 전격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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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졸업, 방위공업 공장 배치
  • 1941–1948우랄 대피 공장에서 당 조직원으로 활동
  • 1948–1954즐라토우스트·첼랴빈스크 공장 주임기사 → 공장장
  • 1955–1959첼랴빈스크 주당위 서기 → 제2서기 → 소브나르호스 의장
  • 1959–1962카자흐스탄 카라간다 주당위 제1서기
  • 1962–1964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4–1966로스토프 주당위 제1서기
  • 1966–1971CPSU 중앙위 서기 겸 중공업부장
  • 1971–1983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의장
  • 1983–1988CPSU 중앙위 당통제위원장, 정치국 정위원
  • 1987–1988정치국 1930~50년대 탄압 희생자 재활 위원회 위원장
  • 19889월 중앙위 총회에서 전격 해임, 은퇴

이반 파블로비치 카자네츠

Иван Павлович Казанец
정부 수반 소련 우크라이나 1918–2013 ○ 자연사

우크라이나 총리에서 소련 철강부 장관으로: 20년간 소련 철강을 지배한 드네프르 출신 기술관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카자네츠 동지. 미국보다 더 많이 제련한다고 자랑하지만, 금속 품질은 어떻습니까? 생산된 톤당 40%만 제품이 되고 나머지는 슬래그와 부스러기로 나갑니다!» — 1972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브레즈네프의 질책.

드네프르 강 도선사 집안 출신의 우크라이나인 기술관료로, 전기기사로 시작해 쿠즈네츠크 제철소와 예나키예베 제철소에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1953년 흐루쇼프의 발탁으로 35세에 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가 되었고, 1960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1963–1965년 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을 지냈다. 1965년 코시긴 개혁으로 소련 철강부가 재설립되자 초대 장관에 임명되어 20년간 재임하며 소련을 세계 최대 철강 생산국으로 올려놓았다. 브레즈네프 시기 내내 중앙위원을 지냈고, 1985년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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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4쿠즈네츠크 제철소 전기기사·기사·변전소 구역장, 시베리아 야금연구소 졸업
  • 1944–1952예나키예베 제철소 압연공장 교대장·당위 부비서·공장장, 1950년 당조직자
  • 1952–1953예나키예베 시당위 제1서기 → 마케예프카 시당위 제1서기
  • 1953–1960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
  • 1960–1963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3–1965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65–1985소련 철강부 장관
  • 1961–1986CPSU 중앙위원 (1956–1961 후보위원)

언드라시 헤게뒤시

Hegedüs András
정부 수반 헝가리 헝가리인 1922–1999 ○ 자연사

혁명의 문턱에서 책임을 짊어진 젊은 총리

그는 훗날 총리직 수락을 두고 “나쁜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헤게뒤시 언드라시는 헝가리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사회학자로, 라코시 체제의 충실한 간부에서 체제 비판적 연구자로 이동했다. 라코시와 게뢰의 후원으로 총리가 되었지만, 1956년 혁명 때 소련군 개입 요청서에 서명하며 마비된 지도부의 정치적 책임을 떠안았다. 모스크바로 피신했다가 귀국한 뒤 사회학 연구를 이끌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한 뒤 당에서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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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불법 헝가리 공산당 가입
  • 1945–1947MADISZ 전국 서기
  • 1951–1953농업 관련 장관
  • 1953–1955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5–1956헝가리 각료회의 의장
  • 1956혁명 중 소련군 개입 요청서 서명
  • 1963–1968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사회학 연구그룹 창립·소장
  • 1973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제명

비탈리 이바노비치 보로트니코프

Виталий Иванович Воротник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26–2012 ○ 자연사

러시아를 떼어내지 않으려 했던 RSFSR의 마지막 수반

1989년 10월 당 중앙위원회 RSFSR 정치체제 회의에서: "러시아 공산당을 따로 만드는 것은 소련을 분할하는 길이다." 고르바초프의 구상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항공공장 기술자로 출발해 쿠이비셰프·보로네시 지역 당 제1서기를 거친 소비에트 제도인. 브레즈네프 말기 쿠바 대사로 좌천되었다가, 안드로포프가 부패 척결을 위해 크라스노다르 지역에 투입하면서 정치적으로 부활했다. 1983년 RSFSR 각료회의 의장(총리)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라 러시아 공화국 정부를 5년간 이끌었고, 체르노빌 사고 직후에는 정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현장 수습에 참여했다. 1988년 RSFSR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국가원수)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고르바초프가 러시아 분리 공산당 창설을 밀어붙이자 이에 공개 반대하며 소련이라는 틀 안에서의 RSFSR을 끝까지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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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60쿠이비셰프 항공공장 기술자 → 당위원회 서기
  • 1961–67쿠이비셰프 주 당 서기 → 제2서기 → 주 집행위 의장
  • 1971–75보로네시 주 당 제1서기
  • 1975–79RSF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79–82주쿠바 소련 대사
  • 1982–83크라스노다르 변경주 당 제1서기: 부패 척결
  • 1983–88RSFSR 각료회의 의장, 정치국 정위원
  • 1988–90RSFSR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리시코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Рыжков
정부 수반 러시아 러시아 1929–2024 ↓ 퇴임 1991

페레스트로이카 경제개혁기의 총리

1990년 5월 24일, 전국에 생중계된 최고회의에서 "빵과 식료품 가격이 터무니없이 낮으며 인상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상품 부족과 배급제가 일상이 된 시점에서 이 장면은 리시코프 내각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렸다.

우랄 공업 관리자 출신으로 고르바초프의 총리가 되어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경제를 이끌었지만, 시장개혁과 계획경제 보존 사이에서 흔들렸다. 체르노빌 사고 수습과 아르메니아 지진 복구를 진두지휘했으나, 재임 말기 공산품 부족과 배급제가 도입되는 경제 위기를 맞았다. 1991년 초 심장발작으로 물러난 뒤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에 이어 2위를 기록했고, 이후 20년간 연방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2024년 9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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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1991.1각료회의 의장

이반 스테파노비치 실라예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Силае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30–2023 ○ 자연사

소련의 마지막 정부 수반: 항공장관에서 제국의 청산인으로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소련 정부 수반이 된 실라예프는 옐친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연방 재산을 러시아로 이전하는 포고령을 정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 달 뒤 그는 해임되었다.

니즈니노브고로드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카잔 항공대학을 졸업하고 고리키 항공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20년 만에 공장장이 된 항공산업 관료였다. 1981년 항공공업장관으로 취임해 MiG-29, Su-27, Tu-160, 부란 우주왕복선 등 소련 항공·우주 기술의 정점을 총괄했고,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정부대책위원장으로 현장을 지휘했다. 1990년 옐친에 의해 RSFSR 각료회의 의장으로 발탁되었고,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소련경제운영위원회 의장으로서 사실상 소련의 마지막 정부 수반이 되었다. 그러나 옐친이 연방 기관을 일방적으로 접수하자 이를 저지하려다 한 달 만에 해임되었고, 소련 해체라는 결과에는 결국 맞서지 못한 과도기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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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74고리키 항공공장: 기술자 → 공장장
  • 1974–1977소련 항공공업 차관
  • 1977–1980소련 항공공업 제1차관
  • 1980–1981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장관
  • 1981–1985소련 항공공업 장관
  • 1985–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기계제조 담당)
  • 1986체르노빌 사고 정부대책위원장
  • 1990–1991RSFSR 각료회의 의장
  • 1991.8–12소련경제운영위원회 의장 ― 사실상 소련 마지막 정부 수반
  • 1991–1994유럽공동체 주재 러시아 상임대표 (대사)

발렌틴 세르게예비치 파블로프

Валентин Сергеевич Павл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37–2003 ↓ 체포 1991

소련의 마지막 총리이자 8월 쿠데타 가담자

1991년 1월, 총리 취임 직후 "화폐개혁은 없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장담했다. 불과 며칠 뒤인 1월 22일 저녁, 50루블·100루블권을 사흘 안에 교환하라는 긴급 명령을 발표했다.

모스크바 금융대학 출신의 재정 관료로, 재무부·국가가격위원회·국가계획위원회를 거치며 소련 경제 관리의 핵심 라인을 밟아 올라갔다. 1989년 재무장관, 1991년 1월 소련 최초이자 마지막 '총리' 직함의 정부 수반이 되었다. 취임 8일 만에 50·100루블권 강제 교환을 단행해 '파블로프 개혁'으로 기록된 충격 요법을 시도했고, 같은 해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했다가 쿠데타 실패 후 체포·구금되었다. 1994년 사면 뒤에는 은행권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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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1–8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