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창설자,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정되다
「저는 미코얀에게, 25년 동안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애썼지만 결국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이 무엇인지 묻는 미코얀에게 답하며 (1956년 면담, 네크리치 회고록)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제도화를 이끈 철학자. 기계론자 논쟁에서 변증법 진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1931년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탄받았다. 흐루쇼프 해빙기까지 살아남아 저작 복간을 목격했다.
경력 연표
- 1897–190316세에 마르크스주의 비밀서클 가입, 1903년 경찰 탄압으로 해외 탈출
- 1903–1908볼셰비키 가담(1903) → 멘셰비키 전향(1907), 베른대학 철학과 졸업(1908), 플레하노프의 제자
- 1908–1916마하주의·경험비판론 비판,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 출간(1916), 철학에서 레닌과 접근
- 1921–1926적색교수양성소 철학부장(1921), 『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편집위원(1922~),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과학부소장(1924~)
- 1926–1931『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주필, 공산아카데미 철학부장, 철학연구소 초대 소장(1929),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29)
- 1931「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규탄 — 주필·소장직 박탈, 스탈린주의 철학 전환의 상징
- 1935–1963과학아카데미 연구직 복귀, 사회과학부·역사철학부 아카데미서기(1937~1941), 1956년 미코얀 면담 후 저작 복간
스피노자와 플레하노프의 유산 — 데보린 철학의 핵심
데보린 철학의 독자성은 플레하노프로부터 물려받은 스피노자 해석에 있다. 플레하노프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스피노자주의의 한 종류'로 보았고, 데보린은 이 명제를 평생의 철학적 과제로 삼았다. 그에게 스피노자는 단순한 철학사적 선구자가 아니었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철학자가 제시한 단일실체론, '신, 즉 자연', 은 정신과 세계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체계였다. 데보린은 여기서 마르크스주의가 필요로 하는 체계적 합리성의 원형을 발견했다.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탁월한 논객이었으나 체계적 철학자는 아니었다는 트로츠키의 지적과도 맞닿아 있었다.
1927년 스피노자 서거 250주년을 맞아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 학술회의에 소비에트 대표로 참석한 데보린은, 국제연맹 측 연사가 스피노자를 기독교와 양립 가능한 평화 사상가로 포장하는 것을 듣고 격분했다. 그는 '당신들은 뻔뻔한 거짓말쟁이다. 현대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스피노자의 유일한 진정한 상속자'라고 내심 기록했다. 이는 단순한 학술적 논쟁이 아니었다. 소비에트 국가가 서구 부르주아 철학에 맞서 스피노자라는 근대 철학의 정통성을 전유하려는 문화적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 스피노자주의에는 치명적인 난점이 있었다. 스피노자의 필연적 세계는 정적인 체계였고, 역사적 변화와 계급투쟁의 변증법을 내장하지 않았다. 데보린은 여기서 헤겔을 끌어들였다. 스피노자의 실체에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을 결합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귀결되는 역사적 필연성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 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실천보다 체계를, 레닌보다 스피노자와 헤겔을 앞세운 철학적 성향)이 1931년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공격의 실질적 표적이었다. 데보린이 몰락한 후, 스피노자는 소비에트 철학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루이 알튀세르와 에발트 일리옌코프 같은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스피노자와 마르크스의 연결을 다시 사유했고, 그 출발점에는 데보린의 실패한 기획이 놓여 있었다.
기계론자-변증법론자 논쟁과 데보린 학파
데보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업적은 1920년대 소비에트 철학계를 양분한 '기계론자 대 변증법론자' 논쟁에서 변증법 진영을 이끈 것이다. 기계론자들(이반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 아르카디 티미랴제프, 류보비 악셀로트 등 자연과학자 출신)은 모든 운동을 물리역학적 힘의 이동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철학 자체를 '배 밖으로 던져버려야 한다'(S. 미닌의 구호)고까지 했다. 부하린의 『사적 유물론』(1921)은 평형론을 통해 이 입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이에 맞서 데보린은 변증법 진영을 조직했다. 1924년 '전투적 유물론적 변증법자 협회'를 결성하고 공산아카데미, 적색교수양성소,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의 철학자들을 규합했다. 그들은 운동의 원천은 외부 충격이 아니라 사물 내부의 모순이며, 변증법은 자연과학을 포괄하는 보편적 방법론이라고 주장했다. 1925년 엥겔스의 『자연변증법』과 레닌의 『철학 노트』가 출간되면서 변증법 진영에 결정적 무기가 더해졌다. 이 논쟁의 분수령은 1929년 4월 제2차 전연방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술기관 회의였다. 데보린은 이 자리에서 기계론을 반마르크스주의적 수정주의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변증법적 유물론은 소비에트 과학과 철학의 공식적 방법론으로 확립되었다. 이 승리는 데보린 학파의 절정이었으나, 불과 2년 뒤 같은 논리('정통'에서의 이탈)가 이번에는 데보린 자신을 향해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 1931년의 규탄
데보린 학파의 몰락은 1930년 12월 9일 스탈린이 적색교수양성소 철학·자연과학부 당국과 가진 면담에서 시작되었다. 스탈린은 이 자리에서 데보린의 경향을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이라고 처음 불렀다. '멘셰비키화하는'이라는 수식은 멘셰비즘이 본래 지닌 이론과 실천의 분리 경향을 데보린 학파가 되살렸다는 비난이었고, '관념론'은 헤겔의 관념적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지나치게 가깝게 연결했다는 공격이었다. 1931년 1월 25일,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잡지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여 데보린을 주필 자리에서, 그리고 그가 창립한 철학연구소 소장직에서 해임했다. 공격의 선봉에는 젊은 철학자 마르크 미틴과 파벨 유딘이 섰고, 코마카데미야 간부부에서는 블라디미르 밀류틴과 예브게니 파슈카니스가 공세를 지휘했다. 핵심 고발은 두 가지였다. 첫째, 데보린 학파는 마르크스주의의 '레닌적 단계'를 인정하지 않고 레닌을 실천가로만, 플레하노프를 진정한 이론가로 취급했다. 둘째, 철학의 당파성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이 캠페인은 소비에트 철학의 완전한 정치화, 즉 '철학 전선의 볼셰비키화'를 의미했으며, 미틴-유딘 동맹이 새로운 철학 지도부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데보린이 모스크바 숙청 재판의 희생자들과 달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만든 제도적 기반과 그리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정치적 타협에 힘입은 바 크다. 1956년 미코얀 면담 이후 이 규탄이 실질적으로 철회될 때까지 25년이 걸렸다.